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휴스 의학 연구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연구소는 억만장자인 하워드 휴스가 설립한 비영리 연구기관인데, 1년에 의학 연구에 지원하는 돈이 7억 달러나 됩니다. 이 연구소는 이처럼 큰 예산을 가지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를 장려함에 있어서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발견되지 않은 불확실한 주제를 탐구하는 데 매진할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한다는 점입니다. 예산을 받기 위해 연구 과제를 신청할 때 해당 연구가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설득하지 못하면 연구 자금을 지원 받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죠.
연구 과제 신청건이 올라오면 그 과제와 관련하여 몇 명의 전문가를 선정하여 해당 연구 과제가 얼마나 성공 가능성이 큰지, 연구 결과가 얼마나 확실하게 산출될지, 연구 결과에 따른 효과가 얼마나 큰지를 납득시켜야만 하는 보통의 연구 조직과는 다릅니다. 애초에 휴스가 이 연구소를 설립할 때부터 유연하고 자발적이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연구가 조직의 지향점이었습니다.
'지식의 경계를 확장시킨다'는 모토 하에 이 연구소는 연구원들에게 상세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느라 '진을 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략적인 연구 방향만 제시하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연구 과제가 채택되면 5년간 자금을 지원하고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번 갱신되어 10년까지 연장해 줍니다. 10년이 되어도 연구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그때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데, 연구원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지원을 철회하는 속도를 조절한다고 합니다. 연구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야멸차게 자금줄을 끊는 보통의 연구 조직과 또한 다른 모습입니다.
하워드 휴스 의학 연구소(HHMI)의 문화와 정반대의 문화를 지닌 곳이 미국의 국립보건원(NIH)입니다. 연구원이 확실한 연구 결과를 보장하고 납득시켜야 예산을 편성해주는 철저한 연구 관리 시스템을 지닌 곳이죠. 피에르 아줄라이(Pierre Azoulay), 구스타보 만소(Gustavo Manzo), 조슈아 그래프 지빈(Joshua Graff Zivin), 이 세 명의 경제학자들은 HHMI와 NIH의 서로 상반된 조직문화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고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와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합리적인 문화가 각각 연구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통계적으로 동일한 비교집단을 구성하기 위해서 각각 HHMI와 NIH에서 탑 클래스에 해당하는 과학자들을 선별했습니다. HHMI에서는 73명, NIH에서는 393명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NIH가 HHMI보다 상대적으로 큰 조직이라 NIH의 샘플이 더 큼). 그런 다음, '얼마나 논문의 인용 빈도가 큰지'와 같은 지표를 사용하여 그들의 연구 성과를 비교하기로 했습니다.
두 조직의 과학자들은 탑 클래스에 속하기 때문에 언뜻 봐서는 연구 성과가 비슷해 보였지만, 통계적으로 따져보니, 차이가 상당했습니다. HHMI와 같이 연구원들에게 불확실한 연구 수행을 장려하고 실패를 용인하며 지지부진한 연구에도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문화라면 나태하고 안일한 '무임승차자'들이 득시글할 거라는 우려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HHMI의 과학자들이 NIH의 과학자들보다 논문을 더 많이 발표했고 논문의 인용 빈도가 2배 이상 높았습니다. 해당 연구 분야에서 히트한(키워드에 오를 정도로 독창적인) 논문의 수를 비교해도 역시 HHMI의 과학자들이 더 나은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물론, 논문을 냈는데도 한번도 인용되지 못한 논문의 개수를 비교하면 NIH가 HHMI보다 더 적었습니다. HHMI의 실패율이 더 높다는 의미죠. 이는 HHMI가 연구원들의 실패를 용인하고 그들에게 불확실성이 큰 연구를 장려하다 보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HHMI의 혁신성이 훨씬 월등하다는 점에서 그 정도의 실패는 혁신에 따르는 비용으로 충분히 감수할 만합니다. 반면, 연구 결과에 따른 위험(자금 손실 등)을 회피하고 안전한 연구만을 취하려는 NIH의 연구 방식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뛰어난 아이디어들'을 무시해 버릴 위험을 오히려 키우는 꼴은 아닐까요?
조사 결과, HHMI의 과학자들이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연구 주제로 더 자주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하며 유연하고 자유롭게 지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기 때문에 뛰어난 성과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을 실패로 보지 않고 혁신적 연구를 위한 지적인 도약으로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이것만 제대로 하면 혁신할 수 있다'는 충분조건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런 충분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그러나 혁신을 위해서 처음부터 돌다리를 두드려 보면서 위험을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조치는 그 자체가 혁신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방만할 정도로 자금을 퍼주다시피 하면서 실패를 용인하고 독창성을 찬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요점은 '균형'입니다. 새롭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는 아이디어에 투자할 개방성과, 위험을 감수할 때와 회피할 때를 탄력적으로 분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쉽지는 않죠. 하워드 휴스 의학 연구소처럼 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합리성이라는 탈을 쓴 관료주의적 문화가 다양한 시도를 옥죄고 실패를 크게 벌주려는 것만은 피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실패를 피하고 벌주면서 조직을 위축시키는 일이 종국에 더 큰 비용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을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합리성의 함정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혁신은 철저함이 아니라 엉성함에서 더 자주(더 훨씬) 창발합니다. 오늘은 지난 한 해 동안 철저한 잣대를 들이대는 바람에 죽어간 아이디어를 회생시키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참고논문 : Incentives and Creativity: Evidence from the Academic Life Sci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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