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주면 '장땡'일까?   

2011. 11. 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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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난 1년 동안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던 사장은 직원들에게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고 동시에 친목과 단결을 다지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그가 떠올린 방법은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동남아로 4박 5일 간의 워크숍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사장은 이런 결정이 직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리라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비록 사장 앞에서 말은 안 했지만 '그냥 돈으로 주지, 뭐 하러 그런 데를 가느냐?'는 눈치가 역력히 느껴졌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말하던 어느 직원은 '거기까지 가서 지겨운 사장 얼굴을 또 봐야 하느냐?'라고 구시렁거리기도 했다.
 
사장은 아주 섭섭했다. 돈 쓰고도 욕먹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비록 직원들이 30명 남짓인 작은 회사였지만, 동남아로 여행을 다녀오는 데 드는 비용이 꽤 많이 소요될 터였기 때문이다. 딴에는 큰 결정이었는데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직원들이 야속했다.  상심한 그는 사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직원들에겐 이런 거 저런 거 필요 없어요. 돈이면 장땡이에요." 정말 그럴까? 직원들은 돈만 많이 주면 회사에 충성할까?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 생기는 오해들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처럼 '직원들은 돈이면 다 좋아한다.'는 생각은 그 중에서 가장 풀기 힘든 오해 중 하나이다. '돈으로 주면 좋겠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수용하면 '직원들은 돈이면 장땡이다'라고 생각할 만하지만, 사실 그렇게 내뱉는 직원들이 마음속에서 진짜로 갈구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이다.

위에서 떨어지는 업무 지시를 수행하느라 밤낮으로 일하면서 삶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 때 그 결핍감을 그나마 메울 생각으로 '돈으로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돈이야말로 배려나 관심을 기대할 수 없는 회사 내에서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가장 가깝고 그 가치가 쉽게 변치 않는 대용물이니까 말이다. 직원들이 짓는 냉소적인 표정의 이면을 봐야 한다. 
 
사장이 직원들의 말을 그대로 따라 돈으로만 보상한다면, '그냥 돈으로 달라'는 직원들의 냉소와 '직원들은 돈이면 장땡이다'란 사장의 편견이 악순환하면서 두 계층 사이에 씻을 수 없는 앙금으로 남는다. 또한 다음의 사례처럼 경영진과 직원들 사이의 '사회 규범'이 '시장 규범'으로 변질되고 말지도 모른다. 세바스티안 쿠베라는 실험경제학자는 한 가지 실험을 고안했다. 그는 사람들이 높은 보수를 받으면 그만큼 열심히 일할 거라는 통념이 과연 옳은지 따져보고 싶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3시간 동안 도서 목록을 만드는 작업을 하면 급여를 지급하겠다는 광고를 내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쿠베가 광고에서 학생들에게 지급하겠다고 약속한 금액은 시간당 12유로였다. 그는 광고를 보고 찾아온 학생들을 무작위로 세 그룹으로 나눴다. 일을 시작하기 전,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광고에서 약속한 금액대로 급여를 지급(3시간 동안 일하니 모두 36유로를 지급)하겠다고 말한 반면,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뜻밖의 선물'을 주었다. 바로 학생들에게 7유로를 더 주기로 한 것이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표시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일이 끝나면 7유로를 더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왜 당초 약속한 금액보다 20%나 더 많은 돈을 주는지 이유를 분명하게 알렸다.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도 일을 수행하던 도중에 '뜻밖의 선물'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돈이 아니었다. 7유로에 해당하는 보온병을 역시 "감사의 표시로" 주기로 했다. 이 세 그룹의 학생들 중 어느 그룹이 가장 좋은 성과를 올렸을까? 뜻밖의 선물이 과연 효과가 있었을까?
 
7유로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두 번째 그룹은 첫 번째 그룹과 비슷한 성과를 보였다. 처음에만 반짝하다가 결국 생산성이 비슷해졌다. 20%나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생산성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 셈이다. 반면, 보온병이라는 선물을 받기로 한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은 다른 그룹보다 30%나 높은 생산성을 나타냈다. 게다가 그들의 높은 생산성은 3시간 내내 계속됐다고 한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쿠베의 실험이 주는 시사점은 비금전적인 보상이 생각보다 효과가 크다는 점이다. 뜻밖의 선물이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7유로의 돈과 7유로짜리 보온병 중에서 어떤 것이 더 활용가치가 클까? 당연히 7유로의 돈이 크다. 보온병은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선물이다.

하지만 보온병이란 선물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나를 고용하는 사람이 내게 선물을 하는 의도'를 선(善)하게 느끼도록 하는 효과가 현금보다는 훨씬 크다. 선물을 하기 위해 뭔가 고심을 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다. 즉 보온병이 현금보다는 '왜 나에게 좋은 보상을 해주는가?'란 의문에 더 충분한 답을 주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연구 사례는 너무나 많다.
 
직원들의 성과를 인정할 때 금전적 보상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회사로부터 배려 받고 있다', '내 성과가 정당하게 인정받고 있다'란 메시지를 직원들에게 주기에 돈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효과가 있어도 처음에만 '반짝'하고 만다. 그런 메시지를 직원들에게 전달하려면 비금전적 보상을 함께 구사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복리후생제도는 '직원들은 돈이면 장땡이다'라는 경영진의 편견과 '그냥 돈으로 달라'는 직원들의 냉소가 악순환의 고리로 심화되지 않도록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비금전적 보상의 장치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성과 창출에 지친 직원들의 노고를 사심 없이 인정하고 그들의 고충과 관심을 배려한다는 느낌을 전달함으로써 경영진과 직원 사이의 '사회 규범'이 늘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좋은 복리후생제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직원들이 복리후생제도가 정말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직원들이 이 제도를 충분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 열쇠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메뉴의 가짓수를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 심리학자 쉬나 아이엔가는 시식코너에서 24가지의 잼을 보여줄 때와 6가지 잼을 보여줄 때 고객들이 실제로 얼마나 잼을 구입할지를 살펴봤다. 그 결과 적은 가짓수를 본 고객들의 30퍼센트가 잼을 사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반면에 많은 종류의 잼을 본 고객들은 겨우 3퍼센트만이 구매했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선택되지 않는 것들이 함께 많아지기 마련이라서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는지 확신을 가지기가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무력해지는 법이다. 메뉴의 가짓수를 늘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직원들에게 꼭 필요하고 나아가 업무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메뉴를 알차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직원들의 유형별로 '메뉴판'을 다르게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직원들의 연령대에 따라 필요로 하는 메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미혼인 직원들은 주로 자기계발이나 오락 활동을 선호하고,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고참 직원들은 교육비 지원 등과 같이 자녀를 위한 메뉴를 많이 고른다. 따라서 동일한 메뉴판을 제시하기보다는 직원들의 연령대별로 맞춤 설계된 메뉴판을 제공한다면 "저는 혜택 받을 게 별로 없네요."라는 말이 덜 나올 것이고 활용도가 높아질 것이다. 또한, 연령대별로 메뉴판을 달리하는 조치는 너무나 많은 메뉴를 쳐다보면서 무엇을 고를지 막막해 하는 직원들을 도와주는 역할도 할 것이다.
 
셋째, 수혜자를 직원 개인에게 한정시키지 않는다. 여러 가지 복리후생 프로그램을 직원 자신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할 필요가 있을까? 직원의 직계존속에게 회사의 복리후생 메뉴를 공개하고 같이 즐기면 어떨까? 복리후생제도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을뿐더러 직원의 가족들까지 배려하고 관심을 기울인다는 회사의 진정성을 보다 높일 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지출될 복리후생비라면 이런저런 제약을 두기보다는 완전히 써버리되 '잘 써버리는' 전략이 중요하다.
 
이제 서두에서 언급했던 어느 회사의 뒷이야기를 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자. 사장은 몇몇 직원들의 노골적인 불만을 무릅쓰고 전 직원 해외 워크숍을 진행하는 용기를 보였다. '그냥 돈으로 주지. 뭐 하러...'란 직원들의 냉소 때문에 괴로워하던 사장은 워크숍을 다녀온 이후에 그 고민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회사가 설립된 이후에 처음으로 직원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고충을 귀담아 들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직원들도 회사가 자신들의 공을 인정하여 직원 모두와 함께 해외 워크숍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이처럼 태평양만큼이나 넓던 사장과 직원들 사이의 간극이 크게 줄어들었음을 나타내는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물론 그 간극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지만, 가장 다행스러운 일은 사장이 '직원들은 돈이면 장땡이다'란 편견을 버린 것이었다. 이런 편견을 없애는 일이 복리후생제도가 맨 먼저 넘어야 할 커다란 도전일 것이다.

(* 본 칼럼은 ezwel.com 에 11월 4일자로 실렸습니다. 원문 보러 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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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을을 찍다   

2011. 11. 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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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토)는 날씨가 마치 초여름처럼 더웠습니다. 반팔티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종종 눈에 띄었을 정도였죠. 11월에 단풍이 지고 낙엽이 길바닥에 가득한데, 기온은 스산하지 않으니 가을 느낌이 잘 나지 않더군요. 그래도 풍경만 보면 이제 만추입니다.

곧 겨울이 오고 2011년도 안녕을 고하겠죠?

공원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찍어 본 사진 몇장을 올려 봅니다.
즐거운 가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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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사 시나리오 플래닝 워크샵 실시   

2011. 11. 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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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인퓨처컨설팅의 유정식입니다.

오는 11월 7일(월)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5시간 동안 D사 마케팅 담당 인력을 대상으로 '시나리오 플래닝 워크샵'을 실시합니다. 워크샵의 개략적인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불확실성의 의미
- 시나리오 플래닝의 필요성
- 시나리오 플래닝 사례
- 시나리오 플래닝의 방법론
   - Future Backward
   - Future Forward
- 시나리오 플래닝 실습 : Phase 1 부터 Phase 6까지 진행
   (실제 내부 사례를 가지고 진행)

인퓨처컨설팅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나리오 플래닝 특강과 워크샵을 실시합니다. D사와 같이 5시간 프로그램도 있고, 8시간, 1박 2일 프로그램을 운영 중입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클릭하시거나, 아래의 연락처로 문의해 주시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화 : 02-733-1568 / 010-8998-8868
이메일 : jsyu@infuture.co.kr

감사합니다.

- 유정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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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원장이 비논리적이고 선동적이라고?   

2011. 11. 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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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저녁에 차를 타고 가다가 무료하여 라디오를 켰습니다. 97.3 MHz에서 그때 방송되는 프로그램은 '열린 토론'이었습니다. 중간부터 들은지라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신분이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오고 가는 이야기를 잠깐 들으니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 관하여 각 당의 입장을 정리하여 말하는 자리 같았습니다.



그런데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안철수 원장에 대한 언급을 하더군요. 워낙 이슈의 중심에 있는 사람인지라 그가 안철수 원장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말하는 논리를 듣고 실소를 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KBS 홈페이지 들어가니 그날 나눴던 토론 전문이 올라가 있더군요. 그 부분을 복사하여 아래에 옮겨 봅니다.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철수 교수가 ‘상식과 비상식의 대결에서 시민들이 상식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사실상 상식이 비상식을 이겼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도 과학자답지 못한 대단히 비논리적이며 상당히 국민들을 선거결과를 놓고 갈등과 분열로 놓고 가는 잘못된 선동적 분석이다 이렇게 판단합니다.

만약에 나경원 후보 쪽이 비상식이었다면 나경원 후보고 지지한 46%라든가 또는 50대, 60대에서는 나경원 후보가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지지를 받았는데 50대, 60대의 우리 한국사회의 중견이나 원로급들은 전부 다 비상식이라는 것인지, 젊은이들은 상식이고 중견 원로층은 비상식이라고 하면 한국사회가 물구나무 사회라는 것인지 안철수 교수는 대단히 선거결과를 너무 자극적이고 정치적이고 선동적으로 해석한 것 아니냐 이렇게 판단합니다.

(*출처 : http://www.kbs.co.kr/radio/1radio/kbsopen/interview/index.html ) 2011.10.31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듭니까? 진짜로 안철수 원장의 논리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선동적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저는 김진 위원의 발언을 듣고 비논리적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김진 위원의 논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적인 후보(즉 비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비상식적인 시민이다.
어떤 사람이 상식적인 후보(즉 상식적인 정당)를 선택했다면, 그는 상식적인 시민이다.



이런 논리로 안철수 원장의 발언이 선동적이라고 김진 위원은 주장하지요. 그러나 그의 논리는 지극히 단선적이고 양자택일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했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비상식적일까요?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걸까요?

진짜로 엄밀하게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비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섞여 있다고 봐야 옳습니다. 반대로, 상식적인 후보를 선택한 사람들 중에도 역시 상식적인 사람과 비상식적인 사람이 (비율은 잘 모르겠지만) 섞여 있겠죠. 게다가 인간의 특성을 잘 안다면, 인간은 상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비상식적으로 행동할 때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논설위원인 김진 위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진 위원은 안철수 원장이 50~60대 시민들을 비상식적인 사람들로 인식하케끔 선동적인 해석을 했다고 비판하는데, 사실 시민들을 상식이니 비상식이니 하며 흑백논리적으로 갈라 놓고 생각하는 사람은 김진 위원 자신이 아닐까요? 제 생각에는, 후보자(그리고 정당)는 선거에 임하는 시민들을 기본적으로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시민들을 가치 중립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을 거라면 후보자들은 굳이 TV 연설을 하거나 선거 유세를 하며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상식에 손을 들어줬다'는 안철수 원장의 말은 가치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시민들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판단했다는 고마움의 말로 해석해야 합니다. 비논리적으로 확대해석하고 상식적이니 비상식적이니 하는 구분자로 시민들을 나누며 선동하는 사람은 안 원장이 아니라 오히려 김 위원 자신입니다.

김진 위원의 비판은 언뜻 들으면 옳은 말 같아서 청취자들, 나아가 시민과 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공산이 크지 않을까요? TV나 언론매체에서 나오는 소위 논객들의 말 속에도 얼마나 많은 논리적 오류가 숨어있는지를 안다면, 그들의 말을 글자 그대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라는 체를 통해 거르고 또 걸러서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게 상식적인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일 겁니다.


(* 본 글은 저의 정치적인 입장과 무관합니다.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 검색해보니, 김진 위원이 자신의 신문에 올린 논평 기사가 눈에 띄는군요. '안철수의 선동 바이러스'란 글입니다. 읽고 판단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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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에 관한 철학적 단상   

2011. 11. 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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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가 무언가에 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주장할 때 그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은 좀 철학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짚어보겠습니다.

플라톤 시절부터 철학자들은 '세 갈래 이론'이라고 불리는 세 개의 기준을 통해 '안다는 것', 즉 지식을 정의해 왔습니다.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하면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을 안다'면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한다는 뜻이죠. 그 세 가지 기준은 바로 '믿음', '정당화', '진리'입니다.



첫 번째 기준인 '믿음'에 의하면, 우리가 1+1=2를 안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을 안다고 주장할 수 없겠죠. 당연한 말이지만, '믿음'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면 절대적인 지식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동일한 사실에 대해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지식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지식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지식도 상대성 원리를 갖는 걸까요?

믿음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여러 발견이 사실임을 인정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그걸 믿을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위대한 과학자가  그랬을까요?

왜냐하면 '안다' 말은 정당화의 책임을 동반하기 때문이죠. 1 + 1 = 2임을 안다면, 믿어야 하고 증명해야 하는 의무감도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믿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책임을 거부했습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에 있어 그의 '' 수준은 양자역학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일반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말해도 '안다는 것'을 정의하는 철학적 기준으로 본다면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기준인 '정당화'는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하려면 자신의 믿음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학적 증명이든, 과학적 실험이든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지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면 땅에 동시에 닿는다'라는 갈릴레이의 믿음도 피사의 사탑(여기서 실험했다는 것이 허구라는 지적도 있지만)에서 사람들에게 시현하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을 테지요.

옥스포드 소사전(Shorter Oxford Dictionary)에서 믿음을 뜻하는 ‘Belief’제안, 진술, 사실을권위나 증거를 기반으로진실로 인정하는 정신적 동의나 수용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정의에서 보듯이 믿음을 믿음답게 만드는 것은 믿음에 대한 증거가 얼마나 타당하냐는 것이죠.
 

세 번째 기준인 '진리'는 결과론적인 기준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지식이 되려면 진짜로 옳아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당연한 말이죠.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믿고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지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충분히 믿고 충분히 정당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아니었던 사례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을 믿고 천문학자들은 여러 가지 증거와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동설을 정당화했지만 결국 진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어떤 지식이 진리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현재 시점에서 파악하기가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것을 믿고 정당화하여 진리로 인식한다 해도 미래의 어느 시점에 가서 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지 새의 이름만 뿐인데도 모든 안다고 자부하곤 합니다. 누군가 개똥지빠귀 이야기를 하면, 새에 대해 알아라고 참견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사물의 이름을 아는 것과 사물의 본질을 아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새가 어떤 색의 깃털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소리로 우는지, 어떻게 새끼를 키우는지 등을 체험과 증명을 통해 아는 것이 중요하죠.

안다는 것은 적극적이고 동적인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믿고 증명할 있어야 여러분은 비로소 '아는 '입니다. 안다는 것의 세 가지 기준을 들여다 보면서 주위를 둘러싼 지식을 고찰해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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