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잘 아는 팀장이 나를 잘 평가할까?   

2014. 10. 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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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상사로 모시고 있는 팀장이 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회사 사정상 그 팀장이 여러분의 역량과 업적을 평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마도 ’팀장님이 나에 대해 얼마나 아실까? 그 분이 정말 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마음 속에서 크게 자라날 겁니다. 같이 근무한 기간이 길고 친밀해야 ‘나의 특성’을 잘 파악할 수 있고 ‘나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친밀할수록 나를 잘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다면평가 시에 종종 불거지는 ‘나를 잘 모르는 동료가 나를 평가하는 문제’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헌데 과연 그럴까요? 나와 함께 한 시간이 길수록 나를 잘 알까요? 오랜 기간 함께하며 친밀해질수록 상대방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추구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믿음은 과연 옳을까요? 상사와의 친밀도와 평가의 정확성을 측정한 실험이 있으면 안성마춤이겠지만(혹시 아시면 귀띰해 주세요), 텍사스 대학교의 윌리엄 스완(William B. Swann, Jr.)과 마이클 길(Michael J. Gill)이 연인들과 기숙사 룸메이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실험을 통해 이 질문의 답을 간접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스완과 길은 연애기간이 최소 3주에서 최대 312주에 이르는 57쌍의 연인들을 서로 다른 방으로 안내한 다음 특성이나 능력, 성적 취향, 흥미 등을 묻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를 들어 참가자들은 본인의 자존감, 지능, 사회적 스킬, 예술적 능력, 매력, 운동 경기에 대한 열정 등과 같은 항목에 자신이 얼마나 동의하는지를 질문 받았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방 청소, 술집 가기, 보드게임하기 등과 같은 활동을 본인이 얼마나 즐기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서 적어야 했습니다. 옆방에 있는 파트너는 참가자가 각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를 예측하고 그런 예측이 맞을 확률을 0에서 100까지의 숫자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스스로의 판단을 확신하는지 알기 위함이었죠.


그 결과, 연인들은 어림짐작으로 맞힐 수 있는 수준보다 높은 정확도로 상대방의 생각을 예측했습니다. 예를 들어 파트너의 자존감에 대해서 ‘찍어도 맞힐 수 있는’ 확률은 20%였는데 연인들은 44%의 정확도를 보였고, 파트너의 자질에 대해서는 어림짐작 수준인 20%보다 높은 30%의 정확도를 나타냈습니다. 이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나와 친밀한 사람이 나를 잘 안다’는 명제가 ‘어느 정도 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잘 안다’는 자신감이 과도했다는 것입니다. 파트너에 대해 ‘실제로 알고 있는 정도’보다 ‘알고 있다고 믿는 정도’가 더 높았으니 말입니다. 자존감을 묻는 질문에 연인들은 44%의 정확도를 보였지만 ‘나의 예측이 맞다’라고 확신한 정도는 82%나 됐습니다. 연인 관계가 아니라, 같은 기숙사방에서 함께 생활한 룸메이트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더 흥미로운 결과는 후속 실험에서 나왔습니다. 스완과 길은 사귄 기간과 예측의 정확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고, 오히려 사귄 기간이 길수록 파트너를 잘 안다는 ‘과신’의 정도가 커진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 결과는 함께 한 시간이 길다고 해서 상대방을 더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니라는 점, 사귄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점을 꼬집어 줍니다.


서두에 밝혔다시피 연인들을 대상으로 한 스완과 길의 연구를 상사와 직원 관계에 직접적으로 대입할 수는 없겠지만, ‘나와 오래 근무한 팀장님이 날 잘 평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틀렸을지 모른다고 추측케 합니다. 심리학자 케네스 새비스키(Kennethe Savitsky)는 공동 연구자들과 함께 이런 편향을 ‘친한 사람과의 소통 편향(the closeness-communication bias)’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했기 때문에 눈빛만 교환해도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경우가 분명 있지만, 이와 반대로 서로 잘 안다고 확신하는 탓에 오히려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방을 편향적으로 판단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새비스키는 말합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한 기간이 짧은 사람이 날 평가해서는 안 된다’라는 일반적인 믿음도 의심할 필요가 있겠죠. 새로 온 팀장이 나의 능력을 더 올바르게 평가할지 모르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모시고 있는 팀장 혹은 임원과 오랜 시간을 함께 근무 중이라면, 그가 여러분을 얼마나 정확히 평가하고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기 바랍니다. 의외의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까요?




(*참고논문)

Swann Jr, W. B., & Gill, M. J. (1997). Confidence and accuracy in person perception: do we know what we think we know about our relationship partner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3(4), 747.


Savitsky, K., Keysar, B., Epley, N., Carter, T., & Swanson, A. (2011). The closeness-communication bias: Increased egocentrism among friends versus strangers.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47(1), 269-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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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타적일까, 이기적일까?   

2014. 10.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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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려운 질문을 던져야겠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일까 아니면 이타적일까? 이 질문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사이에 두고 오래 전부터 수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벌여온 논쟁과 비슷한 논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기적인 존재로 보느냐 이타적인 존재로 보느냐에 따라 인간을 대하고 다루는 방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극대화하려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인간을 규정한다면, 그 이기심이 조직과 사회의 안녕을 해치지 않게 유도하고 나아가 시너지를 구축하도록 만들려면 통제와 명령으로 인간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당위성을 갖는다. 반면, 타인을 돕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인 받고 보호 받으려는 존재로 인간을 바라본다면,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존중하고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려는 내적 동기를 극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는다.



출처: daddytypes.com



인간이 이기적인지 이타적인지에 관한 논쟁을 이 짧은 칼럼에서 다루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아와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한  펠릭스 바르네켄과 마이클 토마셀로의 연구 결과를 들여다 본다면 이 오래된 질문의 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네켄과 토마셀로는 17~18개월 정도의 유아 24명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간단한 과업을 수행했다. 그들은 어른 남자가 일부러 펜이나 빨개집게를 떨어 뜨리고 손에 안 닿는 척 하거나,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있어서 캐비넷 문을 열지 못하는 척 하거나, 또는 책을 쌓다가 실수로 책을 미끄러뜨렸을 때 유아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관찰했다. 


모두 10가지의 과업을 수 차례 실험한 결과, 유아들은 10회 시도할 때마다 5.3회 꼴로 남자를 도와주는 행동을 보였다. 분석해 보니 24명 중 22명의 유아들이 적어도 한 번 이상 남자를 도왔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긴 했지만 어떤 유아가 항상 남을 돕는지, 또 어떤 유아가 절대로 남을 돕지 않는 이기적인 성격을 지녔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바르네켄과 토마셀로는 비슷한 실험을 세 마리의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침팬지는 인간과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유인원이고 유전자의 98퍼센트 이상을 공유하기에 이타성의 본류를 확인하는 데에 좋은 실험 대상이다. 침팬지에게도 모두 10가지 종류의 과업을 실시했는데, 실험자가 테이블을 스폰지로 닦다가 일부러 떨어뜨리고 집어올릴 수 없는 척 하거나, 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있어서 바닥에 있는 물건을 치우지 못하는 척 하거나 했다. 그랬더니 유아를 대상으로 했을 때와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 비록 유아들보다는 도와주는 회수가 적었지만 침팬지들은 도움이 필요한 실험자를 제법 자주 도왔다.


바르네켄과 토마셀로의 실험은 인간이 남을 도우려는 이타심을 타고났을 거라 짐작케 한다. 이타심이 발현되는 이유가 사회로부터 배척 당하지 않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또는 ‘이기적 유전자’ 관점에서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 가능성을 높이려고 숙주인 인간을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조종하는 것이라 말한다 해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대가 없이 타인을 도우려는 심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연구 하나만으로 논쟁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긴 하다.


심리학자이자 경영학자인 더글러스 맥그리거는 ‘조직의 구성원들을 대하는 관점’을 ‘X이론’과 ‘Y이론’이라는 말로 구분했다. X이론은 직원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통제해야 하고 동기가 사라지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기에 바른 길로 가도록 끊임없이 동기를 불어넣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통제와 규율, ‘당근과 채찍’을 통한 경쟁을 강조한다. 반면, Y이론은 직원들이 스스로 성취감과 자아실현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솔선하며 자율적인 책임 하에 목표에 헌신한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Y이론 하에서는 자유와 창의, 협력과 상호존중을 가치로 삼는다. 바르네켄과 토마셀로의 실험 결과는 Y이론을 지지하는 하나의 증거다. 인간은 본디 이타적이고 선한 존재이므로 자율을 부여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할 경우 최고의 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길임을 보여준다. 당신은 이기적인가, 아니면 이타적인가?



*이 글은 월간 <샘터> 10월호의 <과학에게 묻다> 코너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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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페이스북을 허용해야 하는 이유   

2014. 10. 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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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컨대 여러분은 십중팔구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보다가 제목에 흥미를 느껴 이 글을 보게 됐을 겁니다. 처음부터 이 글을 검색해서 읽었다기보다 분명 심심풀이로 혹은 강도 높은 업무에서 잠깐 해방되고자 SNS를 아무 생각없이 훑어보다가 이 글을 발견했겠죠. 여러분의 상사 혹은 동료들은 일은 하지 않고 SNS나 들여다 보고 있는 여러분을 한심스럽게 바라보거나 나중에 싫은소리 좀 해야겠다고 마음 먹을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인터넷을 하릴없이 서핑하는 것(cyberloafing, 사이버로핑)이 업무의 생산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많은 기업들은 회사 인터넷을 통해서는 SNS(혹은 유튜브 등 엔터테인먼트 용도의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도록 막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업무에 몰입할 것을 직원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합니다.





하지만 멜버른 대학교의 브렌트 코커(Brent L. S. Coker)는 그 반대라고 주장합니다. 코커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과도하게 이용하지 않고 업무를 하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5분 정도 한다면(Workplace Internet Leisure Browsing, WILB), 오히려 생산성이 9%나 올라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코커는 458명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모니터 화면에 검은 선을 보여 주고 그보다 짧은 선이 나타나면 키보드를 누르는, 집중력을 요하는 과제를 10분 동안 수행하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참가자들을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휴식의 방식과 조건을 달리했습니다.


1 그룹 : 페이스북 즐기기

2 그룹 : 인터넷으로 의료보험회사들을 서로 비교하기

3 그룹 :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쉬기

4 그룹 : 쉬지 않고 다시 과제 수행하기


이런 식으로 4회에 걸쳐 과제를 수행하고 나서 참가자들이 키보드를 누른 ‘반응 시간’을 살펴보니, 과제 수행 중간중간에 5분씩 페이스북을 즐긴 1그룹의 반응시간이 가장 빨랐고 그런 상태가 끝까지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반면, 나머지 그룹의 참가자들은 첫회 때는 1그룹과 마찬가지로 반응시간이 짧았지만 2회 때부터는 반응시간이 곧바로 길어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아래 그래프 참조).



출처: 아래에 명기한 논문



이렇게 집중력을 요하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중간중간에 페이스북을 즐기는 것이 오히려 생산성에 도움이 된다는 증거가 나타났지만, 코커가 268명의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해보니 30세 이하의 젊은 직원들은 인터넷 서핑이 업무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답한 반면, 30세가 넘는 직원들은 그 긍정적 효과에 동의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코커의 연구는 업무를 하는 동안 짧게짧게 페이스북을 하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물론 일보다 SNS 활동이 과도하다면 당연히 제재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일정 시간 내에서 자유롭게 인터넷 서핑을 용인하는 것이 직원들의 의지력(willpower)를 유지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때문에 ‘접속 불가 사이트’를 만들어 놓은(혹은 만들 생각을 가진) 기업들은 정말로 생산성을 위한 조치가 무엇인지 숙고하기 바랍니다.



(*참고논문)

Coker, B. L. (2013). Workplace Internet leisure browsing. Human Performance, 26(2), 11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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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자아에 대하여   

2014. 10.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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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페이스북 등 SNS에 남긴 저의 짧은 생각들입니다. 이번엔 양이 얼마 되지 않네요. 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따뜻한 하루 되세요.



[진정한 자아에 대하여]


- 진정한 자아란 없다. 지금의 나가 바로 진정한 자아다.


-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는 주체는 누구일까? 바로 지금의 '나'다. 지금의 '나'가 진정하지 않다면 진정한 자아를 찾은들 그게 진정하다 말할 수 있을까? 고로, 진정한 자아란 허상이다.


- 진정한 자아는 저기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냉정히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다.



출처: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마스다 미리, 이봄, pp 105.



[의사결정의 시간에 대하여]


다음 의사결정의 단계 중 가장 시간이 많이 드는 단계는?


(1) 정보 수집

(2) 이슈 분석

(3) 대안 도출

(4) 대안별 비용 효과 분석

(5) 최적 대안 결정


(답) 위에 답 없음. 정답은 "대기 시간"



[기타]


- 이타주의가 이기주의에서 비롯됐다는 말처럼 어이없는 말도 없다. 이타주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 Top 5 MBA 출신들(혹은 훌륭한 컨설턴트)이 훌륭한 경영자가 될 거라는 믿음은 훌륭한 미술 평론가가 훌륭한 화가일 거라는 믿음과 다를 바 없다.


- 잘 하려고 하면 자주 못하는 법이고, 자주 못하면 습관(또는 실력)이 되지 못한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잘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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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제가 피터 센게의 경영학 고전 <제5경영>의 개정증보판인 <학습하는 조직>의 감수를 하고 나서 쓴 '감수의 글'입니다. 이름만 거는 일부 감수자들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을 매우 꼼꼼하게 감수했다고 자부합니다(감수하는 데에 1개월 반이 소요되었는데, 매끄럽게 읽히고 이해가 쉽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 책은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경영자와 관리자라면 꼭 읽어야 하는 필독서입니다. 시스템 사고 없는 의사결정이 어떤 문제를 야기했는지를 절감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문제해결의 빛을 비춰줄 겁니다.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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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무렵, 동료 컨설턴트가 좋은 책이라며 이 책의 초판인 <제5경영>을 나에게 건넸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랬다. “책 제목이 왜 이래?” 기존의 경영방식을 반성하고 새 길을 제시한다는 의미로 ‘제2의 경영’이라는 말은 있을 법했지만 ‘제5경영’이라니! 나에겐 ‘적국에 있으면서 외부세력과 연동해 간첩 활동을 수행하는 집단’인 ‘제5열’이란 단어를 연상시키는 제목이라서 페이지를 들쳐볼 동기가 별로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컨설팅 프로젝트가 ‘시스템 다이내믹스’라는 툴을 사용해야 했고, 이 책의 초판이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기본 개념을 잘 정리한 책이라는 동료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했던 기억이 있다.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나치게 이상적인 경영철학을 이야기할 줄 예상했던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시스템 사고의 정수에 빠져들고 말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합리적으로 내린 결정이 어떻게 시스템 전체로 볼 때 엄청난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도식화하여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특히 ‘맥주 게임’을 통해 시스템 사고를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주 단위로 설명하는 부분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정에만 집중하고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가히 이 책의 압권이라 불릴 만하다. 의사결정을 잘못해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가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주 단위로 벌어지는 사건을 일일이 따라가기가 조금 버거울지라도 ‘맥주 게임’ 부분은 반드시 읽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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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판은 내가 <시나리오 플래닝>을 쓸 때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환경에서 흘러다니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런 영향이 어떤 결과로 치닫는지를 예상하는 ‘미래 시나리오’ 작성에 시스템 사고는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미래 시나리오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 내린 결정이 시스템 전체에 미칠 영향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는 데에 이 책이 훌륭한 처방전이 될 것이다. 


개정판 번역을 감수하면서 다시금 책을 꼼꼼히 읽어보니 초판에서 사용한 ‘제5경영’ 혹은 ‘제5의 분과학’이란 말은  곧 ‘시스템 사고’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분과학들’이라는 알듯 모를듯한 단어는 결국 학습조직이 준수하고 마스터해야 할 ‘5가지 규율들’이란 뜻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초판을 읽은 독자들에게 ‘학습조직’이란 말은 조직 내에 독서 모임, 지식 동아리 등을 만들어 운영하는 조직이라는 뜻으로 잘못 이해되었던 같다. 


이 책에서 ‘학습’이란 그저 학교나 학원에서 하는 식의 공부가 아니라 ‘새롭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을 부단히 추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경영 분야의 고전이라며 세계적으로 호평 받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초판 판매가 부진했던 까닭은 용어 번역의 문제도 한몫 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제 개정판이 나왔고 새로이 번역도 되었다(제목도 멋지게 바뀌었다!). 이 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이 책을 지나치지 말기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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