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터스가 올리브를 못 살게 굴 때마다 뽀빠이는 깡통에 든 시금치를 입에 털어 넣고는 부르터스를 번쩍 들어서 바다 속에 내다 꽂는다. 그런 다음 뽀빠이는 시청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시금치를 먹으면 힘이 세진다는 뽀빠이 아저씨의 말씀~~!"
시금치는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 야채보다 철분 함량이 10배나 높다고 해서다. 하지만, 시금치는 배추나 브로콜리 같은 야채보다 오히려 철분 함량이 낮다. 물론 시금치를 먹어서 나쁠 것은 없지만, 먹는다고 해서 다른 채소보다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시금치를 먹는다고 해서 뽀빠이처럼 힘이 불끈 솟아오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만화의 이야기일 뿐이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시금치의 영양학적 효능이 실제보다 과대하게 평가된 이유는 어이 없는 실수 때문이라고 한다. 시금치의 영양 성분을 연구하던 과학자의 비서가 논문을 타이핑할 때 소수점을 한 자리 오른쪽에 찍었다. 예를 들어 0.052% 라고 해야 할 것을 0.52% 라고 잘못 기재한 것이다. 시금치가 다른 야채들보다 10배 이상 철분이 많다고 오해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
또 '말린' 시금치를 가지고 영양 성분 분석을 했기 때문에 철분 함량이 높게 나왔다는 설도 있다. 시금치는 약 90%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말린 시금치로 영양 분석을 하면 실제보다 철분 함량이 10배나 더 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시금치 때문에 건강해진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뽀빠이 덕에 판매가 신장된 시금치 판매상일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과 부모들은 시금치를 먹고 먹이느라 스트레스만 더 쌓였을 거다. 이처럼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 당연히 그렇다고 별 의심 없이 받아 들이고 있는 것들 중 상당히 많은 것들이 실제와 다른 경우가 많다.
어떤 사실을 '안다'라고 말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번째 조건은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 + 1 = 2 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려면, 답이 2임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물을 믿지 않고서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을 알려면,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을 것을 먼저 믿어야 한다. 시금치가 몸에 좋다는 걸 믿지 않고는 감히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다. 앎의 두번째 조건은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 + 1 = 2 라는 식을 증명해서 참 또는 거짓의 여부를 판단해야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신이 존재함을 안다'라고 말하려면 일단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증명을 해야 한다.
증명이라고 말하면 수학이나 과학과 같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판단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증명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먼저 수학과 과학으로 증명 가능한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좋다. 수학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미신이나 신화를 먼저 끌어들여서는 안된다. 시금치가 철분이 많아서 몸에 좋다고 '그냥 믿기' 전에, 정말 그러한지를 과학적으로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수학과 과학만으로 모든 걸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믿는 바를 조리에 맞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서 나와 공감대를 형성하도록 만들면 그것이 바로 증명이다. 비록 어떤 사실이 진리라 할지라도 '내가 믿으니까 너도 그냥 믿어라' 식으로 협박한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시금치가 건강에 좋다는 걸 안다고? 그걸 믿을 수는 있겠지만, 본인이 직접 증명하지 않았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증명되지 않은 거라면 '안다'라는 말을 거둬야 한다.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려면, 내가 그것을 믿고 그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증명은 했는데 믿기가 어렵다면 우리는 그걸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1 + 1 = 2가 참임을 증명했는데도 그게 미덥지 않다면, 역시나 그걸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여러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걸 믿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위대한 과학자인 그가 왜 그랬을까?
왜냐하면 '안다'는 말은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1 + 1 = 2임을 안다면, 믿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생기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거부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있어 그의 '앎'의 수준은 양자역학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처럼 수동적이며 정적인 행위가 아니다. 앎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이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수 있어야 눈으로 읽는 글과 귀로 듣는 말이 전적으로 앎의 세계로 들어와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귀에 들리는 대로 믿고 수용한다면, 우리는 절대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때문에 불쌍한 아이들은 오늘도 시금치를 먹지 않기 위해 매 끼니마다 부모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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