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원장이 비논리적이고 선동적이라고?   

2011. 11. 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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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저녁에 차를 타고 가다가 무료하여 라디오를 켰습니다. 97.3 MHz에서 그때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열린 토론'이었습니다. 중간부터 들은지라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신분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오고 가는 이야기를 잠깐 들으니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 관하여 각 당의 입장을 정리하여 말하는 자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안철수 원장에 대한 언급을 하더군요. 워낙 이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인지라 그가 안철수 원장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는 논리를 듣고 실소를 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KBS 홈페이지 들어가니 그날 나눴던 토론 전문이 올라가 있더군요. 그 부분을 복사하여 아래에 옮겨 봅니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철수 교수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에서 시민들이 상식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사실상 상식이 비상식을 이겼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도 과학자답지 못한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상당히 국민들을 선거결과를 놓고 갈등과 분열로 놓고 가는 잘못된 선동적 분석이다 이렇게 판단합니다.

만약에 나경원 후보 쪽이 비상식이었다면 나경원 후보고 지지한 46%라든가 또는 50대, 60대에서는 나경원 후보가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지지를 받았는데 50대, 60대의 우리 한국사회의 중견이나 원로급들은 전부 다 비상식이라는 것인지, 젊은이들은 상식이고 중견 원로층은 비상식이라고 하면 한국사회가 물구나무 사회라는 것인지 안철수 교수는 대단히 선거결과를 너무 자극적이고 정치적이고 선동적으로 해석한 것 아니냐 이렇게 판단합니다.

(*출처 : http://www.kbs.co.kr/radio/1radio/kbsopen/interview/index.html ) 2011.10.31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진짜로 안철수 원장의 논리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저는 김진 위원의 발언을 듣고 비논리적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김진 위원의 논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적인 후보(즉 비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비상식적인 시민이다.
어떤 사람이 상식적인 후보(즉 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상식적인 시민이다.



이런 논리로 안철수 원장의 발언이 선동적이라고 김진 위원은 주장하지요. 그러나 그의 논리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비상식적일까요?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걸까요?

진짜로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섞여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반대로, 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도 역시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비율은 잘 모르겠지만) 섞여 있겠죠. 게다가 인간의 특성을 잘 안다면, 인간은 상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비상식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논설위원인 김진 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진 위원은 안철수 원장이 50~60대 시민들을 비상식적인 사람들로 인식하케끔 선동적인 해석을 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시민들을 상식이니 비상식이니 하며 흑백논리적으로 갈라 놓고 생각하는 사람은 김진 위원 자신이 아닐까요? 제 생각에는, 후보자(그리고 정당)는 선거에 임하는 시민들을 기본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들을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을 거라면 후보자들은 굳이 TV 연설을 하거나 선거 유세를 하며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상식에 손을 들어줬다'는 안철수 원장의 말은 가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시민들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판단했다는 고마움의 말로 해석해야 합니다. 비논리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상식적이니 비상식적이니 하는 구분자로 시민들을 나누며 선동하는 사람은 안 원장이 아니라 오히려 김 위원 자신입니다.

김진 위원의 비판은 언뜻 들으면 옳은 말 같아서 청취자들, 나아가 시민과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공산이 크지 않을까요? TV나 언론매체에서 나오는 소위 논객들의 말 속에도 얼마나 많은 논리적 오류가 숨어있는지를 안다면, 그들의 말을 글자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라는 체를 통해 거르고 또 걸러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게 상식적인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일 겁니다.


(* 본 글은 저의 정치적인 입장과 무관합니다.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 검색해보니, 김진 위원이 자신의 신문에 올린 논평 기사가 눈에 띄는군요. '안철수의 선동 바이러스'란 글입니다. 읽고 판단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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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에 관한 철학적 단상   

2011. 11. 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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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무언가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은 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짚어보겠습니다.

플라톤 시절부터 철학자들은 '세 갈래 이론'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기준을 통해 '안다는 것', 즉 지식을 정의해 왔습니다.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하면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안다'면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한다는 뜻이죠. 그 세 가지 기준은 바로 '믿음', '정당화', '진리'입니다.



첫 번째 기준인 '믿음'에 의하면, 우리가 1+1=2를 안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믿음'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면 절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해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지식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지식도 상대성 원리를 갖는 걸까요?

믿음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여러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걸 믿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위대한 과학자가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안다' 말은 정당화의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죠. 1 + 1 = 2임을 안다면, 믿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있어 그의 '' 수준은 양자역학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철학적 기준으로 본다면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기준인 '정당화'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믿음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학적 증명이든, 과학적 실험이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동시에 닿는다'라는 갈릴레이의 믿음도 피사의 사탑(여기서 실험했다는 것이 허구라는 지적도 있지만)에서 사람들에게 시현하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제안, 진술, 사실을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증거가 얼마나 타당하냐는 것이죠.
 

세 번째 기준인 '진리'는 결과론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지식이 되려면 진짜로 옳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믿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지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충분히 믿고 충분히 정당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니었던 사례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을 믿고 천문학자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동설을 정당화했지만 결국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떤 지식이 진리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파악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것을 믿고 정당화하여 진리로 인식한다 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지 새의 이름만 뿐인데도 모든 안다고 자부하곤 합니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중요하죠.

안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있어야 여러분은 비로소 '아는 '입니다. 안다는 것의 세 가지 기준을 들여다 보면서 주위를 둘러싼 지식을 고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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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를 받아야 저축을 많이 한다   

2011. 10. 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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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러 회사에서 연봉제를 실시하면서 예전에 운영하던 '보너스(상여금)'을 폐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달마다 한번씩 받는 상여금과 설날이나 추석 때 나오는 명절 보너스를 없애고 그것들을 모두 합해서 12로 나눠서 매월 똑같은 금액을 지급하는 방식을 취하곤 합니다.

어떤 직원들은 균등하게 매월 같은 금액을 받는 것을 선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직원들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상여금을 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전자를 희망하는 직원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행동경제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연구를 했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A와 B는 똑같이 연봉이 3만 6000달러입니다. A는 이 연봉을 매월 균등하게 3000달러씩 받습니다. 반면에 B는 매월 2500달러를 월급으로 받고 보너스로 6000달러를 받지요. 이때 둘 중 누가 더 많은 돈을 저축하게 될까요? 이것이 행동경제학자들의 연구 주제였습니다.

언뜬 생각하면 A처럼 균등하게 받아야 수입의 예측가능성이 커서 매월 꼬박꼬박 저축할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2500달러는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500달러는 저축하면 될 테니까요. B의 경우, 나중에 한꺼번에 6000달러를 보너스로 받으면 '공돈'으로 생각하여 돈을 흥청망청 쓰지는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B와 같이 보너스로 목돈을 받는 사람들의 '저축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심적 회계'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 속에는 나름대로 계정과목이 있어서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각 계정과목으로 '분개'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죠.

매월 동일한 금액이 월급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생활비'라는 계정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소비해도 '괜찮은' 금액으로 여기는 것이죠. 반면에 보너스로 목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생활비가 아니라 일종의 '정기예금'으로 여겨서 쉽게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B가 A보다 저축할 가능성이 크죠.

똑같은 연봉을 매월 균등하게 나눠 지급하냐(혹은 그렇게 지급 받느냐), 아니면 상여금을 지급하냐(혹은 그렇게 지급 받느냐)는 회사나 직원들의 선호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직원들이 받은 연봉을 허투로 쓰지 않게 유도하려면 상여금을 적절하게 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제도일 겁니다. 물론 상여금을 지급하면 저축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지, 반드시 저축을 많이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겠죠.

사람들의 심적 회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직원들에 대한 보상 방식도 심적 회계를 염두에 두고 설계하면 어떨까요? 단순하게 행정의 편의성을 강조하거나 직원들의 의견조사 결과에 의존하기보다는 말입니다. ^^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 참고도서 : '불합리한 지구인', 비즈니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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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내일보다 더 중요한 이유   

2011. 10. 20.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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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피부암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의사입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들이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은 채 강렬한 햇빛에 그대로 피부를 노출시키며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여러분은 여성들에게 자외선과 피부암의 위험을 끊임없이 경고하지만 그들은 여러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피부암의 위험을 제대로 알려서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방법은 이렇습니다. 피부암의 위험을 홍보해봤자 그것이 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슴에 와닿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면 여드름이 생기거나 40대가 되기 전에 얼굴에 기미와 검버섯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게 효과적입니다. 먼 일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일로 이야기해야 납득을 하는 것이죠.



"오늘 사과 하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내일까지 기다려서 사과 2개를 받을 것인가?"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사과 하나를 받고 만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60일 후에 사과 1개를 받을래, 아니면 61일 후에 사과 2개를 받을래?"라고 물으면 거의 모두가 61일 후에 사과를 2개 받겠다는 선택을 합니다. 똑같은 '하루 차이'인데도 현재에 가까울수록 그 시간의 가치를 훨씬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처럼 먼 미래보다 현재를 중요시하는 '현재 지향 편향'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지향 편향'에 빠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강의 의뢰가 들어올 때 "내일 하겠습니까, 아니면 내일 모레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거의 어김없이 "모레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강의를 30일 후에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다음 날에 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또 어김없이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라고 대답하죠. 역시 현재에 가까운 '하루'일수록 시간의 가치를 더 크게 느끼는 편향에서 저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간단한 사례들이지만, 사람들의 행동 변화가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가 '현재 지향 편향'에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의미있는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현재 지향 편향'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봐도 인간은 먼 미래를 보는 것보다 바로 지금의 일에 더 큰 가치를 두고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게 당연합니다. 수백만 년 전,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제도나 전략을 조직에 도입할 때, 비전 달성이니 녹색 환경에 일조한다든지 하는 거창한 목표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 해서 동조하지만 실상 직원들의 마음 한켠에는 '좋은 말이야. 하지만 나랑 크게 상관없는 일이야. 경영진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 피어 오릅니다. 변화할 생각이 별로 없다는 뜻이죠.

사람들의 '현재 지향 편향'을 이해한다면 거창하고 먼 미래의 일로 보이는 목표를 바로 오늘이나 내일의 일로 잘게 쪼개거나, 적어도 그런 일로 표현할 줄 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제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현재 지향 편향'을 시행하는 모든 제도에(그리고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안 되는 제도에) 적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오늘은 힘들다구요? 그렇다면 앞으로 한 달 후에 고민하시겠습니까? ^^


(*참고도서 : '불합리한 지구인', 비즈니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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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으로 직원만족도를 측정한다?   

2011. 10.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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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기업들은 주기적으로 직원만족도를 조사합니다. 경영진, 상사 및 동료, 처우, 직무 등 만족도를 결정하는 몇 가지 카테고리를 정한 다음 구조화된 설문을 실시하죠. 설문방식의 만족도 조사는 꽤 유용하지만, 설문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반대로 응답할 경우 만족도 결과는 왜곡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곡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이죠.

기술과 비용 상의 문제만 없다면, 호르몬을 정기적으로 측정함으로써 설문 응답이 왜곡된 것인지 판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업 경영에 있어 리더가 눈 여겨 봐야 할 호르몬은 테스토스테론, 아드레날린, 코르티솔, 세로토닌, 옥시토신, 엔도르핀 등입니다.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공격성을 상징합니다. 지나치면 조직의 정신을 무너뜨리지만 일정 수준의 테스토스테론은 활력 있는 조직임을 나타내는 지표죠. 만일 수치가 이전보다 떨어졌다면 직원들의 변화의지와 도전정신이 꺾이고 조직이 보수적이고 수동적인 문화로 후퇴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수치가 올라가는 호르몬들입니다. 과중한 업무와 급격한 스트레스로 아드레날린이 높아지면 테스토스테론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난동을 유발할 확률이 높아지죠. 코르티솔은 스트레스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이해력과 기억력을 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로토닌의 수치가 낮으면 불안감이 유발되고 수치가 높으면 행복감이 높아집니다. 세로토닌은 업무생산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로토닌의 생성은 2500럭스 이상의 빛에서 왕성해진다. 햇살 좋은 날의 산책이 좋은 건 이것 때문이죠. 따라서 생산성을 높이려면 사무실의 광도(光度)를 높이는 것이 좋습니다. 지난 번 포스팅('어두우면 일 못한다')에서도 밝혔듯이 조명이 직원들의 생산성을 크게 좌우합니다. 또한 직원들이 아침을 거르지 않도록 캠페인을 벌이거나 회사에서 아침을 제공하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식사가 세로토닌의 수치를 높이기 때문이죠.

옥시토신은 친밀감과 신뢰감을 나타내는 호르몬입니다. 직원들 간의 화합이 깨지고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서로 반목한다면 옥시토신의 수치는 추락하고 있을 겁니다. 엔도르핀은 긍정적인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수치가 지나치게 높다면 직원들의 고충이 오히려 크다는 증거입니다. 엔도르핀은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 분비되기 때문이죠.

이처럼 호르몬을 측정하면 설문조사로 찾기 어려운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지도 모릅니다. 단, 호르몬의 수치는 수시로 바뀌므로 통계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측정방법과 측정주기를 잘 설계해야 하겠죠. 또한 호르몬 측정은 결과치만을 알려줄 뿐입니다. 원인을 파악하려면 설문조사나 인터뷰 등 심도 깊은 분석이 병행돼야 하겠죠. 물론 돈은 더 들겠지만요.

건강한 하루 되세요.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유정식 저)'에서 발췌 &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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