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결사 여러분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란 용어를 고등학교 때(혹은 중학교 때)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문기사나 방송에서 '무엇은 무엇의 필요조건이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각각 무엇인지 구분해 설명할 수 있는지요?
제법 많은 분들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서로 혼용하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다음의 두 문장 중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택해 보기 바랍니다.
1)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2)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
답을 골랐나요? 확실하게 어느 하나를 택한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뒤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약간 수학적인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겁니다.
'P이면 Q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P이면 Q이다'인 참 명제를 수학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 ⇒ Q
이 때, 수학에서는 P는 Q이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Q는 P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P와 Q가 동일하다면(이를 '동치'라 합니다) P는 Q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혹은 Q는 P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죠. 좀 어렵나요?
P ⇒ Q 라는 표현을 집합으로 나타내면, P ⊂ Q 가 됩니다. 충분조건인 P가 필요조건인 Q의 부분집합이 되죠. 쉽게 말해 '부분집합은 충분조건, 전체집합은 필요조건'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퀴즈의 정답을 알아보겠습니다. 노력이 성공의 부분집합일까요? 아니면 성공이 노력의 부분집합일까요? 아직 모르겠다구요? 그렇다면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명확하게 보일 겁니다.
위의 1)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는 곧 '노력 ⊃ 성공'이고, 2)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는 '노력 ⊂ 성공'입니다. 따라서 벤다이어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이 보니 이해가 더 안 간다구요?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2)번 그림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비유해 보면 어떨까요? 신(神)이 앞으로 태어날 인간 아기의 성별을 결정한다고 해보죠. 신이 '넌 여자로 태어나거라'고 말하면 무조건 '인간'이라는 속성을 자동적으로 부여 받습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2번) 그림은 노력하면 곧 성공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노력하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는 속성을 보장 받는 거죠.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죠. 그러므로 2)번 그림은 틀렸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1)번 그림은 어떨까요? 이 그림은 성공한 사람들은 곧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분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겁니다. 동의하지 않은 분들은 행운이나 타인의 전적인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으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노력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할 겁니다.
맞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노력과 성공 간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하면 위의 1)번 그림이 아니라, 아래의 3)번 그림처럼 서로 겹쳐진 모습이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결론적으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래서 위 퀴즈의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적인 엄밀함을 따지지 않는다면,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1)번 그림이 맞다고 허용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라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옳다고 판단해도 됩니다. 하지만 느슨하게 용인해 준다고 해도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좀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실제로 사용한 케이스가 없나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알려 드린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이 기사 속에 나오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옳게 쓰였는지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전략)... 국토해양부 해양개발과의 OOO 연구원에 따르면 좋은 물을 판별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 즉 '유해요소가 없는지'와 '유익한 성분이 있는지'로 나뉜다. O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후략)(출처 : 아시아경제 2009년 6월 1일자)
말이 좀 어렵죠? 이를 명제로 풀면,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즉,
유익성분 있는 물(P) → 유해성분 없는 물(Q)
연구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P는 Q의 충분조건이고, Q는 P의 필요조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를 각각 따져보겠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찬찬히 읽으면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P가 Q의 충분조건인지 따져보기]
연구원의 말대로, P가 Q의 충분조건이 되려면, P가 참일 때 항상 Q도 참이어야 합니다. P가 참인데도 항상 Q를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P는 Q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면(P), 항상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이라는 조건문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유익성분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도 있고 유해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성분이 들어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물을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성분을 파란색으로, 유해한 성분을 빨간색으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성분을 노란색으로 표시해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위 그림과 같이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파란색)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빨간색)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물을 유해성분이 없는 물이라 말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익성분이 있는 물'은 '유해성분이 없는 물'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연구원의 말이 틀렸다는 소리죠.
[Q가 P의 필요조건인지 따져보기]
이번에는 반대로 따져보죠. 유해성분이 없는 물(Q)는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일까요? Q가 P의 필요조건이 되려면, Q가 참이 아닐 때 P도 항상 참이 아니어야 합니다. Q가 참이 아닌데, P가 참인 경우가 있다면 Q는 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그대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유해성분이 없는 게 참이 아니라면(즉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이 있는 것도 항상 참이 아니다(즉, 유익성분이 없는 물)"가 성립되어야 Q는 P의 필요조건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해서 유익성분(파란색)이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의 왼쪽처럼 말입니다. 왼쪽 동그라미와 오른쪽 동그라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은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유익성분이 있는 물과 유해성분이 없는 물 사이에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원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연구원의 말이 옳다고 해도 그 말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런 용어를 쓰지 않고서도 쉽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의사소통의 오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만'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어야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물이 되려면 반드시 유해성분이 없어야 하고, 거기에 유익한 성분까지 포함되면 더 좋은 물이다
" 이렇게 말해도 의미는 고스란히 유지됩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들이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해결사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가능한 한 이렇게 어렵고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용어를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의뢰인이 문제의 해결책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지, 의뢰인을 교육시키는 것이 문제해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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