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박사의 공(空) 사상   

2008. 6. 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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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됐지만 작년 9월에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대통령 후보와 공병호가 토론을 했다고 해서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찾아서 보았다. 환경주의자(이런 호칭이 적당할지 모르지만)와 신자유주의자가 맞붙어 논쟁을 벌인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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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네이버

날카로운 설전이 오갈 것을 기대했지만, 토론 자체는 매우 평이해서 하품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흥미로웠던 것은 문국현의 확신에 찬 말투와 경험에서 우러난 논리, 그리고 그와 반대에 아주 가벼운 공병호의 논리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토론에 누가 승자고 패자라는 개념은 온당치 않지만, 자칭 타칭 보수논객이라던 공병호가 문국현 앞에 '깨지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고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병호는 토론 후에 자신의 특기인 펜으로 앙갚음을 했다. 월간조선 10월호에 '내가 만난 문국현'이라는 칼럼을 내고는 지난 번 토론에서 진것이 분했던지, '반기업적 인사'라고 문국현을 공격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답지 않게 아주 부드러운 문체로 문국현의 사상이 반기업적이고 좌파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환경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을 논하면 공병호의 눈에는 모두 좌파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토론에서는 문국현의 생각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학생 같은 태도를 보이다가, 뒤에서 문국현을 까는 행위는 좀 비겁하다. 치사하다. 그것도 장문의 칼럼으로, 동어반복에, 어설픈 신자유주의 이론을 덧대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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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네이버

사회를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라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길 바란다. 자신이 신봉하는 主義와 사상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고집을 버리기 바란다. 자기 생각이 틀리면 인정하고 수정하는, 탈(脫)사상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어떠한가?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하지만 공병호는 걱정하지 말라고 여유를 보인다. 그의 책 '인생경제학'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혹자는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수준까지 오를 것으로 내다보기도 하지만, 가격 상승은 대체재 등장이나 공급량 증가를 가져오기 때문에 원유 가격 상승이 예상되는 경우 메이저 정유사를 중심으로 그동안 채산성 문제 때문에 고려하지 않던 유정을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할 것이다…(중략)…경제학적으로 고갈이라는 상황을 예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원유 채굴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유정을 개발해도 채산성이 맞기 때문이다.”

시장 논리에만 천착한 경제학 박사의 어이 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월간조선 10월호에는 공병호의 기고문 이외에 흥미로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모 교수가 '지구온난화는 재앙이 아니다. 오래된 자연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글이 실렸다.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온난화를 가져온다는 가설은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난 과학자가 아니라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그사람의 주장을 논박할 능력은 없다. 심증적으로 그 주장에 반대하는 마음이기는 하다. 하지만 '가이아'가 자체 조절 능력을 상실하고 이제 곧 인간을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러브록(가이아 이론의 주창자)의 경고를 외면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가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환경 보호'를 외치면 자동적으로 反시장, 反기업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좌파로 몰아 붙이고, 반대로 신자유주의를 외치면 反환경론자로 낙인 찍어 버리는, Automatical Dichotomy(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더 큰 문제다.

좌파가 환경론을 무기로 삼고 우파를 공격하는 이유는 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우파(신자유주의자 포함)가 환경론자들을 좌파로 모는 이유도 역시 알 것 같다. 사상적 이해, 권력의 이해, 금전의 이해 등등, 그것은 각자의 이해(利害) 때문이다. 제발 그러지 말자. 환경은 이데올로기의 총포와 갑옷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생태계를 지배하는 종이 아니라, 그 속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아야 할 일원이다.

기업이 환경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충분한 이문을 남기는 방법, 그 이득을 환경의 자정능력 회복에 사용하는 방법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충돌한다고 생각되면, 충돌하지 않고 조화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해야 한다.

환경을 둘러싼 공병호식 이데올로기의 거미줄을 걷어내고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을 함께 할, 창백한 푸른 지구를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어설픈 제3의 길이슈?"라면서 나를 몰아세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관 없지만, 이데올로기 이야기라면 사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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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으로 3행시를 써 보다   

2008. 6. 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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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웃자고 써 본 3행시입니다.
써 보니 재미는 없군요. ^^


이/ 이십년 넘게 일구어 놓은 민주주의
명/ 명박이(李) 당신 때문에 산산이
박/ 박살난 민주화의 거탑

이/ 이쁨 받고파 다우너(downer)도 오케이 했나
명/ 명명백백 불평등한 쇠고기 협상
박/ 박명수도 뿔났다, 우씨~~!

이/ 이주일처럼 뭔가 보여주고 싶었나
명/ 명 짧은 놈 턱 떨어질까*, 왜 이리 밀어 붙이나
박/ 박악한* 성질 한 번 고약하구나

이/ 이십일 넘게 열린 청계천 촛불집회
명/ 명예나 돈 바라고 국민이 일어났겠는가
박/ 박사들 줄줄이 많은 정부가 왜 모르나

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명/ 명색이 대통령인데 무르지도 못하고
박/ 박수 쳐 줄테니 재협상에 임하라

이/ 이사 간 무현이로부터...
명/ 명박이 형, 대통령 못 해먹겠지?
박/ 박카스 마시고 정신 차려~~


* 명 짧은 놈 턱 떨어질까 : 성격이 매우 급함을 뜻하는 속담
* 박악하다 : 됨됨이가 변변치 못하다

아래 사진은 재미있어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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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다음 카페 '원피스 만화' http://cafe.daum.net/dnjsvltmrhk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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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방관자의 고백   

2008. 6. 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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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오늘 아침에 이 사진 한 장을 보고 나는 절망했다. 80년대 공안 정국을 이겨내며 우리가 이룬 민주화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억장 무너듯이 붕괴되는 모습이다.

나는 글을 통해 미국 쇠고기 수입과 관련한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 사진은 그동안 내가 비겁한 방관자에 불과했구나, 라는 뼈 아픈 자괴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간 나는 펜으로는 '극력 반대'를 외치면서도 촛불집회는 웬지 나가기 싫었다. 아니, 귀찮았다. 나 말고도 그곳에 나가서 내 대신 목소리를 높여 줄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나는 그저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왜 사람들이 몇 천명 밖에 모이지 않는 걸까, 왜 오늘은 촛불집회를 하지 않는 걸까, 6.10 항쟁 때처럼 모든 국민이 일어서면 될텐데, 라고 안타까움에 혀를 찼었다. 그리고 늘 달콤하게 잠을 자고 배 부르게 밥을 먹었다.

그래, 나는 비겁했다. 그리고 지금도 비겁하다. 이 사진을 보며 울분을 토해 내면서도 지금 당장 청계천으로 달려갈 생각보다 오늘 저녁에는 식구들과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겁 많은 생활인이다.

나의 직업은 경영 컨설턴트다. 이명박 대통령이 자주 하는 말을 빗댄다면, 경영 컨설턴트는 노(勞)보다는 '사(使) 프렌들리' 성격이 강한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날 때마다 나름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를 외치고 있지만, 그 때마다 한계와 모순을 느낀다. 경영자를 대변하면 우파와 신자유주의의 매파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면 좌파와 분배론자로 몰리기도 한다. 컨설턴트는 괴로운 직업이다.

방관과 참여 사이에서 나는 괴롭다. 괴롭고 슬프다. 슬프고 분노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모르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비겁자다.

당신도 그렇지 아니한가? 이제 행동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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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2008. 5. 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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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에 나는 총 11권의 책을 읽었다.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아서 20권 쯤 읽은 기분이 든다. 책 그만 읽고 이제 책을 좀 써야 하는데, 진도가 잘 안 나간다.  글감옥에 갇혀 있는 기분....

지금까지 총 44권의 책을 읽었다.

1월 : 10권
2월 : 12권
3월 : 4권
4월 : 7권
5월 :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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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4권

'앵무새의 정리 1'

수학사를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소설형식의 책이다. 근데 프랑스식 서술 구조가 내겐 어색했고, 추리와 서스펜스는 기대하기 어려운, 좀 애매한 소설이다.

'앵무새의 정리 2'

상동

'공기 위를 걷는 사람들'

기체의 발견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산소, 이산화탄소 등을 어떻게 과학자들이 발견했는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한비자'

법가의 대표 격인 한비가 쓴 저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비견되는 책이다. 오늘날의 통치철학과 맞지 않고 좀 우스꽝스러운 조언도 있지만, 2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매한 임금이 설쳐대면 나라가 망한다는 뼈 아픈 교훈을 담고 있다.

'나는 물리학을 가지고 놀았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전기. 책의 많은 부분이 '파인만 씨, 농담도 잘 하시네'와 '남이야 뭐라 하건'과 겹치는데, 이 책은 주로 파인만의 물리학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양자역학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어려운 책. 나도 그 부분은 좀 어려웠다.

'아인슈타인 : 삶과 우주'

20세기의 지성, 아인슈타인의 전기. 독행자(獨行者)로서의 삶을 고집한 그의 생활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다. 그가 양자역학을 믿지 않은 이유는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은 아닐까? 73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재미있으니 읽어 보라.

'실패의 향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저자는 책에서 그 이유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걸까? 실패란 어떤 의미일까란 질문으로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냥 이 책은 실패의 문화사 정도로 봐주면 되겠다.

'패러독스의 세계'

논리학, 기호학, 언어철학에 관한 책. 역설을 주로 다루는데, 초심자에겐 좀 어려울 책이다. 나도 역시 어려웠다.

'몰입 Flow'

몰입하면 행복하다,를 거듭 주장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박사의 대표작. 아! 나는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포스팅)을 쓰면서 몰입을 했는데, 그만 back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쓰던 글을 다 날리고 말았다.(지금 다시 쓰는 중) 결국 나는 행복해진 걸까, 불행해진 걸까? ㅋㅋ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사람들은 UFO, 심령술, 음모론 등 검증되지 않는 걸 믿으려는 경향이 매우 강함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회의주의자 선언'! "나는 경영계의 회의주의자로서 사람들을 기망하는 경영학자와 컨설턴트의 속셈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 폭로하련다" .... 이런 생각을 해 봤다.

'퀴리 가문'

퀴리 부인과 그의 남편 피에르만 알고 있었는데, 그 가문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6명이라니, 놀랍다. 전기는 모두 이렇게 두꺼운 걸까? 730페이지 넘는 이 책, 그러나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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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足]보다 숫자가 더 정확하지!   

2008. 5. 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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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 분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 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고 말하면, 그 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하고 감탄한다.

직원들의 스킬 수준을 파악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스킬을 중심으로 교육계획을 수립하겠다는 니즈를 가진 회사가 있었다. 개념적으로는 옳은 접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수준이 떨어지는’ 스킬을 파악하는 기술적인 방법에서 불거져 나왔다.

그들은 반드시 경쟁사 직원들과 역량 수준을 반드시 숫자로 바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그 차이가 큰 것부터 우선적으로 교육계획에 잡을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으나 도대체 경쟁사 직원들의 스킬수준을 어떻게 알 수 있을지, TOEIC과 같은 공인시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점수로 어떻게 측정할 수 있단 말인지,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요구였다. 내가 난색을 표하니 그들은 ‘전문가니까 그런 것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 는 말로 내 반론을 가볍게 묵살했다.

다른 회사의 사례. 어느 날, 모회사의 신입사원 교육현장을 보게 되었다. 임원과의 간담회 시간에 직장인으로서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임원은 말끝마다 “숫자로 이야기하지 않는 직원들의 보고는 받지 않는다. 신입사원 여러분은 항상 숫자로 이야기하라.” 라고 1시간 내내 강조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숫자가 뭐기에?

의사결정시 숫자가 주는 힘은 무시하지 못한다. 사안이 중요할수록 숫자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수용성을 높이는 힘도 가지고 있다. 또한 숫자는 상대방에게 ‘생각의 고통’을 주지 않는다. 숫자로 얘기하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숫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기법을 주제로 한 각종 책이나 강좌에서는 최대한 숫자화할 것을 제 1 규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숫자가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간편성을 높인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숫자에 대한 맹신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숫자는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크다. 인력채용에 있어 우수인재확보율을 관리하는 회사가 늘고 있는데, 그 기준이 기껏해야 출신학교나 학점수준 등에 불과하다. 명문대 출신을 몇 명 뽑았다는 그래프를 보고 인사담당자는 뿌듯해 한다. 그러나 좋은 학교, 높은 학점이 직장 내에서의 우수한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숫자는 조작이 쉽다. 모 회사 공장은 납기단축을 목적으로 성과지표(KPI)로 ‘입고 후 출고시간’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지표는 항상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납품은 여전히 늑장이었다. 알고 보니, ‘입고 후 출고시간’을 임시창고에 완성품을 갖다놓는 시점까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납기의 문제는 물류에 있었으나, 공장 측은 문제를 숨겨보려 출고 시점을 조작한 것이었다.

셋째, 숫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로 막는다. 갓 생각해 낸 새로운 아이디어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숫자로 덜 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인력과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이디어의 결과로 나오는 산출물이 회사의 수익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숫자로 정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에 집착하는 이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 상사가 ‘숫자 킬러’라면 부하직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숫자의 기세에 눌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다.

숫자는 강력하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숫자는 매우 취약하기도 하다. 숫자를 잘 관리하라는 말은 ‘뭐든지 숫자로 측정하고 표현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정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숫자로 잘 표현하고, 정성적 측면이 더 큰 의미가 있다면 숫자화시켜 의미를 상실케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중국 정나라 때 한 남자가 신발가게에 와서 자기 발 치수를 적은 종이쪽지를 집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았다. 당황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쪽지를 가져왔지만, 신발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친구가 물었다. “아니, 발이 있는데 종이쪽지가 왜 필요한가?” 그러자 남자가 당연 하다는 듯 대답했다. “발보다야 숫자가 더 정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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