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어느 커피숍의 리뉴얼을 보며   

2017. 7. 6. 09:24
반응형



2017년 7월 6일(목) 유정식의 경영일기 


한때 가맹점이 1000개를 돌파했다던 OOOO 커피 전문점, 무서울 정도로 가맹점이 늘어나서 사람들이 ‘바퀴벌레’ 같다고 농담을 하곤 했던 커피숍 브랜드는 경영이 악화되어 가맹점 수가 700여개 수준으로 급감하고 말았다. 경영 정상화의 일환으로 2015년 6월에 천호동에 있는 1호점을 시작으로 매장 리뉴얼을 단행했지만, 그곳마저 끝내 지난 3월에 폐점되고 말았단다. 상징성이 큰 매장이었고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데 왜 1년도 안 되어 문을 닫고 만 것일까?


뉴스 기사에 따르면 ‘본질과 공감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바탕으로 심플한 현대적 공간과 오래된 커피 저장소의 감성적인 공간 이미지를 차용했다’며 인테리어 리뉴얼의 방향성을 설정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뉴스 기사에 딸린 인테리어의 모습을 보니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소극장 객석을 연상케 하는 계단 모양의 좌석 레이아웃(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들이 올라가서 앉기가 저어되는), 의자라기보다 방석을 깔고 앉아야 하는 좌석, 커피 두 잔 정도 겨우 놓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감성적인 공간인지 의문이 들었다. 


뉴스기사 캡쳐. 출처: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html?no=380386


공간이 말을 걸어 온다고 했던가? 직접 찾아가서 본 것이 아니라 비록 사진 상의 느낌이지만, 그곳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다 가길 바라는 공간이 아니라 커피를 빨리 마시고 돌아가라는 듯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잘 만들기 때문에 커피맛으로 승부를 걸 거야. 그러니 공간이 좀 불편해도 커피맛으로 참지 그래?’라는 메시지도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이 커피숍의 커피맛이 앉은 자리의 불편함을 인내하고 수용할 만큼 특별한가? 


제주도에 오래된 창고를 커피숍으로 리뉴얼한 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그곳의 테이블과 의자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창고 안에서 느껴지는 헤리티지와 감성, 특유의 커피맛은 그런 불편함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오히려 앉은 자리의 불편함이 커피향을 더 특별하게 여기도록 대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연희동에 10평도 안 되는 공간이고 테이블과 좌석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아침 9시에 열어서 정확히 저녁 6시에 닫는 커피숍이 있는데,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렇게 일찍 문을 닫는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도 공간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멋진 대답을 한다. 그곳에서 아이스 플랫 화이트를 마치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입에 털어넣듯 먹는 즐거움이 온갖 불편함을 이겨내도록 해준다. 하지만 OOOO이 그러한가? 그곳 말고도 다른 선택지가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는데 그 공간으로 사람들을 끌어 당길 차별성과 흡인력이 있던가?


창고를 개조한 제주도 모 카페



나는 공간 디자인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어느 공간에 찾아가면 방문객으로서 그곳이 유발하는 감정을 느낄 줄은 안다(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런 능력이 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자기가 만들면 공간의 결함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인 것 같다. 과연 이 인테리어를 디자인한 사람들은 손님의 입장에서 그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을까 의심이 든다. 손님이 어떤 불편과 고충을 공간에서 경험할지 진정으로 ‘느껴본’ 적이 있을까? 이렇게 질문하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했어요, 진짜’라고 답하겠지만, 사진만 봐도 누구나 느끼는 공간의 불편함과 불쾌함을 왜 그들은 못 본 것일까? 보고도 외면한 걸까? ‘그까짓 불편함은 아무것도 아닐거야. 손님들은 잘 몰라’라면서. 결국 리뉴얼 1호점의 폐점(그리고 그후에 이어졌고 앞으로도 이어질 폐점)은 디테일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과 하루바삐 경영 정상화를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인테리어 디자인만 바꾸면 손님들이 다시 찾기 시작할 거라는 과거의 성공전략이 다시금 ‘먹히기’를 기대하면서 안일하게 생각한 탓일 것이다. 공간이 걸어오는 말을 외면한 것이다.


“소극장이라면 좋은 인테리어겠지만, 이게 커피숍이라구요? 저라면 절대 안 가요.”

H군에게 아무런 사전 정보를 주지 않고 사진만 보고 느낌을 말해 달라니까 이렇게 답했다.

“다들 앞만 바라봐야겠네요. 뻘쭘하게. 노트북이나 테이블에 제대로 올려 놓겠어요? 노트북은 그렇다 치고, 커피 말고 빵이나 케익을 주문할 텐데 이거야 원, 올려 놓을 수가 없겠네요.”

H군의 말은 고객의 소리를 대표한다. 매장과 사무실의 풍수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이 있는 H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런, 팥빙수를 시켜면 대체 어떻게 먹으란 말이에요? 장사를 하고 싶은 거 맞아요, 여기?”

H군에게 팥빙수는 일종의 역린인가보다.



*뉴스 기사 원문: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html?no=380386



반응형

  
,

평소에 '독'을 조금씩 마셔야 하는 이유   

2017. 7. 4. 11:23
반응형



2017년 7월 4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요즘 모 출판사 측에서 의뢰를 받아 책 한 권을 번역 중이다. 이래 저래 잡다한 일이 많고 몸도 며칠간 좋지 않아서 번역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이번 달까지 끝내야 하는데 과연 끝낼 수 있을까? 어젯밤에 이런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단 1페이지라도 번역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펼쳤다. 마침 내가 번역을 시작하려는 부분에 책의 저자들(공저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겠다는 말이 나와 있었다. 1987년에 제작되어 우리나라에는 1992년에 개봉된 <프린세스 브라이드 The Princess Bride>라는 꽤 오래된 영화였다. 나도 어디선가 제목은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내용은 생소했다. 


저자들이 좋아한다는 장면은 남자 주인공 웨슬리(Westley)가 버터컵(Buttercup) 공주를 구하기 위해 악당 비지니(Vizzini)와 ‘재치 겨루기(battle of wits)’를 벌이는 상황이었다. 책에 이 장면이 소개되어 있지만 대략적으로 표현돼 있어서 인물들의 구체적인 대사나 표정, 행동을 상상하는 데 제약이 있었다. 책 문장만 가지고 번역해도 되겠지만 좀더 충실한 번역을 하려면 직접 영화 장면을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혹시 유튜브에 나와 있을까? 어, 진짜 나와 있네? 친절하게도 ‘재치 겨루기’에 해당하는 클립만 따로 유튜브에 공개돼 있었다. 스포일러일지 모르지만(좀 오래된 영화라는 핑계로) 영화 장면이 주는 교훈이 커서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 유튜브 화면 캡쳐



버터컵 공주는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악당 비지니 옆에 앉아 있고 웨슬리와 비지니는 테이블처럼 큰 바위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바위 위에는 두 잔의 와인이 놓여져 있는데, 웨슬리는 이오케인(iocaine)이라는 독을 비지니에게 보여주며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이라고 소개한다. 그러고는 와인 두 잔을 들고 뒤로 돌더니 독을 잔에 넣는 듯한 시늉을 한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비지니 앞에 와인 두 잔을 다시 놓으면서 웨슬리는 말한다. “자, 어디에 독이 들어있을까? 재치 겨루기가 시작됐다고.”


이후에 비지니는 자신이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이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죄다 범죄자라는 둥, 범죄자들은 남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는 둥, 그래서 그렇게 쉽게 속을 것 같으냐는 둥, 주저리주저리 말을 쏟아내면서 웨슬리를 떠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저 뒤에 있는 게 뭐지?”라고 소리친다. 이 말에 웨슬리가 등을 돌리는 사이 비지니는 와인잔을 바꿔 놓는다. 웨슬리 앞에 있던 것을 자기 앞으로, 자기 앞에 있던 것을 웨슬리 앞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결정을 끝낸 두 사람은 각자의 와인을 동시에 마신다. 웨슬리가 “네가 틀렸다.”라고 말하니 비지니는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네가 등을 돌렸을 때 잔을 바꿔 놓았지”라고 말하며 꽥꽥거리듯 웃는다. 그러다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고 그대로 죽는다. 버터컵 공주는 안대를 풀어주는 웨슬리에게 “비지니가 마신 키 작은 컵에 독이 들어 있었군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버터컵 공주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한다. “두 잔 모두 독이 들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이오케인을 먹어도 괜찮도록 면역을 키웠거든요.”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 유튜브 화면 캡쳐



저자들이 이 영화 장면에서 초점을 맞춘 부분은 바로 사람의 심리를 역추적해서 알아맞히려는 똑똑함(비지니로 대표되는)보다는 이오케인을 몇 년 동안 조금씩 먹으면서 면역을 키우는 것, 즉 ‘작은 리스크’를 계속 수용하면서 스스로를 단련시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웨슬리라는 인물은 두뇌의 똑똑함만을 믿을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작은 고통을 스스로에게 일부러 주입해야 더 큰 고통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스스로를 리스크에 계속적으로 노출시켜야 더 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소리다. 비록 영화 속 이야기지만 시사하는 바가 제법이지 않은가?


기업이 평소에 이렇게 작은 리스크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시나리오 플래닝도 한 가지 방법이 아닌가 싶다. 위기가 닥쳤을 때 ‘준비가 된 상태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려면 그런 위기를 미리 떠올리고 그에 대한 대비책을 예행연습하듯이 시뮬레이션해보는 것이 웨슬리가 이오케인에 대한 면역을 키운 것과 같지 않은가? 물론 위기가 터졌을 때의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약간은 달라서 미리 세워 두었던 대비책을 바꿔야 하거나 변칙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경우도 분명히 발생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황을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대비책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상황 대응의 좋은 기준점이 된다.


‘전략적 면역’을 높이는 방법은 전염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놓는 것이라는, 아주 당연하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철칙이라는 점을 영화 <프린세스 브라이드>의 짧은 대사 속에서 발견한다. '잘 나가는' 평소에 '독'을 조금씩 먹어두는 게 나중에 큰 독을 먹을 때를 대비할 수 있다. 이것이 전략 리스크를 예방하는 유일한 해결책 아니겠는가?


“이 오이 소박이 좀 먹어 봐요.”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온 오이 소박이가 맛있어서 H군에게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싫어요. 전 오이를 못 먹어요. 냄새 나서.”

원래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웨슬리처럼 오이에 대한 면역을 평소에 키워야 하지 않겠냐며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앞으로 세상에 먹을 것이 오이 밖에 없다고 생각해 봐요. 그래도 오이를 안 먹을 거에요?”

“당연하죠! 안 먹어요, 절대! 그리고 그런 세상은 절대 오지 않거든요!”

시쳇말로 ‘흥, 칫, 뿡!’의 표정으로 H군은 오이 소박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이에 독이 들었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다 먹을 수밖에. 난 오이에 대한 면역이 있으니까.



------


이번 7월 21일에 열리는 시나리오 플래닝 실무자 과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5시간 동안 시나리오 플래닝을 학습하고 실습하면서 전략 리스크에 대한 면역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전략적 질문을 통해 위기를 예행연습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세요. 자세한 교육 안내는 여기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반응형

  
,

연봉을 2배 준다 해도 기쁘지 않은 이유   

2017. 7. 3. 09:57
반응형




2017년 7월 3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지금보다 연봉을 2배 주겠다고 회사 측에서 제안한다면 열심히 일하시겠습니까?”

며칠 전 나는 모 기업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성과주의 인사제도의 문제점(특히 차등보상의 문제점)을 강의하던 중에 어떤 여성 직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몸살에 걸려 진통제를 2알 먹고 겨우 진행하던 강의여서 그랬는지 나는 그녀의 답변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당연히 열심히 일하죠.”라고 대답할 게 뻔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 여러 직원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하나같이 이런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갑자기 연봉을 2배 준다고 하는데! 이런 대답이 나오면 나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란 후속 질문을 할 참이었다. 이 질문에 “1년이요.”라는 사람도 있고 “1개월 정도”라는 사람도 있는데, 대개 “3~4개월 가량”이라고 답을 한다. 실제로도 남들보다 연봉을 크게 높여주면 기분 좋아서 일을 열심히 하려는 동기는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3개월 이후에는 ‘이 연봉이 동료들보다 꽤 좋기는 하지만 응당 내가 받아야 할 연봉 아닌가?’라는 생각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자신의 ‘시장가격’이라고 간주하고 어느덧 더 높은 연봉을 자신에게 줘야 일하고자 하는 동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이런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있던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어떻게 일을 열심히 하죠? 이미 최대치를 하고 있는데?”

의외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갖가지 대답을 들었지만, 이런 대답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쉬크한 얼굴에서는 연봉을 2배 주든지 말든지 그건 상관없다는 표정이 읽혔다. 당황한 나는 (몸살 때문에 더 그랬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현재의 업무에 어떤 문제가 있는데요?”라고 질문했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아프면 변화를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 때문인지 나는 이미 구상해 둔 시나리오로 그녀를 몰고 갈 생각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래도 기분 좋아서 지금보다 열심히 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라는 멍청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어떻게든 “열심히 일을 하고 싶을 거에요.”란 대답으로 유도하고 싶었다. 





“이런, 멍청한!”

집으로 돌아와 약을 먹고 누워 있던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며 이불을 걷어 차고 일어났다. 이런 걸 이불킥이라고 하던가? 그녀의 대답 속에서는 직원들이 현장에서 감당해야 하는 업무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미 업무량이 턱 밑, 아니 코 밑까지 차올라 숨이 막힌데, 높은 연봉을 흔들어 대며 ‘이렇게 더 줄 테니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할래?’라고 유혹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없는 짓인가? 야근과 주말근무는 물론이고 퇴근 후에도 ‘카톡’으로 이어지는 업무 지시, 갑자기 위에서 떨어지는 수명 업무 등으로 많은 직원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현실을 나는 잠깐 망각하고 말았다. 


“연봉을 많이 받고 싶습니다.”라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말하지만 이 말은 강도높은 업무에 대한 보상으로, 즉 ‘돈이라도 많이 받아야지’라는 이유 때문이다. 직원들의 속마음은 돈을 많이 받고 싶기보다 ‘쉬고 싶고, 인생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직원들이 지금보다 많은 연봉을 기대하고 요구한다고 해서 그 액면만 보고 어떻게 하면 연봉을 높여줄지 혹은 어떻게 차등보상을 강화할 것인지, 우수인재에겐 어떻게 보상할지 등을 논의하고 실행해 봤자 직원들의 동기 향상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그 이유가 과중한 업무 로드 때문이라는 점을 그녀가 새삼 일깨워 주었다. 다시 말해, 업무 강도의 경감, 컴팩트한 업무 구조, 일과 생활의 적절한 균형 등이 ‘보상이라는 장난감’보다 동기 유지에 훨씬 중요한 요소다.




“번아웃(burn-out)이란 말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 같은데요?”

H군에게 이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그녀가 상당히 번아웃된 것 같다고 하니 H군은 이렇게 반박했다. ‘어, 또 왜 이러시나?’

“번아웃은 무언가를 열심히, 맹렬히 하고 나서 하얗게 타 버렸다는 뉘앙스가 풍겨요. 마라톤을 뛰고 나서 기진맥진해진 상태 같다고 할까요?”

“그러면 그 여성 직원은 어떤 상태인데요?” 몸살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나는 물었다.

“번아웃된 게 아니라, 무기력해진 거에요. 나쁘게 말하면 ‘좀비’ 같다고 해야 할까요? 자기가 회사에 왜 다니는지, 왜 이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상태가 돼 버린 거죠.”

“좀비라고요? 너무 심한 표현 아닌가요?”


H군은 단호했다.

“아뇨. 좀비가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리고 직원들을 좀비로 만든 건 바로 경영자들의 책임이죠. 매일 야근에 주말근무에, 시시때때로 울리는 카톡에, 회식과 주말 산행에 언제 직원들은 자기 삶을 즐길 수 있을까요? 살아아있다는 감정은 ‘오감(五感)’을 느낄 수 있을 때 찾아와요. 오감을 느끼려면 자기만의 시간이 있어야 하죠. 그런데 진짜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직원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감을 느낄 기회를 회사 때문에 차단 당하니까 살아있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고, 점점 무기력해지고, 한번 무기력해지면 좀처럼 활력이 생겨나지 않고, 그러니까 좀비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거에요. 무기력의 악순환이죠. 무기력이 번아웃보다 훨씬 무섭고 훨씬 해결하기가 어려워요.”


좀비라는 표현만 아니라면 H군의 의견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더 이상 어떻게 일을 열심히 하죠?”라고 말하던 여성 직원의 표정에서 나는 무기력을 읽었어야 했다.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상태, 아무것에도 감정의 반응이 없는 상태에서 돈을 논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에게 오감을 회복시켜 주고 삶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알아서 일의 의미를 찾을 것이고 자신이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뾰족한 해답이 아직 나에게 없는 게 아쉽다.


“제 오감을 회복시키려면 팥빙수를 먹어야 해요!”

진지한 대화를 하나 싶더니 H군은 또 팥빙수 타령이다. 빙수기계를 하나 사든지 해야겠다.


반응형

  
,

내가 하는 고민은 진짜 고민일까?   

2017. 6. 30. 09:10
반응형



2017년 6월 30일(금) 유정식의 경영일기 


“고민이 아닌 걸 고민하시는 것 같은데요?”

내가 이렇게 단적으로 말하니 시나리오 플래닝 워크숍에 참석한 상대방은 상당히 당황한 눈빛이었다. 고민이 맞는데 고민이 아니라니까 약간은 화가 섞인 표정으로 상대방은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시나요?”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확실한 걸 두고 고민하시니까요. 확실하게 미래에 생길 것들을 왜 고민하시죠? 그것에 맞서든지 아니면 피하든지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확실하게 발생할 것들을 두고 ‘어쩌지’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고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오후에 비가 올 것이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다는 일기예보를 들었고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데 업무상 중요한 미팅 때문에 외출해야 한다고 해보자. 게다가 집에는 찢어진 우산 밖에 없어서 그걸 들고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이때 ‘비가 온다는데 제대로 된 우산은 없고, 이것 참 고민이네.’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오를 텐데, 사실 이것은 고민이 아니다. 일기예보가 틀리지 않는 한(틀리기를 바라겠지만) 비가 ‘확실히’ 오는 상황이고, 집에 찢어진 우산 밖에 없는 것도 ‘확실한’ 조건이다. 이렇게 확실한 상황을 두고서 ’이를 어쩌지…’하는 걱정은 고민이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바로 대책을 마련하면 될 일이다. 아직 시간이 남았고 당장 비가 오지는 않으니 얼른 가게에 가서 중요한 미팅에 어울릴 만한 우산을 사오면 되지 않겠는가? 사러 가는 게 귀찮다거나 누가 우산을 사다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서 고민이라는 소리는 진짜 고민이 아닌 걸 두고 고민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3년 후 대학입시에서 내신 비중이 더 높아질 거라고 예고됐다고 하자. 내신이 약한 학생은 이러한 확실한 상황이 고민이 될 법도 하겠지만 역시나 고민할 타이밍이 아니다. 내신 강화를 위해 3년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울 시간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규제 강화로 사업의 축소가 불가피해진 상황 역시 불확실한 조건이 아니므로 엄밀히 말해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사업 축소로 인해 발생할 이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만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고민이 아닌 걸 고민하는 두 번째 경우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을 고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유학을 가고 싶지만 돈이 궁핍한 상황이라고 하자. 돈이 없어서 유학 가고픈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돈이 없다’라는 조건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돈의 유무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스스로 벌 수도 있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돈을 벌고 싶어도 제 능력으로 잘 안 돼요. 부모님도 돈이 별로 없고요. 그러니까 고민이에요.”라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인의 능력이 없다는 것, 부모님도 돈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확실한 상황’이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 역시 고민이 아닌 것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고민하지 말고 유학을 깨끗이 포기하는 게 답이다. 


기업의 경우, 해외 이머징 마켓에 진출하려는데 현지에 능통한 인력이 없어 고민이라고 말할 때도 역시나 고민이 아니다. ‘인력 확보’는 외부 인력을 영입하든 아니면 현지 기업과 제휴하든지 해서 어떻게든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게 상당히 어렵다고? 그렇다면 역시나 확실한 조건이니 이머징 마켓에 눈 돌리지 말고 기존 시장에나 집중하면 될 일이다.




고민이 아닌 걸 고민하는 세 번째 경우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 혹은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들었던 상황,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는 오후에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있는데 우산이 없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이 상황에서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바로 그 ‘중요한 미팅’이지 제대로 된 우산이 없다는 지엽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미팅의 결과에 따라 어떻게 대처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에 ‘우산이 없어서 어떻게 해’라는 고민은 ‘중요한 미팅에 나가고 싶지 않아’라는 핑계거리에 불과하다. “그 일을 하고는 싶은데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하고 싶지 않아.”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에서 ‘이렇게 되면’이라는 말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진짜로 이 사람이 그 일을 하고 싶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드는 때가 잦다. 목표가 뚜렷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그런 지엽적인 것들은 그냥 안고 가야 하지 않을까? 지엽적인 것 때문에 못하겠다는 사람은 목표 달성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고 싶지 않거나 누가 떡 하니 갖다 줬으면 좋겠다는 심보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정리해 보자. 지금 무언가 고민이 있다면, 불확실한 상황을 고민하고 있는지, ‘내가 컨트롤하기 힘든 것’을 고민하고 있는지, 진짜로 중요한 것을 고민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만약 이 세 가지 질문에 ‘아니오’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고민은 고민이 아니다. 깨끗이 접든지, 아니면 머리를 싸맬 시간에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게 생산적이다.


“OO에 새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생겼다는데 한번 가볼래요?”

내가 묻자 H군이 이렇게 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맛없으면 어떻게 하죠? 그건 진짜로 불확실한 상황이고, 내가 컨트롤할 수도 없고, 자고로 레스토랑은 맛이 정말로 중요한 요소인데 말이에요. 이런 건 고민 맞죠?”

무엇이든 잘 배우는 H군이다. 대견하다.


---------



이번 7월 21일에 열리는 시나리오 플래닝 실무자 과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5시간 동안 시나리오 플래닝을 학습하고 실습하면서 무엇이 진짜 고민인지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교육 안내는 여기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반응형

  
,

미신의 유혹에 빠지다   

2017. 6. 29. 09:04
반응형



2017년 6월 29일(목) 유정식의 경영일기


“어떻게 해야 사무실이 빨리 나갈까요?”

좀더 코지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서 지금 쓰고 있는 사무실을 계약기간보다 일찍 복덕방에 내놓았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인지 문의하는 이들이 거의 없자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이렇게 푸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열이면 열 나에게 이런 저런 미신을 동원해 보라고 조언했다.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는 분은 잘 나가는 고깃집에서 가위를 훔쳐다가 거꾸로 매달아 놓으라고 하고, H군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성씨 100개를 써서 신발장 안에 붙여두라고 했다. 대체 이런 미신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번 해볼까 싶어 인터넷에서 성씨 100개를 검색하기도 했다.




과학의 공식적인 반대말은 비과학이지만, 흔히 비과학은 미신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과학적인 근거 없이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믿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요새 옛날 물건에 관심이 많아 중고물건을 사고파는 사이트에서 1976년에 나온 괘종시계를 6만원 주고 샀는데, 오래된 탓인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멈추곤 했다. H군은 “죽어 있는 시계를 달아두면 안돼요.”라며 내게 핀잔을 줬다. 내심 고리짝 같은 물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H군은 2년이나 지난 잡지를 가리키며 “철 지난 잡지를 책상 위에 두면 안돼요”, “변기 뚜껑은 꼭 닫아둬야 해요”, “사람키보다 높은 화초를 옆에 두면 안돼요” 등등 내가 보기엔 미신처럼 들리는 조언을 수없이 했다. 본인 책상은 늘 지저분하게 두면서 나에게만 핀잔이다.


H군보다 미모에서 살짝 밀리는 유명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은 요즘 여성 인권 향상의 리더로 떠올랐으나 그녀 역시 확고한 미신을 가지고 있는 게 확실해 보인다. 스칼렛은 어느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선배 배우인 새뮤얼 잭슨에게서 감기가 옳음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감기에서 낫고 싶지 않았어요. 유명스타의 감기라서 왠지 가치 있게 느껴졌어요.”라고 고백하며 그 자리에서 휴지에 코를 풀었다. 새뮤얼 잭슨이 옮긴 감기로 여배우 스칼렛이 코를 풀었으니 그 얼마나 가치 있겠는가? 그 휴지는 자선행사에서 5,300달러에 팔렸다. 유명인의 감기라고 해서 바이러스의 생물학적 구조가 특별히 다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물론 나라도 그 휴지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미신을 더욱 신봉할까? 그것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통제감을 확보하려는 인간 나름의 방어책이라는 의견이 있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지오라 케이난은 불확실하고 스트레스가 큰 상황에서 미신적인 사고방식에 집착한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스라엘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응답자들의 교육 수준과 관계없이 미사일 공격 위험이 높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미신적인 사고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위험한 직업 중 하나인 어부들 사이에 ‘물고기를 먹을 때 뒤집지 마라’, ‘뱃일 나가는 어부에게 인사를 하지 마라’와 같은 이런저런 금기가 많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무실이 나가지 않아 초조해진 나도 미신의 유혹에 빠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미신은 그 자체로는 비과학이지만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경감시키고 통제감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던 2000년대 초반에 종교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상황을 개선시킬 방법을 물었다. 그랬더니 35%의 여성들이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찬송가를 부르는 여성들이 테러의 공포를 덜 느꼈다고 한다. 심리학자 리산 다미쉬는 ‘행운의 골프공’이라는 말을 들은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35%나 더 공을 잘 친다는 결론을 냈다. 운이 함께 할 경우 자신감이 배가되고 실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미신의 효과는 분명 존재한다.


친하게 지내는 헤어디자이너의 미용실에 갈 일을 만들어야겠다. 그 분야에서 잘 나가는 분이니 미용실에서 가위 하나 훔쳐와서 사무실에 달아볼까? 한심하게 도둑질할 생각이나 하다니, 어느덧 나도 미신의 노예가 된 모양이다. 이게 다 H군 때문이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