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가지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   

2017. 6. 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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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5일(목) 유정식의 경영일기  


“열정을 좀 가져. 열정을 가지면 안 될 일이 없어.”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채근하거나 응원할 때 ‘열정’이란 단어를 언급한다. 역량이 부족해서 어떤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성격이나 기질상 그 일에 도전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열정만 있다면 못해낼 것이 없다고 말한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들여다 봐도 열정의 필요성은 어디에나 등장하는데, 열정을 갖는 것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되는 ‘쉬운’ 일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로 깔려 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조언은 모두 열정을 장착한 상태를 전제로 한다. 헌데 열정을 갖는 것이 정말 쉬울까?


나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단어의 어원을 따져보기를 즐긴다. 그러면 단어에 담긴 고유의 의미와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의미를 비교하면서 뜻밖의 통찰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어원을 알려주는 www.etymonline.com 란 사이트에서 열정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passion’를 쳐보니 생각치 못한 의미와 만났다. 10세기에 쓰인 라틴어 passionem은 십자가의 매달린 예수의 육체적 고통을 의미했다. 우리가 열정의 뜻으로 보통 알고 있는 ‘열광’이나 ‘환호’, ‘선망’과 같은 뉘앙스는 17세기에 가서야 덧붙여졌을 뿐 ‘육체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passion의 본래 의미였다. 어원으로 봐도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그렇기 때문에 열정을 갖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그야말로 ‘도전’이다.




열정의 동반자가 고통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열정이 부족한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열정은 ‘없어야’ 고통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열정을 갖지 않으면 유리한 점이 많다. 책임을 덜 질 수 있고 좀더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고 개인 활동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열정이 부족한 것이 별로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열정이 부족한 것에는 일이 자기와 맞지 않는다든지, 상사가 제대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든지, 보상이 따라주지 않는다든지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자기 잘못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냉정히 말해, 열정 역시 일종의 재능이라서 ‘그래, 이제부터 열정을 가지겠어.’라는 다짐으로 쉽게 불타오르지 못한다.


조직으로 시각을 돌려보자. 리더가 열정이 부족한 직원에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목표 설정과 성과관리 방법은 이미 많이 나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방법들이 직원의 마음에 열정이 끓어오르도록 만들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안다. 열정의 옆좌석에 고통이 동반하는데 누가 쉽사리 열정의 열차에 올라타겠는가? 사실 리더가 성과관리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더 높이 더 멀리 도달하도록 직원들을 채근하고 상기시키지 않아도 되는 수준에 이르는 것이 열정에 관한 한 최종적인 목표다.


리더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은 열정의 열차에 올라태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단호히 구분하는 일이다. 열정을 가지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직원을 억지로 태우려 한다면 그들에게 시간과 노력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 정작 열정을 가진 자(열정을 가질 준비가 된 자)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부족하게 된다.  


열차에 태울 직원들을 선별했다면 그들이 쉽사리 열정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들여다 봐야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의 업무가 조직의 업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팀원들 중에서는 남들보다 덜 중요하고 덜 긴급한 업무를 담당하지만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업무를 담당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일이 타 팀원들의 성과 창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나아가 팀과 회사 전체의 성과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김 대리의 일은 목표 달성에 아주 중요하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개별 업무의 아웃풋이 어떻게 타인 업무의 인풋이 되고 성과로 이어지는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열정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구체적인 기대감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열정의 행동을 알려주고 그런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감을 심도록 해야 한다. 매출 얼마, 고객만족도 얼마, 라는 식으로 목표 달성치를 제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 팀이 문제 해결에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일이 많아 야근을 하는 동료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객 대상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 상황에서 요구되는 행동을 명확히 제시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조직의 ‘시민’으로서 어떤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지 전달하고 서로 합의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한다. 열정이라는 열차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않는다. 탑승자들이 열차의 각 부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일러주어야 한다.


또한 절대 지속적인 피드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열정적이지 않았던 사람은 ‘무열정’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껍질을 깨고 나오도록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제부터 열정적으로 일해야지!’라고 생각해도 오랫동안 굳어진 몸은 관성에 따라 행동하려 한다. 또한 리더도 열정적이지 않은 구성원을 보고도 가만히 두고 넘어가려는 관성에 빠진다. 특히 1년에 한번 평가하고 면담하는 제도가 운영 중이라면 그때까지 피드백을 미루려고 한다. 1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네는 열정적이지 않은 것 같아.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한다면 직원이 과연 그런 피드백을 받아들일까? 1년 동안 그 많았던 행동 변화의 기회들은 다 던져 버리고 이제와 한 번의 피드백으로 변화를 바라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한가? 직원에게 욕을 먹을 것을 염려해 피드백을 주저하는 리더라면 열정을 끌어올리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열정적인 사람으로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 직원은 리더의 행동과 마인드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말이다. 물론 리더도 사람인지라 열정적이지 않을 수 있고 항상 열정적이지는 못하다. 완벽한 롤모델이 되라는 말은 아니다. 열정적이려고 노력하라는 말이다.


열정은 고통을 내포하기 때문에 끌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열정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리더는 직원의 저항을 반드시 경험한다. 평가와 보상이라는 장치로 절대 열정을 끌어낼 수 없다. 솔직하고 대담하게 나아가라. 감동적인 스토리나 구호 같은 것에 기대기보다는 직들에게 열정의 구체적인 행동을 바란다고 솔직하게 말하라. 그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대화할 때 열차의 무거운 바퀴는 목적지를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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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에어비앤비의 매력   

2017. 6. 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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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9일(금) 유정식의 경영일기  


(오늘의 경영일기는 이번에 새로 나온 저의 번역서 '에어비앤비 스토리'에 올린 옮긴이의 글로 대신합니다. 제 경험을 위주로 썼으니 일기처럼 읽힐 겁니다. ^^ 참고로 이 책은 어제 날짜로 발간되었습니다.)


에어비앤비의 이야기를 번역해 보면 어떻겠냐는 편집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마침 안동의 하회마을을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같이 여행하던 일행에게 번역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하니 모두들 놀란 눈을 하며 당장 수락하라고 야단이었다. 다들 한 번 이상 에어비앤비를 경험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앞으로의 여행도 에어비앤비를 1순위로 삼는다고 입을 모으며 에어비앤비의 장점을 줄줄 쏟아냈다. 호텔보다 저렴한 숙박비로 여러 명이 넓은 공간을 이용할 수 있다는 직접적인 장점뿐만 아니라, 호스트가 게스트를 위해 마련한 독특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낯선 장소에서 현지인처럼 살아보는 즐거움이 매력이라고 말하며 서로 어디어디에서 묵어 봤냐며 한창 수다를 떨었다. 나는 에어비앤비의 장점 자체보다 그렇게 재미나게 에어비앤비를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이 더 놀라웠다. ‘에어비앤비 빠’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이야!


몇몇 사람들은 해당 지역의 삶과 문화를 경험해 보라는 에어비앤비의 권유가 듣기 좋은 선전문구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호스트의 얼굴을 마주하고 호스트와 같은 공간에서 머무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 역시 지금껏 수차례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동안 호스트의 얼굴을 한번도 직접 본 적 없고 사이트에 나온 사진을 보며 문자 메시지를 나눈 것이 전부다. 하지만 에어비앤비 숙소가 위치한 지역으로 시각을 넓혀보면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에어비앤비의 매력은 ‘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제가 번역한 책, 에어비앤비 스토리



이 책의 번역을 얼추 마무리 지었을 때 나는 지인들과 함께 일본 교토를 여행했다. 에어비앤비 이야기를 번역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숙소는 에어비앤비였다. 유명 관광지라서 도심의 호텔은 지나치게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교토의 뒷골목을 경험하고 싶었기에 상대적으로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변두리로 숙소를 예약했다. 호스트가 이메일로 알려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여니 작은 공간에 집기들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차고 다다미 냄새가 풍기는 숙소는 여느 일본 가정집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가 묵었던 교토의 에어비앤비 숙소



다음날 아침,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골목을 나서던 우리는 간판도 없는 작은 중고 LP 가게를 우연히 발견했다. 다들 LP 애호가인 우리는 만세를 부를 뻔했다. 교토의 변두리에서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500~1000엔)으로 오래된 LP를 판매하는 곳을 만나게 되리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신나게 LP를 고르고 주인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교토 시내 구경은 어느새 뒷전으로 물러나 버렸다. 호텔에 묵었으면 이런 즐거움은 절대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숙소 근처의 작은 LP 가게



이런 극적인 발견은 그날 저녁에도 있었다. 한창 놀다가 허기가 진 우리는 서점 점원에게 동네 맛집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빗 속을 걸어 점원이 지도에 그려준 집을 어렵게 찾아간 우리는 ‘closed’란 팻말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아무 식당이나 가자며 들어간 곳이 ‘카라반’이라는 동네식당이었다. 허름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이름인데다가 동네 아저씨들이 한켠에서 담배를 피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며 ‘지금이라도 나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마침 나온 치킨 가라아게와 카레 라이스를 한 입 먹어보고 ‘유레카!’를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음식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관광 안내 책자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그곳은 교토 대학생들에게 맛집으로 알려진 식당이었다. 우리는 다음날 저녁도 그곳에서 배불리 먹었고 나는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구글맵에 위치를 기록했다. 옮긴이의 말에 쓰기에 이처럼 좋은 소재가 있을까? 유명 관광지가 되어 버린 안동 하회마을 같은 곳이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행운이었다.


식당 카라반의 소박한 간판



책에도 소개됐듯이 에어비앤비는 단순한 숙박 서비스에서 벗어나 호스트를 중심으로 한 ‘체험’으로 무게중심을 점점 옮겨 가고 있다. 교토 여행을 같이 갔던 사람들과 홍대 부근의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경험’과 ‘체험’의 차이가 무엇인지 잠시 토론한 적이 있다. 영어로는 두 단어 모두 ‘experience’라서 견해에 따라 정의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나름 열띤 토론을 통해 제3자적이고 ‘안전한’ 입장에 머무는 것이 경험인 반면 상황에 뛰어들어 몸소 체득하고 느끼는 것이 체험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경험과 체험을 구분해서 사용했고 에어비앤비가 새로이 추구하는 전략 방향을 체험이라고 번역했다. 


체험이야말로 에어비앤비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독특한 가치다. 에어비앤비 숙소에 현지인처럼 머물다가 구석에 위치한 중고 LP가게와 ‘카라반’ 식당 같은 곳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 것이다. 이 책으로 에어비앤비의 이야기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이 끝났으면 이제 체험할 차례가 아닐까? 나처럼 각자의 보물장소를 발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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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원더우먼은 누구인가?   

2017. 6. 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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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7일(수) 경영일기 


얼마 전 새로 나온 영화 <원더우먼>을 봤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예뻐 보였던, 파란 눈빛과 환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던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하지만 상영시간 내내 ‘이게 뭐지?’라는 당혹스러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성 히어로물이지만 그간 나온 남성 히어로들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순전히 남성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다. 


영화 속 원더우먼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만 빼고는 악에 대항해 여전히 남성스러운 방식으로 싸우고 남성스럽게 영웅이 된다. 영화 속에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코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여성들만 사는 가상의 섬이라든지, 그곳에 남성이 불시착하는 장면이라든지, 섹시한 옷을 입고 ‘착하게’ 행동하는 주인공 여성의 모습 등이 그러했다. 결론적으로 영화 <원더우먼>은 ‘얼굴 예쁘고 마음씨도 착하고 게다가 능력까지 출중한 여자’, 원더우먼이라기보다 ‘수퍼우먼’을 바라는 남성들의 은밀한 욕구가 투영된 영화였다. 원더우먼 여주인공은 남성이 바라는 여성성이 강요된 캐릭터였다. 스토리의 느슨함과 편집의 엉성함이라는 단점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더우먼>에 실망한 채 영화관을 걸어 나오던 나는 진짜 원더우먼, 말 그대로 ‘놀라운 여성’은 몇 달 전에 봤던 영화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의 세 여성이라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1960년대 NASA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했던 주인공들이 ‘여성인데다가 흑인이기까지 한’ 당시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우주선의 안전한 귀환이라는 난제를 풀어내는 과정이야말로 ‘놀랍기’ 그지없었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자라는 집단조차 ‘지성 중심’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 강력했다는(정도가 옅여졌을 뿐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것과 머리가 좋든 실력이 뛰어나든 흑인여성은 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세 여성 중에 어릴 적부터 두뇌가 뛰어나고 수학에 천부적인 능력을 나타낸, 그래서 남성 과학자들이 쩔쩔 매는 문제를 단숨에 풀어내고 압도하는 캐서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에 비해 흑인여성들로 이뤄진 계산부서의 리더 도로시와 흑인여성 최초의 엔지니어가 되는 메리의 이야기는 캐서린의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정도의 비중으로 다뤄진다. 그래서인지 나도 영화를 보는 내내 캐서린에 집중했고 영화를 본 후에도 그녀의 이야기가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살짝 고백하자면, 매력적인 외모의 자넬 모네가 역할한 메리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로시의 이야기가 기억의 수면 위로 자꾸 떠올랐다. 영웅의 등급이나 능력의 경중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세 흑인여성 중에 가장 놀라운 여성, 즉 원더우먼은 도로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나가다가 IBM으로부터 들여온, 커다란 방을 가득 채운 전자계산기를 목격한다. 이제까지 우주선 발사에 필요한 수치 계산을 도맡았던 자신들을 대신할 기계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흑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도서관에서 프로그래밍 언어인 ‘포트란(FORTRAN)’ 책을 훔쳐 나온 그녀는 훔쳐도 되냐는 아들의 말에 ‘우리도 세금을 냈으니까 훔치 게 아니야’라고 당당히 말한다. 


도로시 본



두려워하는 흑인여성 계산원들에게 책을 들어 보이며 ‘이게 우리의 미래다’라고 말하고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도태될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하는 모습, IBM 엔지니어들도 쩔쩔 매는 전자계산기 사용을 보란듯이 해내는 장면, 포트란 언어를 익힌 계산원들을 이끌고 전자계산기가 가득한 방으로 ‘행진’하는 장면, 그래서 나중에는 백인여성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가르치는 자로 스스로의 위상을 높인 모습은 왜 도로시가 진정한 원더우먼인지 곧바로 느끼게 한다. 



그녀는 변화를 인지하고,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방법을 찾고, 그 방법을 혼자만 취하지 않고 동참하도록 만들어 변화의 물결에 함께 올라탔다. 캐서린과 메리 역시 놀라운 여성임에는 틀림없지만 둘은 ‘머리’가 뛰어난, 기본적으로 재능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그런 ‘머리’는 없었지만 ‘누구의 도약이든 우리 모두의 도약이야’라고 말하며 변화를 뚫고 모두를 이끌어가는 도로시의 리더십이야말로 원더우먼의 칭호를 선사하기에 아깝지 않다.


영화 <원더우먼>은 주인공이 전쟁 중에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자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에 젖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끝까지 남성이 바라는 여성성, ‘지고지순함’을 은근 강요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히든 피겨스>는 세 여성의 실제 모습을 엔딩 타이틀과 함께 올리며 이 영화를 헌정한다. '진정한 원더우먼이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나는 규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 규정은 남성인 내가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진정한 원더우먼들은 이미 우리 곁에 있었고 앞으로 그러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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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까페의 흔들리는 테이블을 보며   

2017. 6. 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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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5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오늘 아침 브런치나 먹으러 갈래요?”

“오, 좋아요! 어디로 갈 건데요?”

“홍대 근처에 있는 F카페, 어때요?”

“어, 거기요? 거긴 별론데…”

“왜요? 거기 12시까지 브런치를 뷔페로 먹을 수 있고 커피도 무제한인데.”

“음식은 좋은데요, 거기 테이블이 문제에요. 테이블이 너무 흔들려서 가기가 싫어졌어요.”


며칠 전에 동료와 나눴던 대화다. 동료가 가기가 싫다고 댄 이유를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지난 번에 찾았을 때 테이블이 출렁거려서 도저히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기 어려웠다. 2~4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은 상판이 기둥 하나에 붙어있는 구조였는데, 그 결합이 느슨한 탓에 모든 테이블이 죄다 시소처럼 상판이 아래 위로 1~2센티미터 가량 흔들렸다. ‘이러다 뜨거운 커피를 엎는 거 아냐? 테이블에 팔을 올려 놓을 수도 없고, 영 불편해.’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안 흔들리는 테이블은 없나요?”

종업원은 미안한 듯 대답했다.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테이블이 문제라는 걸 모르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물었다. “저번에도 테이블이 이렇게 흔들렸는데 왜 안 고치나요?”

종업원은 연신 미안한지 손을 마주 비비며 말했다. “이게 구조상 고치기가 힘들다고 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힘없는 종업원을 탓해서 뭐하랴.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로스팅 기계 앞에서 커피콩에 코를 갖다대는, 사장인 듯 보이는 사람(아닐 수도 있다)을 쏘아 보았다. 저렇게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할 생각 말고 테이블이나 고치든지, 고치는 게 불가능하면 매몰비용을 아까워 말고 바로 교체나 할 것일지! 본인이 이렇게 흔들리는 테이블에서 커피를 매일 마셔야 한다면 과연 그냥 놔둘까?




혹시 F까페의 대표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리고 매장 매출이 점차 감소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바로 테이블을 교체할 것을 권한다.  흔들리는 테이블은 고객이 매장에서 느끼는 안정성에 꽤나 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니까 말이다. 그냥 상식선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험으로 증명된 바다. 워털루 대학교의 데이비드 킬리(David R. Kille)는 대학생 47명(남 25명, 여 2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약간씩 흔들리는 의자와 테이블에 앉혔고 나머지 그룹은 안정적인 의자와 테이블에 앉게 했다. 그런 다음, 버락 오바마와 미셸 오바마, 데이비드 베컴과 빅토리아 베컴 등과 같이 널리 알려진 네 커플이 5년 내에 헤어질 가능성을 7점 척도로 평가해 달라고 했다. 


분석해 보니, 흔들리는 의자와 테이블에 앉은 참가자들이 안정적인 의자와 테이블에 앉은 참가자들에 비해 네 커플이 깨질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고, 안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흔들리는 테이블에서 불안하게 커피와 음식을 먹은 손님의 마음 속에는 커피향이나 음식맛보다는 그 매장에 주는 불안정성 때문에 다시 찾기를 꺼려할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맛있거나 특별히 저렴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테이블을 바꿀 것을 권하는 것이다.


사소하게 보이는 가구의 안정성이 인간의 심리를 크게 좌우한다는 점은 비단 F까페와 같은 음식점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직원들이 매일 살을 붙이고 앉아 있는 의자와 책상이 과연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는지, 열심히 일하도록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따져 보는 것도 경영자의 관심사항이 되어야 한다. 




내가 아는 컨설턴트 A는 과거에 유명 가구회사에 다닌 적이 있는데, 그는 직원들이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가 전혀 통일돼 있지 않을 뿐더러 낡아 빠졌었다고 털어 놓았다. 명색이 가구회사가 직원들의 업무용 가구에는 전혀 투자를 하지 않는다니, 듣는 나도 어이가 없었다. 작년인가, 그 회사를 업무 협의를 위해 찾은 적이 있었다. A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어서 옆눈으로 직원들의 책상과 의자를 살펴보고 전체적인 인테리어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애석하게도 십 몇 년 전의 상태가 별로 개선된 것 같지 않았다. 가구 회사가 왜 이 모양이지, 싶었다. 회사 직원들의 자존감이 얼마나 낮을지 짐작이 됐다.


A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나 더 추가하면, 고객 대상의 매장 인테리어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데 판매직원들을 위한 휴식공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있다 해도 매우 '후지다'고 한다.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영업사원들이 휴식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건의하니까 경영진은 그럴 공간이 없다는 소리만 하더란다. 직원들을 사람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명확한 신호다.


업무환경을 구글이나 에어비앤비처럼 돈을 쏟아부어 화려하고 멋있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잘 열리지 않는 책상서랍을 열다가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에 부서 간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든지, 얼룩지고 뜯긴 의자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자존감 때문에 업무에 몰입하지 못한다든지 해서 잃어버리는 이익과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회사 물품 관리를 책임지는 총무부서도 이제는 이런 전략적이고 심리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책상 하나도 내 몸 하나를 의탁할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서로 신뢰할 수 있겠는가?


흔들리는 테이블 때문에 F끼페를 포기한 나와 동료는 바로 메밀국수집으로 향했다. 그곳의 테이블은 소박하기 그지없고 촌스러웠지만 팔뚝을 얹고 몸을 기대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했다. 아무렴, 테이블은 모름지기 이래야지! 그게 테이블의 기본 아닌가?



(* F까페에 그 후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글은 F까페가 아직 테이블을 고치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 쓰여졌습니다.)



(*참고논문)

Kille, D. R., Forest, A. L., & Wood, J. V. (2013). Tall, dark, and stable: Embodiment motivates mate selection preferences. Psychological Science, 24(1), 1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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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에 가면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2017. 6. 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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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일(금) 경영일기


연희동에 스타벅스가 들어오던 날, 나는 소박하면서도 격이 있는 주택가까지 거대 다국적 기업의 자본이 손을 뻗은 것 같아서 마음이 꽤 불편했다. 연희동 곳곳에 자리를 잡은 아기자기한 까페들이 스타벅스의 진입으로 손님들을 빼앗기게 되고, 외국 자본까지 들어왔으니 건물주의 임대료 인상 욕구가 고개를 들 것이고, 급기야 연희동에도 젠트리피케이션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앞섰다. 개점 첫날부터 그 넓은 공간을 빼곡히 메운 손님들을 보니 더 심난해졌고 ‘나는 이곳을 이용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웬걸? 그렇게 마음까지 굳게 먹었지만 목이 말라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끌려 어느새 점원에게 주문하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게다가 자리에 앉으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뻥 뚫린 공간에 여러 테이블이 가득한 터라 처음에는 번잡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막상 테이블에 앉아 1시간 정도 있어 보니 연희동의 다른 까페들보다 안정되고 쾌적했다. 나와 비슷하게 처음엔 거부감을 보였던 지인들도 ‘염탐’을 핑계로 몇 번 가보더니만 역시나 장소의 매력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게 뭘까? 지인들과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합의에 이른 결론은 ‘스타벅스는 손님들에게 눈치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심지어 1잔만 시켜놓고 여럿이 앉아 있어도, 도서관처럼 노트북을 펼쳐 놓고 공부를 해도 카운터의 직원들은 개별 손님들에게 눈치를 주지 않는다는 게 스타벅스가 주는 편안함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직접 운영하는 소규모 까페에서 달랑 1잔을 시켜놓은 채 오래 앉아 테이블을 독차지한다면 주인은 주인대로 심기가 불편하고 손님은 손님대로 자신에게 쏘아보는 주인의 레이저에 마음을 놓을 수 없다(물론 아랑곳하지 않는 손님은 논외로 하자).


(내가 자주 가던 스타벅스를 그려봤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스타벅스는 모든 지점이 직영이고 종업원들의 교육과 관리는 본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종업원들은 매출을 갉아먹는 ‘죽돌이 손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덜 팔아도 급여를 받는 데 회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스타벅스는 소위 ‘돈 많은 거대 다국적 기업’이지 않은가? 영세 사업자가 운영하는 까페와 달리 당당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다. 와이파이도 빵빵하고 여기저기 전원 콘센트도 많아서 오히려 오래 앉아 있기를 바라는 듯 한 분위기도 편안함을 배가하는 요소다.


물론 같은 손님 입장에서 이런 스타벅스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주변에 대학교가 있어서 그런지 주말이면 여기가 대학교 도서관인지 착각할 정도로 자리를 펼쳐 놓은 학생들이 많아서 정작 커피를 즐기러 찾은 손님들이 앉을 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1인용 자리도 많건만 4인 테이블에 떡 하니 휴대용 스탠드와 독서대를 세워두고 커다란 노트북을 두드려대는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이런 ‘죽돌이 손님’은 점원들이 좀 통제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스타벅스에서 심심해서 그린 그림



그럼에도 ‘남들에게 주목 받지 않을 권리’를 갖게 하는 스타벅스의 매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탁 트인 공간에서 만끽하는 ‘익명성’이 스타벅스의 진짜 매력은 아닐까? 앉아서 무얼 하든 관여치 않는 자유로움이 스타벅스의 또다른 힘은 아닐까? 작은 까페에 주인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은 어색하기 그지 없다. 커피맛이 특별하지 않거나 주인과의 친밀함 없이는 매일 가기 어렵다. 온라인 상의 교류가 더 편한 세대들에게 각자가 섬처럼 앉아 있는 스타벅스야말로 비록 물리적으로는 오프라인이지만 가상세계의 연장이다. 


개인적으로 나도 스타벅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침에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앞 스타벅스에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동안 앉아 책도 쓰거나 고객에게 줄 보고서를 작성하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5년 간 세 권의 책을 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와 생각하니 바로 스타벅스가 보장하는 ‘익명성’ 덕분이었을 게다. 이 또한 물리적인 공간의 힘일 게다. 그리고 이것이 죽돌이 손님 때문에 잃어버리는 매출 기회를 충분히 보상 받는, 눈에 보이지 않는 스타벅스의 경쟁력일 게다. 스타벅스를 보니 커피맛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커피를 팔지 않고 공간을 파는 게 스타벅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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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이론적인 내용과 학술적인 용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사건이나 경험을 경영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이 경영일기의 취지입니다. 말 그대로 일기인 탓에 다소 두서가 없고 덜 체계적이라 해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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