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에 걸쳐 전국에 산재한 유명 빵집 10군데를 '순례'하는 여행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빵을 아주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런 테마로 여행을 한 이유는 '지방의 작은 점포'에 불과한데 어째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는 빵집이 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짧은 방문으로 각 빵집의 경영 철학이나 전략이 어떤지를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매장에 들어가서 빵 냄새를 맡아보고 빵의 구색이나 인테리어를 보면 '이래서 이 빵집이 유명할 수밖에 없구나'를 아주 조금은 느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사진이 많습니다. ^^ 스크롤 압박 주의)
1. 대전 성심당
아침 일찍 출발하여 도착한 첫 번째 빵집은 대전의 성심당입니다. 유명한 부추빵과 튀김 소보루를 맛봤습니다. 부추빵은 자주 먹어도 부담이 없고, 튀김 소보루는 바삭하지만 너무 바삭해서 입천장이 까질 수도 있겠네요. 주말이라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다른 빵집들이 부러워할 만합니다. 하지만 빵을 구매하려는 손님과 계산하려는 손님들이 엉켜서 동선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죠. 또한 설립 당시부터 만들어 팔던 빵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진열하면 어떨까 싶었답니다. 반면, 빵을 파는 곳과 케잌을 판매하는 곳을 분리하고 2층에 관련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전략은 매우 스마트해 보였습니다.
성심당 건물
튀김 소보루와 부추빵 등
튀김 소보루의 속살
케잌 부티크의 먹음직스런 케잌들
부추빵의 속살
2. 군산 이성당
이곳에서는 1시간이나 줄을 서서 겨우 야채빵과 앙금빵을 손에 넣었네요. 많은 사람들이 1인 최대 구매 가능량인 10개씩 사던데, 오랫동안 기다린 탓에 많이 사가야 한다는 보상 심리가 작용하나 봅니다. 1~2개 사려고 줄을 서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네요. 빵 나오는 시간을 통제해서 손님들을 줄 서게 만드는 것, 고도의 판매 전술인 듯 싶었답니다. 이성당의 대표빵인 야채빵은 부드럽고 감칠맛 납니다. 나머지 빵들은 전체적으로 투박해 보이지만 기본기에 충실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야채빵과 앙금빵이 워낙 유명해서 그 빵들이 외면 받는 것 같더군요. 한 두 가지 빵에 집중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다양한 빵들을 고객에게 맛보이는 게 좋을까, 제가 빵집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택과 집중'이란 게 과연 빵집에 어울리는 전략인가 싶었죠. 이런 고민은 뒤에 방문한 광주의 궁전제과와 부산의 백구당에서 해소되었답니다.
오래 기다려서 받은 앙금빵과 아채빵
줄이 너무 길어요
요즘 유행인 달달한 붕어빵, 여기서도 만들어 파네요.
3. 전주 PNB풍년제과
PNB풍년제과는 수제 쵸코파이가 유명한 곳이죠. 들어서자 마자 갓 구어져 나온 쵸코파이를 포장하는 종업원들의 바쁜 손놀림이 보였습니다. 빵집이라기보다는 마치 공장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쵸코파이를 제외하고 다른 빵들은 끌리지 않았죠. 조명도 좀 어두웠고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원래 전병으로 유명하다던데 초쿄파이에만 너무 집중돼 있어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웠죠. 이성당과 마찬가지로 다른 빵들이 외면 받는 것이 안쓰럽기까지 하더군요. 유통기한이 길어서 관광객들의 선물용 구매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초쿄파이와 묘한 대비가 되었습니다.
어딘가 촌스러운 케잌들
초쿄파이를 포장하는 손길들
초쿄파이를 사려고 줄 선 사람들
좀 썰렁한 매장
맛보라고 둔 전병
4. 전주 원제과점
네번째 빵집인 원제과점은 6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PNB풍년제과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과연 전국 10대 빵집이 맞나 싶었죠. 대표빵이라는 바나나빵만 하나 사서 나왔습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맞은편 동네에 위치해 있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사람들이 덜 찾게 되나 봅니다.
찾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손님도 별로 없고 진열대도 빈 곳이 많고.
5. 광주 궁전제과
다섯 번째인 광주의 궁전제과에서 유명한 공룡알 빵과 나비파이를 먹었습니다. 다른 빵집들은 마트의 매대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곳은 분위기가 따뜻하고 빵들이 먹음직스럽게 잘 진열돼 있어서 좋았습니다. 빵 냄새가 매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웰커밍'에 신경을 많이 쓰는 빵집으로 인정해 줄 만합니다. 2층에서 음료와 함께 빵을 먹을 수 있는 점도 좋았구요. 공룡알 빵과 나비파이가 대표빵이지만 그것들을 부각시키지 않고 다른 빵들에게도 손님에게 선택될 기회를 골고루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군산의 이성당과 전주의 PNB풍년제과보다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배가 불러서 다른 빵들을 못 먹는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이번 투어에서 가장 느낌이 좋은 빵집 중 하나였습니다.
궁전제과 버전의 부추빵
나비파이
2층으로 향하는 나선형 계단
2층 카페의 모습
불고기 또띠아
따뜻한 느낌의 매장
공룡알 빵
아삭 소세지와 불타는 핫도그
간추려진 역사
6. 목포 코롬방제과
여섯 번째 빵집인 목포의 코롬방제과는 치즈크림 바게트가 대표빵이죠. 요거트 맛이 가미된 치즈크림이 바삭한 바게트와 잘 어우러집니다. 밀크셰이크도 옛스러운 맛인데 이성당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하지만 빵이 진열된 모습이 식욕을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빵집을 보는 듯 했죠. 2층에 마련된 카페는 나름 운치가 있었지만, 빵집 특유의 따뜻함은 느낄 수가 없었죠. 분발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옛스러운 종이컵과 크림치즈빵
겉에서 보기엔 규모가 꽤 크네요
이런 모양의 빵은 없던데....
뭔가 초라한 진열대
7. 부산 OPS
일곱 번째 빵집인 부산의 OPS(본점이 아닌 해운대점)에서 '학원 가기 전에 먹는다'는 학원전 빵과 슈크림 빵을 먹었습니다. 슈크림이 가득 든 빵맛이 의외로 담백하네요. 학원전 빵은 우유랑 같이 먹으면 간식으로 훌륭할 듯 합니다. 다른 빵집들은 지역 빵집이란 느낌이 강했는데, 이곳의 인테리어는 뚜레쥬르나 파리 바케트 같았답니다.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지역 빵집으로서의 전통은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OPS 본점을 가면 좀 달랐을까요? 나중에 본점으로 가봐야겠습니다.
학원전 빵
초콜릿도 맛있어 보이네요
슈크림빵
슈크림빵의 속살
포장용 학원전 빵
8. 부산 B&C(비앤씨)
여덟 번째 빵집인 부산의 B&C의 대표빵인 사라다빵와 어묵 고로케, 만쥬를 샘플로 먹어 봤습니다. 사라다빵은 맛이 좀 평범했습니다. 단, 어묵 고로케 맛은 독특하더군요. 특별한 맛과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는데 부산이 아닌 서울에 이 빵집이 있었다면 이렇게 유명해질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느낌으론 그랬답니다.
과자로 만든 장식
사라다빵
9. 부산 백구당
비앤씨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도 역사와 전통이 엿보이는 곳입니다. 크람빵이 유명하다해서 먹어보려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군요.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손님들이 크람빵만 너무 찾는 바람에 다른 빵들이 외면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금은 만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다른 빵들이 훨씬 맛있는데 손님들이 크람빵만 찾는다면 빵 만드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선택과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수의 대표빵에 집중하고 나머지 빵들은 병풍처럼 구색만 갖추고 돈을 벌면 되겠죠.
하지만 그런 빵집에서 우리는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백구당은 제빵 명가로서 자부심이 느껴진 유일한 빵집이었는데, 크람빵을 만들지 않는 이유를 종업원들이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에서 더 신뢰가 갔습니다. 빵이 지겨워서 패스하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좋은 빵집을 경험하지 못할 뻔 했습니다. 크람빵 대신 콘샐러드가 들어있는 크로이즌이라는 빵을 먹었는데 어릴 적 먹던 빵맛이더군요. 독특했습니다.
10. 안동 맘모스제과
마지막 열 번째 빵집인 안동의 맘모스제과는 이름이 촌스러워서 이렇게 건물이 세련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의 대형 빵집 못지 않았죠. 베스트라고 명찰이 붙은 사과 또띠아와 크림치즈빵을 먹었습니다. 호두와 사과맛이 어우러진 사과 또띠아가 입에 맞더군요. 주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조도 재밌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 특히 외지 관광객들에게 '이 빵이 우리의 대표빵이다'라는 걸 알기 쉽게 표시해주는 건 좋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하는 바람에 다른 빵들이 외면 받고 있었습니다. 빵 종류도 다양하지 못해서 광주의 궁전제과에서 느꼈던 빵집 특유의 따뜻함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화장실은 건물 외양에 맞지 않게 초라했습니다.
케잌을 만드는 사람들
크림치즈빵
몇 개 안 남은 사과 또띠아
이번 전국 10대 빵집을 돌면서 처음으로 든 생각은 '버티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오래 살아남는 것이 빵집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는 것을 10대 빵집들이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죠. 제빵과 같이 장인의 실력에 크게 의존 받는 업종일수록 '잘 버텨야' 합니다. 그러면 성장은 자연스레 따라 올 거라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의 유명 빵집들은 그 지역에 있을 때만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답니다. 지역의 빵을 먹는다는 것은 그 지역의 분위기를 함께 먹는 것이니까요. 이성당 등 지역의 몇몇 유명 빵집들이 전국(특히 수도권)으로 확장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리 좋은 전략은 아닌 듯 합니다. 처음에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매출이 급증하겠지만, 확장 때문에 빵맛이 진부해지는 것은 시간 문제 아닐까요? 혹여 대기업 자본에 이용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1940~70년대 설립된 대부분의 유명 빵집이 2세 경영체계로 옮겨 간 듯 한데, 양적 확장을 통해 자신의 경영능력을 인정 받으려 하기보다는 선대부터 이어져 온 빵맛을 진화시키는 것을 본인의 임무라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라는 점을 미리 밝히면서, 제 나름대로 베스트 3와 워스트 3를 뽑았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이미 설명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베스트 3
- 백구당
- 궁전제과
- 성심당
워스트 3
- PNB풍년제과
- 이성당
- 코롬방제과
그나저나 저는 빵을 많이 먹는 바람에 당분간 빵은 못 먹을 것 같군요.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자기만의 테마를 가지고 전국 일주를 해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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