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칼라 범죄(White collar criminal)'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행하는 범죄를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말하는 배임이나 횡령, 탈세, 문서 위조, 뇌물 수수, 회계 장부 조작 등이 화이트 칼라 범죄의 대표적인 예이죠. 유럽의 경우, 대기업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화이트 칼라 범죄로 피해를 본다고 합니다. 화이트 칼라 범죄는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입히는 중대한 범죄 행위임이 분명하지만(그리고 누구나 그렇게 말은 하지만),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보다 간접적이고 겉으로 보이는 폭력성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 범죄의 심각성을 덜 느끼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는 법 적용 차원에서나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나 화이트 칼라 범죄를 특히 관대하게 여깁니다.
더 큰 문제는 화이트 칼라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도 죄책감을 덜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으로 응당 누려야 할 권리라고 여기는 데에 있습니다. 엔론을 망가뜨린 제프리 스킬링이 의회 청문회에 나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질문에 거만하게 대답하고 도도하게 굴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도산 직전까지 갔다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으로 겨우 살아난 금융회사들이 성과급 잔치를 벌였죠.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기업의 총수가 사람들을 향해 정직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당당히 훈계하는 모습은 우리를 참담한 마음으로 이끕니다.
허나 높은 위치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다고 해서 모두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여기저기에서 손을 뻗치는 유혹의 손길을 견뎌낼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이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큰 걸까요? 물론 범죄를 일으키는 요인은 범죄자 자체의 성격적 특성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적 구조적 상황 속에서 터져나올 수 있겠죠. 하지만 기업에서 벌어지는 화이트 칼라 범죄의 환경적인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위가 있고 그에 따른 권력이 있으며 '돈'이나 권력욕 자체가 범죄의 최종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독일 본 대학의 게르하르트 블릭클레(Gerhard Blickle) 등은 이러한 가정 하에 화이트 칼라 범죄자의 성격적 특성을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심각한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질러 수감 중인 76명의 죄수를 샘플로 삼았습니다. 그 죄수들이 수감 직전의 연봉 평균은 66,169 유로였고, 그들이 피해를 입힌 금액을 평균 내보니 약 190만 유로(약 24억 원)에 달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범죄자 그룹과의 비교를 위해 범죄자들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150명의 관리자를 따로 선정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두 그룹을 대상으로 자기통제력, 쾌락주의 성향, 성실성, 나르시시즘 성향 등 4가지 특성을 측정하여 그 특성과 화이트 칼라 범죄와의 연관성을 통계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리더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여성일 때보다는 남성일 때 화이트 칼라 범죄를 범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쾌락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나르시시즘 성향이 높을수록, 자기통제력이 낮을수록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았습니다.
특이한 것은 성실성 점수가 높을수록 화이트 칼라 범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과는 성실성이 높으면 도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낮다는 기존의 연구와 반대되는 것이었죠. 연구자들은 화이트 칼라 범죄자들이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 평균 이상의 성실성이 필요하고,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르는 데 필요한 기술적인 능력이 성실성을 바탕으로 갖춰지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성실성은 높을지라도 진실성(integrity)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연구를 요약하면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나르시스트들이 권력을 잡으면 화이트 칼라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나르시스트들이 드러내 보이는 성실성은 진실함이 부족한, 어디까지나 수단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나르시스트들이 모두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 배임과 횡령, 장부 조작, 탈세 등을 거리낌없이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이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나르시스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번 글에서 봤듯이 나르시스트인 리더는 성과를 떨어뜨림으로써 조직에 손실을 입히기도 하지만 화이트 칼라 범죄를 저질러서 재무적인 차원에서 회사의 이미지 차원에서 큰 피햬를 가져올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들의 범죄가 범죄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지', '왜 나만 가지고 그래?'란 도덕적 해이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겠죠.
회사의 윤리적 기강은 나르시스트들에 의해 허약해질 수 있습니다.
(*참고 논문)
Some Personality Correlates of Business White-Collar Crime
(*추신) 이 블로그에서 언급한 '나르시스트 리더'는 그저 잘난 척 하는 리더가 아니라, 로버트 서튼 교수가 '또라이(asshole)'라고 부르는 리더와 맥을 같이 합니다. 로버트 서튼 교수의 '또라이 제로 조직'이란 책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