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하게 삽시다   

2009. 6. 15.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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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에 가끔 그림을 그립니다. 주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곤 합니다. 취미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 그림이지만, 20분 남짓의 시간 동안 그림에 몰입된 스스로를 발견하지요. 그 느낌이 저에겐 아주 좋습니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

꽤 조심스럽게 그린다 해도 어긋나는 선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볼펜으로 그리는 탓에 수정이 어렵죠. 그냥 선 몇 개를 더 그려 넣어서 실수를 대충 무마(?)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엔 아주 젬병입니다. 실제의 얼굴과 그림의 얼굴이 전혀 다르죠.

하지만 인물에 과감히 도전해 봤습니다.


첫번째는 찻집에서 어느 커플의 모습을 곁눈질로 보면서 그린 그림입니다. 그림에서 여자가 실수로 컵을 엎지르는 모습이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 엎지르진 않았습니다. 탁자를 균형에 맞지 않게 그린 저의 부주의를 그렇게 그림으로써 덮어버렸죠. 여자의 얼굴은 꽤 예뻤는데 약간 도드라지게 그린 광대뼈와 콧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돼 버렸습니다.


두번째는 제 아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모습인데, 다 그린 걸 보여주니 "내가 왜 이렇게 생겼어?"라며 울상을 짓더군요. 초등학교도 안 간 아이를 늙은 아저씨의 얼굴로 그렸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게다가 허리 아래 부분을 그리기가 어려워서 사진에서 '아웃 오브 포커스'하듯이 선을 어지럽게 휘갈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이불 같다며 아들이 놀립니다.

아들은 자기를 그린 그림이 싫다며 수첩을 찢을 기세로 달려들고 아이의 엄마도 합세하여 면박을 줍니다. 나름 힘들여 그린지라 약간 억울하지만, 맞습니다. 굳이 작품이랄 것도 없는 제 그림 목록 중에서 최악의 실패작으로 분류될 만한 그림들이 틀림없습니다. 고흐, 밀레, 클림프, 루벤스, 르느와르와 같은 대가들의 그림을 보다가 제 그림을 보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지경입니다. 정말 한심하고 쓰레기 같습니다. 그림이라고 불러주는 것만 해도 황송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자학에 가까운 자평을 하다가도 생각을 고쳐 먹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가 만든 작품를 스스로 평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도저히 못봐주겠습니다",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지"라며 아주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평가 내립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능력에 진짜로 실망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먼저 혹평을 내림으로써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은 어떨까요?

제 아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뭔가를 열심히 그려댑니다. 스케치북으로 모자라서 아예 A4 용지 한다발을 주었습니다. 아들 방은 늘 종이와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어지럽습니다. 아들은 다 그린 그림을 들고 쪼르르 달려나와 매번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잘 그렸지요? 예쁘죠?"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렸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도 있지만 솔직히 낙서 같은 그림도 종종 그려옵니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자신의 그림에 무한한 자긍심을 나타냅니다. 어떨 때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그리지요?"라며 스스로를 극찬하기도 합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어린아이들은 자학할 줄 모릅니다. 9살 이하의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을 한없이 사랑하고 자신의 재능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혹시 어린아이 중에 "내 그림은 정말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지요? 이렇게 높은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이 왜 커갈수록 자학을 배워갈까요?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법을 습득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상대평가법'을 배우는 거죠. 

사회화의 당연한 과정이지만 씁쓸한 면도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혹평하는 법을 배우는 순간 무언가를 배우려는 열정이 급격히 식진 않을까, 그리하여 타고난 소질을 잠재된 상태로 영원히 묵혀버리진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에게도 자학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타인의 비평을 차단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만든 작품을 쓰레기통에 쳐 넣으면서 동시에 실패한 작품을 통해 배우는 기회를 유기하기 때문입니다.작품을 만들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희열의 감정이 자학이라는 싸구려 감정으로 교환되어 마음의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

성공의 반대말은 실패가 아니라, 정체( )입니다. 자학은 정체의 늪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림이든, 안무든, 보고서든 자신의 작품을 자학하려는 관성을 버리고 찬찬히 반성하는 태도를 가질 때 개선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자신의 못난 작품을 감상하듯 즐기고 반성을 통해 배운다면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작품과 만나게 됩니다. 실패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못 그린 제 그림에도 뻔뻔해지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제 그림을 블로그에 공개하는 이유입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제 그림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린 그림입니다"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자신에게 사랑의 비를 내릴 때 자아가 자랍니다. 자학은 자아를 갉아먹는 해충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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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람회 : part 2-2   

2009. 6. 1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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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람회는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찍은 사진입니다.
2007년의 단풍은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곱게 물들었습니다.
(2008년은 단풍이 아니라 탄풍이었다는...)

역시 사진이 많습니다.
차나 맥주 한 잔 놓고 찬찬히 보시기 바랍니다.
못 찍었다 생각되어도 양해 바랍니다. ^^

(크게 봐야 좋으니 클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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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람회 : part 2-1   

2009. 6. 1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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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올린 '사진 전람회 - part 1'에 이어,
오늘은 2007년 1월~8월에 찍은, 나름 best 사진을 골라서 올려 봅니다.
제 수준에서 best이오니, 고수님들의 비웃음은 달게 받겠습니다. ^_^;

사진이 좀 많습니다.
차 한 잔 준비하시고, 천천히 음미하듯 감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크게 봐야 좋으니, 클릭해 주세요.)

발가락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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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회사 판별법   

2009. 6. 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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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을 위해 여러 회사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걸 느낍니다. 생각보다 탄탄하고 건전한 문화를 지닌 회사가 있는 반면에, 겉으로 보기엔 이미지가 좋은데 실상은 곪을대로 곪은 문제에 허덕이는 회사도 있습니다.

컨설턴트인 저의 경험을 토대로 '망하는 회사 판별법'을 만들어 봤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들이죠. 만일 이 중에서  15개 이상 '예'라고 대답한다면, 혁신을 제안할 시기가 된 거라 감히 말하고 싶군요.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회사가 어려움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절차를 바꾸기 위한 절차가 만들어진다.
   (할일이 떨어졌다는 뜻)

2. 임원회의에서 CEO만 말을 한다.
   (말 꺼내기 무섭게 쫑크만 주니까. "그래, 당신 말 한번 잘했어..."라고.)

3. 신사업을 고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발등에 불 떨어진 일이 너무 급해서. 문제는 그런 일이 너무 흔하다는 것)

4. 신사업을 시도하지만 매번 흐지부지된다.
   (CEO부터 신경을 안 써주니까 힘을 받을 턱이 있나)

5. 최근 2년 안에 시장 2위에서 3위 이하로 떨어졌다.
   (스타사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매우 위급한 상황.)

6. 경쟁사와의 경쟁보다 내부 경쟁이 더 치열하다.
   (회사 발전보다 '내'가 더 중요하니까 타이틀이나 확보하자!)

7. 전략이 실패했을 때 내부에서 희생양 찾기에 몰두한다.
   (그래야 '내'가 사니까. '내가 안 그랬어요~' )

8. 화장실이 매우 지저분하다.
   (회사에 애정이 없으니까. 특히 남자 소변기 아래. 뚝뚝 떨어진 눈물(?) 자국들)

9. CEO가 바뀌면 문제가 대번 해결될 거라 믿는다.
   (CEO 바뀐다고 크게 달라질까?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계속 남는 법)

10. '유학가겠다'며 그만두는 신입사원이 많아진다.
   (1년후 그 신입사원은 타사 근무 중. 이직하겠다는 핑계거리...)

11. 이것저것 잘잘한 포상제도가 많아진다.
   (백약이 무효라는 증거)

12. 하루 스케쥴의 반 이상이 회의다.
   (회의해서라도 일거리 만들어야 하니까)

13. 교육이 없다는 불평이 부쩍 는다.
   (교육 받을 거 받고 나가려고)

14. 바로 옆에 있는데 메신저로 대화하는 사람이 많다.
   (얼굴 보면서 말하면 피차 피곤하니까  or  다른 사람 욕하려고)

15.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회사도 하나?"란 말로 눌러 버린다.
   (그러면서 '창의'가 사훈이다)

16. 팀장이 "난 그럴 권한이 없어"란 말을 자주 한다.
   (모든 게 윗사람(CEO)에게 집중돼 있으니까)

17. 흡연실의 꽁초 양이 많아진다.
   (괴롭거나 심심하니까)

18. 보고서가 두꺼워진다.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니까)

19. 회의할 때나 보고할 때 팔짱끼는 사람이 많다.
   ('듣기 싫다, 꺼져'라는 뜻의 바디 랭귀지)

20. CEO가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활기차다.
   (만날 기죽어 지내니까)


15개 ~ 20개  :  매우 위험! 회사를 떠날 준비를...
10개 ~ 14개  :  위험! 강력한 혁신 필요.
6개 ~ 9개     :  대체로 양호. 그러나 주시해야.
5개 이하       :  건전!


덧붙임 1 :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재미로 판별해 보세요. ^^
덧붙임 2 : 우리나라의 대표께서는 스스로를 CEO로 포지셔닝하시던데, 위의 판별법을 응용해서 점수를 매겨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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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조건과 충분조건, 그 차이를 아십니까?   

2009. 6. 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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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해결사 여러분은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란 용어를 고등학교 때(혹은 중학교 때)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문기사나 방송에서 '무엇은 무엇의 필요조건이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런데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각각 무엇인지 구분해 설명할 수 있는지요?

제법 많은 분들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서로 혼용하지요. 그래서 이 글에서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다음의 두 문장 중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택해 보기 바랍니다.

1)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2)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

답을 골랐나요? 확실하게 어느 하나를 택한 다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뒤에 이어지는 글을 읽어 보기 바랍니다. 약간 수학적인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을 겁니다.

'P이면 Q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하겠습니다. 'P이면 Q이다'인 참 명제를 수학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P  ⇒ Q


이 때, 수학에서는 P는 Q이기 위한 충분조건이고, Q는 P이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P와 Q가 동일하다면(이를 '동치'라 합니다) P는 Q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 혹은 Q는 P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죠. 좀 어렵나요?

P  ⇒ Q 라는 표현을 집합으로 나타내면,  P  ⊂ Q 가 됩니다. 충분조건인 P가 필요조건인 Q의 부분집합이 되죠. 쉽게 말해 '부분집합은 충분조건, 전체집합은 필요조건'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위에서 제시한 퀴즈의 정답을 알아보겠습니다. 노력이 성공의 부분집합일까요? 아니면 성공이 노력의 부분집합일까요? 아직 모르겠다구요? 그렇다면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보면 명확하게 보일 겁니다.

위의 1)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는 곧 '노력 ⊃ 성공'이고, 2)번 문장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다'는 '노력 ⊂ 성공'입니다. 따라서 벤다이어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이 보니 이해가 더 안 간다구요?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2)번 그림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이렇게 비유해 보면 어떨까요? 신(神)이 앞으로 태어날 인간 아기의 성별을 결정한다고 해보죠. 신이 '넌 여자로 태어나거라'고 말하면 무조건 '인간'이라는 속성을 자동적으로 부여 받습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2번) 그림은 노력하면 곧 성공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노력하기만 하면 무조건 성공이라는 속성을 보장 받는 거죠.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력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죠. 그러므로 2)번 그림은 틀렸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1)번 그림은 어떨까요? 이 그림은 성공한 사람들은 곧 노력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에는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분도 있겠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겁니다. 동의하지 않은 분들은 행운이나 타인의 전적인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으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노력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할 겁니다.

맞습니다.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닙니다. 노력과 성공 간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하면 위의 1)번 그림이 아니라, 아래의 3)번 그림처럼 서로 겹쳐진 모습이라고 말해야 정확합니다.

결론적으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래서 위 퀴즈의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수학적인 엄밀함을 따지지 않는다면,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라는 1)번 그림이 맞다고 허용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흔히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이다'라고 말하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옳다고 판단해도 됩니다. 하지만 느슨하게 용인해 준다고 해도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이제 좀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실제로 사용한 케이스가 없나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앞에서 알려 드린 기초 지식을 바탕으로 이 기사 속에 나오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 옳게 쓰였는지 판단해 보기 바랍니다. 

...(전략)...  국토해양부 해양개발과의 OOO 연구원에 따르면 좋은 물을 판별하는 기준은 크게 2가지, 즉 '유해요소가 없는지'와 '유익한 성분이 있는지'로 나뉜다. O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후략)


말이 좀 어렵죠? 이를 명제로 풀면,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 유익성분 있는 물 ⊂ 좋은 물)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 좋은 물 ⊂ 유해성분 없는 물)
즉,
유익성분 있는 물(P)  → 유해성분 없는 물(Q)

 

연구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P는 Q의 충분조건이고, Q는 P의 필요조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를 각각 따져보겠습니다. 좀 어렵더라도 찬찬히 읽으면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겁니다.

[P가 Q의 충분조건인지 따져보기]
연구원의 말대로, P가 Q의 충분조건이 되려면, P가 참일 때 항상 Q도 참이어야 합니다. P가 참인데도 항상 Q를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P는 Q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면(P), 항상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이라는 조건문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유익성분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도 있고 유해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성분이 들어있을 때에도 우리는 그 물을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성분을 파란색으로, 유해한 성분을 빨간색으로, 유익하지도 유해하지도 않은 성분을 노란색으로 표시해서 보면 금방 알 수 있지요.


위 그림과 같이 유익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파란색) 뿐만 아니라 유해성분(빨간색)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물을 유해성분이 없는 물이라 말해도 될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익성분이 있는 물'은 '유해성분이 없는 물'의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연구원의 말이 틀렸다는 소리죠.

[Q가 P의 필요조건인지 따져보기]
이번에는 반대로 따져보죠. 유해성분이 없는 물(Q)는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일까요? Q가 P의 필요조건이 되려면, Q가 참이 아닐 때 P도 항상 참이 아니어야 합니다. Q가 참이 아닌데, P가 참인 경우가 있다면 Q는 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그대로 대입해 보겠습니다. "유해성분이 없는 게 참이 아니라면(즉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면), 유익성분이 있는 것도 항상 참이 아니다(즉, 유익성분이 없는 물)"가 성립되어야 Q는 P의 필요조건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유해성분이 있는 물이라고 해서 유익성분(파란색)이 들어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의 왼쪽처럼 말입니다. 왼쪽 동그라미와 오른쪽 동그라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조건문은 거짓이고, 유해성분이 없는 물(Q)은 유익성분이 있는 물(P)의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유익성분이 있는 물과 유해성분이 없는 물 사이에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연구원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연구원의 말이 옳다고 해도 그 말을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언뜻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런 용어를 쓰지 않고서도 쉽게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게 의사소통의 오류를 줄일 수 있습니다. 연구원은 ""해로운 요소가 없는 깨끗한 물은 좋은 물의 필요조건이라면, 유익한 성분'만'이 함유된 건강한 물은 좋은 물의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어야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물이 되려면 반드시 유해성분이 없어야 하고, 거기에 유익한 성분까지 포함되면 더 좋은 물이다

" 이렇게 말해도 의미는 고스란히 유지됩니다. 게다가 듣는 사람들이 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해결사는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보고서를 쓰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가능한 한 이렇게 어렵고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용어를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의뢰인이 문제의 해결책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지, 의뢰인을 교육시키는 것이 문제해결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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