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컨설턴트 A군을 데리고 컨설팅을 진행하던 어느 날이었다. 재무제표를 바탕으로 인건비 지출의 적정성을 분석하는 작업을 A에게 지시했다. A는 그 작업을 언제까지 마쳐야 하나며 나에게 물었다. “그 작업은 하루면 충분해. 다른 일로 바빠질 것 같으니 지금 시작해 줘.”, 라고 답해줬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너무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시간을 더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마음 약한 내가 어쩌겠는가? 결국 3일의 시간을 A에게 주면서 “납기는 반드시 지켜라.”는 다짐을 받아두었다.
그런데 요놈 봐라! 처음 이틀은 빈둥빈둥 놀며 인터넷과 메신저에 빠져 키득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당장에 호통 칠까 하다가 약속한 기일까지 어쨌든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때 가서 혼내줄 요량이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A는 슬금슬금 관련 자료를 챙기고 하는 척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꼼지락대더니 저녁때가 되자 쓱 하고 뭔가를 내놓았다. 내가 지시했던 작업 결과였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알록달록 총천연색으로 장식된 문서였다. 그 문서의 모양새는 차치하고서라도, 도대체 숫자들이 서로 맞지 않았다. 급하게 한 티가 팍팍 났다. 화가 난 나는 A에게 그동안 지켜 본 바를 이야기하며 왜 빨리 분석을 시작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물었다.
A가 대답했다. “작업을 하기 전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어이쿠! 속으로 불덩이가 솟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세상에, 간단한 숫자계산에 길고긴 사색의 시간이 요구된다니 어이가 없어서 나중엔 웃음만 나왔다. 그 이후에도 그런 식의 태도를 강력히(?) 견지하는 A를 결국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증후군?여러분은 학창시절에 교수가 과제를 내주면 거의 습관적으로 “너무 시간이 촉박해요. 조금 더 시간을 주세요.” 라는 앓는 소리를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교수가 10일의 시간을 줬다면 처음 5일 정도는 아예 신경 끄고 다른 일을 하다가, 3일 정도는 고민 좀 해보고, 막판이 돼서야 부랴부랴 해내지 않았었나?
이것을 ‘학생 증후군’ 이라고 한다. 즉 어떤 작업을 수행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예측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실제 소요될 시간에다 여유시간(Slack Time)을 덧붙여 부풀리는 증상을 말한다. 이 학생 증후군을 ‘직장인 증후군’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회사 여기저기에 이런 증상을 보이는 직원들이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혹시 여러분이 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러면 분명 하루 밖에 안 걸리는 일에 3일이나 5일의 시간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가 당신에게 차를 가지고 주어진 시간 안에 잠실에서 종로까지 와달라고 지시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그 일이 여러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해보자.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교통체증이라는 변수 때문에 어쩔 때는 30분밖에 안 걸리지만 최악의 경우 2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에게 얼마의 시간을 달라고 요구할 것 같은가? 백이면 백 2시간 정도는 줘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업에 소요되는 최대시간을 그 작업의 실질적인 수행시간으로 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시간이 소요될 확률은 매우 적은데도 말이다.
프로젝트가 질질 늘어지는 이유
어떤 프로젝트가 있는데, 여러분이 A, B, C 3명의 프로젝트 멤버를 거느린 프로젝트 매니저라고 가정해보자.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여러분이 멤버들에게 각자가 맡은 작업이 얼마나 걸릴 것 같은지 물어봤더니 A가 5일, B가 6일, C가 7일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여러분은 모두 더해서 총 18일을 프로젝트 소요시간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각자가 답한 소요시간에는 이미 여유시간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비율이 개인별로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A, B, C가 각각 1일, 2일, 3일의 여유시간을 나름대로 계산에 넣어뒀다면, 실제 프로젝트 소요시간은 4일, 4일, 4일로 총 12일이다. 18일과 비교할 때 6일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프로젝트 매니저인 여러분은 A, B, C가 답한 결과인 18일에다 5일 정도를 덧붙여서 모두 23일 걸린다고 상사에게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18일을 경과하더라도 비난을 피할 수 있겠다 생각한 탓이다. 결국 12일에 끝날 일이 11일이 더 보태져서 23일이 지나야 끝나는 불합리한 현상이 발생한다.
이 프로젝트에 관여된 의사결정자들이 겹겹이 존재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부장 보고를 위해 2일 정도 여유시간을 붙이고, 부사장 보고를 위해서는 3일, 사장 보고를 위해서는 5일 정도를 늘이는 따위의 행위 말이다.
이렇게 되면 11일에 끝날 일이 33일이나 걸려 겨우 끝난다! 단계 단계를 지날 때마다 하루하루씩 늘어나는 게 뭐가 대수냐고? 조직 전체로 생각해보면 그 양은 엄청나다. 남들이 1년에 할 것을 3년이 지나야 겨우 해낸다면, 우리 회사는 그만큼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다.
무조건 빨리 빨리?
H사 회장이 연구개발센터 건설 현장을 찾아가 금일봉을 전달하면서 예정된 공기보다 앞당겨 달라는 말을 수차례 내렸다는 말이 있었다. 무슨 이유로 공기 단축을 지시했는지 모르겠지만, 연구개발센터에 남다른 애정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하루 바삐 건립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안 좋게 이야기하면 그의 조급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프로젝트 완료 시점에 대한 예측을 일단 믿으려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알게 모르게 여유시간을 끼워 넣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과를 빨리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100일 걸릴 예정이라고 보고하면, 앞뒤 안 가리고 20일 정도를 줄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프로젝트 실무자들은 관리자의 한마디에 일률적으로 프로젝트 일정을 압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상례이다.
보통 할 일이 별로 없는 관리자일수록 결과를 재촉하길 좋아한다. 그 일 이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다그쳐 줘야 권위가 선다는 유치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결과를 제출하여 검토를 요청하면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다.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것이 무능한 관리자의 단면이다.
이러한 관리자의 습관 때문에, 아예 애초부터 125일 정도 걸릴 거라 부풀리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을 빨리 끝내려는 관리자의 시도가 일을 늦게 끝마치도록 유도하는 꼴이 된다. 결국 관리자나 프로젝트 실무자나 Lose-Lose 게임이 되는 것이다.
조직의 민첩성을 위해
실행력을 저해하는 요소의 첫째는 마지막에 가서야 일을 시작하는‘직장인 증후군’이고, 둘째는 겹겹이 쌓인 의사결정단계이며, 셋째는 관리자의 대책 없는 조급증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를 격파한다면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나이 먹은 직장인들이 학생들처럼 징징거리며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당장 실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관리자가 역시 중요하다. 본인의 경험을 충분히 떠올리며 작업에 소요되는 실제 시간과 작업품질의 목표를 명료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렇다고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지나치게 빠듯한 시간을 강요하지는 말라. 부하직원들이 알아서 요리조리 피할 궁리만 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복잡한 의사결정 단계가 있다면 이를 과감히 줄여야 한다. 모회사 이야기를 들어보니, CEO가 중간관리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실무자의 보고만 받는다고 한다. 조직도를 펼쳐 놓고 한번 살펴 보는 것이 어떨까? 자리를 주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장(長)’이 얼마나 많은지 볼 수 있을 것이다.실행력을 높이려면 답은 하나다. 조직을 혁신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