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이 빠지면 다시 찌는 또 하나의 이유   

2012. 9. 2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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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경영대학원의 에일렛 피쉬바흐(Ayelet Fishbach)는 45명의 여대생들에게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무게와 현재의 몸무게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물으면서 수직선을 제시했습니다. 수직선 가운데에 위치한 빈칸에 현재의 몸무게를 쓰게 하고 이상적인 몸무게를 수직선 상에 표시하게 하고 두 점 사이를 색칠하도록 했죠. 그런데 피쉬바흐는 여대생의 절반에게는 양 끝점이 각각 -5파운드와 +5파운드인 수직선(좁은 수직선)을 주고, 나머지 여대생들에게는 -25파운드와 +25파운드인 수직선(넓은 수직선)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의 몸무게가 125파운드(약 57킬로그램)이고 이상적으로 여기는 몸무게가 120파운드(약 54킬로그램)이라고 가정하면, 좁은 수직선을 받은 학생은 넓은 수직선을 받은 학생보다 상대적으로 더 넓은 범위를 색칠해야 합니다. 색칠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많이 노력해야 하는구나. 아직 멀었네.'란 생각을 갖게 되는 반면, 색칠을 적게 하면 '목표 체중과 현재 체중이 그리 차이 나지 않네? 내가 살을 많이 뺀 모양이구나.'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피쉬바흐는 목표 달성도를 인식하는 차이가 목표 달성을 추구하는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여대생들에게 실험과 관계 없는 설문에 응답하게 하고는 고마움의 의미로 초콜릿바와 사과를 주겠다고 했죠. 단, 초콜릿바와 사과 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게 실험의 핵심이었죠. 넓은 수직선을 받은 여대생들 중 85퍼센트가 초콜릿바를 선택한 반면, 좁은 수직선 조건의 여대생들은 58퍼센트만 초콜릿바를 골랐습니다. '목표와 차이가 크지 않다.'라고 느낄수록 초콜릿바처럼 다이어트에 방해가 되는 음식을 선택하는 등 '체중 감량'이라는 목표에 반(反)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는 결과였죠. '나는 충분히 살을 뺐으니 이제 좀 즐겨도 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목표 몸무게처럼 자신이 정한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인 기준에 얼마나 도달했는가를 인식하는 차이도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피쉬바흐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지난 주에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했는지 적도록 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적어야 할 종이에는 이미 다른 학생의 공부시간이 고의로 적혀져 있었습니다. 피쉬바흐는 그 값이 30분인 경우(낮은 사회적 기준)와 5시간인 경우(높은 사회적 기준)로 나누어 참가자들에게 제시해 보았습니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공부시간을 적은 다음에는 '친구와 함께 외출하기', 'TV 시청하기', '재미있게 놀기'와 같이 비학업적 활동에 얼마나 흥미를 느끼는지 물었습니다. 통계를 내보니 낮은 사회적 기준 조건의 학생들이 비학업적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싶어했습니다. 다른 학생이 적게(30분) 공부한다는 것을 본 참가자들이 '나는 충분히 공부했어.'라는 생각으로 인해 공부에 반하는 행동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 역시 목표와 현재 상태 사이의 차이를 적게 인식할수록 목표와 일치하지 않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보여줍니다.


위의 두 실험 결과는 목표까지 얼마나 남았는가를 확인하는 행동이 목표 달성을 저해하는 활동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추론케 합니다. 피쉬바흐는 참가자들을 둘로 나눠 첫 번째 그룹에게는 학업, 저축, 건강 유지라는 목표 각각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몰입'하고 있는지를 묻었고(몰입도 조건), 두 번째 그룹에게는 동일한 목표에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달성도 조건). 그런 다음, 밤에 친구들과 어울려 놀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도록 했죠. 달성도 조건의 참가자들은 목표에 부적절한 행동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반면, 몰입도 조건의 참가자들은 그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목표 도달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유지하려면 얼마나 달성했는지를 점검하기보다는 얼마나 노력하고 몰입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피쉬바흐는 체육관에 운동하러 들어가는 학생들과 운동을 끝내고 나오는 학생들에게 각각 건강 유지를 위한 운동의 효과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 다음 저녁식사로 맛있지만 지방질이 많은 음식을 얼마나 먹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운동을 끝낸 후의 학생들보다 운동하기 전의 학생들이 운동의 효과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운동하기 전의 학생들이 운동 후의 학생들에 비해 느끼한 음식을 더 많은 관심을 보였죠. 따라서 운동 효과를 높게 인식할수록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에 더 많이 끌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목표에 더 많이 다가갔다고 느낄수록 목표에 반하게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 실험에서도 드러난 것이죠.


이처럼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목표에 많이 도달했다고 생각할수록 그 목표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저울에 체중을 달아보고 '2킬로그램이나 빠졌네. 목표까지 5킬로그램 밖에 안 남았어.'라고 기뻐하면 무의식은 우리에게 기름기 많고 당분이 많은 음식을 먹어도 된다는 '면허증'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빠졌던 2킬로그램이 다시 불어버린 몸무게를 보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죠. 목표까지 얼마나 남았느냐를 확인하는 행동이 오히려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피쉬바흐의 실험을 조직에서의 MBO 목표 달성에 바로 대입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수치를 정해두고 목표 달성도를 강조하며 직원들을 독려하는 방식이 오히려 목표에 반하는 행동, 목표 도달을 유보하려는 행동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직원들을 코칭하는 관리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입니다. 타겟을 정해두는 MBO가 과연 옳은지도 재검토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피쉬바흐의 세 번째 실험이 시사하듯이, 목표 달성도보다는 목표에 얼마나 몰입하는지를 점검해 나가는 방식이 목표에 일치하도록 직원들의 행동을 유지시키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MBO에서 정해놓은 타겟이 절대적으로 '옳은' 값일까요? 100이란 타겟을 달성한 직원에게 '이제 할 만큼은 다 했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요? 타겟을 정해둠으로써 목표 달성도에 관심을 두도록 만들면 100을 넘어선 성과가 진짜로 도달해야 할 수치인데도 불구하고 100 언저리에서 멈춰 버리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타겟을 정해놓은 관행이 이런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겠습니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목표에 얼마나 접근했는지를 자주 확인하는 것보다 목표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에 집중할 때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피쉬바흐의 연구가 주는 시사점입니다. 타겟에 근접했다 해도 목표 달성에 몰입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느낀다면 목표에 반하는 행동에 면허증을 발부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제어해야겠습니다.



(*참고논문)

Ayelet Fishbach, Ravi Dhar(2005), Goals as Excuses or Guides: The Liberating Effect of Perceived Goal Progress on Choice, Journal of Consumer Research, Vol.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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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이 다른, 경영의 현장   

2012. 9. 21.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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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생각나서 적어봤습니다. 여러분도 말과 행동이 다른, 모순적인 면이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 잡을 수 없는 경영의 본질?)



장기적인 미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적어도 3~5년 먼 미래만 하루종일 생각하는 직원을 두지 않는다.

==> 그러면서 평가는 단기적으로(1년 단위로) 한다.


일하는 데에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그러나 우수인재를 데리고 오려면 돈을 많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회사가 어려워지면 1시간 더 근무하자고 제안한다.


인재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이미 회사에 있는 인재는 신경 쓰지 않는다. 

==> 우수인재는 항상 외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랫 직급에서 일 잘한다고 팀장으로 승진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 그러나 아랫 직급에서 일 잘해야 승진시킨다.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보고체계는 그대로 유지한다.

==> 보고체계를 뛰어넘는 소통은 제재를 받는다.


일의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버려야 할 사업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 늘 '결정 장애'다.


틀을 깨는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틀을 깨는 사고가 제시되면 비난할 준비를 한다.


독창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다른 회사가 하지 않은 전략이라면 성공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한다.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말한다.

==> 그러나 사장실과 임원실은 필요 이상으로 크다.


휴가를 다 소진하라고 말한다.

==> 그러나 다 소진하기 위해 휴가를 자주 쓰면 일 안 한다고 뭐라 한다.


우수한 여성인재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 그러나 출산휴가 가면 싫어한다.


괴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 그러나 평가할 때는 괴짜에게 낮은 점수를 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키라고 말한다.

==> 그러나 '다음날 아침'까지 완성해서 보고하라고 말한다.


사회에 기여하자고 말한다.

==> 그러나 정작 직원들의 삶의 질은 외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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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 반대하면 오히려 성차별을 하게 된다?   

2012. 9. 2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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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집에서 애들이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남성이 해야 할 일과 여성이 해야 할 일이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남성들이 주류를 차지하는 직업 세계에 여성들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지요? 여성들에게 가장 적당한 직업은 요리사, 간호사, 교사일까요?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정말로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아마도 여러분 중 대부분은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겁니다. 이 블로그의 방문자분들은 훌륭한 양성평등주의자(혹은 페미니스트)일 거라 믿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방금 함정에 걸려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성차별적인 질문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표한 후에 누군가가 성(gender)과 관련된 판단 과제를 제시하면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적인 답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죠?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할수록 나중에 편견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그럴리가!' 부정하고 싶지만 이는 베누이 모닌(Benoît Monin)의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모닌은 20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위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질문 5개를 제시하고 동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멘트 회사에서 사업 확장을 위해 신규직원을 뽑는다는 가상의 사례를 참가자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이 사례는 지원자가 고객과의 협상력, 공사 감독과 건설회사와의 친화력, 전문 기술 등이 갖춰야 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여성보다는 남성 직원이 적합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죠. 모닌은 참가자들에 남성과 여성 중 누가 이 포지션에 적합할 것 같은지 물었습니다.


5개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임을 강하게 유도 받은 참가자들은 놀랍게도 그렇지 않은 참가자(사전에 질문를 제시 받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멘트 회사에 근무할 사람은 남성이어야 한다는 대답을 더 많이 내놓았습니다. 분명히 여성 차별적이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남성성이 강한 직업에서 여성을 더 많이 배제하려 했던 겁니다.


후속실험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모닌은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원하는 지원자 5명의 이력서를 보여주고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라는 과제를 참가자들에게 던졌습니다. 지원자들 중에는 유일하게 백인 여성 1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나머지는 모두 백인 남성), 명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누가 봐도 다른 지원자들보다 매력적으로 보였죠. 이런 조건 하에서 참가자들은 '나는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신호를 받았거나 '나는 여성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식했을 겁니다.


하지만 모닌이 첫 번째 실험에서 제시했던 시멘트 회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참가자들은 이런 조건에 노출되지 않은 참가자들(지원자 5명 모두가 백인 남성이라는 조건을 접한 참가자들)에 비해 여성보다 남성을 더 많이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모닌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에 대한 편견 상황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을 수행했는데, 흑인에 대한 편견이 없음을 사전에 자극 받은 참가자들이 신임 경찰관으로 흑인보다는 백인을 더 선호했습니다.


이렇듯 성, 인종, 정치적 성향 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자극 받고 나면 그 다음에 보이는 판단과 행동이 편견에 빠지고 마는 현상, 간단히 말해 편견이 없다는 자신감이 오히려 편견에 의한 행동을 강화시키는 현상, 이를 심리학에서는 '크레덴셜 효과(Credentials Effect)'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직전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되지 않았다고 자신하거나 느낄수록 그 다음의 말이나 행동이 편향적이어도 된다는, 일종의 자격(credentials)을 부여 받는다는 뜻입니다. 착한 일을 하면 나쁜 일을 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도덕적 허용(Moral licensing)'이란 개념과 크레덴셜 효과를 연결하면 평소에 양성평등을 외치던 사람이 엉뚱하게도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하거나 성희롱를 저지르는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편견이 없다고 자신하면 오히려 편향된 행동이 강화되는 현상. 인간의 심리는 알면 알수록 오묘합니다. 여성 인력을 많이 채용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기업일수록 알게 모르게 차차 여성 인재(혹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려는 경향이 드러날지 모릅니다. 또한 기업에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필수로 진행하곤 하는데 크레덴셜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라지 않는 상황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참고논문)

Benoît Monin, Dale T. Miller(2001), Moral Credentials and the Expression of Prejudi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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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된 '장미빛 전략'이 난무하는 이유   

2012. 9.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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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여러분에게 간장과 케첩이 혼합되어 역겨운 액체를 마셔보라고 권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역겨움이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라고 말하면서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는 마음으로 이 액체를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마셔줄 것을 부탁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간장과 케첩이 섞였다고?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맛이겠죠. 프린스턴 대학교의 에밀리 프로닌(Emily Pronin)과 동료들은 이런 역겨운 액체를 마셔야 하는 실험에 153명의 학생들을 참여시켰습니다. 


학생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 그룹은 이 액체를 곧바로 먹어야 한다면 얼마를 마실지 결정해야 했죠('현재의 나'를 위한 결정). 반면, 두 번째 그룹은 오늘밤으로 계획된 실험이 연기되어 다음 학기에 실행될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가 되면 얼마를 마실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미래의 나'를 위한 결정).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은 이 액체를 자신이 아니라 다른 학생이 실험에서 마실 양을 결정하라고 요청 받았죠('타인'을 위한 결정). 학생들은 1작은큰술, 1큰술, 1/4컵, 1/2컵, 1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과학의 발전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양을 선택해 줄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학생들은 '현재의 나'보다는 '미래의 나'에게 역겨운 간장-케첩 음료를 더 많이 '먹이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당장 음료를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대략 2큰술 정도 마실 수 있다고 했지만, 다음 학기에 자신이 먹어야 할 경우에는 반 컵 분량에 가까운 음료를 마시겠다고 답했습니다. 타인을 위해 음료의 양을 결정할 경우에도 역시 반 컵 정도의 음료를 할당했습니다.


이 결과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는 사실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간장-케첩 음료는 지금도 역겹고 다음 학기에도 똑같이 역겹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역겨움에 대한 내성이 생길 리 없습니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사람들이 '미래의 나'가 그런 역겨움을 더 잘 참아내리라 믿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에 비해 무엇이든 잘 참아내고 잘 극복하는 이상적인 대상으로 막연히 떠올린다는 것이죠. 또한 '미래의 나'를 위한 결정과 '타인'을 위한 결정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실험 결과는 우리가 '미래의 나'를 낯선 타인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미래의 나'를 '나'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죠.


확인을 위해 프로닌은 낙제 받을 위험에 처한 동료학생 A를 위해 공부를 도와줄 수 있는지 학생들에게 묻는 후속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실험이 중간고사 기간에 수행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타적인 결정과 이기적인 결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죠. 프로닌은 학생들에게 "바로 A를 도와줘야 하는데 몇 시간이나 도울 수 있는가?('현재의 나')"라고 물었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A를 다음 중간고사 기간에 도와줘야 한다면 몇 시간이 도울 수 있는가?('미래의 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현재의 나' 조건의 학생들은 27분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한 반면, '미래의 나' 조건의 학생들은 85분이나 도울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다른 학생이 A를 도와야 한다면 몇 시간이나 도와줄까?"라는 '타인' 조건의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120분이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답했죠(하지만 '미래의 나' 조건과 비교했을 때 통계적인 차이는 없었음).


"100분의 1의 확률로 50달러에 당첨될 수 있는 복권을 지금 받을 것인가, 아니면 65달러에 당첨될 수 있는 복권을 2.5개월 후에 받을 것인가?"를 묻는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현재의 나' 조건일 때는 46퍼센트만이 2.5개월 후에 복권을 받겠다고 말한 반면, '미래의 나'와 '타인' 조건일 때는 공히 74퍼센트가 복권을 나중에 받겠다고 답했습니다. '미래의 나'가 '현재의 나'에 비해 만족을 지연시키며 더 잘 참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었죠. '미래의 나'는 '타인'처럼 먼 존재로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람들은 '미래의 나'를 이상적인 존재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재의 나'가 하지 못한 일을 '미래의 나'는 잘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일이 된다고 해서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고 없던 능력이 생겨나며 열정이 솟아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나'는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고 사람들은 막연하게 믿어 버리죠. '미래의 나'는 사실 '현재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미루는 습관'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에 프로닌의 실험은 의미가 있지만, 기업이라는 조직에 시사하는 바도 큽니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 계획을 수립할 때 혹은 중장기 전략을 세울 때 '미래의 조직'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래가 되면 '다 이루어지겠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라고 막연한 기대를 겁니다. 사실 '미래의 조직'이 '현재의 조직'보다 더 나아진 상태라고 보장하지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지금은 간장-케첩 음료를 2큰술 밖에 못 먹지만 그때가 되면 1/2컵이나 마실 수 있을 거야.'란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약 '미래의 조직'을 이상화하는 편향에 빠지면 프로젝트 계획이나 중장기 전략이 허황된 '장미빛'으로 가득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일정을 아주 빠듯하게 잡는다든지, 기대효과를 부풀린다든지 하겠죠. 돌발변수나 예상되는 리스크에 대한 대책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저 '잘 되겠지'란 근거 없는 낙관주의만 난무할 겁니다.


'미래의 조직'은 '현재의 조직'에 비해 더 체계적이고 더 경쟁력 있으며 더 일사불란한 조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오늘 여러분이 수립하는 크고 작은 계획들은 태생적인 리스크를 잉태하는 꼴입니다. 그 계획들을 실행할 '미래의 조직'의 실태를 냉철하게 판단할 때 현실성 있는 계획이나 전략이 수립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미래의 조직'은 '현재의 조직'과 별다를 것이 없으니까요.



(*참고논문)

Emily Pronin, Christopher Y. Olivola, Kathleen A. Kennedy(2008), Doing Unto Future Selves As You Would Do Unto Others: Psychological Distance and Decision Making,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Vol.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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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를 승진시키지 마라   

2012. 9. 1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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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랑이 심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 믿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토론 그룹의 일원으로 끼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여러분은 아마도 그를 리더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겠다고 말할 겁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믿는 자, 뭔가 잘못되면 자신은 뛰어난데 주변 상황이 자신을 도와주지 못한다며 불평을 늘어 놓는 자, 즉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에게는 리더의 지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겠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르시시스트들은 사람들로부터 리더의 소양을 갖춘 자로 인정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를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동료들이 아니라 지근거리 너머에 위치한 나르시시스트의 상사에게 리더십이 뛰어나다고 평가 받기 쉽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의 에이미 브루넬(Amy B. Brunell)과 동료 연구자들이 수행한 일련의 실험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브루넬은 효용이 이미 증명된 설문지를 통해 실험 참가자들의 나르시시즘 성향, 5대 성격 특성, 자존감을 측정한 후에 무작위로 4명씩 그룹을 이루게 했습니다. 각 그룹에게는 학생회의 프로그램 디렉터에 지원한 후보자의 가상 프로필을 읽고서 후보자의 리더십과 능력 등을 평가하는 위원회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물론 멤버들은 토론을 통해서 그룹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야 했죠. 토론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리더십을 평가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그룹의 리더가 되기를 희망하는지도 적어야 했죠. 분석 결과, 참가자들의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을수록 그룹의 리더가 되길 원하는 정도가 높았고 자신의 리더십도 높이 평가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은 참가자가 다른 멤버로부터 높은 리더십 평가 점수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실험은 나르시시스트가 리더로 인정 받거나 선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학생회 디렉터를 평가하는 일처럼 확실한 '정답'이 없는 문제를 토론 주제로 주었기에 나르시시즘과 리더십 점수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을지 모릅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브루넬은 난파선이 어느 섬에 가까스로 당도한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난파선에서 구할 수 있는 15개의 물건을 생존에 필요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과제를 참가자들에게 부여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로 4명씩 구성된 그룹 멤버들은 토론을 통해 그룹의 의견을 결정해야 했고, 토론이 끝난 후에 자신과 다른 멤버의 리더십을 평가해야 했습니다. 결과는 동일했습니다.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을수록 다른 멤버로부터 리더십 평가를 높게 받았죠. 하지만 나르시시즘 성향은 개인과 그룹의 성적(15개 물건을 옳게 배열하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잘났다'고 자랑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이 실상은 그렇게 잘나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였죠.


브루넬은 MBA 과정에 다니는 153명의 관리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실험을 수행함으로써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무작위로 4명씩 구성된 각 그룹은 가상의 기업이 기부한 자금을 가지고 예산을 정해야 하는 학교 이사회의 역할을 맡아 자기 그룹의 의견을 최종 결정해야 했습니다. 앞의 두 실험과 다른 점은 보다 객관적인 측정을 위해 2명의 훈련된 평가자가 멤버들의 리더십을 평가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분석 결과, 훈련 받은 전문 평가자가 측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은 자가 역시 높은 리더십 점수를 받았습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어떻게 하여 다른 이들로부터(심지어 전문 평가자로부터) 리더로 인정 받는 걸까요? 아마도 그들은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자신의 의견을 남들보다 자주 개진하고 다른 멤버들에게 강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나르시시스트의 태도가 다른 멤버들에게는 자신감으로 인식되어 보다 쉽게 영향 받고 보다 쉽게 설득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이유가 분명치는 않지만 어쨌든 나르시시스트들은 리더로 인정 받을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물론 브루넬의 실험은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짧은 시간 동안 느낀 리더십을 평가토록 한 것이기에 멤버들이 오랫동안 같이 일할 경우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스트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동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으려 않겠죠. 하지만 그렇게 동료들에 의해 빨리 탈락되는 나르시시스트들은 그저 '왕자병', '공주병' 환자에 불과합니다. 진짜로 영악한 나르시시스트들은 높은 위치에 오르기 전까지 자신의 발톱을 숨기며 남들에게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특히 상사에게는 더욱 그러하죠. 여기에 사람을 잘 다루며 설득력 있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사회적 스킬을 가미하면 나르시시스트가 리더로 인정 받고 선발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집니다. 리더로 선발할 권한은 대개 나르시시스트의 상사(혹은 경영자)가 쥐고 있기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관점(동료들의 관점이 아니라)에서는 나르시시스트를 비(非)나르시시스트보다 '좋은 리더'로 여길 가능성도 높습니다.


좋은 리더를 뽑기 위해 평가 센터(Assessment Center)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방법도 나르시시스트를 걸러내지 못한다는 것을 브루넬의 세 번째 실험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평가자도 나르시시스트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평가 센터가 나르시시스트의 승진을 돕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나르시시스트들을 승진의 사다리에서 내려오게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발톱을 철저히 감춘 나르시시스트를 밝혀내기란 상당히 어렵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은 직원들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폭넓게 들어보는 것 뿐입니다. 


그간 이 블로그에서 나르시시스트에 관해 언급한 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성과를 우선하기에 조직 성과를 방해하고, 창의적이지 않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강요함으로써 조직의 창의성을 저해하며, 지나치게 과감한 결정을 내려서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고, 급기야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비리를 저지르고도 응당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로 착각하기도 하죠. 나르시시스트가 조직의 리더로 잘못 인정 받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일 또한 건강한 조직문화를 구축하는 방법임을 항상 기억해야겠습니다.



(*참고논문)

Amy B. Brunell, William A. Gentry, W. Keith Campbell, Brian J. Hoffman, Karl W. Kuhnert, Kenneth G. DeMarree(2008), Leader Emergence: The Case of the Narcissistic Leader,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Vol. 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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