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데 왜 메신저로 대화하나?   

2008. 5. 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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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데 화면에 메시지가 톡 떠올랐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식사하러 가시지요."라고 바로 옆에 있는 컨설턴트가 메신저로 보내온 것이었다. 갑자기 실소(失笑)가 터졌다. 왜냐하면, "5분 후에 나가자." 라고 답신을 보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데 말로 하면 될 것을 굳이 메신저로 의사를 전달할 필요가 있었을까? 한참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 웃지 못 할 촌극이었다.

나 말고도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을 것 같다. 불과 몇 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직원들이 말로 하면 될 것을 이메일을 통해 업무보고를 한다고 씁쓸한 표정을 짓던 관리자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관리자는 나에게, "이메일로 보고하는 걸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대일 대화가 가능한데도 그런 걸 사용하는 이유는 '당신과 대화하며 괜히 나쁜 소리 듣기 싫으니 결과만 알고 있어라' 라는 편의적인 마음 때문 아니냐." 며 푸념을 한 적이 있다.

100% 공감이 간다. 이메일, 메신저, 그룹웨어, 지식경영시스템 등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매체는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매체들이 커뮤니케이션의 접근편리성을 증대시켰는지는 몰라도, 과연 조직 내 쌍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어느 회사든 진단을 해 보면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최소 50% 정도는 된다. 그 때마다 나는 '다 비슷하니까 다른 회사 보고서 슬쩍 베끼면 되겠네.' 라는 얄팍한 유혹에 솔직히 사로잡히곤 하지만, 첨단의 커뮤니케이션 도구 구축에 크게는 수십억 원을 들이고도 의사소통에 여전히 문제가 있다고 하소연하는 까닭이 도대체 뭔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얼마나 멋진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갖췄느냐가 아니다. 매체는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 메시지를 조직 내에 잘 통하게 만들어 주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런 도구들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진솔하며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일방적 통보와 지시로 오용될 수 있어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경직되게 만들어 버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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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자결재를 꽤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데, 결재요청을 올리고 나서 상사가 시스템에서 결재해주길 놀면서 기다리다가 제때 안 해주면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며 불평해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관리자는 관리자대로 시스템에서 결재하기 바쁘다. 대면 결재하면 금방 끝날 것을 말이다. 엄청난 낭비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의사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저쪽 부서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직원들이 경영진 생각을 잘 몰라준다며 불평을 쏟아내기 전에, 지속적으로 다른 부서의 업무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 직원들의 진짜 생각을 알기 위해 노력했는지 자문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도 노력이 있어야 잘 된다.

즉, 조직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에도 마케팅하듯 해야 한다. 정보 홍수의 시대다. 그래서 자기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받는 사람은 수많은 정보 중의 하나로밖에 여기지 않거나, 정보에 치여 미처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피드백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따라서 고객 대상으로 PR, 캠페인 등 갖가지 마케팅 전략을 실행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고 필요한 정보를 전달 받으려는 노력을 실천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하려면 대면 보고, 간담회, 워크숍 등 다양한 오프라인 활동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직접 대면하고 공감하는 만남을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패션을 따라가는데 급급하지 말고 초심으로 돌아가 원칙에 충실하라. 그것이 잘 통하는 조직으로 가는 첩경이다.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해결하고자 반짝이는 화면과 윙윙대는 서버로 된 시스템을 새로 들여올 궁리를 하고 있다면, 그 계획서를 과감히 찢어라. 살 뺀다며 비싼 러닝머신을 사 놓고 몇 번밖에 안 뛰어 보고는 왜 살이 안 빠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식의 오류를 더 이상 범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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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를 잃은 리더, 이명박   

2008. 5. 6.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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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 때문에 진시황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비운의 사상가 한비(韓非). 그가 쓴 '한비자'란 고전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진나라 문공(文公)이 위(衛)나라의 원(原)이라는 곳을 공격하기로 했을 때, 10일 안에 성을 함락할 테니 10일치의 식량을 준비해 달라고 대부(大夫, 귀족)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약속한 열흘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문공은 대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군사들에게 후퇴를 명했다.

부하들은 동요하며 이렇게 말했다. "사흘만 시간을 더 주면 충분히 함락할 수 있습니다. 원은 지금 고립됐기 때문에 식량 부족으로 얼마 못 견딜 겁니다. 그러니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문공은 "나는 대부들과 10일의 기한을 약속했다.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시간을 더 지체한다면 나는 신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을 못 얻더라도 신의를 잃진 않겠다." 라고 말하면서 병사들을 모두 물리고 떠났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위나라 사람들은 "문공처럼 신의가 있는 군주라면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며 문공에게 순순히 항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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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

국민들은 신의를 지키는 리더를 따르며, 신의를 저버리는 리더는 국민으로부터 언젠가 버림을 받는다는 걸 이 고사는 엄중히 시사한다.

이명박 대통령, 그는 어떤가? 그는 과연 신의를 지키는 지도자인가? 후보자 시절, 자신이 BBK를 설립했다는 비디오가 만천하에 공개됐을 때 나는 차라리 그가 떳떳하게 자신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용서를 빌기를 바랬다. 그랬다면 대통령이 되어서 국민과의 신의를 지키겠다는 맹세로 인정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척 하면서 발언 내용 중 '나'라는 주어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비겁한 변명에 급급했다.
 
이번 광우병 소 수입에 관한 일련의 사태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과연 신의를 지키는 리더의 모습인가? 노무현 정권이 진행했던 일을 '설겆이'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그를 국민이 믿고 따를 리더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게 진정 사실이라 할지라도, 리더로서 신의 있는 태도가 아니다.

이의관이란 사람이 쓴 '왜 이명박인가'라는 책을 보면 목차에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인물'이라고 나와 있다.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인물'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아래 도서 정보 참조). BBK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뽑아 줬으니 광우병 거짓말 쯤은 아무 것도 아닐거라 생각하는지 참으로 우려스럽다.

왜 이명박인가(신화는 있다) 상세보기
이의관 지음 | 지성문화사 펴냄
서울의 명물이 되어 버린 청계천. 결코 우연이 아닌 이 청계선 신화의 주인공은 개혁의 상징인 전 서울특별시장 이명박이다. 저자는 그를 작은 나라지만 강한 국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인물, 온 국민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선사할 21세기를 여는 영웅이라고 표현한다. 먼저 지도자란 누구인가를 시작으로 지도자의 조건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명박 전 서울특별시장에 대해 시대의 패러다임을 아는 인물, 매사에 앞장 서는 인물


국민을 기만하고 깔보는 정부. 그리고 여론 조작과 기사 거르기를 일삼는 조/중/동을 위시한 어용 언론들. 그들에게 맡겨진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타닉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빙산을 향해 돌진하고 있진 않은가? 혹 우리의 리더는 '선장'의 책무를 망각한 채 자신이 탈 구명보트의 밧줄을 풀고 있진 않은가?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취임한 지 2개월 남짓 밖에 안 된 정권 초기에 탄핵론이 불 붙은 이유를 단지 몇몇 불순분자의 선동에 바보 같은 국민들이 호도된 탓이라고 보는가? 과연 이게 그대가 말한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는' 자세란 말인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잘못된 정책과 협상을 바로 잡음으로써 국민을 섬기겠다는 처음의 다짐을 몸으로 실천하라. 진나라 문공이 신의를 지킴으로써 세상을 얻었다는 옛 교훈을 부디 2MB의 메모리 속 깊이 새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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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있는 동전을 살려라   

2008. 5. 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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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한번쯤 이런 기억이 있을 겁니다. 빨간 돼지저금통에 10원짜리, 100원짜리를 넣을 때 짤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 돼지저금통이 다 차면 '맛난 것을 먹어야지, 어디에 놀러 가야지' 하며 설레이던 때가 누구나 한번쯤은 있겠죠.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10원짜리도 꽤 유용한 돈이었습니다. 웬만한 과자 하나는 쉽게 살 수 있었으니까요. 100원짜리 몇개만 있어도 하루 종일 먹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어릴 적 동전은 그 소유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풍요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자 하나 사먹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미래의 작은 꿈을 위해 고사리같은 손으로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곤했죠.

그런데 요즘은 10원짜리는 어디가나 푸대접을 받습니다. 50원짜리, 100원짜리도 마찬가지죠. 그나마 대접받는 것은 500원짜리인데 그것도 점점 그 효용가치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버스나 지하철도 500원짜리가 두 개는 있어야 탈 수 있으니까 말이죠. 요즘 은행에서는 자기네 고객이 아니면 동전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기껏 돼지저금통에 열심히 동전을 모아서 은행에 가면, 옛날엔 '저축을 열심히 하는 분이군요'라는 찬사(?)를 받았었지만, 요즘엔 은행원의 차가운 시선을 안 받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몇년 전, 나는 집구석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는 동전을 모두 모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상상 외로 그 액수가 크더군요. 자그마치 5천 3백 4십원이었습니다. 그 만큼의 돈이 우리집 구석구석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집안 곳곳에 숨어있는 동전을 찾아보세요. 애들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동전, 화장대 서랍 속에 잠자는 동전 모두를 말입니다. 만일 돼지저금통으로 동전을 저금하고 있다면 그것도 포함시켜서 모두 얼마나 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몇천원 쯤은 족히 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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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연합뉴스


'돈'이라는 말은 '돌고 돈다'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진 5천3백4십원의 돈은 돈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겁니다. 돈은 유통이 되면서 효용을 창출하고 교환되어야만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5천3백4십원의 돈을 잠재웠을 때의 효용은 '0'이지만, 나의 생활 속에서 유통시켰다면 적어도 5천3백4십원 만큼의 효용을 발생시킵니다. 효용을 발생시키지 않는 '죽은 돈'은 가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로 봐서도 '손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돼지저금통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전도 죽은 돈입니다. 물론 나중에 돼지를 잡을 때쯤 제법 많은 돈이 쌓여 있어서 그것으로 더 큰 효용을 위해 쓰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돼지저금통을 은행에 가지고 가면 차가운 시선만 받을 뿐입니다. 집에서 잘 저축했다고 이자를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동전을 집에 잠재우고 있는 것은 막대한 손실입니다. 10원짜리 하나 만드는데 원가가 10원이 넘는데 그것들이 유통되지 않고 집안 곳곳으로 숨어 들어가니 그만큼의 돈을 다시 찍어 내느라 손실이 큰 것이죠. 국민 1인당 잠자고 있는 있는 동전의 액수가 1000원만 된다고 가정해도 4천8백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국가적 손실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전은 이제 저축의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습니다. 즉, 이제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차곡차곡 모으는 일은 아이들에게 저축하는 습관을 길러 준다든지, 우리가 어릴적 추억을 떠올려서 재미삼아 해본다든지 등의 의미 밖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동전을 별 생각없이 모아두거나,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지 말고 잘 써야 하지 않을까요? 동전을 집안에 잠자고 있게 하지 말고, 들어오는 즉시 잘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동전을 마구 써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요지는, 동전은 절대로 방치하거나 많이 모아두거나 하지 말고 효용가치가 발생할 수 있도록 제때제때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전을 써버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마시고 싶지 않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동전이 쓰여야 할 곳에 잘 쓰자는 것이죠.

그 동전의 액수가 얼마정도 된다고 이렇게 호들갑이냐, 라고 하실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식당의 밥 한끼 값이 얼만데, 하시며 동전을 세고 있는 사람의 '짠돌이' 행각에 비웃음을 던지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생활 습관을 조사한 글에서 보면, '작은 돈을 잘 쓴다'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활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작은 돈이라도 '죽어있거나', '별 이유없이 빠져나가는' 것에 대해 아주 민감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들은 '큰 돈'만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돈'을 더 잘 다루고 있습니다.

얼마 전 서점에서 책을 샀는데 점원이 책과 함께 플라스틱 캔 모양의 저금통을 함께 주더군요. 그 저금통을 이리보고 저리 돌려보니, 그 안에 동전을 모으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빈 저금통으로 남겨 두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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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푸르구나   

2008. 5. 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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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5월 5일, 참 푸른 하루였다. 내 사진이 그걸 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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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화로 풀지 마라   

2008. 5. 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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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살던 집의 시세가 오르자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팔고서 교외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학원은 옮겨가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서 계속 운영했다.

그런데 집을 팔자마자 시세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몇 천 만원씩 오르더니 급기야 자신이 판 금액의 두 배 가까이 육박하고 말았다. 이사를 갔으니 떨어지든 말든 잊어버리면 그만이었겠지만, 학원 때문에 자신이 판 아파트 시세의 변화를 가까이서 목도할 수 있었던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학원으로 가다가 팔아 버린 아파트를 볼 때면 가슴이 방망이질 치면서 숨쉬기 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가곤 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기에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내린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퍽퍽한 가슴만 내리 칠 수 밖에 없었다. 한 두 푼도 아니고 몇 억원의 돈이 순간의 판단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자기학대로도 화를 이겨내기 어려웠다.

여자의 성격은 점점 포악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났다. 집안 일이고 학원 일이고 모두 귀찮았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이유야 상관없이 소리부터 질러댔다. 가슴 속의 화가 활활 타오르다 보니 애꿎은 아이들에게로 자신의 화가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변한 걸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라도 벅벅 질러야 화가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다혈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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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화를 풀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든, 타인 때문에 화가 나든 간에 참지 말고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화는 풀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푼다'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곤 한다.

화가 난다고 해서 그 화를 남에게 전이시키거나 되갚아 주는 것, 즉 나의 화를 '풀어해치는' 방법은 옳지 않다. '내가 화났으니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가만히 안둘 테야' 혹은 '네가 날 화나게 만들었으니까 나도 널 화내게 만들겠다'며 화를 있는 그대로 앙갚음하는 것은 화를 푸는 방법이 아니다.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샌드백을 대신 두들겨 패거나, 상관없는 이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화가 줄어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들은 오히려 자신의 화를 증폭시키고 스스로를 모난 인간으로 변하게 만들 뿐이다.

위에서 말한 그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제3자에게 화를 내는 행동을 취했겠지만, 그것으로 화의 근원을 치유할 수 없다. 남에게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화를 풀다보면 처음 한 두 번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겠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차츰 익숙해지면서 일상이 된다. 그리고 어느덧 자신의 성격은 괴목처럼 비뚤어진 모습으로 굳어진다.

화는 화로 풀어서는 안 된다. 불 난 집에 불씨를 던져 넣는다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 불은 물로 끄는 게 상식이다.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화는 '자각(自覺)'이라는 물로 꺼뜨려야 한다. 가슴 속에 화가 일렁이면 그것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려는 감정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화를 마치 내것이 아닌 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나를 화내게 한 사람으로부터, 혹은 화가 발생한 물리적 장소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에 잠겨보라. 깊은 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도 좋다. 화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내가 힘든 것이 무엇인지, 나를 화 나게 한 사람(자신 또는 타인)의 지금 상태는 어떨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의 화가 어떻게 변할지 등을 제3자가 되어 찬찬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본다. 그렇게 자각하는 '냉각기'를 거치면 그전보다 화가 엷어진 게 느껴지고 용서할 마음이 생겨난다.

그런 다음,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껴보라. 내 행복의 크기가 화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어선 안된다. 행복은 누구에게서 주어지거나 누구로부터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는지에 달렸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자각할수록 화 따위는 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녀가 비록 수 억원의 돈을 물거품처럼 날렸다고 해도, 소중한 가족인 남편과 자녀들은 변함없이 그녀와 함께 숨쉬고 있질 않은가? 수 억원의 행운을 받게 된다고 해서 가족의 불행을 댓가로 치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노여워하고 괴로워하기 전에,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먼저 깨닫는 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를 잠재우는 방법이다.

화가 나면 감정의 노예가 된다. 노예가 되면 자신의 삶을 노예의 삶 이상으로 결코 만들 수 없다. 화가 나면 자신이 화를 다루는 주인임을 자각하라. 화가 주인 행세를 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 자각하고 명상하는 것이 화를 올바르게 푸는 방법이고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자신 또는 타인)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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