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원이 팀장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   

2012. 4. 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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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팀장들은 팀원들이 조언을 구할 때마다 언제든지 경청하고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필요한 도움을 줘야 한다는 점을 관리자의 덕목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팀장과 팀원들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관리자와 부하직원이 조언을 주고 받는, 이 단순한 의사소통 과정을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팀장은 팀원들이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팔을 걷어부치고 도와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팀원들이 자신을 멀리 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 팀원들은 팀장에게 조언을 구하기가 꺼려지고 뭔가 벽이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도움을 요청해도 기각되거나 일부만 받아들여진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업무 경험과 지식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팀장이 팀원들을 도와주고 이끄는 것이 업무의 흐름상 자연스럽고 비용효과적인 차원에서 권장되어야 할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것이 많은 기업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멘토링이나 튜터링과 같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팀장과 팀원 사이에 놓인 벽을 우회하려 합니다. 하지만 원대한 목적 하에 실행된 제도들이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또한 많습니다. 멘티들은 멘토를 찾아가지 않고 멘토들은 멘티들이 왜 자신을 안 찾아오는지 의아해 하다가 자기 일이 바빠지면 멘토링 프로그램 자체를 잊어버리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심리학자인 바네사 본스(Vanessa K. Bohns)와 프랜시스 플린(Francis J. Flynn)은 팀원이 팀장에게 도움을 쉽사리 요청하지 못하고 여러 멘토링류(類) 제도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시사하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의 '불편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원인임을 규명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동료 지원 프로그램(Peer Advisory Program)'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MBA 학생 35명과, 학부 조교 91명에게 학기말까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올 것 같은지 예상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동료 지원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12.6명이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찾아온 학생은 7.6명에 불과했습니다. 학부 조교들도 17.8명의 학생들이 자신을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학기말까지 14.7명만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간단한 조사이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을 과대평가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을 무작위로 '프라이밍'해도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두 번째 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돕는 자'로 배정된 참가자들에게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준 경험을 회상하도록 했고 '도움 요청자'로 선정된 참가자에게는 다른 이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각 기억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쓰라고 요청했습니다. '중립적 관찰자'로 배정된 참가자들은 프라이밍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로 실험에 임했습니다. 모든 그룹의 참가자들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4가지 상황을 읽고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을 요청할 것 같은지, 그가 도움을 요청할 때 마음이 얼마나 불편할지 예상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불편함이란 도움을 요청할 때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건성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상대방이 날 우습게 알거나 조롱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실험 결과, '돕는 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도움을 청하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조언 요청자'보다 더 강했습니다. '중립적 관찰자'는 중간 정도의 값을 나타냈죠. 그리고 '도움 요청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도움을 요청할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돕는 자'들보다 더 크게 느꼈습니다. 이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과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많이 요청하리라고 과대평가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도움 요청이 일으키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함)에 있었죠.

그렇다면 도움 받는 자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줄이고 도움을 주고 받는 원활한 관계가 촉진되려면 그들에게 어떤 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할까요? 예를 들어 멘토링 프로그램을 홍보하려 한다면 이 제도의 실용성에 무게를 둬야 할까요, 아니면 편의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본스와 플린은 이 질문에 답을 할 만한 후속실험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참가자들을 둘로 나눠 '신참자'와 '멘토'의 역할로 프라이밍 시킨 다음에 멘토링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짧은 문장 2가지를 보여줬습니다. 하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점을 솔직히 밝히면서 바보스러워 보일 거라는 걱정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기 원한다는 문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장을 위해 멘토링 프로그램이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신참자'로 프라이밍된 참가자들에게 두 문장의 효과를 평가하게 하자 그들은 멘토링 프로그램의 '편안함'을 강조한 첫 번째 문장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멘토'들은 멘토링의 '유용함'을 표현한 문장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이 결과 역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바꿔 말해,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도움 요청의 불편함'보다는 '도움의 유용함'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멘토링류(類)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제도의 필요성과 이득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멘티들이 느낄(혹은 멘토들이 부담스러워 할)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해소시켜 줄 것인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팀원들이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까닭은 자신을 멍청하게 보지는 않을까, 자신의 능력 없음을 자인하는 것은 아닐까, 속으로 나를 우습게 알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하지만 팀장은 팀원들이 느끼는 걱정을 실제보다 적게 인식하기 때문에(혹은 그런 걱정은 별로 대단치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오픈 마인드'임을 선언하기만 하면 팀원들이 자기에게 언제든지 거리낌없이 도움을 요청하리라 오해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오픈 마인드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팀원과 팀장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과 여러 가지 멘토링류 프로그램의 실패는 조직구조, 업무 프로세스, 프로그램 설계의 오류라는 눈에 보이는 요인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미묘한 인식의 차이와 감정의 질적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결코 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팀장과 팀원 사이의 벽을 끝내 없앨 수 없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애써 만들었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여러 가지 조직활성화 제도들을 다시 살려낼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의 팀은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Why didn’t you just ask?” Underestimating the discomfort of help-see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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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만족도와 성과는 아무 상관없다   

2012. 4. 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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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A는 자기 일에 상당히 만족하는 직원인 반면, B는 맡은 직무에 만족하지 못할 뿐더러 회사에 불만도 많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둘 중 누가 더 성과가 높을 것 같냐고 질문을 던진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십중팔구 직무만족도가 높은 A의 성과가 당연히 좋지 않겠냐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대답은 '누구의 성과가 더 나은지 알 수 없다'가 되어야 옳습니다.

심리학자 네이선 볼링(Nathan A. Bowling)은 여러 연구 결과에서 도출된 데이터를 토대로 메타 분석을 실시하여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믿음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직무에 만족한다고 해서 성과가 좋을 거라고 믿을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죠. 볼링은 1967년부터 2006년 사이에 출간된 109개의 논문을 면밀히 분석하여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먼저 개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5개의 특성(보통 Big 5 모델이라 불림) 때문에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잘못 알려진 것은 아닐까 의심했습니다. 그가 경로분석(Path Analysis)를 통해 Big 5 특성을 고정시킨 후에 직무만족도와 성과 간의 관계를 살펴보니 의미 있는 값이 나오지 않았습니다(경로계수가 0.19에 불과). 이는 Big 5 특성이 직무만족도와 성과에 각각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듯한 착시효과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는 결과입니다. 술주정뱅이 수와 목사의 수가 동시에 증가한다고 해서 둘 사이에 모종의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인구의 증가라는 요인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볼링은 자존감, 자기효능감(self-efficacy), 감정적 안정성, 통제감(locus of control) 등에 대해 구성원들이 자신을 평가한 자료들을 분석한 후에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4가지 요소를 통제한 후에 살펴보니 역시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의 관계가 미약했습니다(경로계수 0.21). 그리고, 조직 내에서 느끼는 자존감(organization-based self-esteem)을 고정시켰을 때는 경로계수가 0.09에 불과하여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의 관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직무만족도와 성과 사이에 서로 인과관계가 있어 보이는 이유는 제 3의 다른 변수들 때문이라는 것으로 볼링의 메타 분석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들을 만족시키면 성과가 올라갈 거라 기대하면서 복리후생 프로그램을 늘리고, 유연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고, 사무실 인테리어를 멋있게 교체하는 등 직원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을 실행에 옮깁니다. 허나 성과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게 향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조치들은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볼링이 지적했듯이 직무만족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여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볼링의 연구를 곡해해서는 안 되겠죠. 왜냐하면 설령 성과와 별 상관이 없다 해도 직무만족도가 비생산적인 행동, 이직률, 직원들의 지각과 결근 등에 중요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여러 학자들의 연구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업무나 회사에 불만이 가득하지만 성과가 높은 직원들이 여러분의 조직에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들은 언젠가 회사를 나가거나 규칙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조직의 장기적인 발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겠죠. 볼링의 연구는 장기적인 영향에 관한 것이 아니기에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합니다. 직무만족도를 올려 성과를 높이겠다는 단순한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한 것으로만 그의 연구 결과를 수용해야겠죠.

볼링의 연구는 성과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조치만으로 쉽사리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얽혀서 산출되는 결과물임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과관리는 일종의 예술인 듯 합니다. 원하는 수준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직무만족도와 같은 어느 한 가지 요소로 성과를 끌어 당기려는 단선적인 조치에서 벗어나 조직 전체를 조망함으로써 구조적인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관리는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참고논문)
Is the job satisfaction–job performance relationship spurious? A meta-analytic exa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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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예측은 '힘 없는 자'에게 맡겨라   

2012. 4.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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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린 글 '성공의 착각에 빠져 있습니까'에서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전문가들이 커리큘럼 설계를 최대 30개월 안에 끝내겠다고 했지만 결국 8년이나 지나서 겨우 끝나버렸다는 사례를 들며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전략이나 프로젝트의 앞날을 예측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안 될뿐더러 헛된 망상을 키울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번엔 이러한 계획 오류와 '권한(혹은 권력)' 사이의 관계를 실험을 통해 규명한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권한을 가진 자와 권한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프로젝트의 완료 시점을 예측할 때 누가 더 큰 계획 오류에 빠질까요? 마리오 웨이크(Mario Weick)와 애나 귀노트(Ana Guinote)는 여러 개의 실험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20명의 학생들을 권한을 위임 받은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에 무작위로 배정한 다음, 대학 당국이 새로 들어올 학생들을 위해 학점 체계를 새로 정비할 계획이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권한을 위임 받은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대학의 최종 결정에 50%의 비중으로 반영될 거라고 들은 반면, 권한을 갖지 못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열람되겠지만 학점 체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웨이크와 귀노트는 두 그룹의 학생들에게 각자 학기 중에 제출할 과제의 마감일을 정하고 언제까지 그 과제를 제출할 수 있을지 예상하라고 요청했습니다.

학생들이 과제를 제출한 날짜와 예상한 날짜를 비교해 보니 계획 오류가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룹과 상관없이 학생들은 마감일이 되기 1.88일 전에 과제를 제출했지만 그보다 2일 먼저 제출할 수 있다고 예상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계획 오류는 권한을 가진 그룹에서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마감일이 되기 2.47일 전에 제출을 완료했으나 당초 예상할 때에는 마감일보다 4.93일 전에 제출할 수 있다고 장담한 바 있었죠. 대략 2.5일 정도를 낙관적으로 본 겁니다. 반면, 마감일 2.7일 전에 과제 제출을 예상했던 '비권한 그룹'의 학생들은 마감일 1.3일 전에 제출을 완료함으로써 1.4일의 오차를 보였습니다. 권한을 가질수록 예측이 상대적으로 덜 정교하고 소요시간을 더 적게 산정한다는 점이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 결과는 권한을 가진 학생들이 자신도 모르게 더 어려운 과제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웨이크와 귀노트는 후속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40명의 학생들에게 과거에 남들에게 권력을 발휘한 기억과 타인의 힘에 의해 억압 받았던 기억을 각각 떠올리게 하는 '프라이밍' 기법을 써서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그런 다음, 거칠게 작성된 파일을 문서 편집 프로그램을 써서 깔끔한 포맷으로 만들라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부여했죠. 학생들은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 각자 완료 시간을 예상해야 했습니다.

분석 결과, '지배자' 학생들이 '피지배자'로 프라이밍된 학생들에 비해 완료 예상 시간을 훨씬 적게 예측한다는 경향이 도출되었습니다. 지배자 학생들은 8.91분이나 걸릴 일을 3.95분만에 끝낼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피지배자 학생들은 실제로 9.13분 걸리는 일을 6.32분 정도에 끝낼 수 있으리라 예측했던 겁니다. 추가로 분석해 보니 전체적으로 지배자 학생들이 피지배자 학생들에 비해 77% 정도 더 계획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걸까요? 권한 혹은 권력이 '자기 효능감(Self Efficacy, 무언가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높이기 때문일까요? 학생들이 작성한 설문을 기초로 자기효능감과 계획 오류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니 유의미한 연관성이 드러나지 못했습니다. 웨이크와 귀노트는 또 다른 실험을 통해 권력을 가진 사람이 예상되는 결과물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그 예상을 벗어나게 만들 잠재 요소에 관한 정보를 미처 감안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즉 '주의 초점(Attentional Focus)'이라는 현상이 계획 오류와 연관이 있다고 밝힌 겁니다.

두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각각 프라이밍된 학생들은 2천자 분량의 에세이 쓰기, 저녁 외출 준비하기, 슈퍼마켓에서 쇼핑하기, 세 가지 요리 준비하기 등 4가지 상황을 전달 받았습니다. 웨이크와 귀노트는 절반의 학생들에게 과거에 이 4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회상하게 한 다음, 과거의 경험에 감안하여 어떻게 이 과제들을 수행할지 짧게 글을 쓰도록 했습니다. 글을 다 쓴 후에 학생들은 4가지 과제를 모두 완료하는 데 걸릴 시간을 예측했습니다. 

그 결과, 과거의 경험을 회상한 지배자 그룹의 학생들이 낸 예측값은 피지배자 학생들의 것과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이 과거의 일을 떠올림으로써 덜 낙관적이 됐다는 뜻입니다. 반면 피지배자 학생들의 예측값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는 것에 의해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권력과 낙관적인 예측 사이에는 목표 외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주의 초점이 연관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완료 시간을 과소평가하는 계획 오류를 범하곤 하지만 권력이 가진 자들이 주의 초점에 빠져 나타내는 오류의 정도가 더 크다는 게 이 연구의 결론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까요? 조직 내에서 힘을 가진 사람이 프로젝트의 완료 시점을 제시하고 주도하려 할 때 스스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이 연구는 일깨웁니다. 권한을 가진 자는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야 할 목표 자체에 매몰되어 생각하는 경향이 큰 탓에 과거의 경험이나 앞으로 생길지 모를 돌발변수를 별로 감안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프로젝트나 전략의 실행계획을 수립할 때 권력을 가진 사람은 욕구를 자제하고 다른 구성원들의 생각을 충분히 받아들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의사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구성원들에게 실행계획 수립을 일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프로젝트를 무조건 일찍 끝내는 게 능사가 아니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말입니다.

여러분이 의사결정권을 가진 위치에 있다면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는 완료 시점이 지나치게 빡빡하지 않은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니까요. 그런 예측은 의사결정권 없는 '힘 없는 자'들에게 위임하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참고논문)
How Long Will It Take? Power Biases Time Predi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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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봉에 대한 불만이 줄지 않는 이유는?   

2012. 4.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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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하는 일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또 어떤 느낌이 들까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고 생계를 위한 목적 외에는 그 어떤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일을 수행하는 사람은 삶의 낙오자가 된 듯한 열패감이 휩싸일 겁니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 받기 위한 매개체이자 자아실현의 표현물이기 때문입니다. '인정'과 '일의 의미'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일을 수행하려는 동기를 구축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두 요소가 옅어지거나 사라질 때 직원들의 생산성은 현저하게 하락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정과 일의 의미라는 두 가지 동기 요소와 '유보 임금(reservation wage)' 사이의 관계는 어떨까요? 유보 임금이란 직원들이 노동의 대가로 최소한으로 받으려는 임금 수준을 말합니다. 상사나 동료로부터 자신의 업적을 인정 받지 못하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가?'라며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그 직원은 자신이 '최소한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임금의 크기는 그렇지 않은 사람(인정 받고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비해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행동경제학자인 댄 애리얼리(Dan Ariely)와 동료들은 업적을 인정 받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을 수행하는 사람의 유보 임금이 더 클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MIT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실험은 글씨가 적힌 한 장의 종이를 주고 연속해서 s가 두 번 나오는 경우를 10개씩 표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첫 페이지를 완성하면 55센트를 주었고, 두 번째 페이지를 끝내면 50센트를 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 페이지씩 과제를 완성하면 수고료가 5센트씩 줄어들도록 했는데, 학생들은 언제든지 일을 그만하겠다는 표현을 실험진행자에게 할 수 있었죠.

학생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애리얼리는 학생들을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인정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페이지를 건네 받을 때마다 상단에 자신의 이름을 쓰도록 했고 나중에 검사를 실시하기 위해 폴더에 보관하겠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무시 그룹'의 학생들은 이름을 쓰라는 지시를 받지 못했거니와 과제를 완료한 이후에 한쪽 구석에 쌓아 놓기만 할 뿐 연구자들이 따로 검사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을 들었죠. 마지막으로 '세단 그룹'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실험진행자의 '만행'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상황에 처하게 했습니다. 학생들이 과제를 완료할 때마다 살피지도 않고 곧바로 문서세단기에 밀어넣었기 때문이었죠. 자신이 애써 수행한 일이 잔인하리만큼 무시 당하는 상황에 처하게 했던 겁니다.

실험 결과, 인정 그룹의 학생들이 완료한 일의 양이 9.03페이지로 가장 많았습니다. 무시 그룹과 세단 그룹은 각각 6.77페이지와 6.34페이지였죠. 노동의 결과가 무참히 잘려나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세단 그룹의 학생들이 가장 먼저 포기를 선언했던 것이죠. 이로써 각 그룹의 유보 임금 수준은 애초에 세웠던 가설과 반대라는 점이 확실해졌습니다. 따져 보면 인정 그룹의 유보 임금은 14.85센트인 반면, 세단 그룹은 그 두 배에 달하는 28.29센트였습니다. 이는 자신의 노력을 올바르게 인정 받지 못할수록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결과입니다.

애리얼리는 '일의 의미'가 생산성과 유보 임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속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실험 참가자인 하버드 대학 학부생들에게 바이오니클(Bionicle)이라 불리는 레고 블럭을 조립하도록 하고 처음 완성하면 2달러를 주고 그 다음 회부터는 매회 11센트씩 깎아서 지급하겠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학생들을 몰래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의미 그룹'의 학생들은 바이오니클 하나를 완성하면 책상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고 실험진행자로부터 새로운 세트를 건네 받았습니다. 이 학생들은 노동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죠. 반면 '시지푸스 그룹'에 속한 학생들은 말 그대로 시지푸스처럼 무의미한 반복 작업으로 느껴지는 상황에 처해야 했습니다. 바이오니클을 만들자마자 실험진행자가 냉정하게도 그것을 바로 부수어버리고 다시 만들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실험 결과, 의미 그룹의 학생들은 평균 10.6개의 바이오니클을 완성했지만, 시지푸스 그룹의 학생들은 7.2개 밖에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빨리 포기를 선언했다는 말이죠. 의미 그룹은 수고료 수준이 1.01달러가 될 때 그만하겠다고 말한 반면, 시지푸스 그룹은 1.40달러일 때 두 손을 들었습니다. 이 차이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시지푸스 그룹의 학생들이 그만큼 자신의 유보 임금을 40% 높게 설정했음을 뜻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성과를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성과를 달성했더라도 그게 자신과 조직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알지 못할 때, 생산성이 저하되는 반면 유보 임금은 높아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현상을 이 실험이 확실하게 규명해 준 셈이지만, 이로써 인정 받고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더 많이 기여한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렇지 못한 직원들은 비자발적으로 돌아서서 동일한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유보 임금을 주장하겠죠. 임금 수준에 불만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어쩌면 그 불만은 '무인정'과 '무의미'에 지치고 소외 받은 직원들이 그 상실감을 돈으로나마 보상 받으려는 자연스러운 심리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릅니다.

진정한 성과관리는 직원들에게 밀착하여 목표를 끊임없이 각인시키고 행동을 수정하도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이룬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인정하고 그 성과가 개인의 발전과 조직의 대의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인식케 하는 일임을 이 실험의 결과가 시사합니다. 직원이 현재의 업무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면 그가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찾아주려고 애쓰는 일이 KPI를 수립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단순하게 목표 세우고 평가해서 줄을 세우는 것은 성과관리가 아니라 무미건조한 측정에 불과합니다. 측정보다는 사기 진작에 초점을 맞춰 성과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임금을 제법 괜찮게 주는데 이상하게도 줄어들지 않는 불만을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논문)
Man’s search for meaning: The case of Le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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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거짓말과 부정행위를 늘린다   

2012. 4. 1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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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경쟁을 강화하면 성과가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쟁이 개인들로 하여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유도하고 크고 작은 혁신을 가속화시키며 적은 비용으로 높은 성과를 창출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조직 성과가 지지부진하거나 조직의 활력이 저하된 원인을 구성원들의 경쟁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기존 제도의 느슨함에서 찾습니다. 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평가제도와 보상제도를 변경하면 개인과 조직의 성과가 향상되리라 기대합니다. 이런 기대는 언뜻 보면 논리적인 것 같지만, 경쟁이 야기하는 현실은 추구하는 바와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크리스티아네 쉬비에렌(Christiane Schiwieren)과 린쯔 대학의 도리스 바이히셀바우머(Doris Weichselbaumer)는 미로 찾기 게임을 통해 경쟁의 강화가 성과를 높이는 데 기여하는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것은 아닌지를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은 30분 동안 컴퓨터 모니터상에 차례로 나타나는 여러 개의 미로 게임을 가능한 한 빨리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했죠. 게임 화면 내에는  '경로 자동 찾기'와 '경로 확인'이라는 버튼이 있었는데, 일부러 참가자들의 부정행위를 유도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연구자들은 얼마나 많은 미로를 풀었는지 참가자들 스스로 기록하도록 했습니다. 컴퓨터에는 참가자들의 행동을 모니터하기 위한 스파이 웨어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모든 부정행위가 감시되었고 실제로 얼마나 많은 미로를 풀었는지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죠.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각각 두 가지 보상 조건 하에서 미로 게임을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첫 번째는 '낮은 경쟁 조건'이라서 참가자들은 다른 참가자들의 성적과는 상관없이 미로 게임 하나를 풀 때마다 30센트씩 받았습니다. 반면 '높은 경쟁 조건'은 토너먼트를 벌여서 오직 1등인 자만이 미로 게임 하나에 대해 1.8유로씩 받을 수 있는 '승자 독식'의 구조였죠.

실험 결과, 참가자들이 높은 경쟁 조건 하에서 더 많은 미로 게임을 푼다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일 때보다 높은 경쟁 조건일 때 2.7개 정도 적게 풀었습니다(여자들은 거의 차이가 없었음). 경쟁을 강화한다고 해서 성과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부정행위의 빈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참가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에서는 자신이 실제로 푼 개수보다 1.31개를 더 풀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을 강화하니 그 개수 차이가 2.91개로 늘어났죠. 연구자들은 높은 경쟁 조건일 때 특정 참가자가 문제를 하나 이상 더 풀었다고 거짓으로 보고할 확률이 31%에서 39%로 늘어난다고 분석했습니다. 경쟁의 강화가 부정행위와 속임수의 증가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죠.

그런데 남녀 차이에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부정행위의 빈도가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남자들은 낮은 경쟁 조건에서 높은 경쟁 조건으로 바뀌면 부정행위의 비율이 줄어든 반면(48%에서 28%로), 여자들은 부정행위의 비율이 29%에서 60%로 크게 상승했던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실험에 참가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평균 5~8개 정도의 미로 게임을 더 풀었습니다. 이 차이가 미로 게임을 푸는 남녀 간의 유전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들은 이런 류의 게임에 약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여자들 스스로 위축됐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연구자들은 추가분석을 통해 여자라는 이유로 경쟁이 강화된 상황에서 부정행위를 더 많이 범하는 게 아님을 규명했습니다.

쉬비에렌과 바이히셀바우머는 경쟁이 강화되면 성공의 기회를 손에 잡기가 어려운 저성과자가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부정행위나 속임수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고 결론 내립니다. 또한 스포츠처럼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실력 차이가 거의 비슷할 경우에도 조그만 부정행위가 승자와 패자를 가르기 때문에 역시 부정행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어쨌든 경쟁은 승자가 되기 위해 양심을 버리는 행위를 합리화('강한 자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식)하는 부작용을 낳고 맙니다.

경쟁은 개인의 성공을 강조하기에 조직에 기여하려는 동기를 약화시키고 공정한 룰을 지키려는 의지도 희석시킵니다. 개인의 성공을 위해 동원되는 수단의 정당성은 일단 이겨야 한다는(혹은 '일단 체면은 유지해야 한다는') 자기합리화에 의해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경쟁이 개인의 성과를 높이는 장치로 전혀 효과가 없다는 점과 원치 않는 부정행위를 장려(?)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경쟁은 바람직하다는 단선적인 생각은 이제 버릴 때가 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참고논문)
Does competition enhance performance or cheating? A laboratory exper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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