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에 속한 당신은 분명 게으르다   

2012. 4. 2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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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겔만 효과(Ringelmann Effect)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1913년에 독일의 심리학자 맥시밀리엔 링겔만(Maximilien)이 수행한 유명한 실험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링겡말은 참가자들에게 줄다리기를 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줄에는 참가자들 각자 얼마나 세게 줄을 당기는지 측정할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어서 집단 전체가 줄을 당길 때의 힘과 개인이 혼자 줄을 당길 때의 힘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럿이 줄을 당기면 당연히 혼자 당길 때보다 힘이 커지지만, 놀랍게도 집단에 한 명의 참가자가 추가된다고 해서 비례적으로 집단의 힘이 커지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집단이 3명이면 2.5명분의 힘이, 8명이면 고작 4명분의 힘이 측정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집단의 산출하는 결과는 개인들의 노력을 모두 합한 것보다 작다는 것이 링겔만 효과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이 집단에 속해 있을 때는 자신의 힘을 최대로 내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하이오 주립대의 빕 라테인(Bibb Latane), 키플링 윌리엄스(Kipling Williamns), 스테판 하킨스(Stephen Harkins)는 링겔만 효과를 다시 한번 검증하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참가자들에게 혼자서 '손뼉 치기'나 '소리 지르기'를 하도록 하고, 그룹을 이루어 같이 하도록 요청한 다음 소리의 크기를 각각 측정했습니다. 참가자들에게 가능한 한 큰 소리를 내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역시 링겔만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참가자들은 혼자서 소리를 낼 때는 평균 3.7(dynes/sq cm)의 값을 기록했으나, 4명이 한 그룹이 되면 1인당 평균 1.8 밖에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일 때에 비해 50% 밖에 힘을 쓰지 않은 셈이었죠. 그룹이 6명일 때는 1인당 평균 1.5로 떨어졌습니다.

연구자들은 여럿이서 함께 소리를 내면 소리의 간섭과 상쇄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룹의 결과가 개인의 결과보다 저조하게 나타난 것은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라테인 등은 참가자들에게 헤드폰을 쓰게 하고 동일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각자 격리되었지만 같이 소리를 내는 것이라 확신한 상태로 실험에 임했죠. 참가자들은 그룹을 이룰 때 첫 번째 실험 때보다 소리를 더 크게 내긴 했지만 링겔만 효과는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둘을 짝 지을 때는 혼자일 때의 82% 정도의 크기로 소리를 질렀고, 6명이 한 그룹일 때는 74% 정도로 소리를 냈습니다.

두 실험의 결과가 검증해낸 링겔만 효과는 혼자서 일할 때보다는 동료가 옆에 있음을 느낄 때 책임감을 느끼고 성과가 더 향상된다는, 심리학자 로버트 자종크(Robert B. Zajonc)의 '사회적 촉진 효과(Social Facilitation Effect)와 배치됩니다. 혼자 골방에 앉아 공부를 할 때보다는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더 잘 되는 것(물론 반대인 사람도 있지만)이 대표적인 사회적 촉진 효과의 예입니다. 지난 번에 올린 바 있는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진짜 이유'도 일종의 사회적 촉진 효과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촉진 효과는 개인의 성과가 집단 속으로 희석되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위의 실험처럼 개인이 집단 속에 묻혀 자신의 노력을 정확하게 측정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거나 자신의 게으름이 들키지 않을 거라는 안전감이 들면 혼자일 때 발휘하던 노력을 감(減)하려는 무의식적인 심리가 작동합니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에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붙였습니다. 사회적 태만 현상은 개인들을 모아 집단을 이루게 할 때 필연적으로 무임승차자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일정한 양의 노력을 덜어내려고 하여 오히려 성과가 예전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일깨웁니다. 

어떤 일을 개인이 혼자서 수행할 수 없다면 사회적 촉진 효과를 최대화하고 사회적 태만 효과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집단의 크기를 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실험이 조직 운영에 주는 시사점입니다. 집단이 커도 곤란하고 작아도 곤란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집단이 어떤 종류의 일을 수행하느냐, 기업이 어떤 산업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집단의 적정 규모는 달라지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아무런 가이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없이 팀을 설계하지 마세요'란 글을 참조하세요). 무엇보다 사회적 태만 효과와 무임승차자의 발생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에 완전히 '박멸'하자는 시도는 조직이 달성해야 할 목표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무임승차자를 없애려 하지 말라' 참조).

여러분은 모두 조직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100을 할 수 있는데 70 밖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게으르거나 약삭빠르거나 비윤리적이라기보다는 '집단은 개인보다 게으르다'는 인간의 심리 때문입니다. 개인과 조직 모두 70의 성과를 80이나 90정도로 끌어 올리려는 의식적인 노력(제도 개선, 구조 개편, 프로세스 변경 등)이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개인들 모두 100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과욕은 금물입니다.


(*참고논문)
Many hands make light the work: The causes and consequences of social loaf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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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독(毒)이다   

2012. 4. 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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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라는 아이가 사탕을 상자 안에 넣은 다음 방에서 나갑니다. 샐리가 없는 동안 누군가가 들어와 상자에서 사탕을 꺼내 바구니로 옮겨 놓은 후 사라집니다. 샐리가 돌아오면 상자와 바구니 중 어디에서 사탕을 찾으려 할까요? 당연히 상자를 먼저 들여다 볼 겁니다. 하지만 4살 미만의 아이들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면 샐리가 바구니에서 사탕을 찾으려 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아는 것(누군가가 사탕을 옮겨 놓았다는 것)을 샐리도 알고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것이죠.

헌데 이런 현상이 비단 미성숙한 아이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우습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자기가 아는 정보로 인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지식의 저주'에 빠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의 수잔 비르히(Susan A.J. Birch)와 예일 대학의 폴 블룸(Paul Bloom)은 155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경고합니다.



비르히와 블룸은 참가자들에게 짧은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방 안에는 파란색, 빨간색, 보라색, 녹색의 상자가 있다. 바이올린 연습을 끝낸 '비키'라는 여자아이가 바이올린을 파란색 상자에 넣은 후에 밖으로 놀러 나갔다. 비키가 없는 사이에 동생인 데니스가 들어와서 바이올린을 다른 상자로 옮겼다. 그런 다음, 모든 상자의 위치를 바꿔 놓았다. 비키가 방으로 돌아와 어느 상자에서 바이올린을 찾을 것 같은지 각 확률을 써보라." 데니스가 상자의 위치를 바꾸기 전의 모습과 바꾼 후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 아래 링크의 논문)



(출처 : 아래 링크의 논문)



참가자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1그룹은 위와 동일한 설명을 들었고, 2그룹은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빨간색' 상자로 옮겼다는 설명을, 3그룹은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보라색' 상자에 옮겼다는 설명을 전달 받았습니다. 1그룹에겐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어느 상자로 옮겼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2그룹과 3그룹에게 비키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준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데니스가 네 상자의 위치를 뒤섞을 때 원래 파란색 상자가 있던 자리에 빨간색 상자를 놓았다는 점을 알았지만, 그 의미는 2그룹에게 특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왜냐하면 2그룹은 데니스가 빨간색 상자로 바이올린을 옮겼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반면, 3그룹은 파란색 상자의 원래 위치와 보라색 상자의 새 위치 사이에 전혀 관련이 없었기에 2그룹과 같은 의미를 느낄 수 없었을 겁니다.

참가자들이 적어낸 확률을 평균해 보니, 데니스가 바이올린을 어디로 옮겼는지 듣지 못한 1그룹(일종의 대조군)은 비키가 파란색 상자를 제일 먼저 확인할 확률을 71%, 빨간색 상자를 가장 먼저 확인할 확률을 23%로 보았습니다. 3그룹의 학생들도 이와 비슷한 확률을 제시했습니다(파란색 상자 73%, 빨간색 상자 19%). 하지만 2그룹의 학생들은 다른 그룹과 확연한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비키가 파란색 상자를 먼저 확인할 확률을 59%, 빨간색 상자를 먼저 꺼내볼 확률을 34%로 보았습니다.

1그룹과 비교하면 2그룹의 판단이 편향되었음이 금세 드러납니다. 비키는 분명 파란색 상자에 바이올린을 넣고 밖에 나갔기에 그 상자의 색깔을 기억할 겁니다. 물론 기억 못할 수도 있어서 파란색 상자가 원래 있던 위치에 놓여진 빨간색 상자를 제일 먼저 확인할지도 모릅니다. 1그룹은 비키가 이렇게 상자 색깔을 기억 못할 확률을 23%으로 본 반면, 2그룹은 34%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는 바이올린이 실제로 들어있는 상자가 빨간색 상자임을 안다는 것이 2그룹 학생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2그룹의 학생들은 상황을 알지 못하는 비키의 입장이 되어 1그룹과 비슷한 확률을 추정해야 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영향을 받아 확률을 부풀려 생각한 것이죠. 그야말로 '지식의 저주'가 단적으로 나타나 버렸습니다.

우리는 조직 내외부적으로 상황이 매우 모호하게 흘러갈 때 상황을 설명해주는 지식이 주어지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곤 하지만, 그 지식으로 인해 실제 수준보다 가능성을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판단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위의 간단한 실험이 이를 일깨워 줍니다. 여기에 본인이 보고싶어 하는 것만 근거로 채택하려는 확증편향까지 더해지면 지식의 저주는 우리의 눈에 안대를 씌우고 판단 실패라는 절벽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길잡이가 됩니다.

판단은 항상 어떤 요인에 의해 편향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의사결정자의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기 이전에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참고논문)
The Curse of Knowledge in Reasoning About False Belie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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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이타적인 팀원을 쫓아내려 한다   

2012. 4. 2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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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팀에 특별히 남에게 많이 베풀고 자신은 이득을 적게 취하는 이타적인 직원이 있다면 그가 여러분의 팀에 계속 남아있기를 원합니까? 아마 여러분은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하겠지만, 과연 그가 팀원으로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솔직히 여러분은 남들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그가 어서 팀에서 떠나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워싱톤 주립대의 심리학자 크레이그 파크스(Craig D. Parks)는 아사코 스톤(Asako B. Stone)과 함께 이 불편한 추정이 사실임을 실험을 통해 규명했습니다. 그는 104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각자 5명으로 구성된 팀의 일원이라고 가정하게 했습니다. 10포인트씩 지급 받은 학생들은 컴퓨터 상에서 일종의 기부 게임을 진행해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포인트의 일부 혹은 전부를 기부하면 두 배의 포인트가 팀 공동계좌에 적립되는 방식이었죠. 학생들은 기부를 끝낸 후에 팀 공동계좌의 잔고 중에서 최대 4분의 1까지 포인트를 꺼내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10번의 라운드를 실행한 다음에 학생들은 자기계좌에 쌓인 포인트를 교내에서 쓸 수 있는 쿠폰으로 교환할 수 있었죠.



파크스는 게임을 끝낸 후에 실험 대상자인 학생에게 다른 팀원들(사실은 가상의 팀원들)들이 얼마나 기부하고 얼마나 인출했는지를 알려줬습니다. 3명의 팀원은 팀의 평균만큼 기부하고 인출했지만, '제4의 팀원'은 팀의 평균보다 많거나 적게 기부하고 팀의 평균보다 많거나 적게 인출했다고 실험 대상자에게 전했습니다. '제4의 팀원'이 적게 기부하고 적게 인출했거나 많이 기부하고 많이 인출했다면 '공정한 팀원', 적게 기부하고 많이 인출했다면 '이기적인 팀원', 많이 기부했지만 적게 가져갔다면 '이타적인 팀원'으로 볼 수 있겠죠. 파크스는 학생들에게 '제4의 팀원'이 이 기부 게임에 함께 할 팀원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바라는지를 9점 척도로 질문했습니다.

파크스는 '제4의 팀원'이 많이 기부하고 적게 인출하는 '이타적인 팀원'일 때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거라고 기대했지만(즉 실험 대상자들은 '이타적인 팀원'과 계속 게임을 하고 싶어할 거라 기대했지만),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제4의 팀원'이 적게 기부하고 적게 인출하는 '공정한 팀원'일 때 가장 높은 점수(6.31점)를 얻었지만, '이타적인 팀원'일 경우에는 고작 3.45점 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이 값은 적게 기부하고 많이 가져가는 '이기적인 팀원'이 얻은 2.35점과 비교해 별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타적인 팀원도 이기적인 팀원과 마찬가지의 정도로 조직에서 '축출' 대상으로 평가 받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결과였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제4의 팀원'이 다른 사람에게 무능하거나 행동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파크스는 비슷한 방식의 후속 실험을 통해 '제4의 팀원'이 보이는 무능함 여부와 행동의 일관성 여부는 별 관련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여전히 '이타적인 팀원'은 '이기적인 팀원' 만큼 인기가 없었고 축출되어야 할 대상으로 평가 받았으니 말입니다.  

왜 '이타적인 팀원'들은 함께 할 팀원으로 인기가 없을뿐더러 축출의 대상이 된 걸까요? 파크스는 다시 한번 동일한 실험을 수행한 다음에 '제4의 팀원'에 대해 왜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글로 설명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 실험의 목적을 모르는 2명의 심사자에게 실험 대상자들이 쓴 글의 내용을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는 작업을 맡겼습니다. 그 결과, 95%의 실험 대상자들은 '이타적인 팀원'이 다른 팀원들과 비교하여 특이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는 이유로, 그리고 팀의 암묵적인 규범을 깨뜨린다는 이유로 그를 팀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예를 몇 개 들어보면, "아무도 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 팀원이 다른 팀원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 "많이 기부하고 적게 가져가는 것은 이상한 행동이다", "아주 부자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이타적인 직원이 조직 성과에 기여하는 수준이 다른 누구보다 높기에 그들이 조직에 남아있도록 보상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업무목표만을 달성하려고 타인의 협조 요청을 묵살하는 이기적인 행동은 옳지 않다고 또한 생각합니다. 그러나 파크스의 실험은 우리의 의도와 현실이 매우 다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개인 간의 경쟁을 통해 조직의 성과를 제고하겠다는 문화는 이타적인 행동이 좋은 평가를 받고 높은 연봉을 받는 데에 불리하다는 점을 보이지 않는 규범으로 만들어 직원들의 뇌리에 심어 놓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업무목표 달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직의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인 직원은 비록 고맙긴 하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하기가 왠지 꺼려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아주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잖아', '왜 저렇게 혼자서 애쓰나? 그냥 다들 하는대로 할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라 생각하며 불편해 합니다. 이타적인 사람들이 '나'의 입지를 흔드는 위험한 인물로 여기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파크스의 실험은 내부 경쟁을 권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타적인 직원들이 설 땅은 점차 좁아지고 결국은 다른 직원들에 의해 서서히 조직 바깥으로 퇴출되고 말 거라는 우울한 결론을 우리에게 시사합니다. 원래는 이타적인 직원도 이타심을 줄이거나 버리려 할 거라는 점도 일러줍니다. 이타적인 직원을 보호하는 다른 장치가 없다면 말입니다. 경쟁은 이기적인 자를 살리고 이타적인 자를 죽이는 가장 은근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조직에서는 이타적인 팀원이 얼마나 남아있습니까?


(*참고논문)
The Desire to Expel Unselfish Members From the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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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승차자를 없애려 하지 말라   

2012. 4. 2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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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몸 속에 기생충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쾌하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회충, 편충, 십이지장충 등과 같은 선형동물이나 편형동물만을 기생충이라고 생각하지만, 개그 소재로 가끔 입에 오르내리는 모낭충은 진드기류에 속하는 기생충이고 음식점의 위생을 점검할 때 기준으로 삼는 대장균 역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의 장 속에 우글대는 기생충의 일종입니다. 이런 크고 작은 기생충들은 숙주가 흡수해야 할 영양분을 중간에서 가로챌 뿐만 아니라 심하면 숙주의 기관을 물리적으로 손상시키거나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면역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숙주의 생명 유지와 재생산(reproduction, 번식)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런데 왜 숙주는 어느 정도의 기생충을 몸 속에 품고 사는 걸까요? 숙주가 면역시스템을 총동원해서 기생충을 완전히 박멸하면 생명 유지와 자손 번식에 유리할 텐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기생충 몇 마리를 제거할 때는 에너지가 별로 소모되지 않지만 가면 갈수록 기생충 한 마리를 없애기 위해 소요되는 에너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에 있습니다. 반면, 기생충을 한 마리 없앰으로써 숙주가 얻는 이득(생명 유지와 자손 번식 상의 유리함)은 갈수록 체감합니다. 제르지 벤케(Jerzy M. Behnke), 크리스토퍼 버나드(Christopher J. Barnard), 데렉 워켈린(Derek Wakelin)은 기생충의 감소에 따라 숙주의 비용은 체증하고 숙주가 얻는 이득은 체감하기 때문에 숙주가 어느 지점에서 균형점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즉 최적의 기생충 보유량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죠.



만일 숙주가 균형점 이상으로 기생충을 없애려 한다면, 기생충 한 마리가 박멸됨으로써 얻는 이득 증가분보다 한 마리를 제거하기 위해 쓰이는 비용 증가분이 더 큽니다. 그러면 기생충을 없앰으로써 생명 유지와 자손 번식의 가능성을 높이려 했던 시도가 오히려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고 번식력을 떨어뜨리게 되겠죠. 따라서 숙주는 균형점 수준에서 기생충을 몸 속에 지니는 것을 최적의 생존전략으로 채택하는 겁니다.

이 균형점이 항상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숙주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균형점이 낮아지기도(최적 기생충 보유량이 상승) 하고 높아지기도(최적 기생충 보유량 하락) 합니다.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큰뿔양(bighorn)의 암컷은 새끼가 없는 암컷에 비해 폐선충에 더 많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이는 젖을 먹이기 위해 에너지를 이미 많이 소요하는 까닭에 기생충 박멸에 배당할 에너지가 적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생충을 감내하는 것이죠. 동일하게 젖을 먹이더라도 수컷 새끼를 가진 어미양이 암컷 새끼를 키우는 어미양에 비해 더 많은 폐선충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컷 새끼를 키우는 게 암컷 새끼를 기르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숙주의 면역시스템은 자손 번식과 기생충 보유 사이에 적절하게 에너지를 배분할 줄 압니다. 절대 기생충 박멸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을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회사에서는 제도를 설계할 때(특히 인사 관련 제도를 설계할 때) 누군가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득을 취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면밀히 따질 겁니다. 제도를 애써 만들어 실행해도 제도의 빈틈을 악용하거나 남들이 거둔 성과에 편승하는 무임승차자가 발생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임승차자의 발생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이것저것 제한조건을 갖다 붙입니다(이럴 때 이렇게, 저럴 때 저렇게...). 이렇게 되면 제도는 너무나 복잡해져서 제도의 본질과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이 제도를 실행하고 관리하기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맙니다. 다시 말해, 무임승차자 한 명을 줄임으로써 증가하는 이득보다 무임승차자 한 명을 줄이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이 훨씬 커지는 상황으로 악화됩니다.

예를 들어 팀원들 사이의 협력을 훼손하는 개인성과급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개인성과급을 모두 조직성과급제로 바꾸려고 할 때 항상 무임승차자 문제가 거론되곤 합니다. 팀원들이 모두 조직성과를 달성하려고 합심할 때 나중에 성과급만 받아 챙기려고 건성으로 참여하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하면 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말 것이고 기대했던 조직성과도 달성하지 못할 거라 우려를 표합니다. 그래서 결국 개인의 기여도를 평가해야 한다는 논리가 받아들여져서 조직성과급과 개인성과급이 '짬뽕'되고 맙니다. 또한 애초에 조직성과급의 도입이 팀원 간, 부서 간 협력 증진이라는 이유를 들며 협력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를 개인이나 단위조직에 할당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개인적으로 협력을 측정하려는 KPI가 가장 우스꽝스러운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임승차자를 줄이고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부칙'이 필요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숙주가 번식이라는 '대의'를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기생충을 몸 속에 보유하는 생존전략을 취하듯이 말입니다. 제도에 편승하고 조직에 기생하는 무임승차자가 눈엣가시처럼 보기 싫더라도 그들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것이 조직의 장기적인 건강과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숙주가 몸 속에 사는 기생충에 눈 감아 줌으로써 자신의 생존력과 번식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볼 때, 오히려 무임승차자는 조직의 발전에 긍정적인 존재일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조직이 무임승차자를 없애려고 지나치게 안간힘을 쓰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기 바랍니다. 조직의 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무임승차자는 그냥 놔두는 게 좋을지 모르니까요.


(*참고논문)
Understanding chronic nematode infections-evolutionary considerations
Ecological immunology: costly parasite defences and trade-offs in evolutionary e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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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이 팀장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   

2012. 4. 2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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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팀장들은 팀원들이 조언을 구할 때마다 언제든지 경청하고 자신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필요한 도움을 줘야 한다는 점을 관리자의 덕목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팀장과 팀원들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관리자와 부하직원이 조언을 주고 받는, 이 단순한 의사소통 과정을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팀장은 팀원들이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팔을 걷어부치고 도와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팀원들이 자신을 멀리 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반면, 팀원들은 팀장에게 조언을 구하기가 꺼려지고 뭔가 벽이 느껴진다고 말하면서 도움을 요청해도 기각되거나 일부만 받아들여진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업무 경험과 지식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팀장이 팀원들을 도와주고 이끄는 것이 업무의 흐름상 자연스럽고 비용효과적인 차원에서 권장되어야 할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것이 많은 기업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멘토링이나 튜터링과 같은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팀장과 팀원 사이에 놓인 벽을 우회하려 합니다. 하지만 원대한 목적 하에 실행된 제도들이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또한 많습니다. 멘티들은 멘토를 찾아가지 않고 멘토들은 멘티들이 왜 자신을 안 찾아오는지 의아해 하다가 자기 일이 바빠지면 멘토링 프로그램 자체를 잊어버리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심리학자인 바네사 본스(Vanessa K. Bohns)와 프랜시스 플린(Francis J. Flynn)은 팀원이 팀장에게 도움을 쉽사리 요청하지 못하고 여러 멘토링류(類) 제도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시사하는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한 사람의 '불편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근본원인임을 규명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동료 지원 프로그램(Peer Advisory Program)'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MBA 학생 35명과, 학부 조교 91명에게 학기말까지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러 올 것 같은지 예상하라고 요청했습니다. 동료 지원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12.6명이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찾아온 학생은 7.6명에 불과했습니다. 학부 조교들도 17.8명의 학생들이 자신을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학기말까지 14.7명만 방문을 노크했습니다. 간단한 조사이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을 과대평가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을 무작위로 '프라이밍'해도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두 번째 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본스와 플린은 '돕는 자'로 배정된 참가자들에게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준 경험을 회상하도록 했고 '도움 요청자'로 선정된 참가자에게는 다른 이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각 기억에 대해 짧은 에세이를 쓰라고 요청했습니다. '중립적 관찰자'로 배정된 참가자들은 프라이밍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태로 실험에 임했습니다. 모든 그룹의 참가자들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4가지 상황을 읽고서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도움을 요청할 것 같은지, 그가 도움을 요청할 때 마음이 얼마나 불편할지 예상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불편함이란 도움을 요청할 때 상대방이 거절하거나 건성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상대방이 날 우습게 알거나 조롱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따위를 이르는 말입니다.

실험 결과, '돕는 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도움을 청하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조언 요청자'보다 더 강했습니다. '중립적 관찰자'는 중간 정도의 값을 나타냈죠. 그리고 '도움 요청자'들은 이야기 속 인물이 도움을 요청할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돕는 자'들보다 더 크게 느꼈습니다. 이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결과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많이 요청하리라고 과대평가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도움 요청이 일으키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함)에 있었죠.

그렇다면 도움 받는 자들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줄이고 도움을 주고 받는 원활한 관계가 촉진되려면 그들에게 어떤 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할까요? 예를 들어 멘토링 프로그램을 홍보하려 한다면 이 제도의 실용성에 무게를 둬야 할까요, 아니면 편의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까요? 본스와 플린은 이 질문에 답을 할 만한 후속실험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참가자들을 둘로 나눠 '신참자'와 '멘토'의 역할로 프라이밍 시킨 다음에 멘토링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짧은 문장 2가지를 보여줬습니다. 하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이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점을 솔직히 밝히면서 바보스러워 보일 거라는 걱정을 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참여하기 원한다는 문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성장을 위해 멘토링 프로그램이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장이었습니다.

'신참자'로 프라이밍된 참가자들에게 두 문장의 효과를 평가하게 하자 그들은 멘토링 프로그램의 '편안함'을 강조한 첫 번째 문장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멘토'들은 멘토링의 '유용함'을 표현한 문장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습니다. 이 결과 역시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바꿔 말해, 도움을 주는 사람은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도움 요청의 불편함'보다는 '도움의 유용함'에 더 많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멘토링류(類) 프로그램을 도입할 때 제도의 필요성과 이득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멘티들이 느낄(혹은 멘토들이 부담스러워 할) 불편한 감정을 어떻게 해소시켜 줄 것인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훨씬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팀원들이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까닭은 자신을 멍청하게 보지는 않을까, 자신의 능력 없음을 자인하는 것은 아닐까, 속으로 나를 우습게 알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하지만 팀장은 팀원들이 느끼는 걱정을 실제보다 적게 인식하기 때문에(혹은 그런 걱정은 별로 대단치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오픈 마인드'임을 선언하기만 하면 팀원들이 자기에게 언제든지 거리낌없이 도움을 요청하리라 오해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오픈 마인드되어 있다고 말해서는 곤란합니다.

팀원과 팀장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과 여러 가지 멘토링류 프로그램의 실패는 조직구조, 업무 프로세스, 프로그램 설계의 오류라는 눈에 보이는 요인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미묘한 인식의 차이와 감정의 질적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결코 제도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팀장과 팀원 사이의 벽을 끝내 없앨 수 없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애써 만들었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여러 가지 조직활성화 제도들을 다시 살려낼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의 팀은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Why didn’t you just ask?” Underestimating the discomfort of help-see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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