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은 푸르구나   

2008. 5. 5.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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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5월 5일, 참 푸른 하루였다. 내 사진이 그걸 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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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화로 풀지 마라   

2008. 5. 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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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다 살던 집의 시세가 오르자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팔고서 교외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학원은 옮겨가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서 계속 운영했다.

그런데 집을 팔자마자 시세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몇 천 만원씩 오르더니 급기야 자신이 판 금액의 두 배 가까이 육박하고 말았다. 이사를 갔으니 떨어지든 말든 잊어버리면 그만이었겠지만, 학원 때문에 자신이 판 아파트 시세의 변화를 가까이서 목도할 수 있었던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학원으로 가다가 팔아 버린 아파트를 볼 때면 가슴이 방망이질 치면서 숨쉬기 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길로 돌아가곤 했다.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기에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내린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퍽퍽한 가슴만 내리 칠 수 밖에 없었다. 한 두 푼도 아니고 몇 억원의 돈이 순간의 판단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자기학대로도 화를 이겨내기 어려웠다.

여자의 성격은 점점 포악해졌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짜증이 났다. 집안 일이고 학원 일이고 모두 귀찮았다. 학원에서 아이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이유야 상관없이 소리부터 질러댔다. 가슴 속의 화가 활활 타오르다 보니 애꿎은 아이들에게로 자신의 화가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변한 걸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소리라도 벅벅 질러야 화가 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다혈질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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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화를 풀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든, 타인 때문에 화가 나든 간에 참지 말고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화는 풀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푼다'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곤 한다.

화가 난다고 해서 그 화를 남에게 전이시키거나 되갚아 주는 것, 즉 나의 화를 '풀어해치는' 방법은 옳지 않다. '내가 화났으니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가만히 안둘 테야' 혹은 '네가 날 화나게 만들었으니까 나도 널 화내게 만들겠다'며 화를 있는 그대로 앙갚음하는 것은 화를 푸는 방법이 아니다.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을 증오하고 저주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샌드백을 대신 두들겨 패거나, 상관없는 이들에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화가 줄어들지 않는다. 순간적으로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들은 오히려 자신의 화를 증폭시키고 스스로를 모난 인간으로 변하게 만들 뿐이다.

위에서 말한 그녀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제3자에게 화를 내는 행동을 취했겠지만, 그것으로 화의 근원을 치유할 수 없다. 남에게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화를 풀다보면 처음 한 두 번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겠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차츰 익숙해지면서 일상이 된다. 그리고 어느덧 자신의 성격은 괴목처럼 비뚤어진 모습으로 굳어진다.

화는 화로 풀어서는 안 된다. 불 난 집에 불씨를 던져 넣는다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 불은 물로 끄는 게 상식이다.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화는 '자각(自覺)'이라는 물로 꺼뜨려야 한다. 가슴 속에 화가 일렁이면 그것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려는 감정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화를 마치 내것이 아닌 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나를 화내게 한 사람으로부터, 혹은 화가 발생한 물리적 장소에서 잠시 벗어나 생각에 잠겨보라. 깊은 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도 좋다. 화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내가 힘든 것이 무엇인지, 나를 화 나게 한 사람(자신 또는 타인)의 지금 상태는 어떨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의 화가 어떻게 변할지 등을 제3자가 되어 찬찬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본다. 그렇게 자각하는 '냉각기'를 거치면 그전보다 화가 엷어진 게 느껴지고 용서할 마음이 생겨난다.

그런 다음,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느껴보라. 내 행복의 크기가 화에 의해 좌우되도록 만들어선 안된다. 행복은 누구에게서 주어지거나 누구로부터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는지에 달렸다.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자각할수록 화 따위는 봄 눈 녹듯 사라진다.

그녀가 비록 수 억원의 돈을 물거품처럼 날렸다고 해도, 소중한 가족인 남편과 자녀들은 변함없이 그녀와 함께 숨쉬고 있질 않은가? 수 억원의 행운을 받게 된다고 해서 가족의 불행을 댓가로 치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노여워하고 괴로워하기 전에,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먼저 깨닫는 것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를 잠재우는 방법이다.

화가 나면 감정의 노예가 된다. 노예가 되면 자신의 삶을 노예의 삶 이상으로 결코 만들 수 없다. 화가 나면 자신이 화를 다루는 주인임을 자각하라. 화가 주인 행세를 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 자각하고 명상하는 것이 화를 올바르게 푸는 방법이고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자신 또는 타인)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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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회사 직원들은 왜 창의적이지 못할까?   

2008. 5. 3.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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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기업들 모두 창의적인 사고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는 분위기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이 창안되고 있으며 회사는 직원들에게 그 기법을 습득시키려 많은 돈을 지출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창의력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면 숱하게 많은 창의력 교육프로그램들의 목록이 어지럽다. 저마다의 방법론과 도구로 무장한 열띤 광고문구가 교육을 수강하기만 하면 에디슨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울고 갈 만큼의 창의력 소유자가 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창의력 교육프로그램이 그렇게 많고 기업들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직원들을 교육에 내모는 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충분히 창의적이지 못할까? 깜짝 놀랄만한 제품이나 서비스는 왜 아주 가끔 더디 생겨나는 것일까? 수학올림피아드에서 1등을 종종 거머쥐는 우리지만 가까운 일본이 노벨 과학상을 9번이나 수상하는 동안 왜 우리는 노벨평화상 수상 하나로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까? 그래서 어떻게든 노벨상을 받고 싶어서 나라 전체가 황우석 신화에 소위 ‘올인’한 것일까?

많은 지식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결과지상주의, 입시 위주의 교육 등으로 인해 창의적인 사고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모두 맞는 얘기다. 그러나 나는 창의적 사고의 경직과 창의적 사고에 대한 이유 없는 배척의 가장 큰 원인을 우리 모두의 ‘게으름을 동반한 두려움’에서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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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사람들은 강의에서나 책에서 뭔가 새로운 걸 알게 되면 흥미를 느끼다가도 ‘이론은 이론일 뿐이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구.’ 하며 짐짓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책에 나오는 이론이 실천되기 힘든 이유는 이론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바로 그 자신이 게으르기 때문이다. 이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수불가결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 없이 그냥 책을 읽거나 강의를 묵묵히 듣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그동안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또한 당신은 두려운 것이다. 이론을 따르는 데 있어 부닥치게 될 개인의 혹은 집단의 곤란과 반대가 지레 두렵기 때문이다.

창의력을 북돋우기 위한 여러 가지 기법들은 바로 이와 같은 직원들의 ‘게으름을 동반한 두려움’을 깨뜨린 다음에 도입되어야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장 대신 캐주얼을 입게 한다고 해서 창의적인 조직이 될 거라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순수한 생각이다. 사무실 벽면을 알록달록하게 만들고 다소 기이한 가구와 기구를 곳곳에 배치한다고 해서 안 나오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갑자기 샘솟지는 않는다. 해병대 캠프에 우르르 입소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땀범벅 눈물범벅 구른다고 해서 경직된 사고가 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튀는 것을 용납 못하는 집단주의를 강하게 결속시킬 뿐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적어도 창의력에 있어 군대는 독이라는 생각이다. 다소 버릇없었지만 창의력으로 반짝이던 친구가 군대 3년 후 말 잘 듣는 평범한 청년으로 변한 것을 보고 꽤나 애석했던 적이 있었다. ‘쇼생크 탈출’이란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이 가석방된 다음에 수퍼마켓 점원으로 일하면서도 오줌 누러가는 것까지 점장 허락을 받아야 비로소 안심하고 다녀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나는 어쩐지 군대가 우리의 젊은이들을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젊은 모건 프리먼’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남북 분단 상황만 아니라면 징병제는 국가 전체의 창의력 수준 향상과 국가발전을 위해서라도 폐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뭔가를 도입하여 추진하고자 할 때 기성세대들의 대부분은 ‘하면 된다’라는 기치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조직의 창의성을 높이는 데에도 강압적이면서도 중앙집권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창의력에도 ‘빨리빨리’ 문화를 접목하려는 것이다. 강압적인 상황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창의가 아니라 ‘순응’에 지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말할 때 ‘찍어 누르지’ 않고 격려하는 의사소통, 실패를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 새로운 것을 말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 직원들, 새로운 것을 항상 찾아 CEO부터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창의가 벌떡 일어나 춤추는 조직이 된다.

창의가 죽어있는 조직을 창의가 벌떡이는 조직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직원들 마음에 웅크리고 있는 게으름과 두려움에게 싸움을 걸어라. 싸움을 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 화장실 뒤로 나와!’ 라고 버럭 소리라도 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뼈 속까지 사무치는 강한 펀치를 날려라. 경험치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불편함과 까닭 모를 두려움의 존재를 느끼게 하고 인정하게 하라. 그것도 아주 뼈아프게 느끼게 하라. 뾰족한 방법은 없으니 뭐든 시도해 보라. 그러니 고민하라. 해병대 입소 같은 것만 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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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반쯤 감긴 눈으로   

2008. 5. 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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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반쯤 감긴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싶다. 산자락을 낮게 휘감는 희고 풍성한 구름을, 그 밑으로 추억처럼 긴 꼬리를 끌며 지나는 기차를, 몇 가닥의 서늘한 바람이 벌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고요한 풍경을 반쯤 감은 게으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다.

사는 게 재미없고 삶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반복되는 일상을 뿌리치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지럽지 않은 곳으로 숨어 들고 싶다. 그곳에서 나른한 몇 날을 보내고 싶다. 맑은 물가에 앉거나 늘푸른 고목 아래에 누워서 끝내 읽지 못했던 1980년대의 연애소설을 읽는다면 어떨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깊고 푸른 밤’처럼 10%쯤 쓸쓸해지고 싶다.

아픈 대목이 나오면 책을 덮고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다가 잠들면 그만. 그렇게 읽다가 잠들다가, 한껏 빈둥빈둥 거렸으면 좋겠다. 시간이 멈춘 듯 구름은 산모롱이에 걸리고 기차는 느릿느릿 간이역으로 들어온다. 나는 작은 정물이 되어 그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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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별이 뜨고 지평선 너머로 하루가 잠길 때, 푸른 잔디에 누운 평화로운 양떼처럼 꿈을 꾸고 싶다. 그 옛날 함께 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하는 꿈을. 슬프던 지난 서로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내는 꿈을. 그리하여 그 옛날 차마 하지 못했던 용서의 말을 수줍게 전하는 꿈을 꾸고 싶다.

때론 반쯤 닫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추억하고 싶다. 내가 너에게서 받았던 상처보다 내가 너에게 주었던 상처를 위하여, 상처가 상처로 감각되지 않고 그저 증류된 기억의 한 페이지로 갈무리될 수 있도록 마음의 한 켠일랑 닫아둬야지.

상처를 상처로 기억할수록 스스로를 용서 못한 채로 살아가야 함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한껏 외쳐버린 고백의 말보다, 반쯤은 숨기고 반쯤은 내보이는 가난함이 길고긴 삶을 견뎌내게 한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기 때문이다.

내 몸의 한 쪽 끝에서 또 다른 한쪽으로 투명한 물줄기를 흘려보내고, 그 물 위에 희고 고운 그리움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누군가 한 뜀 두 뜀 징검다리를 밟고서 내 안으로 들어오겠지. 그의 마른 이마에 내 볼을 맞대고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작은 그의 손을 잡고서 함께 저무는 풍경 속으로 흐릿해지련다. 열려진, 그러나 반쯤은 닫아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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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흐드러지다   

2008. 4. 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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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 가니, 지난 주말보다 더 많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간단하게 산책을 나온 길이라 '똑딱이'로만 찍었다. 꽃이 지고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서 계절의 흐름을 느낀다. 언덕 아래로 부는 바람에도 진한 봄 냄새가 났다. 따뜻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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