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반쯤 감긴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싶다. 산자락을 낮게 휘감는 희고 풍성한 구름을, 그 밑으로 추억처럼 긴 꼬리를 끌며 지나는 기차를, 몇 가닥의 서늘한 바람이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고요한 풍경을 반쯤 감은 게으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사는 게 재미없고 삶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반복되는 일상을 뿌리치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럽지 않은 곳으로 숨어 들고 싶다. 그곳에서 나른한 몇 날을 보내고 싶다. 맑은 물가에 앉거나 늘푸른 고목 아래에 누워서 끝내 읽지 못했던 1980년대의 연애소설을 읽는다면 어떨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깊고 푸른 밤’처럼 10%쯤 쓸쓸해지고 싶다.
아픈 대목이 나오면 책을 덮고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다가 잠들면 그만. 그렇게 읽다가 잠들다가, 한껏 빈둥빈둥 거렸으면 좋겠다. 시간이 멈춘 듯 구름은 산모롱이에 걸리고 기차는 느릿느릿 간이역으로 들어온다. 나는 작은 정물이 되어 그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고 싶다.
어느덧 별이 뜨고 지평선 너머로 하루가 잠길 때, 푸른 잔디에 누운 평화로운 양떼처럼 꿈을 꾸고 싶다. 그 옛날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꿈을.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내는 꿈을. 그리하여 그 옛날 차마 하지 못했던 용서의 말을 수줍게 전하는 꿈을 꾸고 싶다.
때론 반쯤 닫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추억하고 싶다. 내가 너에게서 받았던 상처보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상처를 위하여, 상처가 상처로 감각되지 않고 그저 증류된 기억의 한 페이지로 갈무리될 수 있도록 마음의 한 켠일랑 닫아둬야지.
상처를 상처로 기억할수록 스스로를 용서 못한 채로 살아가야 함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한껏 외쳐버린 고백의 말보다, 반쯤은 숨기고 반쯤은 내보이는 가난함이 길고긴 삶을 견뎌내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내 몸의 한 쪽 끝에서 또 다른 한쪽으로 투명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그 물 위에 희고 고운 그리움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누군가 한 뜀 두 뜀 징검다리를 밟고서 내 안으로 들어오겠지. 그의 마른 이마에 내 볼을 맞대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작은 그의 손을 잡고서 함께 저무는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련다. 열려진, 그러나 반쯤은 닫아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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