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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팝 가수 올리비아 뉴튼존이 세상을 떠났다. 한번 치유됐던 유방암이 재발된 탓에 요즘치고는 약간은 이른 나이인 73세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사실 어렸을 때 나는 그녀가 어떤 가수인지, 디스코그래피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고 예쁘장한 얼굴이라는 것 외에는 그리 관심도 없었다. 아니, 팝 음악 자체에 완전 문외한이었다. 그런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유일하게 기억하는 그녀의 히트곡이 있는데 바로 ‘피지컬(Physical)’이라는 노래다. 

지나고 보니 이 노래는 그녀가 이전에 발표한 곡과 상당히 다른, 록 음악적인 요소가 살짝 가미된 경쾌한 노래인데, 이것이 내가 이 노래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는 아니다. 바로 가사 중의 한 대목이 우리말로 우스꽝스럽게 ‘번안’돼 아이들 입에서 한동안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었다. 노래 중간에 ‘Let me hear your body talk’이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번역하면 “당신 몸짓을 느끼고 싶어.” 어린애들이 따라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은, 야한 내용의 가사다.

 


아마도 영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의 귀에는 이 대목이 ‘웬일이니 파리똥’이라고 들렸나 보다. 분명 그 아이는 ‘웬일이니 파리똥’이라며 계속 따라 불렀을 것이고 재미있어 하는 주변 친구들은 신나게 ‘전염’됐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국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원곡의 가사는 제껴두고 다같이 ‘웬일이니 파리똥’이라고 부르며 히히덕거렸을 것이다. 올리비아는 자기가 부른 노래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문구로 한국 아이들의 입에 회자됐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헌데 몇몇 사람들이 ‘웬일이니 파리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자기 동네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냄비 위에 파리똥’이라며 조금 다른 버전을, 또 어떤 이는 ‘냄비 안에 밥 있어’라며 완전히 다른 버전을 제시했다. 그밖에 ‘냄비 위에 밥이 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나는 지금껏 그 시절 전국의 아이들이 죄다 ‘웬일이니 파리똥’이라고 불렀을 줄 알았는데, 무슨 사투리도 아니고, 또 무슨 고스톱 룰도 아니고 지역마다 각기 다른 버전을 존재했을 줄이야!

이제는 폐지된 <개그 콘서트>에서 박성호라는 개그맨이 선보였던 코너를 기억하는가? 박성호가 힌트를 던지고 나면 원래는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외국어 가사가 한국말처럼 들리는 신기한 경험으로 웃음을 유발했던 코너였다. 한국사람은 한국어의 음운구조에 철저히 학습된 귀를 가지고 있다. 외국어에 능숙하지 않으면 외국인의 말이 그저 소리로만 들릴 뿐 그 의미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데, 한국인은 자신에게 익숙한 음운체계가 한국어이니 그것을 통해 외국어 소리를 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Let me hear your body talk이 한국어 음운체계라는 필터를 통과하며 ‘웬일이니 파리똥’으로 들린 것이다.  박성호는 사람들이 소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점을 이용하여 웃음을 자아냈던 것이다.

이번 주, 실언인지 의도된 발언인지 모르는 말로 내내 온나라가 시끄러웠다. 다들 알고 있으니 기사대로 써보겠다. “국회에서 이 새끼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외교적 결례인지, 향후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인지에 관해서는 이 글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으련다. 이미 많은 기사에서, 많은 논평에서 다뤘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내놓은 변명이 너무나 기가 막히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이 새끼’는 우리나라 야당을 향한 말이었고,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었다.”라고 해명했다. 좋다. ‘이 새끼’ 부분은 그렇다 치자(할말은 많으나 생략한다). 헌데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발언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들어봤는데 전혀 ‘날리면’이라고 들리지 않았다. 분명 ‘바이든’이었다. 대체 어떤 귀를 가지고 있기에 ‘날리면’이라 들을 수 있지? 알다시피, 이런 황당한 해명이 더 큰 파장을 일으켰고 안 그래도 뒤숭숭한 분위기를 더욱 들쑤셔 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한국어 음운체계에 단련된 우리들 귀에는 Let me hear your body talk이 ‘웬일이니 파리똥’처럼 들릴 수 있고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착각’이다. 허나 ‘바이든’란 단어는 한국사람의 입으로 발음된 음성이기에 우리 귀에는 ‘바이든’이라고 똑똑히 들린다. 물론 바이든은 미 대통령의 성이라서 엄밀히 말해 영어이지만, 한국의 대통령이 발음한 소리이고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에 우리 귀에는 바이든이라고 들릴 수밖에 없다. 우리말이나 영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라면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들을 수 있겠지만, ‘날리면’이란 소리가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의미를 갖고 있는 ‘어떤 단어’일 때만 그럴 것이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고 우기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안다. 걷잡을 수 없게 번진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는 마음이 급했겠지. 애잔하지만, 이해는 한다. 허나 고심 끝에 내놓은 대응책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냉소와 조소를 불러 일으키는 억지가 아닐 수 없다. 음향학적으로 볼 때 주파수가 다른 ‘ㅂ’과 ‘ㄴ’을 같은 소리라고 주장하다니, 그 뻔뻔함과 ‘성의 없음’의 극치에 자못 옷깃을 여미게 된다. ‘웬일이니 파리똥’은 재미라도 있지, 날리면이 뭔가!  ‘웬일이니 파리똥’이 아니라 ‘냄비 위에 밥이 타’가 맞다고 주장하는 건 주파수 대역이 비슷하기라도 하지, 날리면이 대체 뭔가!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날리면’을 ‘바이든’으로 들었다면 여러분의 귀가 이상한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정치적 입장을 떠나, 전 국민을 가스라이팅하려는 것인지 준엄하게 묻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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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주간 유정식' 88호 경영수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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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생 때, 내가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어른들이 지나가며 이렇게 한 소리씩 하곤 했다.
“너는 애늙은이도 아니고, 이런 음악을 듣냐? 젊은 애들 노래 안 듣고.”
그때 내가 들었던 음악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소방차, 전영록, 박남정, 김범룡, 이지연 등의 노래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타계한 조동진의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른들이 왜 내게 애늙은이 같다고 했는지 단박에 이해할 것이다.

‘겨울비’, ‘나뭇잎 사이로’, ‘차나 한잔 마시지’ 같은 그의 노래 어디에도 빠른 비트나 복잡한 악기 구성은 찾아볼 수 없다. 담백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 읊조리는 듯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노라면 심박수가 줄어드는 듯 마음이 차분해지곤 했다. 간혹 감상이 지나쳐 멜랑꼴리해지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인위적으로 형성된 우울감을 꽤 즐겼다. 가사 속의 남자라면 나는 어떤 기분일지, 그 남자가 바라보는 바다는 어떤 빛으로 가득할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가 맞는 겨울비의 촉감은 어떨지, 어두운 벌판을 달리다 한가운데 우뚝서서 올려다 본 하늘엔 별이 가득하겠지 등을 상상하는 시간은 내게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했다. 나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해소했다.

그렇다고 유행하는 노래를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워낙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통에 안 들을 수가 없었고 제목이나 멜로디 정도는 들으면 아는 수준이었다. 친구들은 왜 이런 음악을 좋아할까 의아해 하며 일부러 찾아 들어본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왜 이리 빠르고 복잡한 음악을 즐길까? 속 시끄럽게시리…’라며 카세트 데크를 끄곤 했다. 반 친구들이 쉬는시간마다 그 시절의 ‘인싸템’인 ‘마이마이’나 ‘요요’, ‘아하’ 따위의 포터블 카세틏ㄱ를 꺼내들고 흥얼거리다가 내게 한번 들어보라고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꽂으면 그때마다 싫은 티를 팍팍냈다. “야, 너나 들어!”라고. 나는 인싸템 없는 아싸였다.

고등학교 시절, 곱상하게 생겨 가지고 내 뒷자리에 앉아 매일 유행가를 흥얼거리던 녀석이 있었는데, 노래를 곧잘 하는 편이구나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 취향이 아닌 노래를 연신 부르니 자습에 방해가 되었다. 뒤를 홱 돌아보며 “야, 노래 좀 그만해!”라고 소리를 지르면, 녀석은 용용 죽겠지, 하는 입술로 ‘어디 한번 내 입을 막아보시지.’라며 그 잘난 노래를 이어가곤 했다. 군대를 제대할 쯤 보니까 그 녀석은 듀엣 ‘녹색지대’의 멤버가 되어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렇게 짜증을 유발할 정도로 노래를 불러대더니 그 재능을 살리는구나, 싶었다. 지금은 미사리 어느 카페의 단골 초대가수가 된 것 같아 좀 안쓰럽지만.

 

조동진 님. 돌아가시기 6개월 전쯤, 음식점에서 우연히 뵙고, 앨범에 사인을 받았답니다.


템포가 느리고 멜로디가 단순하며 악기 구성이 단촐하고 서정적인 노래를 좋아하는 취향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이어졌고, ‘조동진 류’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당시엔 인디 가수를 이렇게 불렀다)들의 노래에 심취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하지 않으려는 반골 기질도 한몫했지 싶다. 서태지, R.E.F, 핑클, S.E.S 같은 댄스가수들의 비트 빠른 음악은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었고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나온다 싶으면 다이얼을 돌리곤 했다. 마치 못들어줄 소음을 들었다는 듯.

그러던 내가 요즘엔 비트가 강하고 빠르며 휘몰아치는 듯 질러대는 음악을 일부러 찾아 듣고 있으니 나조차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만약 클레어 로진크란츠(Claire Rosinkranz), 두아 리파(Dua Lipa), 베니(BENEE),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lish), 멘 아이 트러스트(Men I Trust) 등의 노래를 즐겨 듣는 나를 누군가가 목격한다면, 내가 청소년 시기를 조동진 노래와 함께 했음을 상상조차 못하지 싶다. 물론 내 음악적 성향의 주류는 여전히 조동진 쪽에 가깝지만, 예전보다는 클레어 로진크란츠 쪽으로 무척이나 ‘우경화’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따져보니, 제대로 된 오디오 시스템을 구비하고 헤드폰이나 이어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전에는 아이폰에 번들로 딸려온 이어폰을 노트북PC에 꽂아 듣거나 조악한 소형 스피커로 백그라운드 뮤직을 틀어놓는 게 전부였다. 최고급 하이파이는 아니지만 새 오디오가 들려주는 소리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10년 묵은 귓밥을 말끔히 파낸 느낌이라고 할까?

싸구려 스피커에서는 들리지 않았던 악기의 디테일이 느껴졌고, 예전에는 꽝꽝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로만 들리던 드럼킥은 쩍쩍하는 소리로 찰지게 들리는 게 아닌가! 가수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온다지만 귀를 엄청 피곤하게 하는 소위 ‘치찰음’은 새 오디오와 새 헤드폰에서는 부드럽기만 했다. 악기 편성이 많은 음악은 안 좋은 기계로는 뭉치고 떡진 소리를 내지만, 나의 하이파이 시스템에서는 4K 영상을 보듯 해상도와 악기 분리도가 뛰어나서 오래 들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게 재미있어서 템포 빠르고 다이내믹이 강하며 폭발적인 노래를 즐기게 됐던 것이다. 그렇다. 도구가 좋아졌기에 그랬던 것이다.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이 거실에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멋지게 장식해 놓을 만큼 좀 사는 집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여느 청소년처럼 박남정이나 소방차의 노래를 즐겼을까? 음악 취향이 우경화된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지 싶다. 어쩌면 내가 조동진 류의 노래에 심취했던 것은 기질탓이 크지만 집에 있는 음악 청취 도구라고는 모노 카세트 레코더 하나 밖에 없었던 형편도 한몫했으리라. 그마저도 안테나가 떨어져 나가 주파수를 맞추려면 안테나 있던 자리에 옹색하게 스테플러를 세워 놓아야 했다. 식구들이 자는 시간이면, 스테레오는 언감생심, 한쪽 밖에 없는 산업용 이어폰으로 들어야 했던 ‘모노 청소년’이었다.

 


취향에도 범위가 있고 지평이 있다. 그리고 그 범위와 지평은 상당 부분 취향 즐기기를 돕는 도구가 좌우한다. 도구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스펙으로 취향의 경계가 결정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도구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거나 아예 차별적인 것으로 바꾸면 현재의 취향 한계선이 풀리고 취향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조동진 족의 땅에서 클레어 로진크란츠 족의 땅으로 취향의 경계선을 넓혔듯이 말이다.

충실한 도구가 당신의 취향을 충실하게 만든다. 때로는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대는 법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비싼 도구를 사들이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기를 바란다. 싸구려 도구로 본인의 훌륭한 취향을 옥죄지 말라는 뜻이다. 어떤 취향이든 해당 카테고리에서 싸구려에 속한 도구로 만족하고 있다면 다른 데 쓸 돈을 끌어오더라도 미들급 도구까지는 접근해 보는 건 어떨까? 그 후에는 각자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기억하라. 당신의 취향에는 그렇게 해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런 의미로, 장바구니에 새 오디오를 담아본다. 내 취향에 신선한 물과 비료를 줄 때가 다시 돌아왔으니까. 허락보다 용서가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등짝 스매싱 몇 대 맞고 당신의 취향을 살려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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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주간 유정식' 70호 경영수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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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이후 국민의 절반은 자신의 투표권에 효능감을 경험하며 새 정부에 나름의 기대를 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나머지 절반은 깊은 실의에 빠져 있으리라. 생각 같아서는 확 이민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하다못해 훌쩍 해외여행이라도 떠나면 좋겠지만 아직 코로나 시국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터라 그마저도 녹록치 않다. 

일에 집중하다가도 ‘그것’만 떠올리면 한숨이 절로 나오고 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길을 걷다가도 “저 무리의 절반은 나와 생각이 완전히 반대이겠구나.”란 생각에 공포스러웠다고 말하거나, 음식점 옆자리에서 보란 듯이 축하 건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기 싫어서 그곳을 바로 빠져나와야 했다고 고백하는 이들도 있다.

이 글이 나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글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이지만, 그리고 나 또한 그 절반의 일원이라서 반대 의견을 지닌 구독자분들의 오해를 살까 두렵긴 하지만, 일종의 자기치유의 방도랄까? 현재 집단우울증의 증상을 겪는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에게 앞으로 5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이 자리를 빌어 이야기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 나라고 해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내가 인생의 구루로부터 답을 절실히 구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찾아 봤다. 기억하겠지만, 2016년 말에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때에 절반이 넘는 많은 미국인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던 모양이다. 

구글에서 ‘How to survive in trump’란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상당히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의 글도 있고 여러 정치 블로거들이 분노를 담아 휘갈려 쓴 듯한 글도 있다. 트럼프 정부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했던지 아마존에 절망하거나 도피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조언을 담은 <트럼프 세상에서 살아남기(Trump Survival Guide)>란 책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나는 요 며칠 동안 그 글들을 꼼꼼히 읽으며 우리 상황에 맞는 ‘내가 뽑지 않은 대통령의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머리 속으로 정리했다. 어떤 조언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 의미가 적었고, 또 어떤 조언은 가열찬 반격을 주장하는 것이라서 몸을 추스를 힘도 없는 지금의 상태에선 무리가 있었다. “이민이나 가버려야겠다.”라든지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져야겠다.”라는 생각도 나름의 방책이겠지만, 5년은 긴 시간이다. 좌절하거나 도피하기엔 아까운 시간이고, 그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절망 혹은 분노의 에너지를 ‘우리 개인의 생산적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질문에 집중하기로 했고, 여기에 나만의 생각을 몇 가지 끄적거려 본다.

축적의 로드맵을 그려라
5년 후가 되면 자신에게 ‘작품’ 하나가 남을 수 있는 시간으로 사용할 것을 제일 먼저 조언한다. 밖으로 향한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5년의 시간을 축적에 매진할 절호의 기회로 설정하면 어떨까? 그게 자기 인생 최초의 책이 됐든 아니면 기술이나 자격증이 됐든, 지금까지 막연히 생각만 했거나 기대를 했던 것을 성취해 낼 시간으로 사용하기에 5년은 아주 넉넉하다. 내가 ‘축적’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한번에 큰 걸음을 내딛으려 하기보다는 조금씩 해나가야 의지력을 유지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2022년부터 2026년 말까지의 달력을 쭉 펼쳐 놓고 본인이 축적해 내고자 하는 것을 어떤 단계로 성취해 갈 것인지 ‘큰 그림’을 그려보라.

예를 들어 책을 쓰고 싶다면 이렇게 로드맵을 정하면 어떨까? 5년 중 2년은 해당 주제에 대한 공부와 자료 찾기에 매진하고, 3년차엔 책 전체의 구성에 집중하며, 나머지 2년은 본격적으로 책을 쓰고 완성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며칠 밤을 새워 일필휘지로 쓰기보다는 일주일 중에 특정 시간대를 정해서 “이 시간은 온전히 책을 쓰는 데 사용한다”고 다짐하기 바란다. 한번에 2~3페이지만 쓰기로 한다면 2년 후에는 웬만한 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축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오프라인의 시간을 늘려라
개인적으로 요 며칠 유튜브를 절독하고 뉴스를 끊었다. SNS에 글을 올리긴 하지만 뉴스피드를 보지 않고 내 ‘담벼락’만 본다. 그랬더니 일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여유시간이 많이 늘어났다. 매일 1시간씩 음악을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고 그간 지지리도 읽히지 않았던 종이책의 글밥도 눈에 들어온다. 글 한 편을 한두 시간만에 뚝딱 써내는 기적같은 생산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얼마나 온라인에 푹 빠져 살았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소모적이었고 비생산적이었는지 새삼 느끼는 중이다. 지금의 이 상황이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 말 다했다 싶다.

지금은 온라인의 즉시적이고 단편적이며 심도 낮은 정보를 멀리하고 누군가가 오랜 시간을 축적해 낸 깊이 있는 지혜에 탐닉할 절호의 기회다. 예전에는 불가촉천만처럼 취급했던 진지하고 두꺼운 고전을 사서 읽어라. 어려울수록 좋다. 언제 어려운 글을 읽을 기회가 있겠는가? 수행하듯 읽고 또 읽어라.

책읽기가 버겁다면 오프라인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남는 시간에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는, ‘무취미’의 삶은 옆에서 보기에 안쓰럽기 그지없다. 건강을 해치지 않는 취미여야 하고 행복감을 고양하는 취미여야 한다. 자기 성장에 도움이 되는 취미면 더할나위없이 좋을 것이다. 나는 5년 동안 목공을 취미로 해 볼 생각이다. 아직 실행에 옮기지 않았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나면 시작해 보려 한다. 5년 후에 작은 스툴이나 테이블 하나 정도는 뚝딱 만들 수 있는 능력치에 도달하면 좋겠다 싶다. 

 


지지하는 단체를 후원하라
정치적 무관심의 기류를 사회 전체적으로 조성한다는 것, 이게 바로 절망과 체념이 무서운 까닭이다. 염증의 대상은 정치가들이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또한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헌신하는 단체나 정당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일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 참여다. 긍정적인 의미로 정부의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며 저항하는 일이다. 밖에서 욕만 하지 않고 지지하는 정당의 당원이 되어 실질적 압력을 가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다.

꼭 그런 단체에 직접 참여해 활동하라는 소리는 아니다. 동물권에 관심이 많으면 동물보호단체에, 경제민주화를 신념으로 삼는다면 그에 대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단체에 자신이 최선을 다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그게 ‘소리없는 기부’일 수도 있고, 찬성 의사를 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좀더 적극적이라면 평화적인 ‘온/오프라인’ 시위에 가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독해지는 법을 배워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외롭게 지내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어른이 됐다는 것은 스스로 경제적,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고독을 즐길 줄 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보통 사춘기를 지나며 부모와의 분리 불안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지만, 나이를 충분히 먹고서도 주변인들과의 정신적 분리에는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 생각 외로 많다. 늘 누군가를 만나지 않으면 안 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 되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누군가의 도움을 갈망하고,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타인의 결정에 삶을 맡기는 이들. 고독할 줄 모르는 삶은 불행하다. 

고독이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에 잠시멈춤을 누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삶을 ‘철학하며’ 5년을 보내자. 정치공학적인 난삽한 가십과 덜떨어진 유사 담론에 취하지 말고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온전히 자신을 사색하자. 사색(思索)은 ‘깊이 생각하며 무언가를 찾는다’는 뜻이다. 고독해야 사색할 수 있다. 나는 매주 토요일 오전을 이렇게 ‘멍 때리며’ 사색하는 시간으로 보내려 한다. 5년이니까 앞으로 500시간 가량을 사색하는 데 쓸 수 있겠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큰 위안이 된다.

5년 후면 나는 50대 후반이 된다. 치열하게 인내하며 살련다. 이 아까운 시간을 절망하는 데, 그들 욕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쓴 글이니, 나와 반대를 찍으신 분들은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조(自助)의 몸부림이라고 여기는 아량을 베풀어주기 바란다.  (끝)

 

* 이 글은 '주간 유정식' 70호 경영수필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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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유정식 2021년 6월 17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9zZfSC1kT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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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유정식 2021년 6월 16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DQSRgco9x0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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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유정식 2021년 6월 15일자

 

https://www.youtube.com/watch?v=8kHHnVwX1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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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 유정식 2021년 6월 14일자(월)

 

https://www.youtube.com/watch?v=uDD9HZJHN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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