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미쳤어요!   

2008. 5. 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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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직원들은 어떤 목표가 정해지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한다.
     제 아무리 어려운 주제의 일이라도 직원들은 화합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직원들의 '도전정신'은 최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인터뷰 때 나온 이야기다. 나는 그 직원의 말을 듣고서 머리를 갸웃했다. '도전'이란 말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도전'이란 말의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 내린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일단 도전이란 단어에는 무엇인가를 향한 '반항'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타파할 대상이 반드시 '도전한다'는 동사의 목적어로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타파해야 할 대상이란 전통, 규칙, 습관 등처럼 이미 여러 사람들이 '바꾸기 힘들며 신성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을 말한다. 이런 모든 '권위'들을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따져보면서 옳은 것은 받아들이고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깨뜨려 나갈 때 우리는 그것을 도전이라고 부른다.  요약하면, 도전이란 모든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다. 그 권위의 크기와 범위가 어떻든 상관없이 말이다.

도전 =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열심히 일하거나 협력을 잘 해서 목표를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도전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해내기 어려운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것이 바로 도전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제한하는 숱한 권위(그게 무엇이든 간에)를 깨뜨리려는 의지와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우리는 그걸 도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한 그 직원의 회사는 전반적으로 권위를 타파하려는 도전 의지보다는 오히려 권위가 회사의 안정적인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회사의 문화가 도전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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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맹목적으로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가장 큰 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던 실업자 시절에 그는 물리학 논문들을 탐독하며 마음을 달래곤 했는데, 유명한 학자들의 논문에서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편지를 보내어 오류를 지적하곤 했다. 그 때문에 그는 '권위자'들의 분노를 사서 소망하던 대학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고 특허사무소의 사무관으로 취직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도전 의지를 결코 꺾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그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그의 무모한 도전에 있었다. 사실 동시대 학자인 앙리 푸엥카레도 상대성 원리의 근처까지 이르렀지만, 그는 여전히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함몰된 탓에 과거의 이론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로서 '에테르'라고 하는 가상의 물질을 고집하느라 위대한 발견의 문턱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반면 아인슈타인은 거추장스러운 기존의 틀을 폐기하면서 물리학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로 인정 받는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역시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역시 위대한 물리학자로 불리는 닐스 보어가 파인만이 근무하던 곳(로스엘러모스)에 세미나를 하러 온 일이 있었다. 닐스 보어는 원자의 구조에 대한 독창적인 가설을 제시한 학자로서 당시에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신적인 존재로 여겨진 사람이었다.

보어가 세미나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도중에 파인만은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미쳤어요!" 그때 파인만은 박사학위를 갓 따고서 교수 자리를 알아 보던 햇병아리에 불과했다. 파인만은 조금이라도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가 누구든지 이같이 대들던(도전하던) 사람이었다. 보어는 파인만의 도전적인 태도에 감동한 듯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친구로서, 내가 잘못되면 바로 지적할 사람이다.
    나중에 내가 아이디어를 토론할 일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옳소'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필요 없다. 나는 그를 제일 먼저 불러서 이야기하고 싶다."

도전은 열정이 아니다. 도전은 묵묵히 수행하는 정진도 아니다. 도전은 자신을 옥죄는 '권위'라는 신성불가침의 껍질을 깨뜨리는 것이다. 열정도 정진도 그 껍질을 깨고자하는 도전이 없으면 의미 없는 소진일 뿐이다. 감히 대들 수 없을 것같은 안온(安溫)한 모든 권위를 차가운 머리로 의심해 보라. 만일 그것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면 파인만이 그랬듯이 이렇게 외쳐라. "당신은 미쳤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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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력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다   

2008. 5. 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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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있었던 모임에서 어떤 분이 하신 말씀이 가슴에 꽂힌다. 그 분이 말씀하신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이 말은 겉으로 드러는 부분은 10%도 채 안 되고 거의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 있음을 나타낸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는 "나의 능력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아. 나는 잠재력이 매우 큰 사람이지" 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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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이렇게 주장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능력, 즉 잠재력이 아무리 커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자기 능력의 '일각'만을 보여주는 것은 무능함의 증거다. 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능력을 겉으로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이다."

옳은 말씀이다. 물 속에 잠긴 잠재력의 크기에 만족해 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잠재력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다. 자신을 좀 더 나은 상태로, 좀더 소망하는 위치로 자리잡으려면 남에게 보이는 내 능력의 크기를 어떻게 키워갈지 고민해야 한다.

잠재력 ≠ 능력


"자네는 매우 잠재력이 큰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상대방의 말이 진심이건 아니건 간에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댄다.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기분을 오래 가져가면 곤란하다. 왜냐면 칭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듣는다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왜 자신이 잠재력을 진정한 능력으로 현실화시키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라. 언제까지 잠재력이 크다는 말만 들을 텐가?

빙산의 밑부분을 띄워 올려서 남에게 더 많은 부분을 보여야 한다. 살아 있는 동안 잠재력을 물 밖으로 띄워 올려라. 잠재력을 무덤 속까지 데리고 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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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많아지면 술주정꾼이 는다?   

2008. 5. 16.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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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통계학자가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술주정꾼 검거 건수와 침례교 목사 수 사이에 '정(+)'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본 통계학자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술주정꾼이 많아져서 그들을 계도하려고 목사들이 많아졌다"라고 말이다. 목사가 많아진 원인이 술주정꾼이 늘어서 그렇다는 소리다. 과연 그럴까?

한마디로 그의 결론은 엉터리다. 술주정꾼이 많아진 것이나 침례교 목사가 많아진 것이나 둘 다 미국 인구의 증가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술주정꾼과 목사 수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목사 수가 많아져서 그런 시대상황을 개탄(?)하느라 술주정꾼이 많아졌다"고는 왜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위의 일화는 실제가 아니라,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자신의 저서 '풀 하우스(Full House)'에서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인하는 경향을 비꼬기 위해 쓴 내용이다.(각색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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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슨 가족'에 캐릭터로 출연한 스티븐 제이 굴드


전문가들이라고 별 수 없다. 그들도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받아들이는 오류에 쉽게 빠지고 만다. 어떤 분이 보내 주시는 뉴스레터를 보니, 이런 제목이 눈에 띈다.
"경총, '성과배분제 실시 기업이 경영성과 좋아' "
(경총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발표 내용은 성과배분제를 도입해야 기업 성과가 좋아진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를 통해 경총은 기업이 성과를 높이려면 성과배분제를 도입하라고 주장한다. 언뜻 보면 옳은 말 같다. 명제 형식으로 바꾸어 보면 아래와 같다.

                                      "성과배분제 도입 --> 기업 성과 향상 "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이다. 자료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성과배분제 도입 여부와 기업성과의 향상 여부 간에 '정(+)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지, 결코 두 요소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업성과를 향상(결과)시키려면, 성과배분제를 도입(원인)해야 한다는 인과관계로 오해하면 안 된다.

통계분석이라는 어려운 도구를 써야 권위가 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지만, 전문가들은 사람들을 헛갈리게 해서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려는 행위를 하곤 한다. 이런 식의 보고서가 딱 그런 경우이다.

기업성과를 달성하기 위한 요소는 성과배분제 이외에 무수히 많다. 어쩌면 성과배분제 도입 때문이 아니라 제품이 좋거나 시장 상황이 좋아서 기업의 성과가 높아졌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업성과가 좋기 때문에 성과배분제를 도입할 만한 여유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별 이유없이 우연히 그런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다.

이런 보고서를 볼 때마다 분석의 내용이 상관관계를 말하는지, 인과관계를 말하는지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성과배분제를 기업성과를 높이는 '도깨비 방망이'로 오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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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 좀 세게 하지 마슈!   

2008. 5. 1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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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할 때 세게 쥐는 사람들이 있다. 어떨 때는 손이 얼얼할 정도로 꽉 쥐는 사람도 있다. 잡히고 난 다음, 기분이 좋지 않다. 게다가 그사람의 손이 축축한 상태라면 바로 화장실로 가서 손을 벅벅 씻고 싶어진다.

어떤 사람은 처음엔 약하게 쥐다가 점점 강도를 높여서 세게 쥐면서 마무리를 짓기도 한다. 이 경우도 기분이 안 좋다. 마치 내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불쾌하다. 또 어떤 이는 이성이나 아이의 손을 잡듯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그럴 땐 내가 먼저 손을 빼 버린다. 민망하거나 말거나 그렇게 한다. 그래야 버릇을 고칠 테니까.

왜 그렇게 세게 쥘까? 약하지도 세지도 않게 딱 적당한 강도로 악수를 하면 안 되는 걸까? 처음 만나 악수를 하면서도 기(氣)싸움에 지지 않으려는 의도인 것 같다. 기선 제압을 위해 악수처럼 좋은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이봐, 까불지 말라고. 난 당신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이야.' 라는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강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수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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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다. 상대방을 제압해야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구분 못하고 무조건 악수를 세게 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악수 때문에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민감한 협상을 하기 전에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상대의 기를 꺾을 의도로 세게 잡는 건 그럴 수 있다해도, 친목을 다지기 위한 만남에서 조차 손이 얼얼할 정도로 잡고 흔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악수 습관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 손을 꽉 쥐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어, 이 사람 나를 제압하려고 하네? 하지만 어림 없어!' 라고 내 쪽에서 역공을 취할 태세를 갖춘다.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내게 한 수 접고 들어 온 것이다.

악수야 그 사람 마음이겠지만, 그나저나 악수 좀 세게 하지 마세요! 손 아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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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라는 깡패국가   

2008. 5. 1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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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한지 불과 2개월 만인 지난 4월 18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취임 초기는 지난 정권의 정책을 인수 받아서 국정 운영의 새 방향 등을 수립하기 위해 꽤 분주하고 번다한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 시절부터 부시를 만나지 못해 안달하다가 망신만 톡톡히 당한 이명박 대통령은 뭐가 그리 급해서 방미를 서둘렀을까? 임기가 6개월 정도 밖에 남지 않아서 레임덕에 허덕이는 부시 대통령에게 무슨 이유로 쇠고기 전면 개방이라는 초대형 선물을 안겨줘야 했을까?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미국이라는 '상왕(上王)'께 제일 먼저 안부인사를 여쭙고 조공의 예를 갖춰야 한다는 의무감이라도 들었는가?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정책과 사업의 기조를 보면 미국의 그것을 모방하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경제를 살린다는 미명 하에 추진하겠다는 대운하 사업은 고리짝 같은 미국의 뉴딜 정책을 배낀 듯한 냄새가 난다. 또한 건강보험과 공공기관의 민영화 추진에는 경쟁을 통한 효율성 추구라는 미국적 실용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다. 그 밖에 여러 정책 발의의 배경 근거들로 하나같이 '미국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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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우리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과연 그토록 동경하고 경외할 대상일지 생각해 봐야 한다. 왜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인가? 과연 미국의 정치,경제,사회 시스템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생각하는가? 알다시피 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이 전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 또는 부정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미국이 지병에 시달리는 늙은 코끼리라는 증거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 제1의 경제대국답지 않게 미국의 10대 임신률과 영아 사망률에 있어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다. 평균수명에 있어서도 77.5세로서 상위 25개국 안에 들지 못한다. 반면 한국은 78.5세로 미국보다도 높다.

경제학자인 리처드 윌킨슨(Richard Wilkinson)은 그 원인을 의료보험의 민영화 등으로 심화된 소득 양극화에서 찾고 있다.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최하위 40%의 전체소득보다 많은데, 이는 일본이나 유럽 국가보다 훨씬 격차가 큰 것이다. 윌킨슨은 소득의 격차가 불만을 야기하고 신뢰를 무너뜨려서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미국의 사회적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같은 소득 양극화가 발생한 근본적 이유는 과도할 정도로 경쟁을 권장하는 미국 사회의 시스템과 문화적 유전자, 즉 밈(meme)에 있다. 미국은 개인주의라는 밈이 일종의 종교처럼 숭상되는 나라이다. 개인은 독립된 개체이므로 모든 결정은 개체 자신이 독자적으로 내리며 각자가 발생시킨 성과는 개인에게 내재된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이 강하다.

예를 들어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를 각각 독자적으로 진행했던 두 진영의 대표자들은 누가 업적의 주인공인지를 놓고 자기네들끼리 한동안 옥신각신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직간접적인 기여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지, 몇몇 대표자가 혼자 힘으로 어느 날 갑자기 성취해 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개인주의는 항상 ‘1명의 아이콘’을 옹립하기 위해 애쓴다.

개인이 내리는 의사결정의 대부분은 집단 내 타인과의 상호작용과 문화적인 조건반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개인의 성과는 많은 부분 숨어있는 타인들의 기여와 이타적 행동의 덕택이라는 점을 미국 사회는 기질적으로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서부 개척 시대 때부터 미국인들의 피에 자연스레 흐르고 있는 것으로서, 개척자적인 성향은 개인 간의 무제한 경쟁을 권장하고 미화하는 방향으로 이미 변질되어 있다. 미국 국민의 건강 수준을 후진국 수준으로 떨어뜨린 주범으로 지목 받고 있는 의료보험 서비스의 민영화는 집단 전체의 이익(국민의 건강)을 높이기 위한 메커니즘이 하위집단(민영 의료보험사)끼리의 무한경쟁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집단 전체의 이익을 얼마나 해치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미국의 개인주의는 지구의 환경까지 위협하고 있다.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 이상이라는 막대한 양을 차지하는 미국이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합의된 ‘교토 의정서’ 가입을 거부하는 이유는 상위집단(세계)의 이익보다는 하위집단인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개인주의가 보여주는 이기심의 절정이며, 세계 제1의 강대국답지 않은 부끄러운 행동이다.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Ernst F. Schumacher)는 “세계 인구의 6%를 지탱하기 위하여 세계 1차 자원의 40%를 사용하면서도 인간 행복, 복지, 평화 또는 문화 수준에 이렇다 할 개선의 자취가 보이지 않는 데 누가 미국 경제를 효율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은 전혀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시스템과 정책 기조를 답습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제1의 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이라크 침공과 같은 깡패짓을 서슴지 않으며 우방국가에게 썩은 고기를 강매하려는 그들이 과연 우리가 조아려야 할 상국(上國)으로서 마땅한가?

5월 13일자로 방영된 PD수첩에서 어느 미국 상원의원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모든 종류의 쇠고기를 개방하지 않으면 FTA 비준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동경하고 경외해야 할 나라가 절대 아니라, 질 나쁜 깡패이고 탐욕스럽고 개걸스러운 '개'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깡패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졸졸 따라 다니는 우리 정권의 무조건적인 짝사랑이 지극히 안타까웠다.

(위의 글 중 일부는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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