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주방 천장에 레일등을 설치하는 공사를 했다. LED로 된 주방 조명은 너무나 밝아서 한번 켜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방에 우리집의 존재를 다 알렸다. 게다가 내 취향에는 안 맞는 주광색(흰색)이라서 전구색(노란색)의 은은한 펜던트 조명을 따로 설치해 필요에 따라 조명의 밝기와 분위기를 다르게 하고 싶었다. 요즘에는 DIY로도 누구나 쉽게 조명용 레일을 부착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오래된 집이라 전기 배선을 파악하기가 어렵고 손수 작업을 하다 자칫 감전될 위험도 있기에 동네에 있는 '전기 아저씨'를 불러 작업을 부탁했다. 내가 직접 하면 하루종일 해도 시간이 부족할 일이지만 전문가가 손을 대면 한 시간 안에 끝날 거라는 기대도 아저씨를 부른 이유였다. 빨리 끝나면 그만큼 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니 출장비가 아깝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작업은 무려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천장 속의 배선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시멘트로 된 장애물이 많아 전기선을 새로 넣고 빼기가 물리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것이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간단한 공사라고 호언하며 작업을 시작하던 아저씨의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두워지고 뭔가에 화가 난 듯 보였다. 천장에 구멍을 내고 선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눈으로 떨어진 나무 가루와 먼지 때문일까? 점심도 못 먹고 작업을 해야 해서 짜증이 난 것일까? 그런 와중에 작업을 할라치면 고객들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서였을까? "석유난로가 고장 났어. 빨리 와서 고쳐 줘!"라며 전기 기술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일을 요청하는 할머니 고객 때문이었을까?
연장을 건네주거나 의자를 잡아줄 셈으로 옆에 같이 있던 나 역시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시겠어요?"라는 부탁을 하기가 미안해졌고, 기껏 용기(?)를 내어 부탁을 하면 아저씨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조바심이 났다. 선을 배선하기가 곤란하게 되어 있는 천장 구조물이 나의 잘못이라고 탓하는 것만 같았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천장에 레일을 붙일 때 내가 실수로 잡고 있던 레일을 놓쳤는데 그때 아저씨는 "에이..."라고 말하며 나를 살짝 흘겨 보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아저씨에게 미안했던 감정이 시간이 갈수록 짜증으로 변했다. 그냥 공짜로 일을 부탁한 것도 아니고 출장비를 주며 일을 시키는데 내가 왜 아저씨에게 쩔쩔매야 하지? 왜 아저씨 눈치를 봐야 하지? 작업이 어려워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그에 맞춰 출장비를 더 주면 될 것 아닌가? 돈 주는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니, 오늘 그냥 내 일이나 할 걸, 왜 불렀을까, 라며 화가 났다.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레일이 다 완성되면 매달려고 했던 펜턴트등의 코드가 말끔(?)하게 잘려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뚜껑'이 열려 버렸다. 공사 끝나면 바로 달려고 사전에 내가 펜턴드등 코드에 레일용 플러그(어댑터)를 힘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걸 똑 끊어낸 것이었다. 해외 사이트에서 어렵게 구한, 특이한 재질 코드였고 공사 시작 직전에 도착한 물건인데!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저씨에게 이유를 물으니 펜텐트등을 레일에 달려고 한 것 아니냐, 그래서 잘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코드가 끊어졌는데 어떻게 달죠?"라고 내가 짜증을 섞어 물으니 아저씨는 대답을 우물거렸다. 딱히 복안이 있어서 코드를 냉큼 자른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도 정신이 없었는지 무심코 그랬던 것이었다. 레일만 설치하는 것이 아저씨의 임무였는데, 본인 딴에는 나를 도와주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생각하며 애써 화를 눌러야 했다. '끊어진 코드는 다시 연결하면 되지, 뭐.'
격정(?)의 4시간이 흘러 공사가 드디어 끝났고, 아저씨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 많은 듯한) 출장비를 받고 돌아갔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나무 가루, 전선 부스러기, 비닐 조각 등을 치우며 청소를 했다.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보다 청소할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아저씨가 끊어먹은 코드를 연결해 레일에 다니 은은한 노란빛이 주방을 감쌌다. 그때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아, 돈을 주건 그렇지 않건 누군가에게 일을 시킨다는 건 엄청난 감정노동이구나!' 실제로 일을 한 사람은 아저씨였지만, 나는 그 시간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기진맥진해졌다. 격한(?) 감정노동 때문에.
상당수의 리더들이 직원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힘들어 하는 이유는 일을 시키는 것이 상당한 감정 소모를 유발하는 감정노동이기 때문이다. 일을 지시 받는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리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리더의 위치는 절대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시키면서 직원의 눈치와 표정 변화를 살펴야 하고, 직원이 지쳐하거나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면 10번 피드백하고 싶어도 한 두 번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 '일하는 대가로 돈(연봉)을 받는데도 일을 시키면 왜 그리 싫은 표정부터 짓는지 모르겠어!', '돈을 받았으니 시킨 일을 해야 하는 게 직원의 임무 아니야?' 지시한 대로 정확하게 직원이 이행할까 조바심이 나고, 위(경영진)에서는 빨리 달라고 독촉하는데 직원이 과연 기한 내에 끝낼 것인지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렇다고 직원에게 뭐라 싫은 소리를 하면 '나를 미워하지 않을지, 나 때문에 직장생활 못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하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또한, 전기 아저씨가 그랬듯이 잠시 신경을 쓰지 못한 동안에 자기 멋대로 해버리는 직원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경우도 잦다. 직원이 자기 딴에는 열심히 해보려고 그랬다며 항변하면 야단치는 '내'가 좀스러워 보인다.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리더와 직원 사이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상호작용 속에서 엄청난 양의 감정이 연료로 소모된다. 리더와 직원 사이에 희노애락의 감정이 늘 불타오른다!
리더는 일을 시키는 사람이다. 일을 시키는 것은 감정노동이다. 고로, 리더는 감정노동자다. 그러니 리더의 '일 시키기'를 감정노동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물론 이런 관점을 취한다고 해서 리더의 감정 소모가 크게 줄지는 않겠지만,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북돋우며 성과 창출을 독려해야 하는 리더의 일이 사실은 엄청난 감정노동임을 리더 자신, 직원들, 조직 전체가 이해해야만 조금이나마 실질적 해결책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리더의 일은 감정노동임을 수용한다면, 리더는 직원에게 일을 시키는 본인의 모습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화시켜 바라봄으로써 감정의 과도한 소모를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리더 역시 실무에 필요한 수준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음을 직원들이 이해한다면, 리더가 자신에게 행하는 업무지시와 피드백을 개인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이 아니라 성과를 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이고 리더와의 불필요한 감정 대립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직은 리더의 리더십 발휘가 방법론이나 도구 사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스트레스 관리, 비폭력 대화법, 표정 관리, 명상 등과 같은 보다 소프트하면서 감정을 다루는 주제로 리더에 대한 교육 혹은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도 방법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직업은 감정노동이다. 인간이 감정의 동물인 까닭이다. 그러니 직원들은 '리더는 나보다 편히 일한다'는 생각을 조금은 접어두자. 리더는 '나는 감정노동자니 리더십 스킬에 앞서 내 감정을 잘 컨트롤해야 한다'고 다짐해 보자. 이런 마음가짐이 '일 시키는 기술'에 앞서 전제돼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말) 처음에 전기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어 공사일정을 정한 사람은 H군이었다. H군은 왜 자기가 전화를 걸어야 하냐며 투덜거렸다. 왜 그런 일은 본인이 전담해야 하냐며. 이해한다.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고 협의를 하는 것 역시 감정노동이니까. 허나 나의 감정노동에 비할까? H군은 그날 집에 없었다. 4시간의 감정노동은 나의 몫이었다.
직원들에게 "업무가 많은 편인가?"라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당연하다. 업무가 너무 많아서 힘들다.", "과도한 업무량 때문에 야근을 해야 할 정도다. 요즘은 주52시간 근무제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야근을 별로 안 하는 것 같지만, 집에 가져 가서 하는 경우가 많다."는 식의 답변을 하곤 한다. 나는 지금껏 20년 넘게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나는 일이 별로 없다." 혹은 "적절할 정도로 업무량이 주어진다"는 대답은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렇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업무량이 더해질까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신이 맡은 역할의 중요성과 함께 본인의 존재감이 미미하지 않음을 남들에게 적극 변호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홍길동은 일을 별로 안 하는 것 같다. 일찍 퇴근한다."는 식의 이야기도 뒤따라 나온다는 점이다. 본인의 업무량이 과도하다는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것인지, 그렇게 자신에게 일이 몰린 이유가 '일 못하고 일 안 하는 홍길동'이라고 하소연하고 싶은 것인지, 평소에 홍길동과 사이가 별로 좋은 않은 것인지, 팀장이 홍길동을 편애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는 없다. 홍길동의 업무능력이 출중하여 업무시간 내에 일을 훌륭히 끝내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외부인인 나는 예단하기 어렵다. 어쨌든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함을 강조하기 위해 상대에 대한 비난을 동원하는 것이 인간사회의 어두운 면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업무량의 과도함을 호소하는 직원들에게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홍길동에게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보지 그러세요?"라고 제안해 본다. 이 질문은 실제로 홍길동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라는 제안이라기보다 사실은 직원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다. 많은 직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한번 홍길동에게 도와 달라고 해 본 적이 있는데, 귀찮아 하더라구요. 자기일도 바쁘다고 핑계를 대더군요. 별로 일 없어 보이던데..." 그러고는 다시 일을 부탁하기가 싫어지더라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절대적으로 업무량이 많든 그렇지 않든 홍길동 자신의 기준으로 볼 때(누구나 자기 기준을 적용한다) 일이 많다고 여길지 모르는 일 아닌가? 업무시간 내내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끝마치느라 애를 쓰는 것은 아닐까? '칼퇴근'을 한다고 해서 할일이 별로 없다고 무조건 간주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상사에게 '얼굴 보여주는 시간(face time)'이 조직 충성도나 '열정'의 잣대로 평가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는 않을까? 나는 '동료들도 나만큼 업무가 많을 것이라고 '일단' 간주하는 것'이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지녀야 할 무엇보다 중요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정말로 놀면서 회사를 다니는 동료 직원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동료들은 '당신만큼' 일이 많다. 당신만큼 과도한 업무량에 허덕인다. 이런 마음가짐을 지닌 채 동료들에게 일을 부탁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일을 요청해야 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이 사람이 나에게 일을 떠안기는구나'라고 느끼게 만든다면 누가 요청을 들어주겠는가? 당신이 해야 할 업무 중에서 동료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부분, 동료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나 동료가 해야 안심이 되는 일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요청하라. 그냥 "나 좀 도와줘"라고 푸념하듯 말하지 마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부분을 요청해야 동료가 자기 시간을 크게 빼앗기지 않는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동료가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일을 부탁하는지 모르겠군. 나 보고 다 해달라는 건가?'라고 생각하게 되면 실제로 여유시간이 있더라도 "미안하지만, 나도 좀 바쁘거든"이라 대꾸하기 마련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동료의 거절을 수용하라. 동료에게 A라는 일을 부탁했는데 "미안하지만 A 전부를 할 시간은 없어. 대신에 A'를 해주면 안 될까?"라고 동료가 제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속으로 '이 사람이 내 부탁을 거절하네. 섭섭하군'이라는 감정이 들겠지만, 상대방도 나만큼 바쁠 거라는 전제를 한다면 '최대한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군'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동료가 "나는 도와줄 시간이 없지만, 여기여기에 가서 문의해 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이 일을 마치고 난 다음에 도와주면 어떨까? 그때 다시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해줘"라고 동료가 말한다면 일단 거절(혹은 핑계)을 수용하고 물러서는 게 좋다.
악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남의 부탁을 거절할 경우 그것을 언젠가는 들어줘야 할 부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에 부탁할 때는 요청을 들어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프랜시스 플린(Francis J. Flynn)의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도움요청자(help-seeker)들은 잠재적 조력자(potential helper)가 과거에 자신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앞으로도 계속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거라고 예단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남의 부탁을 거절하면 조직 내에서의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누구나 알지 않는가? 내가 남의 부탁을 거절하면 나도 남에게 일을 부탁하기가 어려운 법인 말이다. 플린의 연구에서 실제로 잠재적 조력자들은 과거의 거절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앞으로는 부탁을 들어줄 용의를 보였다.
셋째, 동료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라. 부탁을 거절한 것을 부채로 느끼는 것처럼, 부탁을 들어준 것 역시 갚아야 할 부채로 여기는 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평소에 동료를 많이 도와주었다면 상호호혜라는 불문율에 따라 동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동료의 도움을 받으려면 평소에 동료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거나 내가 먼저 동료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야 할 것이다. 물론 사정상 동료의 요청을 들어주지 못할 경우라면(이런 경우가 잦을 것이다), 이때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최대한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역으로 제안하는 것이 좋다. 문서 작성을 부탁 받으면 그와 유사한 샘플 문서를 건넨다든지, 나중에 프린트되어 나온 결과물의 제본과 배포를 돕는다든지 등 언제든지 가용할 경우에는 최대한 돕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넷째, 동료의 도움을 고마워하라. 동료가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면 그 결과물의 질이 어떤 수준이든 관계없이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동료가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부채가 있다고 해서, 또 내가 그동안 많이 도와줬으니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고 해서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다면,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역시나 입장 바꿔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료의 도움이 훌륭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유용하지 않더라도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동료는 자신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 동료에게 부탁을 한 것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도움의 결과에 대해서도 당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당신은 동료의 상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을 시킨 것'이 아니라 '도움을 요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동료에게 일을 구체적으로 부탁하지 못했고 동료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팀워크의 성공은 협력에 있다. 그리고 협력이 잘 이루어지려면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팀원 각자가 능숙하게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상호호혜의 불문율을 각자 준수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동료들에게 먼저 도움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유 있는 거절' 역시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거절을 '쿨하게' 받아 들이는 분위기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 받을 때 지켜야 할 룰을 팀원들의 합의로 결정하는 것이 하나의 실천방법이 되지 않을까?
to be continued...
*참고논문 Newark, D. A., Flynn, F. J., & Bohns, V. K. (2014).
Once bitten, twice shy: The effect of a past refusal
on expectations of future compliance.
Social Psychological and Personality Science, 5(2), 218-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