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을 들고 다니는 사나이   

2010. 2. 2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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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를 10번 던졌더니 이상하게도 10번 모두 6 이 나왔다고 해보죠. 어떤 사람이 11번째 던졌을 때 나오는 숫자를 맞히면 그 숫자에 1만원을 곱한 금액을 당첨금으로 주겠다고 할 때(예를 들어, 4가 나올 것을 맞히면 4만원을 딴다), 여러분은 어떤 숫자를 선택하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6이 아닌 다른 숫자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10번째까지 6이 연달아 나왔는데 11번째까지 6이 나오는 확률은 거의 희박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10번째에 6이 나온 사건과 11번째에 6이 나올 사건은 확률적으로 ‘독립적인’ 상황입니다.

주사위는 결코 10번째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사람만이 그걸 기억할 뿐이죠. 확률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11번째 시도에도 6에 걸어야 함이 옳습니다. 6이 나올 확률은 1/6로 다른 숫자의 경우와 동일하면서도 당첨금은 6만원이고 기대값은 1만원(=6만원*1/6)으로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수학 저널리스트인 마틴 가드너가 이러한 '오해'를 비꼬아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사나이가 누군가 비행기에 폭탄을 휴대하고 탑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뇌관을 제거한 폭탄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보안검색이 심한 비행기에 폭탄을 가지고 타는 승객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발생하기 어려운데다가, 폭탄을 가진 승객이 두 명이나 탑승하는 것은 더욱 일어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의 생각이 일리가 있어 보이나요? 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다른 사람이 가지고 다니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폭탄을 가지고 다니는 사나이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진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규사업을 전개하려 하는데, 타사들이 그 사업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했다고 해보죠. 신규사업을 시작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타사가 실패를 계속 했으니 이번에는 성공할 거야, 혹은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실패하고 말 거야' 라고 단순하게 판단하여 신규사업을 전개하거나 접어 버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전략적 의사결정에 있어 이와 같이 타사의 경험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주사위를 던져 가부를 결정하는 일보다 못합니다. 성공할 건지 실패할 건지의 확률은 신규사업의 컨셉과 전개해 나가는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타사의 경험이 이미 결정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시장과 고객은 변하기 마련이고 타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타사와는 엄연히 다른 독립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전략적 의사결정을 할 때는 '주사위가 10번째의 결과를 기억하지 못하고 11번째의 시도를 시행'하듯 해야 합니다. 타사의 성공과 실패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물론 있지만, 그것에 얽매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요.

한참 블루오션이 화두였을 때 레드오션인 산업으로 진출하면 백전백패할 확률이 크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서브웨이는 햄버거가 가지기 어려운 웰빙 이미지로 미국의 패스트푸드 산업을 장악했습니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은 즐거움이라는 차별적 서비스로 기존 항공사를 앞서 나갑니다. 치열한 출판시장에서 룰루닷컴은 자비출판이라는 새로운 사업모델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타사의 성공과 실패 확률을 기초로 판단했다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기업들이죠. 기업이든 개인이든 선택은 언제나 스스로의 몫입니다. 다른 기업,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겁게 폭탄 하나씩 들고 다녀야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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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양한 기차들   

2010. 2. 2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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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발달한 일본의 기차들은 어느 노선을 달리느냐에 따라 각기 브랜드가 있더군요. 색깔과 모양이 다른 기차들을 타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노선별로 특이한 '브랜드 기차'를 운행하면 어떨까요? 

'부산 행' 기차보다는 '부산갈매기 호'라는 브랜드를 가진 기차가 더 친근하지 않을까요? 철도공사에서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


후쿠오카 하타카역에서 뱃부로 향하는 '소닉(Sonic)' 기차. 차체 색깔이 파랗습니다. 의자 모양이 미키마우스 귀 처럼 생긴 게 특징이죠. 그 모양이 소닉 기차의 로고로 쓰인답니다.


소닉(Sonic) 기차의 화장실 옆에 전시된 곰 인형


뱃부에서 오이타로 향하는 흰색 기차. 날렵하게 생겼습니다.


오이타에서 유후인으로 향하는 2량 짜리 미니 디젤 기차. 귀엽게 생겼습니다. 모든 역에 다 서는 완행 열차죠.


유후인에서 오이타 쪽으로 향하는 빨간색 기차. 1량 짜리라서 더 귀엽습니다.


유후인과 후쿠오카 사이를 운행하는 관광열차, '유후인노모리' 기차입니다. '유후인 숲'이라는 뜻이죠. 차체가 높아서 시야가 넓습니다.


유후인역의 이정표 모습. 유후인은 온천의 도시랍니다.


유휴인 역 플랫폼에 마련된 온천 족욕장. 우리나라의 역에도 이런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후쿠오카에서 하우스텐보스 구간을 운행하는 '하우스텐보스 특급 열차'.


나가사키에서 사세보로 향하는 '시사이드 라이너 호 열차'. 실내가 기차라기보다는 전철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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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과 친구가 되자   

2010. 2. 19.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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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거두, 하이젠베르그는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양자의 위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순간 운동량을 측정할 수가 없고, 반대로 운동량을 측정하는 순간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으로서 양자역학의 근간이 되는 원리입니다.

경영에서도 비슷한 법칙이 존재합니다. 바로 '불확실성의 원리'죠. 기업의 현 상황과 미래의 모습을 동시에 알아내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기업이 처해 있는 상황에 적합하도록 전략을 수립했더라도 그것이 한 달 후에 유효할지는 아무도 담보하지 못합니다. 

또한 미래의 환경을 나름대로 감안하여 전략을 세워도 현재의 상황과 역량을 고려치 않는다면, 말 그대로 ‘근사한 공상’에 지나지 않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지요.

(집 모양이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씩 다르네요)



확언컨대, 현재는 과거보다 불확실하며 미래는 현재보다 더욱 불확실할 겁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반대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말하듯, 우리 주변의 무질서함은 예측 가능한 것을 예측 가능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불확실성을 낳고 불확실성은 기업환경의 무질서 정도를 점점 증가시킵니다.

바퀴 두 개짜리 수레와 비교조차 불가능한 자동차의 복잡한 구조를 떠올려 보면, 복잡함이 불확실성과 무질서함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전자장치 오작동으로 급발진 사고를 일으키는 이유는 첨단 전자장치로 무장한 자동차의 내부구조 때문이죠.

기업환경의  무질서함은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이 많아지고 또 어디로 튈지 모르게 각자간의 상호작용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이제까지 별 상관 없는 산업영역에 있던 기업이 갑자기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신생기업이 과거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전략으로 새롭게 부상하거나 하는 등의 현상이 나날이 발생하기 때문에 환경은 점점 무질서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예를 들어, 이동통신업체가 제공하는 소액결제방식이 신용카드의 아성을 위협한다든지, 소위 지속가능력(Sustainability)을 내세워 기업의 환경보호와 사회공헌 등에 대해 정부와 일반대중이 압박을 가한다든지, 기업으로선 신경 쓸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무질서해지고 기업은 할 일이 많아집니다.

누구나 불확실성을 싫어합니다. 하다못해 내일 아침에 우산을 가져갈 것이냐 말 것이냐 놓고 고민할 때,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TV를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지요. 기업도 마찬가집니다. 어쩌면 기업이 매일매일 하는 활동의 많은 부분이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의도 때문입니다. 회의를 하거나 보고를 하고 고객을 만나 이야기하고 교육을 받는 등의 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기획부서에서는 앞으로 1주일, 한 달 후, 1년 후 등의 미래에 우리의 실적이 과연 어떻게 될까, 경쟁사들은 어떻게 될까를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에도 기업이 굳건히 살아남기 위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인사부서에서는 우수인재를 뽑고 육성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아마 미래가 불확실하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는 인력과 각종 인프라의 3분의 2 정도는 없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없어도 될 인력’을 불확실성 때문에 보유한다는 말입니다. 엔트로피를 줄이려면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어지러워진 방을 청소하려면 손에 청소기를 들고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함이 커진다 해서 ‘무질서를 감소시킬 사람’을 예전보다 많이 고용할 수는 없습니다. 생산성 증가의 압박도 동시에 커지기 때문이죠. 따라서 기업은 인력을 덜 고용하는 대신에 현재 근무하는 인력에게 더욱 많은 일을 시키게 되고 과거보다 양질의 성과를 요구하게 될 겁니다. 

우울하게도 이것이 미래학자들이 내다보는 미래의 모습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면서도 무질서를 감소시키기 위해 더 적은 인력으로 더 많고 더 어려운 일을 시키게 될 겁니다. 또한, 인력의 규모가 노조의 교섭력 강화, 인력관리의 비용 증가 등과 같이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에 미래에는 전문성을 지닌 ‘프리 에이전트(Free Agent)’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제까지는 예측을 잘 하는 기업이 성공해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측기법에 기반하여 기획부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곧 쓰레기가 될 엄청난 양의 보고서를 만들지요. 그러나 미래는 예측 가능하리란 가정과 바람은 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미래에는 ‘확실히’ 불확실성을 잘 다루는 기업이 산업을 호령하는 시대가 될 겁니다. 미래에 무엇을 할지를 미리 대비하고 ‘실행력’을 구축하십시오. 남이 무엇을 하는지 쳐다보지 말고 무궁무진한 기회의 보고인 미래를 연구하기 바랍니다. 불확실성과 친구가 되십시오. 이것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유일한 전략이자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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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2010. 2. 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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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중입니까? 가르치면서 어려움을 느끼진 않는지요? 가르침을 직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길을 묻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일일지언정 우리는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자주 서게 됩니다. 오늘은 남을 잘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잘 가르치는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눈 감고서도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 생(生)초보가 얼마나 한심할까요? '내'가 하면 1시간이면 뚝딱 해치울 일을 1주일 내내 붙잡고 끙끙거리는 부하직원을 보면 얼마나 가슴이 터질까요? 

가르치는 자 중에서 겸손하지 못한 자는 화가 앞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 그것도 못하냐며 윽박지르고 상대방을 비하합니다. 혹은, '네가 나의 깊은 뜻을 알기나 하겠어' 라며 업신여기거나 무시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자의 이런 태도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스스로 깨우치게 만들지 못합니다. 반발하고 저항할 뿐입니다. 인간은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가르치는 일에 실패하고 맙니다. 

부모가 아이를 가르칠 때 ‘이것도 모르냐’며 불같이 화를 내며 답답해 하거나 급기야 매까지 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가 하나의 개념을 받아 들이려면 수백 번의 반복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다려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가르치려는 태도는 자녀에게 과도한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심하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교육자인 로린 홀랜더(Lorin Hollander)는 어렸을 적에 자신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 세우는 선생님들 앞에 설 때마다 너무나 공포에 떤 나머지 몇 년 동안 손가락이 마비되어 펴지지 않는 증상을 앓기도 했습니다.

난방장치의 온도조절장치를 20도에서 25도로 높인다 해도 25도에 도달하려면 시간이 소요됨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추운 날 차를 출발하기 전에 워밍업을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지도할 때는 참을성을 종종 상실하죠. “왜 내가 말한 대로 안 해?”라며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상대방의 미숙함을 자신의 지시에 대한 반항으로 오해하고 못살게 굽니다. 

올바른 가르침은 배우는 자가 습득할 시간을 기다려주는 인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배운 바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 책임은 1차적으로 가르친 사람이 져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디어나 지식도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없다면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이론에 불과합니다.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도취되어 일반인들의 낮은 이해력을 비웃으며 더욱 난해한 이론의 벽을 쌓아가곤 합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위대성은 그의 가르치는 자세에서도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발견한 ‘상대성 원리’는 우리가 우주를 바라보는 직관과 배치됩니다.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측정 결과가 달라지고 중력에 의해서 시공간(時空間)이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통찰을 오늘날의 사람들도 잘 이해하지 못하죠. 

그래서 그는 일반인들이 상대성 원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책을 썼습니다. ‘상대성 : 특수이론과 일반이론’이란 책인데,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상대성 원리의 입문서로 많이 읽힙니다. 그는 자신의 의붓딸인 마르코트에게 상대성 원리를 가르쳐주면서 그녀가 정말 이해하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패서디나에는 ‘파인만 도형’이라고 불리는 그림 여러 개가 그려진 자동차가 전시돼 있습니다. 그 자동차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생전에 가족들과 여행을 다닐 목적으로 사용했던 누런 색 밴입니다. 

이 파인만 도형(전자와 같은 입자가 서로 접근하다가 광자를 교환하면서 상호작용한 후에 서로 멀어져 감을 나타내는 그림)은 복잡한 수학 계산 없이도 원자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쉽게 통찰하도록 해 주는 파인만의 발명품입니다.

동료 교수이자 경쟁 상대이기도 했던 줄리언 슈윙거 (Julian S. Schwinger)가 수백 개의 난해한 수학식을 써서 유도해 낸 물리학적 의미를 파인만 도형은 간단하게 전달합니다. 이 도형은 오늘날에도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데 큰 가르침을 줍니다. 파인만 도형이 없었더라면 많은 물리학도들이 골머리를 무지 썩었을 겁니다. 파인만 도형은 위대한 학자일수록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입니다.

허나, 슈윙거는 “파인만 도형이 계산을 대중에게 주었다”라고 말하며 이 도형의 가치를 폄하하곤 했습니다. 파인만이 과학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을 깎아 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학적인 글을 보면서 얼마나 절망합니까?

‘버스 정류장의 전형적인 월요일’ 같은 정신적 지도는 물리적 사물로 표상될 수 없다. 이러한 표상은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시간, 관계, 행동들까지 포함한 표상이다. 그러한 고등한 코드는 또 다른 면에서 인체 지도와 같다 (데이비드 베레비著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에서)

도무지 의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글자 하나하나는 정확히 읽혀도 뜻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력은 전혀 안중에 없는 오만한 가르침은 어떤 면에서 '지적 폭력'은 아닐까, 란 생각까지 하게 만듭니다.

쉽게 가르치는 것이 어렵게 가르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인내하며 가르치는 것이 군림하고 몰아 세우며 가르치는 것보다 더 힘듭니다. 여러분이 지금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면, 가르침은 곧 겸손이고 인내임을 가르치는 내내 마음 속에 담아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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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가 아니라면, 탈출하세요   

2010. 2.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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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동물원에 가면 원숭이들이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 먹으려고 철망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쉽게 봅니다. 박수를 치며 이리로 던지라고 하는 놈도 있고, 어떤 놈은 자신에게만 과자를 던져주지 않는다는 듯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요. 

애가 타서 낑낑거리는 녀석도 있습니다. 먹이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사육사들이 끼니 때마다 충분한 양의 먹이를 줄 텐데 놈들은 왜 그렇게 먹는 것에 탐닉할까요?


왜냐하면 매우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우리에 갇혀 있다는 구속감과 몇 안 되는 동료 원숭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지겨움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은 그저 먹는 것 뿐입니다. 원숭이들은 관객이 던져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입으로 가져가고 배가 다 차도 끊임없이 먹어댑니다. 

관객들이 던져주는 과자 받아먹기는 원숭이에게는 지루함을 이겨내는 놀이일 뿐입니다. 하나라도 더 받아먹으려고 서로 다투는 것은 경쟁 욕구를 자극할 뿐만 아니라 뱃속에 추가적인 에너지까지 저장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죠. 

원숭이가 아닌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 먹다가 배의 압력 때문에 질식해서 죽는 곰이 있습니다. 어떤 고릴라는 고대 로마의 귀족들이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먹은 것을 토해내고 다시 먹는 행위를 즐겼던 것과 똑같이 하기도 한답니다. 동물원 관리자들이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던져 주지 말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죠. 이처럼 동물들은 무료한 상태에 빠질수록 식욕이나 성욕 같은 ‘익숙한 자극’에 탐닉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군인들을 보면 알 수 있죠. 영내로 제한된 이동의 자유. 이성(異性)과 차단된 생활.매일 똑같은 또래집단. 지겹고 지루할 만합니다. 자유가 억압된 상태에서 동물이나 인간은 자연스럽게 본능의 충족에 집중합니다. 군인들이 사회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을 초코파이를 보면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이유도 비슷한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먹는 행위에 빠지는 것 이외에 동물들은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사자 같은 고양이과 동물들은 지루함이 극에 달하면 죽은 새나 죽은 쥐를 공중으로 높이 던지고 나서 그것을 쫓아가서 잡아채는 행동을 반복합니다. 마치 살아 있는 먹잇감을 사냥하듯이 말이다. 원래 고양이과 동물은 이미 죽어 버린 먹이는 먹지 않고 오직 살아있는 먹이만 잡는 습성이 있습니다. 

놈들이 죽은 먹이를 공중으로 던져 ‘날도록’ 만드는 이유는 그렇게 하면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죽은 먹이를 날려서 잡아 채는 행위는 나름대로 무료함을 극복하려는 놈들만의 ‘스포츠’인 셈이죠.

이처럼 늘어질 대로 늘어진, 별다른 자극 없이 평탄하고 지루한 일상은 우리 몸에 무척 해롭습니다. 자극이 빈곤하고 늘 한정되어 있는 일상의 범주는 폭식과 같은 잘못된 자극원(原)에 탐닉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비만뿐만 아니라 각종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지요. 

혹은 고양이과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정신적으로 이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지루할 정도로 편안한 일상에 액센트를 가할 따가운 자극이 없다면 우리는 익숙한 자극에 몰두할 수밖에 없으며, 심할 경우 삶의 의미를 상실하거나 부정하게 되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지요.

누군가에게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TV 뉴스에서 교통사고로 일가족이 한꺼번에 죽은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TV를 보던 그는 소식을 전하는 비통한 표정의 앵커를 무감각하게 쳐다보다가 “불쌍한 저 사람들 대신에 내가 대신 죽어 줄 수도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그는 신문이나 TV에서 사망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대신 죽고 싶단 생각이 들곤 했답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삶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일말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지요. 삶으로부터 행복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절박하거나 괴롭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의미 없이 비슷비슷한 일상이 매일 반복되는 것에 숨이 갑갑했다고 합니다. 사고로 숨진 사람들을 대신에 죽을 수만 있다면 자신을 조여오는 삶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믿었죠. 그에게 있어 삶은 그저 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가까스로 삶의 의미를 찾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바로 처음으로 떠난 스위스 여행이었습니다. 만년설이 머리를 덮고 있는 몽블랑 아래 드넓은 초원. 산기슭 여기저기에 띄엄띄엄 자리잡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한 샬레(chalet, 스위스 전통 가옥)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을 휘감고 올라가는 빨간 산악열차의 달리는 소리. 그는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볼 것이 많구나.’ 산에서 산으로 부는 바람 속에 서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촉감과 후각을 맘껏 느꼈습니다.

그는 가만히 자신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일깨우는 가슴 속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살아있음은 갑갑함이 아니라 기쁨이고 희열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이에게 선뜻 내어 줄 수 있는 덤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선물이었지요. 자신이 스스로 밀어 낸 삶이 가슴을 꽉 채우는 의미로 되돌아 온 경험은 그가 고백했듯이 감격 그 자체였습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삶이 무료하고 갑갑하고 짜증난다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혼돈스럽고 무감각하다면 자신을 억류한 철창을 부수고 당장에 여행을 떠나야 합니다.

여행은 새로운 자극의 체득을 통해 삶의 의미를 탐색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 안전한 방법입니다. 폭식이나 폭주, 혹은 마약을 통해서도 색다른 자극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은 말초적이고 일회적인 자극에 불과하죠. 

답답한 가슴을 활짝 열고 지금 바로 여행을 떠나세요. 싱그러운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을 옮기며 새로운 풍경이 가슴을 지나 내 삶 안에 가만히 자리잡는 걸 느껴 보세요. 점심을 먹고 산책하는 공원길도 짧지만 훌륭한 여행입니다. 낯선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나 내려서 어슬렁거려보는 것도 좋죠. 뜻하지 않는 즐거움과 행운이 거기에서 여러분을 기다릴지 누가 아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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