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두컴컴한 새벽, 오른손이 내 가슴위에 올라서서 내머리를 흔들어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이야. 아직 일어나려면 멀었다구. 봐, 아직 깜깜하잖아."
"물론 나도 그쯤은 알아. 하지만, 난 지금 자네에게 할말이 있고,
또 그말을 지금 당장해야만 해."
"뜬금없이 무슨 말?"
"작별인사야."
나는 아직 멍한 눈을 비비며 상체를 약간 일으키며 놀란듯 말했다.
"작별인사?"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자네가 재미없어졌어. 난 자네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자네는 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구.
하다못해 은반지로 날 위로해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자네는 날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구. 난 날 아름다운 보석과 귀금속으로 장식해줄
사람을 찾아 떠날거야."
오른손은 검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긁으며 말했다. 무언가 결연한 행동을 눈앞에 둘때 그가 하는 버릇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군.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도 자네에게 늘 미안했어.
군말은 않겠네. 잘 가게."
"자네에게 딱 한가지 마음에 드는 점은 말야,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는 털 끝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야.
자네는 나름대로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아가고 있어. 그 점만큼 존경하고 있다구."
그래, 오른손의 말처럼 난 쉽게 포기하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웠다. 딱히 그럴려고 그런 것은 아닌데 어느새 나는 인생과 그것을 존재하도록 발을 구르는 힘과의 조절레버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뭐, 그런 것이다.
"고맙네. 부디 자네에게 꼭맞는 아름답고 화려한 삶이 되길 빌겠네."
나는 나의 왼손을 내밀어 오른손과 악수를 나눴다.
"잘 있어."
"잘 가."
오른손은 1년 전에 떠나버린 그녀의 손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창 밖 어둠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나는 바로 조금전까지 오른손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섞여있는 어둠이 그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었다.
나는 조금 슬퍼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누구나 그런 것이다. 누구나 누구에게로부터 떠나려고 하고, 누구나 누군가를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이다. 슬픔때문에 삶의 기력을 낭비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 나에겐 그렇다.
나는 지금 왼손하나로 이글을 쓰며 왼손을 바라본다. 왼손은 떠나버린 오른손때문에 슬픈 모양이다. 내내 말이 없다. 언젠가 왼손마저 떠나버릴 날이 오겠지. 그리고, 나의 다리, 팔, 심장, 입술, 성기마저도. 그들은 나로부터 떠날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마다 슬퍼하거나 또는 절망하지 않기를 그저 다짐할 뿐이다.
나는 정말이지 떠나 버린 오른손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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