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행동학자인 펠릭스 바르네켄과 마이클 토마셀로는 생후 17~18개월 가량의 유아 24명을 대상으로 몇 가지 실험을 수행했다. 그들은 일부러 펜이나 빨개집게에 안 닿는 척 하거나, 손에 물건을 가득 들고 있어서 캐비넷을 열지 못하는 척 하거나 또는 실수로 책을 미끄러뜨렸을 때 유아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관찰했다. 유아들은 10회 시도할 때마다 5.3회 꼴로 실험자를 도와주는 행동을 보였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긴 했지만 어떤 유아가 항상 남을 돕는지, 또 어떤 유아가 절대로 남을 돕지 않는 이기적인 성격을 지녔는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바르네켄과 토마셀로는 비슷한 실험을 세 마리의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실험자가 테이블을 스폰지로 닦다가 일부러 떨어뜨리고 집어올릴 수 없는 척 하거나, 손에 물건을 잔뜩 들고 있어서 바닥에 있는 물건을 치우지 못하는 척 하거나 할 때마다 침팬지들은 실험자를 자주 도왔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을 돕는 이타심, 상호존중과 신뢰의 본능이 내재돼 있음을 이 실험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자율을 부여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해야 최고의 성과를 끌어낼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에서 이를 증명한 대표적 인물은 에이브러험 링컨이다. 남북전쟁 때 링컨은 호주가(好酒家)인 그랜트 장군을 북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당시의 전세가 북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그랜트 장군의 단점은 총사령관직 수행에 상당한 결격사유임이 분명했다. 당연히 참모들은 링컨의 결정을 강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링컨은 “장군이 좋아하는 술이 어떤 술인지 알면 다른 장군들에게도 한 병씩 보낼 텐데.”라며 태연해 하며 임명을 강행했다. 개인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올바른 작전으로 승리를 이끌어 낸 그랜트의 강점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지만 만일 링컨이 그랜트를 신뢰하지 않고 약점인 술버릇을 더 크게 보는 ‘부정적 사고’를 했다면 미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지 모른다.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조직은 그렇지 않은 조직보다 앞서 나갈 수 있음을 경제학자 폴 자크의 연구에서 추측할 수 있다. 42개국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경제와 신뢰와의 관계를 검증한 결과, 그는 '타인이 믿을 만하다’고 답한 사람의 수가 15% 증가하면 1인당 연간소득이 1% 증가한다는 분석을 내놨다. 신뢰가 구성원 만족의 중요한 요소이고 구성원 만족이 회사의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변수라고 보면, 상호신뢰를 높이는 일이 품질을 높이고 기술을 개발하는 일보다 우선할 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구성원들 간의 신뢰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 그럴려면 먼저 신뢰도를 결정 짓는 변수가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한다. 어느 팀원에게 고객만족도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더니 몇날 며칠을 밤 늦도록 자료 조사와 분석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자. 그 팀원은 신뢰할 만한 사람일까? 아마 많은 이들이 ‘그렇다’라고 답할 것 같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신뢰도를 판단할 때 나를 도와주거나 내 말을 따를 ‘선한 의도’가 있느냐를 매우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감일에 책상 위에 올라온 보고서를 살펴보니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방법론으로 고객만족도를 조사했고 데이터의 신빙성도 떨어진다고 해보자. 아직 그 팀원은 신뢰할 만한 사람일까?
이때는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능력’ 없이 ‘선한 의도’만으로 신뢰를 얻을 수 없다는 소리다.
선한 의도와 함께 능력까지 갖춘다면 신뢰 받을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우연’이란 요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능력이 있고 조직의 발전을 위하는 마음(의도)이 충만한 팀원이 경영진 앞에서 신사업 아이디오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빔 프로젝트가 고장 나는 바람에 프레젠테이션이 엉망이 되면 비록 그 팀원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신뢰도가 떨어지는 게 인간의 마음이다. 정리하면, 신뢰도는 다음과 같이 의도, 능력, 우연이라는 변수로 이루어진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신뢰도 = 의도 * 능력 * (100 - 우연)
세 개의 변수 중에서 무엇이 가장 핵심일까? 바르네켄과 토마셀로의 실험에서 봤듯이 상대방에게 ‘잘하려는 의도’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정적인 변수는 아니다. 또한 ‘우연’은 말 그대로 우발적이기 때문에 컨트롤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믿고 맡길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구성원 각자가 갖추는 것이 조직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려는 구성원들의 ‘본능적인 선한 의도’를 훼손시키지 않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럴려면 정신의학자인 에릭 번이 제안하는 ‘상호존중의 대화법’을 꾸준히 연습하고 습관화하기 바란다. 번이 정립한 ‘교류 분석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말과 행동의 양식은 성인형, 부모형, 자식형이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성인형은 상호존중과 개방성을 갖추고 상대방의 감정을 자신에게 이입할 줄 아는 유형이고, 부모형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듯이 통제적이고 비판적인 행동 유형을 말하며, 자식형은 감정이 앞서고 자기중심적인 행동 양식을 가리킨다.
번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장 이상적인 상호작용의 방식은 ‘성인형 대 성인형’이라고 말한다. ‘부모형 대 부모형’이나 ‘자식형 대 자식형’의 상호작용은 오해를 가중시키고 대립과 갈등을 심화시킨다고 일갈한다. 조직에서 자주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자.
늑장부리며 기획안을 올리지 않는 팀원에게 팀장이 이렇게 말한다. “지시한 지가 2주일이 넘었는데 왜 아직도 기획안을 올리지 않는 거야?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런 말은 통제하고 비판하는 ‘부모형’ 대화의 전형인데, 애석하게도 부모형의 대화법은 자식형의 대화를 유도한다. 팀원은 이런 식으로 대꾸할 것이다. “제가 OOO일로 바쁜 거 안 보이세요? 상무님이 지시사항이라서 그것 먼저 해야 한다고요.” 만일 앞뒤 안 가리는 팀원이라면 “그렇게 급하면 직접 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박 대리가 요즘 한가한 것 같은데, 걔한테 시키시지요.”라며 부모형 대답으로 대항할 가능성도 있다. 팀원이 이렇게 대꾸하면 팀장은 팀원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삭이느라 괴로울 것이다.
팀장이 자식형의 대화법으로 “OOO기획안, 빨리 좀 줘. 전무님이 보자고 하신단 말이야.”라고 말하면 팀원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팀원은 "저도 힘들어 죽겠단 말이에요. 왜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라며 칭얼거리는 자식형 대답을 할 공산이 크다.
번이 이상적인 상호 교류 방식이라고 말한 ‘성인형 대 성인형’으로 대화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팀장 : 자네가 바쁜 건 잘 알지만, 실은 그 기획안을 전무님이 1주일 후에 열릴 경영회의 때 발표해야 해서 꼭 필요해. 해 줄 수 없을까?
팀원 : 죄송합니다. 저도 실은 상무님이 별도로 시킨 OOO일로 좀 바쁩니다. 상무님께 이야기해서 그 일은 잠시 미루자고 하겠습니다. 전무님 일이 더 급하니까요.
팀장 : 고마워. 상무님한테 이야기할 때 나도 같이 갈게.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이해하실 거야.
팀원 : 네, 알겠습니다.
팀장 : 아, 그리고 좀 힘들겠지만 오늘부터 나와 같이 기획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짜보자고. 이따 3시에 회의실에서 보면 어떨까?
팀원 : 네, 자료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요, 5시쯤 보면 어떨까요?
팀장 : 그래, 그러자고.
문제가 급하고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면 사람들은 강압적인 부모가 되거나(부모형 교류), 감정이 앞서서 요리조리 피하는 자식이 될(자식형 교류) 가능성이 크다. 문제가 복잡할수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성인형 교류를 하려고 노력한다면 상대방도 성인형 대화법으로 응대하면서 문제해결에 머리를 맞댈 것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였던 척 노블락은 뉴욕 양키스로 이적하면서 심한 스트레스에 빠졌다. 명문구단인 만큼 경기 중에 자그마한 실수를 저질러도 팬과 언론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노블락은 의기소침해졌고 기대보다 못한 성적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지켜 본 조 토리 감독은 그에게 “자네 모습 그대로 뛰어주길 바라네.”라고 말했다. 의미 없는 반성은 할수록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토리 감독의 메시지였다. 그 말에 힘입어 노블락은 본래의 컨디션과 플레이를 회복했고 팀을 월드시리즈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만일 토리가 “자네는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나?”라고 말하며 노블락을 비난했더라면 노블락 개인뿐만 아니라 팀도 몰락했을지 모른다. 이처럼 상호존중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며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반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뢰는 상호존중의 초석이고, 성인형 대화법은 상호존중을 지속시키는 엔진임을 기억해 두자.
(*참고도서)
<착각하는 CEO>, 유정식, 알에이치코리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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