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에 중독됐는가?   

2011. 9. 2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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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포스팅에서 에드워드 L. 데시의 '소마(Soma) 퍼즐' 실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실험은 퍼즐 과제 하나를 완성할 때마다 1달러를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내면의 동기'가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실험이었죠. 보상을 받으며 퍼즐 과제를 수행한 사람들은 보상이 중단됐을 때 퍼즐을 하고 싶다는 동기가 떨어진다는 것이 그 실험의 시사점이었죠.

데시는동기부여에 어떤 요소가 큰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 소마 퍼즐 실험을 여러 가지로 변형해서 수행했습니다. 



첫 번째로 '벌'이나 '위협'이 동기부여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를 둘로 나누어 한 그룹의 피실험자들(자신이 가르치는 대학생들)에게 만약 소마 퍼즐 과제를 제대로 제 시간에 풀지 못하면 벌을 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아마도 학점을 적게 주겠다는 식으로 위협했겠죠. 그리고 다른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그런 위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벌이라는 위협을 받은 학생들은 퍼즐 과제를 잘 풀었습니다. 이 결과만 보면 위협이 성과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하기 쉽겠죠. 하지만 지난 번 실험처럼 학생들이 실험실에 소마 퍼즐과 함께 남겨졌을 때, 위협을 받은 학생들은 소마 퍼즐을 가지고 놀려고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벌을 주겠다는 위협으로 인해 내면의 동기가 크게 약화됐다는 증거죠.

이로써 보상이나 위협은 동기를 부여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동기를 훼손시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신상필벌은 조직의 위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직원들 내면의 동기를 북돋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남발할 경우 그들의 동기를 크게 저하시키고 맙니다.

두 번째 실험의 주제는 '경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을 시킬 때 동기가 크게 올라가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들과 겨루어야만 재미를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운동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을 보이죠. 족구 게임을 할 때도 '내기'를 해야 내면의 동기가 상승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인지 조직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회사 내에서도 경쟁 방식을 동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만연해 있습니다.

그러나 실험 결과는 예상과 다르게 나왔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 절반에게 소마 퍼즐 과제를 내주면서 앞에 앉은 실험조교(경쟁자 역할을 맡은)와 겨루어서 '승리'해야 한다고 목표를 부여했습니다. 나머지 절반의 피실험자들에게는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실험조교와 나란히 앉아 퍼즐을 완성하도록 했죠.

경쟁자 역할을 맡은 실험조교는 매번 일부러 져주었기 때문에 피실험자들이 항상 승리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경쟁에서 매번 이기고도 내면의 동기는 경쟁 상황에 처하지 않은 피실험자들보다 훼손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쟁 상황이 끝나자 소마 퍼즐 과제가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던 겁니다. 보상이 중단됐을 때 퍼즐에 흥미를 느끼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겨루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기'를 걸지 않으면 족구 게임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에 중독된 셈입니다.

세 번째 실험에서 사용된 조건은 목표 설정에 대한 '통제'였습니다. 데시는 첫 번째 그룹 학생들에게 어떤 퍼즐 과제를 풀 것인지, 그것을 얼마 동안 풀어낼지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A 과제를 10분 안에 풀겠다"라고 정하게 한 것이죠. 그런 다음 두 번째 그룹 학생들에게는 첫 번째 그룹 학생들이 정한 대로 퍼즐을 풀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그룹은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한 것이고 두 번째 그룹은 타율적으로 지시를 받은 셈입니다.

이 실험은 여러분이 충분히 예상했을 겁니다. 자율적으로 퍼즐 과제와 제한시간을 결정했던 첫 번째 그룹 학생들이 (혼자 남겨졌을 때) 소마 퍼즐을 오래 가지고 노는 모습이 관찰된 것으로 보아 내면의 동기가 강화된 것이죠. 반면 두 번째 그룹 학생들은 그보다 못했습니다. 사실 두 그룹 모두 똑같은 과제, 똑같은 제한시간이 주어졌지만 자율이나 타율이냐에 따라 내면의 동기는 크게 영향 받았던 겁니다.

흔히 직원들은 상사의 지시가 불명확하거나 목표가 top-down으로 주어지지 않으면 뭘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그만큼 일에 대한 의욕도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직원들을 방치하고 나 몰라라 하면 안 되겠지만, 일일이 세부적으로 목표를 정해주고 통제를 가하는 '마이크로 매니징' 또한 직원들의 동기를 갉아먹는, 좋지 않은 행동이죠.

보상, 위협, 경쟁, 통제 모두 직원들의 동기를 고양하는 데 악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입니다. 데시는 특히 보상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좋은 길은 보상을 동기부여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보상이 잘된 일에 대한 인정이나 감사의 표시로만 보상을 사용해야 하지, 전면적인 성과주의 인사제도처럼 보상을 동기부여의 전략으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동기부여는 직원의 자율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면 아무리 긍정적이라 해도 내면의 동기를 발화시키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훼손시키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직원들의 자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며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이 올바른 조직관리이자 직원관리가 아닐까요?

우리 기업이 보상, 위협, 경쟁, 통제에 중독되지 않았는지 뒤를 돌아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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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비정상으로 판단한 의사들   

2011. 9. 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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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에 신생아들 중 일부는 가슴샘 혹은 흉선이라고 불리는 호르몬 분비기관이 비대해 기도를 압박하는 바람에 질식으로 사망하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고 합니다. 일명 '흉선림프특이체질'이라고 부르는 증상이었습니다. 흉선은 신생아 때부터 커지기 시작하여 사춘기 때 가장 커지는데, 그 발육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서 사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죠.

이렇게 흉선이 과도하게 커지는 일을 사전에 막으려면 초기에 확대된 흉선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당시의 의사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방사선을 사용한 치료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방사선 치료법은 그때(1920~1950) 첨단 의학 기술로 각광을 받았죠. 그러나 수천명이 이 치료법을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흉선 비대로 인해 사망하는 일들이 발생했죠. 게다가 흉선의 비대와 질식사와의 관계를 설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문제는 치료법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비대해졌다'라고 판단한 흉선이 사실은 정상적인 크기의 흉선이었습니다. 의사들이 정상적인 크기의 흉선을 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들이 연구용으로 사용한 시체가 전체를 대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해부를 위해 쓰인 시체들은 거의 모두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습니다. 돈이 없어서 친척 중 누군가가 사망하면 해부학 실습용이나 연구용으로 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죠.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영양 섭취가 불가능했던 죽은 자의 흉선은 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학자와 의사들이 해부를 통해 관찰한 흉선은 사실 비정상적으로 작은 것이었죠. 그래서 의사들은 그렇게 작은 크기의 흉선을 정상적인 크기라고 여기고 말았던 겁니다.

애초부터 잘못 선별된 표본인데 그것을 가지고 전체를 설명하려 한 오류를 범한 겁니다. 그러니 멀쩡한 크기의 흉선을 가진 아이들에게 예방한답시고 방사선 치료를 해봤자 소용이 없었던 것이죠. 쓸데없이 방사선을 목구멍 안으로 쬐여서 오히려 다른 질병을 유발했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흉선 말고도 부신의 정상적인 크기를 잘못 판단해서 엉뚱한 치료를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부신은 보통 아드레날린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인데,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스트레스와 고통이 적기 때문에 부신의 크기가 작다고 합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큰 부신을 가지고 있죠. 

마찬가지로 의사들이 주로 해부를 한 시체들은 거의 대부분 가난한 자들의 것이었기에 큰 크기의 부신을 정상적인 크기의 부신으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주로 '특발성 부신 위축'이라는 증상을 앓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편향을 '가용성 편향'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접하거나 취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을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를 말하죠. 무엇인가를 판단할 때 자신이 가용성 편향에 빠져있지 않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판단한다는 것은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을 잡는 것 그 자체'입니다. 판단의 기준을 먼저 오류없이 세운 상태에서 결론을 내려야 옳은 판단이 되는 것이죠.

성급한 판단을 내리려는 마음의 관성을 이겨내야 1세기 전의 의사들처럼 엉뚱한 치료법으로 우왕좌왕하지 않을 겁니다(1세기 전이라고 했지만 요즘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자신의 판단을 성찰하는 뜻깊은 금요일 되십시오.

(*참고도서 : The TROUBLE WITH TESTOSTERONE: And Other Essays on the Biology of the Human Predicament, Robert M. Sapolsk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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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버려야 열정이 살아난다   

2011. 9. 22.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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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돈'이 동기부여의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많이 주면 그만큼 높은 성과와 목표를 달성하고, 돈을 많이 주지 못하면 반대의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성과에 따른 보상의 차등이 조직을 관리하는 데에 유용하다는 인식은 유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인 B.F. 스키너의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기대하는 행동을 보이면 즉시 보상하고, 그렇지 못하면 보상을 끊어 버림으로써 조직성과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직원들을 끌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직성과가 저조하면 으레 따라붙는 것이 성과주의 제도의 강화이고 직원들 간의 보상 차등을 통해 건전한 긴장감을 조성하겠다는 조치입니다. 상과 벌을 엄격히 적용하면 직원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리라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결과물들은 간단하고 명쾌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운 경제 발전의 혜택을 입은 미국인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죠. 학교나 기업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초하여 제도들이 수립되어 사람들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성과주의라는 미명 하에 그때의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돈이 진짜로 동기부여의 막강한 도구일까요? 보상이 없는 상태에서 재미있게 하던 일에 보상을 주기 시작하면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한 내면의 동기가 더욱 불타오를까요? 아니면 그 반대일까요? 에드워드 L. 데시(Edward L. Deci)는 카메기멜론 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지도교수인 빅터 브룸(Victor Vroom)과 함께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습니다. 때는 1969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대학생들 사이에서 소마(soma)라고 불리는 블럭퍼즐 게임이 유행했습니다. 이 퍼즐은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진 7개의 블럭을 가지고 갖가지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게임이었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들인 대학생들을 불러 모은 후에 종이에 그려진 서너 가지 모양을 
블럭을 가지고 만들어보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소마 퍼즐에 굉장한 흥미를 보였죠. 피실험자들이 하나의 모양을 완성하는 데에 주어진 시간은 10분이었습니다.

데시는 피실험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모양 하나를 완성하면 1달러를 주었고(지금으로 치면 1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는 보상), 두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보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상이 피실험자의 동기를 부여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였죠. 데시는 피실험자들이 하나의 모양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을 측정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짜로 의도한 것은 피실험자들에게 '실험이 끝났습니다'라고 알려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였습니다. 그는 피실험자들에게 실험 결과를 입력한 후에 설문지를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서 잠시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그런 다음, 방을 나간 후에 한쪽에서만 보이는 유리벽 뒤에 숨어 피실험자의 행동을 관찰했죠. 피실험자 주위에는 무료함을 달래줄 '뉴요커', '타임', '플레이 보이' 같은 잡지의 신간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물론 방금 놀이를 마친 퍼즐도 옆에 있었죠.

데시는 돈으로 보상 받은 피실험자들과 그렇지 않은 피실험자들이 혼자 남겨져 있을 때 과연 방금 자신들이 가지고 놀았던 소마 퍼즐을 계속해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행동(멍하니 앉아있거나 잡지를 뒤적이거나)을 할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돈으로 보상 받은 피실험자들은 실험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혼자 남겨질 때 퍼즐을 계속 만지작 거릴 가능성이 낮았습니다. 실험을 하기 전에 퍼즐을 주고 자유시간을 가지게 할 때는 즐겁게 가지고 놀던 사람들이 돈을 받고 실험에 응할 때는 그 보상에 길들여져 버린 겁니다.

보상에 길들여졌다는 것은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바로 하던 일을 멈춘다는 의미죠. 즉 외부에서 주어지는 보상은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동기를 끌어내는 데 역부족이며 오히려 내면의 동기를 감쇄시켜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을 뜻합니다. 돈을 충분하게 주면 신바람 나게 일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나 단선적인 생각이었음이 이렇게 간단한 실험만으로 증명되었죠.

데시는 이 실험 이후 1999년에 리처드 라이언(Richard M. Ryan), 리처드 쾨스트너(Richard Koestner)와 함께 실시한 메타 분석 연구에서도 보상이 내면의 동기를 해친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실험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보상의 한계를 충분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데시의 실험이 실시된지 40년이 넘게 흘렀지만 여기 저기에서 차등적 보상을 강조하는 성과주의의 그늘을 목격합니다. 서두에 말했듯이 무언가 잘 되지 않으면 직원들에게 동기를 북돋우어 조직성과를 높이려 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때 항상 '돈'이라는 간편한 수단이 따라 붙습니다.

어떤 조직은 다 합해봐야 얼마 안 되는 급여인상분을 가지고 직원들의 성과에 따라 차등 보상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더군요. 1년에 1인당 최대 100만원 정도의 차등일 텐데, 이런 보상 차등이 조직을 활성화시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겠지만, 차마 건드릴 엄두를 못내고 또 건드릴 의욕도 없어 보였습니다.

동기는 돈이라는 수단으로 결코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동기를 높일 수 있다 해도 돈을 줄 때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자신에게 돈이라도 많이 주면 좋겠다고 불평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보상에 길들여져 있다는 방증입니다. 하는 일이 재미있고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돈은 그저 이차적인 조건이라고 여길 테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패러다임(성과주의) 하에서 경영자와 직원 모두가 행동한 탓입니다.

금전적 보상은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동기를 절대로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감쇄시키고 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높은 보상을 추구하는 것은 외부의 통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종속되고자 하는, 경영자나 직원들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양성화하여 억지로 '그것이 옳다'고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돈을 버려야 열정이 살아납니다.

(*참고논문 : The effects of contingent and non-contingent rewards and controls on intrinsic motivation
(*참고논문 : A Meta-Analytic Review of Experiments Examining the Effects ofExtrinsic Rewards on Intrinsic Motiv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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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   

2011. 9. 2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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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스터 대학이 심리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데시(Edward L. Deci)과 그의 동료들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교사 역할을 할 피실험자들에게 아이들을 가르치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피실험자들(교사)이 가르쳐야 할 내용은 문제해결 방법이었죠. 데시는 피실험자들에게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주의사항을 자세히 일러 주고 문제해결 방법도 철저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데시는 교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학생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그러고는 교사들에게 두 그룹 중 하나를 가르치게 했죠. 그런데 두 그룹 중 하나의 그룹을 맡은 교사들에게는 이러한 지시를 별도로 내렸습니다. "가르친 학생들이 나중에 실시할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해 주세요." 성과를 높게 달성하라는 일종의 압박이었습니다. 다른 그룹을 맡은 교사에게는 별다른 지시를 따로 내리지 않았습니다.



수업의 과정은 모두 녹음되어 나중에 자세하게 분석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특이한 사항이 발견되었죠.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은 교사들이 그렇지 않은 교사들에 비해 수업 중에 말하는 시간이 두 배가 더 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학생들이 발언할 시간을 덜 주고 자신이 더 많이 말함으로써 수업을 끌고 갔다는 뜻이죠.

사용하는 문장의 성격을 살펴보니, 명령어는 세 배 더 많이, 통제적인 문구(have to, should, must 등)를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며 통제를 가했다는 뜻이겠죠. 학생들의 자율성을 훼손하면서 말입니다.

이 간단한 실험은 의미있는 시사점을 우리에게 줍니다. 높은 성적을 달성케 하라는 지시나 강한 바람이 교사들로 하여금 더욱 통제적으로 더욱 독재적으로 행동하게 만들고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과 자유로운 사고력을 방해하고 압박해서, 결과적으로(그리고 장기적으로) 기대하는 높은 성적이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교사들이 이렇게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으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가해진다는 데시의 실험 결과를 기업이라는 조직에 투영시키면 어떨까요? 알다시피 관리자(팀장 이상)들에게는 MBO나 BSC 등으로 성과에 대한 압박이 가해집니다. 
성과주의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경영방식은 압박이 있어야 개인의 의지가 발현되고 그에 따라 조직의 성과가 높아지리란 기대감 위에 존재합니다. 데시의 실험은 관리자가 성과를 달성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면 부하직원들을 통제하고 부하직원의 자율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결국 성과주의가 바라는 성과 극대화는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또한 크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관리자들이 부하직원들의 성과 창출 과정을 조력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배려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하직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회사에 충성심을 바탕으로 업무를 수행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도구를 통해 성과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함으로써 통제를 확산시키고 부하직원들의 자율성을 갉아 먹습니다. 결국 부하직원들의 학습능력과 직무역량을 저하시키죠.

이것 역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물론 관리자의 자율성(그리고 부하직원들의 자율성)과 위에서 아래로 가해지는 성과 압박이 균형을 잘 이루게 하면 좋겠죠. 하지만 균형을 잡기가 과연 쉬울까요? 현실적으로 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입니다.

부하직원들의 자율성과 기여심을 극대화하고 그에 따라 조직의 성과를 높이고 싶다면, 기계적이고 계량적인 도구를 사용한 성과주의 제도는 버려야 합니다. 혹자는 직원들의 자율성과 협력, 충성심 등과 같은 것들도 평가를 통해서 측정하고 독려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이런 생각을 가진 컨설턴트가 많아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직원들의 자율성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쉽지 않은 일이고, '이거다' 하는 확실한 방법도 없습니다. 어쩌면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게(있다고 주장하는 게) 이상하죠. 하지만 조직의 자율성을 키우는 데에 성과주의는 답이 절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팀장의 스트레스가 부하직원을 망칩니다. 그리고 조직도 망칩니다.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마세요. ^^ 

(*참고도서 : 'Why we do what we do', Edward L. Deci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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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이 좋으면 잘해야 '중박'이다   

2011. 9. 20.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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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식품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시장이 커피 시장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커피를 좋아하여 핸드 드립 세트를 구입해서 원산지 별로 다른 원두를 갈아 마시는 것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전자제품 매장을 돌아다니면 예전에는 없던 제품 카테고리가 눈에 띄더군요. 바로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입니다. 네스카페의 돌체 구스토, 밀리타, 일리 등 여러 가지 브랜드의 머신들이 당당하게 코너를 차지하고 있고 구입 문의를 하는 고객들도 끊이지 않더군요.

그 정도로 커피 시장이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크고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방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위 '다방 커피'로 대변되던 우리나라 커피 시장이 고급화되고 동시에 집에서도 커피를 추출해 마실 정도로 저변화되고 있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실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은 가격도 비싸고(업소용은 천만원 대 이상) 덩치도 큰데다가 사용법도 까다로워서 가정에서 사용하기가 버거운 제품이었습니다. 이랬던 머신이 앙증맞을 정도로 작아지고 사용법도 버튼 한 두 개만 누르면 곧바로 에스프레소가 추출돼 나오니, 기술이 참 많이 발전했구나, 란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헌데 이러한 소형 에스프레소 머신 기술은 최근에 나온 게 아니더군요. 역사를 따져보니, 197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 스위스의 바텔(Battelle) 연구소까지 이릅니다. 이 연구소가 개발한 머신 기술은 네슬레에 매각되어 상용화를 위해 추가적인 개발이 1980년대 중반까지 이루어집니다. 10년 넘게 기술을 갈고 다듬어서 시장에 출시한 머신의 이름은 '네스프레소'입니다. 네슬레와 에스프레소를 더해서 작명한 것이죠.

처음 네스프레소가 시장에 나왔을 때 에스프레소 애호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사용법이 간단할 뿐더러 맛도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스프레소 관계자들은 잔뜩 기대감을 품었죠.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참담할 정도로 차가웠습니다. 
초기에 네스프레소가 타겟으로 삼은 시장은 지금처럼 가정용 시장이 아니라, 레스토랑이나 까페, 사무실과 같은 B2B 시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레스토랑과 사무실 등에 시험 설치를 해주며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바리스타들은 그런 제품을 자신들의 밥줄을 위협하는 물건이라 여기고 꺼려하는 바람에 홍보 효과도 떨어지고 판매도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88년에 장 폴 가이야르라는 사람이 네스프레소에 영입되어 책임자가 됩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타겟 시장을 가정용 시장으로 선회합니다. 이사회의 반발이 컸지만 그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해서 이사회의 승인을 얻어냅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가정용 시장 개척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마시겠다는 니즈가 별로 없는 상태였고, 네스프레소에 들어가는 캡슐 하나의 가격도 고객들에게는 터무니하게 비싸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가이야르가 이사회의 승인을 어렵사리 얻어냈지만 네스프레소의 운명은 거기까지인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네스프레소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만든 '방아쇠'를, 가이야르의 후임인 헹크 크바크만이란 사람이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네스프레소에 관심을 가지고 구매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항공기의 1등석 탑승객이라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항공기 1등석에서 네스프레소로 만든 커피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네스프레소 머신을 체험하고 무료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네스프레소 부티크를 주요 도시 200개의 번화가에 세우고, 대형 백화점 속에 '매장 내 매장'을 설치하여 소비자들이 바로 가까이에서 머신을 작동시켜서 여러 가지 맛의 커피를 바로 즐길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게 소비자들로 하여금 직접 체험하는 기회를 극대화시킨 이유는 제품이 좋아도 막상 구매하려 할 때 주저하게 되는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에 대해 막연하게 가졌던 '어렵고 복잡하고 비싸다'는 인상을 깨뜨리는 것만이 네스프레소 수요 증가에 필수적인 방아쇠라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결과는 (적어도 현재까지는) 대성공입니다. 네스프레소만으로 연간 매출액이 30억 달러를 상회하는 성과를 달성 중이죠. 그리고 지금은 거대한 커피 소비 시장인 미국을 공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략적 시도를 꾀하고 있습니다. 커피 시장 전체의 규모는 크지만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는 미국인들은 10퍼센트도 안 되는 현실에서 네스프레소가 어떻게 없는 수요를 새로이 창출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처음 제품 프로토타입이 바텔 연구소에서 개발된지 이제 거의 40년이 됐습니다. 하지만 네스프레소 머신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때는 30년이 지난 2000년대 초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시사점을 얻습니다. 제품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리고 여러 가지 제반요건이 제품이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해도 수요를 촉발시키는 '방아쇠'가 없으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방아쇠란, 제품을 처음 알게 된 시점과 구입한 시점 사이의 시간 간격을 최소화시키게 만드는 촉매를 말합니다. 소비자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구매 습관, 막연한 선입견 등을 깨뜨림으로써 구매로 이어지기 전에 넘어야 하는 '활성화 에너지' 수준을 끌어내리는 역할이 바로 방아쇠입니다. 네스프레소는 자신들의 방아쇠로 '직접 체험'을 발견했던 것이죠.

제품만 잘 만들면 된다는 생각은 이제 구시대적인 마케팅 전략입니다. 그리고, 소위 4P라 불리는 전술적 마케팅을 잘 하면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 수 있다는 생각도 구시대적입니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려면 중간에 뛰어넘어야 할 활성화 에너지를 극복해야 하듯이,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관성을 파악하여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방아쇠 전략'을 고민해야 합니다. 좋은 제품이 방아쇠의 힘을 받아 시장으로 발사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품이 좋으면 잘해봤자 '중박'입니다. '대박'을 얻으려면 '방아쇠'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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