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足]보다 숫자가 더 정확하지!   

2008. 5. 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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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 분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 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고 말하면, 그 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하고 감탄한다.

직원들의 스킬 수준을 파악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스킬을 중심으로 교육계획을 수립하겠다는 니즈를 가진 회사가 있었다. 개념적으로는 옳은 접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수준이 떨어지는’ 스킬을 파악하는 기술적인 방법에서 불거져 나왔다.

그들은 반드시 경쟁사 직원들과 역량 수준을 반드시 숫자로 바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그 차이가 큰 것부터 우선적으로 교육계획에 잡을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도대체 경쟁사 직원들의 스킬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 TOEIC과 같은 공인시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점수로 어떻게 측정할 수 있단 말인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내가 난색을 표하니 그들은 ‘전문가니까 그런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 는 말로 내 반론을 가볍게 묵살했다.

다른 회사의 사례. 어느 날, 모회사의 신입사원 교육현장을 보게 되었다. 임원과의 간담회 시간에 직장인으로서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임원은 말끝마다 “숫자로 이야기하지 않는 직원들의 보고는 받지 않는다. 신입사원 여러분은 항상 숫자로 이야기하라.” 라고 1시간 내내 강조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숫자가 뭐기에?

의사결정시 숫자가 주는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사안이 중요할수록 숫자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수용성을 높이는 힘도 가지고 있다. 또한 숫자는 상대방에게 ‘생각의 고통’을 주지 않는다. 숫자로 얘기하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숫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기법을 주제로 한 각종 책이나 강좌에서는 최대한 숫자화할 것을 제 1 규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숫자가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간편성을 높인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숫자에 대한 맹신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숫자는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크다. 인력채용에 있어 우수인재확보율을 관리하는 회사가 늘고 있는데, 그 기준이 기껏해야 출신학교나 학점수준 등에 불과하다. 명문대 출신을 몇 명 뽑았다는 그래프를 보고 인사담당자는 뿌듯해 한다. 그러나 좋은 학교, 높은 학점이 직장 내에서의 우수한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숫자는 조작이 쉽다. 모 회사 공장은 납기단축을 목적으로 성과지표(KPI)로 ‘입고 후 출고시간’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지표는 항상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납품은 여전히 늑장이었다. 알고 보니, ‘입고 후 출고시간’을 임시창고에 완성품을 갖다놓는 시점까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납기의 문제는 물류에 있었으나, 공장 측은 문제를 숨겨보려 출고 시점을 조작한 것이었다.

셋째, 숫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로 막는다. 갓 생각해 낸 새로운 아이디어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숫자로 덜 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인력과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이디어의 결과로 나오는 산출물이 회사의 수익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숫자로 정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에 집착하는 이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상사가 ‘숫자 킬러’라면 부하직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숫자의 기세에 눌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다.

숫자는 강력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숫자는 매우 취약하기도 하다. 숫자를 잘 관리하라는 말은 ‘뭐든지 숫자로 측정하고 표현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숫자로 잘 표현하고, 정성적 측면이 더 큰 의미가 있다면 숫자화시켜 의미를 상실케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중국 정나라 때 한 남자가 신발가게에 와서 자기 발 치수를 적은 종이쪽지를 집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았다. 당황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쪽지를 가져왔지만, 신발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친구가 물었다. “아니, 발이 있는데 종이쪽지가 왜 필요한가?” 그러자 남자가 당연 하다는 듯 대답했다. “발보다야 숫자가 더 정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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