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 애쉬의 '순응' 실험은 이제 너무나 유명해서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애쉬의 실험은 자기 혼자 실험대상자인 줄도 모르고 공모자들이 단합해 거짓을 말할 때 자신도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여 거짓을 말하는 불편한 현상을 명료하게 보여줍니다(애쉬의 실험 내용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의사결정에 중요한 판단요소입니다. 다른 결정을 내렸다가 혼자만 피해를 보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집단의 대세를 따르려는 강력한 동기를 생성하죠. 원시사회에서 집단의 결정과 행보를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이들이 맹수나 독이 든 식물, 잔인한 적들에 의해 희생되고 말았을 터이니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집단에 순응해서 살아남은 조상의 후손들입니다.
헌데 길이가 같은 선을 선택하라고 했던 애쉬의 실험은 그 결정의 중대성이 낮기 때문에 집단에 동조한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순응 현상이 일어난 까닭은 분명 길이가 다른 두 선을 보면서 길이가 같다고 우기는 다른 구성원들의 대답에 동조해줘도 무방한, 중대하지 않은 결정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만일 집단 전체나 구성원 개개인에게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결정해야 할 사안이 중대하면 순응이 약화될까요, 아니면 강화될까요?
아이오아 주립대의 심리학자 로버트 배런(Robert Baron), 조셉 반델로(Joseph Vandello), 베서니 브런즈먼(Bethany Brunsman)은 사안의 중대성이 순응과 집단 동조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실험을 통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참가자들에게 범죄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얼마나 정확한지 평가하는 것이 실험의 목적이라고 알려줬습니다. 95명의 참가자들은 3명씩 조를 이루어 테스트를 받았는데, 슬라이드를 잠깐 본 후에 '어떤 남자의 키가 더 컸습니까?', '왼쪽의 남자가 안경을 꼈던가요?'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3명의 참가자 중 진짜 실험대상자는 1명이었고 나머지 2명은 일부러 틀린 답을 이야기하는 공모자들이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실험대상자들에게 2가지 실험 조건을 적용했습니다. 하나는 질문의 난이도였는데, 한 그룹의 실험대상자들에게 슬라이드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거나 5초 혹은 10초 동안 길게 보여줬고, 다른 그룹에게는 슬라이드를 매우 짧게(0.5초나 1초) 보여줘서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게 했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 조건은 질문의 중대성이었습니다. 연구자들은 한 그룹의 실험대상자들에게 실험의 의도가 사람들이 얼마나 사물을 잘 인지하는지 파악해서 증언의 정확성을 테스트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적용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질문의 중대성이 낮다고 인식케 했습니다. 다른 그룹의 실험대상자들은 질문의 중대성을 크게 느끼도록 만드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실험 결과가 경찰청과 법원에서 목격자 증언에 사용될 것이고, 목격자 식별 검사를 위한 기준을 마련하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실험대상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질문에 정확하게 답한 참가자에게 20달러를 주겠다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질문의 난이도가 낮고 실험의 중대성을 작게 여기는 조건에서 참가자들 중 33%가 공모자들의 의견에 순응했습니다. 질문의 난이도가 낮고 질문의 중대성이 큰 경우에는 집단에 동조하는 경향이 낮아져서 16%의 참가자가 집단의 의견에 따랐습니다. 질문의 난이도가 낮을 때는 사안의 중대성이 순응의 정도를 약화시킨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죠. 애쉬의 실험을 비판할 수 있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의 난이도가 높을 때(즉, 슬라이드를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고서 답해야 했을 때)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상황에서 질문의 중대성을 낮게 인식한 참가자들은 35%가 집단의 의견을 따랐지만, 실험의 중대성을 높게 인식한 참가자들은 51%나 동조했습니다. 질문이 어렵고 사안의 중대성이 높을 때 집단 동조(순응) 현상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를 조직에서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의사결정 과정에 비춰 보면 어떨까요? 이 실험의 조건 중 질문의 난이도가 낮은 조건은 내외부 환경 변화의 흐름을 파악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고 자료도 충분한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의사결정 사안의 중대성이 낮으면, 즉 의사결정 이후에 예상되는 결과가 조직의 성패에 매우 작은 영향을 미치면, 집단이 몰고가는 방향에 순응하기 쉬움을 보여줍니다. 내외부 환경을 잘 인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안도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집단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별 위험이 없다고 간주하리라 추측됩니다. 반대로 의사결정의 중대성이 커지면 이미 확보했거나 충분히 용이하게 입수가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집단의 의견에 저항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겠죠.
헌데 이런 상황(질문의 난이도가 낮은 상황)은 조직 내에서 자주 있는 경우가 아닙니다. 있다 하더라도 질문의 범위나 수준이 조직의 일부나 개개인 수준에 그칩니다. 매출과 이익,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 인력 운용의 방향, 제휴나 인수합병 등 조직에서 제기되는 대부분의 전략적 질문은 난이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결정에 따른 파급효과 중대성도 큽니다. 관련된 근거를 찾기가 어렵고 상황 탐색을 위한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채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럴 때 자기 목소리를 숨기고 집단의 의견에 따르려는 동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위 실험이 추측케 합니다. 특히 목소리가 크고 영향력이 큰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한쪽으로 의견을 몰고갈 때 더욱 그러합니다(이것은 위 연구자들의 후속실험에서 밝혀진 바임). 이런 이유 때문인지 위급하고 중대한 전략적 의사결정이 제3자가 보기에 우스꽝스럽거나 실패로 막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의사결정의 난이도와 중대성이 동시에 높은 상황에서 집단의 의견에 순응하기 쉽다는 사실은 조직 내에서 의사결정의 책임을 지고 이끄는 리더가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교훈입니다. 만장일치가 의사결정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장일치의 문화는 조직의 건강이 위험하다는 뚜렷한 신호 중 하나힙니다. 의사결정의 책임을 집단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동기에서 만장일치가 나오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목소리를 충분히 내며 갑론을박하는 상황이 건강한 의사결정 과정입니다. 개인이 집단에 동조하도록 유도하는 교묘한 장치나 문화를 걷어내는 일이 의사결정의 건강함을 보장 받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겁니다.
오늘 사장님이 주재한 전략회의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의견을 숨김 없이 피력했습니까?
(*참고 논문)
The Forgotten Variable in Conformity Research:Impact of Task Importance on Social Infl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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