당신만의 스위치를 발견하라   

2008. 6. 30.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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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웨이스(Jay Weiss)라는 생물학자는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눈 후에 바닥에 깔린 전선을 통해 전기 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했다. A그룹의 쥐들이 들어 있는 우리에는 전기 충격을 차단할 수 있는 스위치가 달려 있었으나, B그룹의 우리에는 스위치가 없어서 전기 충격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기 충격을 가한 결과, A그룹의 쥐들은 전기 충격을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건강 상태가 양호했다. 반면 B그룹의 쥐들은 위궤양에 많이 걸렸다. 두 그룹 모두 일정한 시간에 똑같은 양의 전기 충격을 받았음에도 건강 상태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A그룹의 쥐들은 전기 충격을 차단할 수 있는 스위치, 즉 외부 환경의 변화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많은 항체를 생산할 수 있어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통제력을 잃어버리면 건강이 상할 뿐 아니라, 지적 능력도 '흐리멍텅'해진다. 이번엔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봤다. 소음이 매우 심한 상황에서 피실험자들에게 어려운 문제(수학 문제 같은)를 풀게 했는데, A그룹이 앉은 테이블 위에는 소리를 끌 수 있는 스위치가 달려 있었고, B그룹에게는 그런 스위치가 없었다.

짐작했겠지만, 스위치를 가진 A그룹의 사람들이 문제를 훨씬 많이 풀었고 또 틀린 갯수도 얼마 안 됐다. 반면 B그룹의 사람들이 푼 문제 갯수는 A그룹의 1/5에 불과했고, 풀었다 해도 틀린 경우가 많았다. A그룹의 사람들이 소음이 들릴 때마다 스위치를 껐기 때문에 성적이 좋을 수밖에 없었을까? 아니다. 실제로 실험에서 A그룹의 사람들은 스위치를 한 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스위치를 사용하는 빈도보다 환경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지적 능력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정신적인 건강이든, 육체적인 건강이든, 통제력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건강 =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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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스트레스는 일이 너무 많거나 난해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지만, 일의 양이나 경중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의 '질' 때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 계획해서 소신껏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위에서 마구 쏟아지는 지시를 소화하느라 허덕일 때처럼 일의 '질'이 급격하게 저하되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이 없어서 '놀거나' 목표를 망각해서 시간을 어영부영 보냈다고 생각되면 자괴감과 후회에 빠진다. 일이 많을 때보다 스트레스가 오히려 쌓인다. 왜냐하면 그 시간 동안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일이 크건 작건 항상 목표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이 정말 어렵고 많아서 허덕이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또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것이 자신의 건강과 지적 능력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길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통제력을 갖춘다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마음가짐이다.  일의 '종'이 아니라 일의 '주인'이라는 다짐 하나만으로도 통제력은 유지된다. 어깨를 짓누르는 일의 무게에 눌리더라도, 그 속에서 자신의 '스위치'를 발견하라. 적어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쯤은 있을 것이다. 무력해질 때마다 그 스위치를 작동시킴으로써 통제력을 유지하라.

그리고 어떤 분야든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 일이 내가 소망하던 꿈과 정반대의 것이라면, 그러나 거기서 탈피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면, 적어도 그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벎으로써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다는 의미라도 있는 게 아닌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삶의 모든 순간에는 의미가 있음을 명심하자.

빅터 프랑클은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건강하게 살려면, 통제력을 유지해야 하고, 통제력을 유지하려면 당신만의 스위치(목표와 의미)를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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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2008. 6. 29.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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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는 8권의 책을 읽었다. 지난 달에 비해선 좀 부진했다. 좀 바빴나? 책을 본격적으로 쓰다 보니, 책 읽기가 소홀해졌다. 내 책상 위에 잔뜩 놓여진 참고서적 더미에 같이 휩쓸려 다니다가 겨우 읽혀진(?) 책들이다.

아래의 책들은 모두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추천한다.
2008년 상반기를 마무리 짓는 지금까지 모두 52권의 책을 읽었다. 이 정도 속도면 100권 달성은 가능하다 싶다. 신발끈을 다시 묶어 본다.

가이아의 복수 : 인간들의 웰빙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 하루를 더 살기 위해 지구를 황폐화시키는 인간들은 머지 않아 가이아의 복수에 처절히 스러질지니... 이 책을 읽으면 절박한 심정이 된다.

간디 평전 :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구호 중 하나가 '비폭력'이다. 비폭력 운동으로 대표되는 간디의 생애를 읽어 보고 싶어서 집어 들었다. 좀 무미건조한 게 흠이지만, 인간 간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칭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노력이 빛난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  : 왓슨과 크릭에게 X선 사진을 도둑 맞은 여인. 왓슨과 크릭은 그 사진을 보고 1주일 만에 DNA 구조를 규정하고 훗날 노벨상을 거머쥔다. 불행한 다크 레이디, 로잘린드. 그녀는 왓슨과 크릭이 노벨상을 받게 될 것도 모른 채 3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는다.

비폭력 대화 :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또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비폭력 대화법을 소개한다. 좋은 말이고 또 실천하면 좋겠지만, '욱'하는 성질이 앞서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간지러운' 방법일 듯. 하지만 꼭 읽어 볼 책이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 : 과학 에세이가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다니! 눈물나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지,분자생물학자의 관점에서 조근조근 펼쳐가는 이야기 보따리를 어서 풀어 보기 바란다. 강추다!

바보들의 심리학 : 편견과 고정관념에 관한 책. 심리학 책 답지 않게 저자 개인의 경험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좀 심각해지지만... 편견을 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진정한 행복 : 제목이 진부해 보이고 책 표지도 '종교서' 냄새가 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젠채하는 철학자와 종교지도자들이 권하는 행복은 위선이고 거짓말이다. 그리고 행복은 절대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솔직한 행복론을 이 책을 통해 읽어 보라.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 예술과 과학이 만나 인간 심리의 비밀을 풀어가는, 놀라운 책! 아,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었는데... 26살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저자의 통찰에 더욱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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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에 칼럼을 연재합니다   

2008. 6. 29.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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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7월부터 광주일보에 고정으로 칼럼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칼럼 코너명은 '과학과 경영'입니다. 4주마다 1편씩 올리도록 계획되어 있습니다.
게재되면 PDF 화면으로 공개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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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이제 그만 포기하자   

2008. 6. 26.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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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는 삶은 아름답다. 어떠한 위기와 시련이 찾아와도 반드시 해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마침내 성공을 일궈내는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역사를 아름답게 수놓는 많은 위업들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가 흘린 피와 땀의 결과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 ‘최후의 심판’을 보고 있노라면 극심한 통증을 이겨낸 미켈란젤로의 숭고한 열정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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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C)유정식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때때로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때 그렇다.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두 개로 나뉜다. 특수상대성 원리는 1905년에 완성을 했으나, 일반상대성 원리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15년에야 비밀이 풀렸다.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던 10년 간의 기간은 그에게 있어 매우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물리학은 수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므로 물리학적 발견은 수학의 기반 위에서 성립한다. 그가 10년 간의 학문적 시련에 휩싸인 이유는 수학을 멀리 하고 물리학의 기본 원리에 대한 자신의 본능적인 직관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식이 아니라 가상의 스토리를 통해 문제를 풀던(이를 '사고실험'이라고 함), 독창적인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방법을 쉽게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일반상대성 원리를 향한 수년 간의 실패 끝에 자신이 붙잡고 놓지 않았던 직관을 폐기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물리학적 전략을 버리고 수학적 전략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때가 1915년 10월이었고, 그 후로 겨우 한 달 만에 일반상대성 원리는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포기하자마자 성공에 다다른 것이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사고체계를 과감히 탈피해 ‘생각의 자유’를 회복함으로써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포기 = 자기기만으로부터의 자유


인생에 있어 의미 있는 포기란, 자기기만(自己欺瞞)을 버리고 자유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을 때가 분명 있다. 손에 닿을락말락 조금만 더 하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좌절하고 마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신념과 편견이 무엇인지 성찰해 본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의미 있는 포기란, 목표에 다가가려는 자신의 등에 업혀 있는 거짓신념, 고정관념, 편견을 하나씩 끌어 내리는 것이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걸 다 가지고 가려 한다면 목표는 늘 안개 속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때론 목표 자체를 포기할 용기가 필요하다. 1854년에 고트프리트 켈러(Gottfried Keller)가 쓴 자전적 소설 ‘녹색의 하인리히’는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의 삶이 쓸쓸히 몰락하는 과정을 날카롭게 다룬다. 누명을 쓰고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그는 화가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화가로서의 재능이 부족함을 깨닫는다. 캔버스 앞에 앉아서 아무것도 그리지 못하는 때가 많았고 힘겹게 그린 그림은 일반인들도 충분히 그려내는 평범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는 절망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접으려 한다.

그러나 그를 막은 것은 “처음엔 누구나 그래. 조그만 더 열심히 하면 돼” 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주변의 격려였다. 하인리히의 어머니는 미술상에게 아들을 맡기면서 재능을 키울 것을 독려했다. 수업료나 챙길 요량이었던 미술상은 그림의 기초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그려 온 하인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했다.

그는 능력의 한계를 잘 알면서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남들의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는 좌절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속이는 말로 다짐을 한다. ‘그래, 이렇게 열심히 하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이 뛰어난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기만의 말로 인생 전체를 기만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보내 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하며 빚더미에 허덕이던 그가 잘못을 깨닫고 화가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뒤였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 있었다. 그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절망하고 만다. 하인리히는 재능 없는 화가로서 많은 세월을 허송하다가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조그만 관리직을 수행하던 중 쓸쓸히 사망한다.

내게는 10년 가까이 사법고시에 매달려 있는 친구가 있다. 될듯될듯 하면서 낙방할 때마다 더 열심히 하면 될 거야, 라며 상투적인 조언을 하는 내가 어쩌면 그를 절벽으로 내모는 건 아닌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용기 있는 조언자라면, “그 정도면 충분해. 더 이상 네 자신을 속이지 말고 포기하렴. 다른 길이 있을 거야” 라고 말해 줘야 옳다. 하지만 나나 그 친구나 선뜻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매몰비용(sunk cost)의 오류’ 때문이다.

이 말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미 너무나 많은 비용이 손실돼서 포기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투자하는 걸 일컫는다. 도박으로 많은 돈을 잃은 사람이 쉽게 도박판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면 말이다. 눈과 귀를 가리고 입을 막아 버리는 자기기만으로부터의 해방이 목표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게 하기 때문이다. 버거운 거짓목표를 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도박판을 정리하고 나오려면 본전을 회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과감히 발길을 끊어야 한다.

선택을 잘 하려면 포기를 ‘잘’ 하는 것이다. 매몰비용 따위는 잊어라. 목표가 없는 삶보다 허황된 목표에 돌진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  포기한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떳떳한 삶이 의미 있는 건 아니겠는가? 진정한 포기는 비겁함이 아니라 삶을 개척해 나가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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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한강을 건너 본 적 있나요?   

2008. 6. 2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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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신이 삶이 무료하고 갑갑하고 짜증난다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혼돈스럽고 무감각하다면 자신을 억류한 철창을 부수고 당장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 여행은 새로운 자극의 체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안전한 방법이다. 폭식이나 폭주, 혹은 마약을 통해서도 색다른 자극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말초적이고 일회적인 자극에 불과하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자극, 보다 건설적인 자극을 온몸으로 체득해 보자.

보통 여행이라고 하면 돈을 들여서 유럽, 동남아, 혹은 국내 휴양지로 떠나는 관광을 떠올리기가 쉽다. 물론 그것도 낯선 풍경과 새로운 문화의 참맛을 느끼는 기회가 되고, 혹은 삶의 의미를 되찾는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으므로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것들’ 목록 위에 올려 두어야 한다.

하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를 이용해서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야만 여행은 아니다. 참된 여행의 의미, 즉 여행을 통해 얻는 생활의 활력과 삶에의 긍정적인 욕구는 여행에 든 돈과 여행지가 떨어져 있는 거리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틀에 짜인 기존의 생활 범주를 여행을 통해 얼마나 넓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여행 = 생활 범주 + 1


여행은 생활의 범주를 한 뼘씩 넓혀가는 과정이다. 90년대 초에 방영된 ‘케빈은 12살(원제 : The Wonder Years)’이란 성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서 케빈이 남긴 마지막 대사처럼 말이다. 나는 당시 군대에서 고참들 어깨 너머로 그 장면을 훔쳐 봤었는데, 넓은 세상이 그리울 수밖에 없는 군인 신분이어서인지 그 말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케빈은 자신의 집에서 4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간 여자친구 위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며 이렇게 독백한다.

“위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이제 나는 매일 4마일의 길을 더 왕복해야 한다. 위니의 집은 내게는 뉴욕에서 파리까지 이르는 거리만큼이나 먼 곳이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는 문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위니 덕분에 나의 세상은 조금 더 커진 것이다 (As for me, well, I had my own distances to cover four miles, New York to Paris. The thing is until Winnie left, everything in the world was outside my front door. But now, maybe the world would have to get a little bigger.)”
(제가 번역한 건데, 틀린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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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매일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신혼 시절에 내가 매일 떠났던 ‘게릴라식 여행’처럼 말이다. 그 당시 나는 창동에서 여의도까지 자동차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자가용으로 통근을 해야 했다. 변두리에서 도심을 뚫고 지나가야만 했기 때문에 나의 출퇴근 시간은 교통정체가 극에 달하는 러시아워에는 2시간은 우습게 걸렸다.

도로 위에 겹겹이 쌓인 자동차들의 꽁무니들을 바라보면서 이제나저제나 갈까 초조함에 안절부절했다. 그래서 하루는 짜증으로 시작해서 짜증으로 마감됐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침 저녁 합해서 거의 4시간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할 수 없잖아. 하루의 6분의 1의 시간을 도로 위에 뿌리고 다닐 수 없어. 좀더 생산적으로, 좀더 즐겁게 이 시간을 보낼 순 없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어차피 차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바에야 만날 똑같은 경로로 출퇴근하지 말고 조금씩 다른 길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창동에서 청량리를 거쳐 내부순환도로에 올라섰다가 여의도 방면으로 내려가는, 매일 일정한 루트로만 다닐 이유가 없었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가장 빠른 경로였지만, 러시아워가 되면 그 길은 거의 주차장으로 변했기 때문에 다른 경로를 택한다 해도 시간이 더 들지는 않을 텐데… 매일 똑같은 짜증으로 시작해 똑같은 짜증으로 마무리할 바에야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보지 않은 길을 경험해 봤다는 소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날부터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처음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불안했다(그때는 네비게이션이 일상화되기 전이다. 물론 지금도 내겐 없다). 이러다가 너무 우회해서 제 시간에 회사에 도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지각했다고 윗사람의 핀잔은 듣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다른 길로 돌아가더라도 시간은 엇비슷하게 소요됐고 어쩔 때는 오히려 시간이 단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도 가보지 않는 길을 알게 되면서 내 생활의 범주가 매일 한 뼘씩 커간다는 만족감이었다. ‘저기에 저런 음식점이 있네? 나중에 한번 가봐야지. 여기는 차 만 안 막히면 드라이브하기 좋은 길인 걸. 예전에 소개팅을 했던 곳이 저렇게 변했구나, 참 세월 빠르지’ 나는 새로 발견한 풍경과 그 풍경이 전하는 오래되거나 낯선 이야기들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 길은 더 이상 출퇴근길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한 여행길이었다. 나중에 차를 두고 지하철로 통근하게 될 때도 노선을 옮겨 다니는 나의 게릴라식 여행은 계속됐다.

인간이 한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급기야 거대도시를 형성해 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보다 더 오랫동안 인간은 대개 떠돌이로 생활했다. 그러므로 여행은 인간이 가진 제3의 본능이다. 만일 당신이 도시에 살고 있다면 과밀화된 도시환경과 구획화된 주거 때문에 가벼운 형태의 폐소공포증에 걸려 있을 게 분명하다.

답답한 가슴을 활짝 열고 지금 바로 여행을 떠나라. 싱그러운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기며 새로운 풍경이 가슴을 지나 내 삶 안에 가만히 자리잡는 걸 느껴보라.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공원길도 짧지만 훌륭한 여행이다. 낯선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서 어슬렁거려보라. 뜻하지 않는 즐거움과 행운이 거기에서 당신을 기다릴지 누가 아는가? 어떤 형태든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모두 여행이다.

여행은 가능한 한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생활 범주에 낯선 것을 더해 가는 과정이다. 현대인들에게 어느덧 도보보다 익숙해진 자동차를 버리고 직접 걸어서 여행하는 것이 풍경을 온전히 음미하는 방법일 것이다. 도보여행과 등산을 즐겼던 1950년대의 물리학자 로잘린느 프랭클린이 말했듯이, ‘자동차는 사람을 장소로부터 격리’시키기 때문에 감각을 왜곡한다.

시계가 탁 트인 햇살 좋은 날이면 두 발로 걸어서 느릿느릿 한강을 건너보라. 차로만 건너 다닐 때는 느낄 수 없는 감각들, 강물 위로 유리처럼 부서지는 햇살, 강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가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지금 바로 나가서 풍경이 내게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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