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란 말의 용법에 대해   

2009. 5. 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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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한번쯤 들어 본 적이 (극소수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나 있다. 부모님, 친지, 스승님, 때론 아무 상관없는 어른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을 성 싶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주기적으로 싸가지 없는 놈으로 분류되곤 했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습관적으로 내게 싸가지가 없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동네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그 소리를 할 때마다 눈을 치켜 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비웃음을 보이곤 했다. 일부러 그 아저씨를 피해 다녔지만 그는 용케 날 찾아내어 나의 어느 면이 싸가지 없음의 증거인지 캐내려고 눈빛을 반짝였다.

윤문식의 유행어 '이런 싸가지!'

돌멩이를 차며 골목을 걸을 때도, 친구들과 아웅다웅 다툴 때도, 하다못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서 있을 때도, 어김없이 그는 내 뒤에 나타나 나즉히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속삭였다. 어린 나에겐 참 부당한 대우였다.

어느 날 습관적인 그 말에 부아가 나서 "그러면 아저씨는 싸가지가 있나요?" 라고 대들고 말았다. 대답 대신 딱딱한 꿀밤이 날아왔다. 예의 "이런 싸가지 없는 놈!"이란 말과 함께.

그때 난 속으로 '왜? 싸가지가 있다는 말이 왜 싫지?' 라고 구시렁댔다. '싸가지가 없다'고 해도 기분 나쁘고, '싸가지가 있다'고 말해도 기분 상한다. '싸가지'가 비속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싸가지'는 표준말이 아니라 강원도나 전라도에서 쓰이는 사투리라고 한다. 이 말의 표준어는 '싹수'다. 그 뜻은 아래와 같다.

  싹수 [명]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  
                  (출처 : 네이버 국어사전)

표준어보다 더 많이 쓰이는 사투리라니! '싸가지'란 말도 싹수의 입장에서는 싸가지가 없는 단어이겠지 싶다.

헌데 '싹수가 있다'는 말의 뉘앙스는 긍정적인데 반해, '싸가지가 있다'는 말은 똑같은 뜻인데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단지 사투리라는 이유로? 비속어가 아니지만 비속어처럼 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발음 때문에 욕의 일가(一家)를 형성하는 '쌍시옷(ㅆ)파'의 일원으로 오인 받기 때문일까? 난 국어학자가 아니니 모르겠다. 서정범 교수에게 물어볼 일이다.

우리가 어떤 뜻으로 싸가지란 말을 쓰는지, 그 용례 9가지를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생각해보니 이 단어처럼 일상 속에서 여러 뜻으로 쓰이는 말은 별로 없는 듯하다.(유력한 경쟁상대로 '지랄' 이란 말이 있긴 하다).

1. 배은망덕하다
   "먹여주고 입혀 준 은혜를 잊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2. 무례하다(혹은 버릇없다)  -- 가장 자주 쓰인다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이런 싸가지 없는 놈!"

3. 나대다
   "나설 자리 안 나설 자리 가리지 않고 나대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4. 대들다
   "콩알 만한 녀석이 감히 어른에게 대들어? 이런 싸가지 없는 놈!"

5. 고집세다
   "그렇게 설명해도 못 알아 듣냐? 이런 싸가지 없는 놈!"

6. 이기적이다 (혹은 배려가 없다)
   "너 자신 밖에 모르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7. 똑똑하지 못하다(혹은 멍청하다)
   "어떻게 일을 그렇게 하냐? 이런 싸가지 없는 놈!"

8. 욕심이 많다
   "아주 놀부 심보구나! 이런 싸가지 없는 놈!"

9. 삐딱하다(혹은 비판적이다)
   "사사건건 토를 달다니! 이런 싸가지 없는 놈"


아마 이것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쓰이지 싶다. 써놓고 보니 '싸가지 없다'는 말은 그저 '내 맘에 안 드니 너는 나쁜 놈'이란 뜻으로 수렴되는 듯하다. 장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 일상에서는 '밉고 싫고 나쁘다'는 의미로 변질돼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의 장래가 집약된 '싹수'란 말 자체가 다양한 의미를 내재하기 때문이겠지 싶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게 습관적으로 싸가지 없음을 상기시켜 준 그 아저씨는 아마도 아놀드 슈월츠제네거처럼 나의 미래가 불투명함을 미리 경고하기 위해 미래의 누군가가 내게 보낸 사자가 아닐까?
 
스토커 비슷하게 날 따라다닌 그의 공로(?) 덕에 내가 싸가지 있게 자랐을지, 아니면 그 반대일지, 판단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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