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TV를 보지 않는 이유   

2009. 6. 18. 08:22
반응형

여느 집처럼 저희 집에도 TV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안 보고 살죠. 일주일에 30분 볼까 말까 입니다. 결혼할 때 혼수로 산 브라운관 TV인데, 뚱뚱하고 무겁고 화질도 좋지 않습니다. 좀만 지나면 거의 골동품이 될 수준입니다.

어느 집에 놀러가니 50인치가 넘는 LCD TV가 HD급 화질과 박력있는 사운드를 자랑하더군요. 정말 좋아 보여서 한때 강력한 '뽐뿌'를 받았지만, '정신 차려, 이 친구야.'라고 저 스스로를 타박하며 참았습니다.

TV를 없앨까도 했지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처럼 중요한 뉴스나, 월드컵 축구 같은 스포츠 중계 등을 아주 선택적으로 보기 위해 낡은 TV를 살려 두었습니다. 거실에서 침실로 TV를 옮겨 놓으니 습관적으로 TV를 켜지 않아서 좋습니다. 대신 한쪽 벽 전체를 책꽂이로 만들었죠.

제가 TV를 잘 보지 않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이 13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득보다는 실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1. 나의 독해 속도를 무시하고 자기네 속도를 강요한다.
   (90년대 드라마와 지금 드라마, 속도 차이 엄청나다)

2. 자기네 생각을 은연 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강요한다.
   (특히 축구 중계방송의 해설자들. 난 볼륨을 끄고 본다.)

3. 가족들과의 대화가 단절된다.
   (밥 먹을 때 TV보는 모습을 제3자 시각으로 보면 아주 기이하다.)

4. 책 읽을 시간이 대폭 준다.
   (드라마 한편 할 동안 최소한 60페이지는 읽을 텐데)

5. 드라마의 다음 스토리가 궁금해서 머리가 쓸데없이 활성화(?) 된다.
   (중요한 일에 집중해도 될까말까인데...)

6. 저속한 말, '독한' 표현에 중독된다.
   (김구라, 신정환, 박명수가 낳은 '독함의 미학'. 하나도 안 멋있다.)

7. 내 생각을 덧붙이거나 기여할 기회가 없다.
   (좋은 교양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자기 할말만 일방적으로 한다.)

8. 화려한 이야기(예: 재벌 2세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상대적 빈곤감이 야기한다.
   (대리만족 효과가 있다고? 천만에! 대리불만족이겠지.)

9. 높은 데시벨에 중독된다.
   (데시벨미터 있으면 한번 재보라. 조용한 프로그램은 왠지 심심할 정도다.)

10. 아이가 '사랑 타령'을 한다.
   ('내가 미쳤어~'를 웅얼거리는 유치원생, 정말 귀엽나요?)

11. 예쁜 여배우와 아내를 비교한다. 잘생긴 남자 배우와 남편을 비교한다.
   (솔직한 심리. TV 안보기가 배우자를 사랑하는 방법.)

12. 광고에 끌려간다.
   (광고 많이 한 회사가 좋은 회사라고 잘못 인지하니까.)

13.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본다.
   (특히 罹瞑駁)

TV 대신 가족의 발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위와 비슷한 이유로, 신문도 보지 않습니다. 특히 ,OO일보 좀 구독해 주세요, 라고 문 두드리면 '안 봐요' 한마디로 야멸차게 물리칩니다.

신문도 안 보고 TV도 안 보고, 어떻게 바삐 돌아가는 세상을 캐치업 하겠냐고 누가 그러더군요. 캐치업 안 해도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RSS로 편하게 제 블로그를 구독하세요】  
반응형

  
,

문제와 친하십니까?   

2009. 6. 17. 09:52
반응형

살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합니다. 개인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공동체의 문제 등 하루에도 갖가지 문제에 맞닥뜨리며 삽니다. 마치 누군가가 매일 무한대의 크기를 가진 문제은행에서 문제를 한움큼 꺼내 인류를 향해 뿌려대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이 사소하든 심각하든 우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주어질 겁니다.

문제(problem)라는 단어는 어떤 뜻일까요? 개인마다 차이가 좀 있겠지만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아마 여러분의 뇌 속에 있는 편도체가 움찔하며 반응할 겁니다. 아몬드만한 크기의 편도체는 불안함과 공포를 인식하여 그에 따른 호르몬을 분비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심장이 강하게 박동하고 소름이 돋고 팔다리가 잔뜩 긴장하는 이유는 편도체의 작용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급하고 위험한 상황이 아닌데도 '그것이 참 문제야'라는 말을 듣는 순간 편도체가 반응을 보입니다. 이유는 문제라는 말이 뇌 속에 강렬하게 심어 놓은 의미 때문입니다. 문제는 현상황에 대한 도전이자 위협이고, 그것을 풀지 못하면 자칫 위험에 빠질 거라는 '의미 발전'의 연쇄반응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문제는 불편하고 나쁜 것이므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립니다.

제가 잘 가는 스타벅스를 그려봤습니다. ^^ 문제에 직면했을 때 찻집에 앉아 차분히 생각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지요.


문제(problem)라는 단어의 어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이런 '정서적인' 정의와는 다른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어로 문제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어 'problema'는 단순히 '앞에 던져진 것'을 뜻합니다. 주의하고 조심할 필요가 있음을 나타낼 뿐, 반드시 풀어내야 할 '나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 앞에 던져진 꾸러미 안에 금덩어리가 들었을지 모르니까요. 

부정적이고 불편한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휴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아'라며 비관적인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발만 동동 구르면 꾸러미에 감히 접근할 용기가 생기지 않을 뿐더러 계속 지체하다가는 금덩어리가 든 꾸러미를 누군가가 낚아채갈지 모릅니다. 또한 마음이 급해져서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해결책을 실행하다가 낭패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내 앞에 던져진 저 꾸러미 안엔 뭐가 들었을까 궁금증을 가지고 접근할 때 꾸러미를 묶은 끈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공포와 불안감에 빠지려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의식적으로 호기심을 발동해 보면 어떨까요? 이 문제는 왜 내게 던져졌을까, 문제의 내용이 정확히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문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누그러지고 객관적으로 차분히 문제를 바라보게 됩니다. 문제를 타인의 문제로 인식하는 태도도 도움이 되죠.

'반드시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고 말테야' 라고 의욕을 앞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못 풀어도 좋으니 한번 알아나 볼까?' 라고 가볍게 생각하면 의외로 문제가 쉽게 풀립니다.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 'solve'는 라틴어인 'solvere'에서 유래했는데, '바로잡다, 없애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풀어 헤치다'라는 뜻입니다. 그저 꾸러미를 열어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solve입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라는 말은 곧 문제 정의가 문제 해결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문제에 직면했을 때 불안감으로 인해 해결책을 먼저 쏟아내기보다는, 문제 꾸러미의 내용물이 뭔지 먼저 뜯어보고 살펴봄으로써 '아, 이게 정확한 문제구나'라는 '문제 정의'가 먼저 이뤄져야 합니다. 문제가 뭔지 알지 못하고는 문제를 풀 수 없고, 풀었다 해도 잘못된 해결책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한 문제 중에 하나를 생각해 낸 다음 포스트잇에 한 문장으로 써 보십시오. 그것을 모니터 귀퉁이 같이 눈 가는 곳에 붙여 놓아 보세요. 처음엔 볼 때마다 껄끄럽고 짜증나고 불안하지만 좀 지나면 그 문제가 친구처럼 익숙해집니다. 그 순간이 바로 문제를 풀 적기입니다.


【한RSS로 편하게 제 블로그를 구독하세요】  
반응형

  
,

내가 스타벅스를 자주 찾는 이유   

2009. 6. 16. 09:32
반응형

요즘 들어 스타벅스에 자주 갑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그곳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거리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한량 내지는 불한당처럼 들리겠지만, 그렇다고 노는 건 아닙니다. 그곳에서 저는 몇 군데 전화를 하고 강의 준비도 합니다. 책을 읽기도 하고 눈이 아프거나 졸리면 인터넷 서핑으로 달랩니다. 어쩌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흥적으로 글을 쓰기도 하죠. 스타벅스는 또다른 사무실인 셈입니다.

의자는 사무실의 것보다 작고 딱딱해서 시간이 좀 지나면 엉치뼈가 배기고 허리가 당깁니다. 사무용 책상의 5분의 1이나 될까말까한 원형 테이블은 노트북과 책과 필기구를 올려 놓기에도 비좁습니다. 행여나 커피를 엎지르진 않을까 손놀림 하나하나가 조심스럽지요. 불편하지 그지 없습니다.

게다가 좀 시끄럽습니까? 커피 머신이 연신 원두를 갈아대는 소리. '콜링합니다~'를 외치는 점원 목소리. 좁은 테이블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커플이 있는가 하면, 왁자지껄한 대화 끝에 늘 박장대소를 하는 아주머니 부대. 스피커가 찢어질 듯 쿵쾅거리는 음악까지 듣노라면 온갖 소음이 융해된 터널 속에 들어앉은 듯한 착각까지 듭니다. 

스타벅스에 앉아 이렇게 엉터리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편하고 시끄러운 스타벅스에서 곧잘 책이 읽히고 글이 써지니 참 이상합니다. 책 내용이 쏙쏙 들어와 속독이 가능하고 시간당 써내는 글자수도 사무실에 있을 때보다 더 많지요. 조용한 사무실에서는 시계 초침처럼 작은 소리도 거슬리는데, 스타벅스에서는 자식 자랑하는 아주머니의 우렁찬 목소리에도 무감각해집니다. 

간혹 그 자랑 소리가 도가 지나쳐 책읽기와 글쓰기를 멈칫하기도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그럴까요? 누군가가 심리학, 뇌과학, 철학, 사회학 등 학문적인 관점으로 이런 모순적인 '조화'를 설명할 수 있거나 이미 설명했겠지요.

그들의 결론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스타벅스는 타인들과 삶을 공존한다는 느낌을 강화하고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을 극대화함으로써 자아를 향해 집중케 만드는 일종의 장치는 아닐까요? 저처럼 혼자서 자주 스타벅스를 들르는 사람은 그곳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을 듣고 앉았노라면 혼자임에도 혼자가 아니라는 안락함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스타벅스는 다른 테이블에 앉은 타인들과 쉽게 교류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은 아닙니다.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기에 딱 좋은 공간이죠. 이율배반적이지만, 혼자가 아님을 알면서도 고독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런 불협화음 같은 하모니가 내면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책읽기나 글쓰기가 술술 풀리도록 만든 집중력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스타벅스냐구요? 스타벅스와 쌍벽을 이루는 커피빈(일명 콩다방)이 있고, 요즘 영역을 확대 중인 엔젤리너스, 톰앤톰스 등의 커피 하우스도 있는데 왜 유독 스타벅스만을 예찬하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타벅스의 커피맛이 특별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제 입이 좀 저렴한지라 맛 차이를 별로 못 느끼겠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커피빈엔 노트북을 연결할 콘센트를 찾기 어렵습니다. 좀 비싼 커피값은 그러려니 하는데 친화적이지 않은 모바일 네트워킹 환경이 아쉽습니다. 노트북을 자주 이용하는 제겐 부적격 장소죠. 제가 자주 가는 스타벅스 매장은 구석구석 콘센트가 제법 많습니다. 게다가 무선 인터넷을 공짜로 쓸 수 있어서 좋습니다.

톰앤톰스는 흡연자를 더 많이 배려한 인테리어 설계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통유리로 된 칸막이가 흡연자와 비흡자를 가르는 내부 구조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흡연자 좌석은 텅텅 빈 반면 비흡연자 자리는 붐벼서 그냥 나와버린 '안 좋은 기억'이 몇번 있습니다. 편견일까요? 다른 브랜드 매장은 거의 가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스타벅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달리 지금은 브랜드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인테리어와 메뉴의 화려함이 다른 브랜드보다 못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스타벅스만의 빈티지가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파스쿠치란 커피 하우스는 인테리어가 강렬하고 세련되어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모양이지만 스스로가 이물(異物)이 된 듯하여 그곳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올해 초에 나온 제 책('시나리오 플래닝')의 3분의 2는 집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도 자주 간 탓에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숏 아메리카노~"라고 콜링할 정도가 됐었죠. 서너 시간 앉아 있어도 뭐라 하지 않고, 소란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와 휴식을 겸할 수 있는 공간인 '별다방'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애용할 듯 합니다.

* 본 포스트는 스타벅스 홍보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

【한RSS로 편하게 제 블로그를 구독하세요】  


반응형

  
,

뻔뻔하게 삽시다   

2009. 6. 15. 09:06
반응형

수첩에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주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곤 합니다. 취미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 그림이지만, 20분 남짓의 시간 동안 그림에 몰입된 스스로를 발견하지요. 그 느낌이 저에겐 아주 좋습니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

꽤 조심스럽게 그린다 해도 어긋나는 선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볼펜으로 그리는 탓에 수정이 어렵죠. 그냥 선 몇 개를 더 그려 넣어서 실수를 대충 무마(?)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엔 아주 젬병입니다. 실제의 얼굴과 그림의 얼굴이 전혀 다르죠.

하지만 인물에 과감히 도전해 봤습니다.


첫번째는 찻집에서 어느 커플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여자가 실수로 컵을 엎지르는 모습이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 엎지르진 않았습니다. 탁자를 균형에 맞지 않게 그린 저의 부주의를 그렇게 그림으로써 덮어버렸죠. 여자의 얼굴은 꽤 예뻤는데 약간 도드라지게 그린 광대뼈와 콧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돼 버렸습니다.


두번째는 제 아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모습인데, 다 그린 걸 보여주니 "내가 왜 이렇게 생겼어?"라며 울상을 짓더군요.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를 늙은 아저씨의 얼굴로 그렸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게다가 허리 아래 부분을 그리기가 어려워서 사진에서 '아웃 오브 포커스'하듯이 선을 어지럽게 휘갈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이불 같다며 아들이 놀립니다.

아들은 자기를 그린 그림이 싫다며 수첩을 찢을 기세로 달려들고 아이의 엄마도 합세하여 면박을 줍니다. 나름 힘들여 그린지라 약간 억울하지만, 맞습니다. 굳이 작품이랄 것도 없는 제 그림 목록 중에서 최악의 실패작으로 분류될 만한 그림들이 틀림없습니다. 고흐, 밀레, 클림프, 루벤스, 르느와르와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보다가 제 그림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지경입니다. 정말 한심하고 쓰레기 같습니다. 그림이라고 불러주는 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자학에 가까운 자평을 하다가도 생각을 고쳐 먹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가 만든 작품를 스스로 평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도저히 못봐주겠습니다",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지"라며 아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평가 내립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능력에 진짜로 실망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먼저 혹평을 내림으로써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어떨까요?

제 아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뭔가를 열심히 그려댑니다. 스케치북으로 모자라서 아예 A4 용지 한다발을 주었습니다. 아들 방은 늘 종이와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어지럽습니다. 아들은 다 그린 그림을 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매번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잘 그렸지요? 예쁘죠?"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렸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도 있지만 솔직히 낙서 같은 그림도 종종 그려옵니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자신의 그림에 무한한 자긍심을 나타냅니다. 어떨 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리지요?"라며 스스로를 극찬하기도 합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은 자학할 줄 모릅니다. 9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한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혹시 어린아이 중에 "내 그림은 정말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이렇게 높은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이 왜 커갈수록 자학을 배워갈까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법을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상대평가법'을 배우는 거죠. 

사회화의 당연한 과정이지만 씁쓸한 면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혹평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무언가를 배우려는 열정이 급격히 식진 않을까, 그리하여 타고난 소질을 잠재된 상태로 영원히 묵혀버리진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도 자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만든 작품을 쓰레기통에 쳐 넣으면서 동시에 실패한 작품을 통해 배우는 기회를 유기하기 때문입니다.작품을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희열의 감정이 자학이라는 싸구려 감정으로 교환되어 마음의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정체( )입니다. 자학은 정체의 늪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림이든, 안무든, 보고서든 자신의 작품을 자학하려는 관성을 버리고 찬찬히 반성하는 태도를 가질 때 개선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감상하듯 즐기고 반성을 통해 배운다면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작품과 만나게 됩니다. 실패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못 그린 제 그림에도 뻔뻔해지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제 그림을 블로그에 공개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제 그림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린 그림입니다"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사랑의 비를 내릴 때 자아가 자랍니다. 자학은 자아를 갉아먹는 해충일 뿐입니다.

【한RSS로 편하게 제 블로그를 구독하세요】  
반응형

  
,

사진 전람회 : part 2-2   

2009. 6. 14. 08:48
반응형

이번 전람회는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찍은 사진입니다.
2007년의 단풍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곱게 물들었습니다.
(2008년은 단풍이 아니라 탄풍이었다는...)

역시 사진이 많습니다.
차나 맥주 한 잔 놓고 찬찬히 보시기 바랍니다.
못 찍었다 생각되어도 양해 바랍니다. ^^

(크게 봐야 좋으니 클릭해 주십시오.)



반응형

'유정식의 서재 > [사진] 그리고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교체험, 극과 극!  (10) 2009.06.21
졸작 전시회  (10) 2009.06.20
사진 전람회 : part 2-1  (13) 2009.06.13
사진 전람회 : part 1  (6) 2009.06.06
한없이 게으를 자유를...  (0) 2009.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