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한지 불과 2개월 만인 지난 4월 18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취임 초기는 지난 정권의 정책을 인수 받아서 국정 운영의 새 방향 등을 수립하기 위해 꽤 분주하고 번다한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 시절부터 부시를 만나지 못해 안달하다가 망신만 톡톡히 당한 이명박 대통령은 뭐가 그리 급해서 방미를 서둘렀을까? 임기가 6개월 정도 밖에 남지 않아서 레임덕에 허덕이는 부시 대통령에게 무슨 이유로 쇠고기 전면 개방이라는 초대형 선물을 안겨줘야 했을까?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미국이라는 '상왕(上王)'께 제일 먼저 안부인사를 여쭙고 조공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들었는가?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과 사업의 기조를 보면 미국의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 하에 추진하겠다는 대운하 사업은 고리짝 같은 미국의 뉴딜 정책을 배낀 듯한 냄새가 난다. 또한 건강보험과 공공기관의 민영화 추진에는 경쟁을 통한 효율성 추구라는 미국적 실용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 밖에 여러 정책 발의의 배경 근거들로 하나같이 '미국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그토록 동경하고 경외할 대상일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왜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인가? 과연 미국의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생각하는가? 알다시피 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이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 또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미국이 지병에 시달리는 늙은 코끼리라는 증거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답지 않게 미국의 10대 임신률과 영아 사망률에 있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평균수명에 있어서도 77.5세로서 상위 25개국 안에 들지 못한다. 반면 한국은 78.5세로 미국보다도 높다.
경제학자인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은 그 원인을 의료보험의 민영화 등으로 심화된 소득 양극화에서 찾고 있다.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최하위 40%의 전체소득보다 많은데, 이는 일본이나 유럽 국가보다 훨씬 격차가 큰 것이다. 윌킨슨은 소득의 격차가 불만을 야기하고 신뢰를 무너뜨려서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미국의 사회적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소득 양극화가 발생한 근본적 이유는 과도할 정도로 경쟁을 권장하는 미국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적 유전자, 즉 밈(meme)에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라는 밈이 일종의 종교처럼 숭상되는 나라이다. 개인은 독립된 개체이므로 모든 결정은 개체 자신이 독자적으로 내리며 각자가 발생시킨 성과는 개인에게 내재된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강하다.
예를 들어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각각 독자적으로 진행했던 두 진영의 대표자들은 누가 업적의 주인공인지를 놓고 자기네들끼리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직간접적인 기여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지, 몇몇 대표자가 혼자 힘으로 어느 날 갑자기 성취해 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인주의는 항상 ‘1명의 아이콘’을 옹립하기 위해 애쓴다.
개인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대부분은 집단 내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문화적인 조건반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의 성과는 많은 부분 숨어있는 타인들의 기여와 이타적 행동의 덕택이라는 점을 미국 사회는 기질적으로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서부 개척 시대 때부터 미국인들의 피에 자연스레 흐르고 있는 것으로서, 개척자적인 성향은 개인 간의 무제한 경쟁을 권장하고 미화하는 방향으로 이미 변질되어 있다. 미국 국민의 건강 수준을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린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의료보험 서비스의 민영화는 집단 전체의 이익(국민의 건강)을 높이기 위한 메커니즘이 하위집단(민영 의료보험사)끼리의 무한경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집단 전체의 이익을 얼마나 해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지구의 환경까지 위협하고 있다.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 이상이라는 막대한 양을 차지하는 미국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합의된 ‘교토 의정서’ 가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상위집단(세계)의 이익보다는 하위집단인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가 보여주는 이기심의 절정이며, 세계 제1의 강대국답지 않은 부끄러운 행동이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rnst F. Schumacher)는 “세계 인구의 6%를 지탱하기 위하여 세계 1차 자원의 40%를 사용하면서도 인간 행복, 복지, 평화 또는 문화 수준에 이렇다 할 개선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 데 누가 미국 경제를 효율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스템과 정책 기조를 답습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제1의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라크 침공과 같은 깡패짓을 서슴지 않으며 우방국가에게 썩은 고기를 강매하려는 그들이 과연 우리가 조아려야 할 상국(上國)으로서 마땅한가?
5월 13일자로 방영된 PD수첩에서 어느 미국 상원의원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모든 종류의 쇠고기를 개방하지 않으면 FTA 비준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동경하고 경외해야 할 나라가 절대 아니라, 질 나쁜 깡패이고 탐욕스럽고 개걸스러운 '개'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깡패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졸졸 따라 다니는 우리 정권의 무조건적인 짝사랑이 지극히 안타까웠다.
(위의 글 중 일부는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