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 저지를 죄가 과거의 죄보다 나쁘다?   

2012. 5. 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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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직원이 자신의 인사평가 점수를 높일 목적으로 받지도 않은 교육을 받았다고 하고 완료하지 않은 과제를 훌륭하게 완성했다며 평가 근거 자료를 조작했다면, 그리고 상사가 그 직원에게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 좋은 평가 점수를 주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감정이 들까요? 당연히 부정한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려 한 직원을 비난하고 벌을 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이 직원의 조작 행위가 과거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미래에 그 직원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상상할 경우에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과거의 잘못에 제제를 가하는 정도로 그 직원이 미래에 저지를 잘못을 벌 주고자 할까요? 쉽게 말해, 과거의 조작 행위에 1개월 감봉 조치를 내렸다면, 미래에 저지를 잘못에는 그보다 더 무거운 벌(예컨대 감봉 3개월)을 가하고자 할까요, 그보다 가벼운 벌을 주려 할까요? 아니면, 과거에 일어났든 미래에 일어날 것이든 동일한 수준으로 벌을 줄까요?



시카고 대학의 자카리 번스(Zachary C. Burns)와 동료들은 어떤 일이 과거에 일어났다고 아는 경우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들은 경우, 사람들이 각 경우에 대해 행위자의 '고의성'을 어떻게 평가할지 알아보기 위해 일련의 실험을 수행했습니다. 먼저 번스는 472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가상의 상대방과 주사위 게임을 벌여 돈을 따는 상황을 상상하라고 주문했습니다. 학생들은 상대방이 주사위를 던진 결과에 따라 상금을 받을 수도 돈을 잃을 수도 있었죠. 게임의 규칙은 이랬습니다. 상대방이 주사위를 던져 1, 2, 3, 4가 나오면, 학생과 상대방은 똑같이 5달러를 나눠 갖기로 했죠. 상대방의 던진 주사위 수가 5이면 상대방이 10달러를 가지고 학생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반면, 6이면 학생만 10달러를 딸 수 있었죠.

번스는 학생들 중 절반에게는 이 게임이 어제 벌어진 일이라고 상상하게 했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내일 이 게임을 할 거라고 상상하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상대방이 던진 주사위가 학생들에게 불리한 숫자인 5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상황을 머리 속에 담도록 한 후에 번스는 학생들에게 주사위를 던질(혹은 던졌던) 상대방의 고의성을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게임이 내일 벌어질 거라 상상한 학생들이 과거의 게임을 상상했던 학생들보다 상대방의 고의성이 더 짙다고 판단했습니다. 주사위 게임은 상대방과 학생이 돈을 딸 확률이 공평한데도 미래에 벌어질 일이라고 상상하면 상대방이 모종의 조작을 취할 거라 의심한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번스는 이 사실을 더 확인하기 위해 세무 당국에서 소득세 환급을 잘못 정산한 이유들이 나열된 글을 학생들에게 읽도록 하고 세무 담당자의 고의성에 대해 평가하도록 했습니다. 번스는 학생들 중 절반은 세금 환급 마감일인 4월 15일 전에, 나머지 절반은 그 이후에 실험에 참가시켰습니다. 세무 당국의 잘못된 정산을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한 학생들(4월 15일 이전에 실험에 참가한 학생들)은 과거에 저질러진 잘못이라고 안 학생들에 비해 세무 담당자의 고의성이 짙다고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부정한 일이라고 봤습니다. 또한, 상대적으로 중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남편에게 약을 잘못 준 바람에 심장 발작을 일으키도록 한 여인의 이야기를 예로 든 후속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래의 일이라고 상상한 학생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들은 학생들에 비해 보험금을 받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려 한 고의성이 크다고 답했고, 여인에게 더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역시 미래에 저지를 부정적인 행위의 고의성을 높게 보고 그에 따라 중한 벌을 내리려 하는 경향이 발견된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불확실하고 아직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행위자의 고의성이 깊게 관여할 여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제도를 설계할 때마다 염두에 두는 것 중 하나가 제도의 내용을 어기거나 제도의 헛점을 악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제재를 내려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도의 특성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제도의 내용보다는 제제 방안의 비중이 더 큰,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상하게도 강제성이 강한 제도를 폐기하고 자율성을 강조하는 제도로 변경할 때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비용 지출 규정이 지나치게 시시콜콜하고 복잡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일정 금액 내에서 비용 승인자와 집행자의 재량에 맡기는 제도로 변경할 때, '만약 ~할 경우 이렇게 제재한다'는 식의 규정들이 덕지덕지 붙곤 합니다. 자율성을 인정하겠다는 취지가 무색할 정도가 되기도 하죠. 또한 자율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논리에 따라 그 제제의 수준도 과거 제도보다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도를 어겨 벌을 가하려고 할 때는 제도에서 정한 수준보다 관대한 조치를 내리려 한다는 점을 번스가 수행한 일련의 실험이 보여줍니다. 동일한 잘못도 과거에 저지른 것이라고 들으면 행위자의 고의성을 적게 평가하고 '그에게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그가 잘못한 게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라고 '정상 참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의 조직에서 가끔 열리는 상벌위원회의 의결이나 여러분이 속한 팀이 다른 팀에게 가하는 제제를 살펴보면 애초에 문서로 정한 수준보다 낮게 적용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시각을 넓혀 사법부가 화이트 칼라 범죄자에게 내리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일관된(?) 형량을 봐도 그렇죠. 물론 제도로 정한 벌칙은 상한값이기 때문에 적용할 때는 그보다 낮은 수준으로 행위자에게 벌칙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미래에 저질러질지 모를 잘못에 대해 벌칙을 정할 때와 정해 놓은 벌칙을 행위자에게 적용할 때, 그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조직 내 구성원이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제도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거나 지켜지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번스의 실험은 우리에게 제도를 설계할 때 제제의 방법과 내용을 정하는 데 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려주는 걸까요, 아니면 정해진 벌칙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걸까요? 둘 중 무엇을 시사점으로 채택할지는 여러분의 운영 철학이 자율과 통제 사이의 스펙트럼 상 어디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어느 지점에 방점을 찍든지 간에 오늘은 여러분이 설계한 제도의 '벌칙 부분'을 세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참고논문)
Predicting Premeditation:Future Behavior Is Seen as More Intentional Than Past Behav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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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을 많이 해야 승진이 잘 된다?   

2012. 5. 1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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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야근을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 완료해야 할 일이 밀려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많습니다. 개인이 담당해야 할 업무의 양이 많은 이유는 기업들이 잉여인력을 떠안지 않기 위해 웬만하면 인력을 충원하지 않거나 사람이 할 일을 정보시스템으로 대체하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정보시스템이 확산되고 일반화되면서 오히려 일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모든 이들이 공감하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야근을 하지 않고 칼퇴근하면 평가를 낮게 받을 뿐만 아니라 승진도 잘 안 된다'라는 솔직한 대답도 제법 자주 나옵니다. 집에 일찍 가면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회사와 팀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직원으로 낙인 찍혀서 평가 때나 승진 심사 때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반면 직원들에게 평가 점수를 부여하고 승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리자들에게 어떤 직원에게 높은 점수를 주거나 지지하냐고 물으면, 야근보다는 업무의 질이 훌륭한 직원이라고 답합니다. 늦게까지 남아서 일한다고 해서 결과물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일의 양보다는 일의 질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관리자들이 직원을 평가하거나 승진을 결정할 때 밤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가 중요한 요소라는 르네 랜더스(Renee M. Landers)의 연구 결과는 관리자들의 이런 말들이 위선일 수 있음을 아프게 꼬집고 있습니다. 



랜더스는 변호사들로 이루어진 로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변호사가 윗사람에게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모습을 얼마나 자주 보여주냐가 '파트너'로 승진하는 데에 중요한 변수임을 밝혔습니다. 연구 대상으로 로펌을 선택한 이유는 직급 구조가 간단하고(어소시에이트-파트너), 파트너로 승진하면 이익 배분금으로 거액의 성과급을 받을 수 있기에 변호사들의 승진욕이 상당히 내재됐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랜더스는 먼저 복잡한 수학 방정식을 통해 야근이 승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보였습니다(이 수학 모델은 복잡하고 또 어렵기에 이 글에서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소시에이트들이 승진을 위해 가능한 한 오래 일하려는 상황으로 '평형'을 이룬다는 것이 이 수학 모델의 결론이었죠. 이후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로펌 두곳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수학 모델이 제시한 의미가 옳은지 검증하기로 했습니다. 

변호사(어소시에이트)와 파트너에게 '업무의 질'이 승진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자 거의 모두 강한 동의를 표했습니다. 헌데 '야근이 업무의 질을 평가하는 지표라고 보느냐'는 질문에는 예상대로 두 그룹 모두 별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야근이 업무의 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데 두 그룹 모두 같은 생각이었던 거죠. 또한 두 그룹은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승진에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야근이 충성심을 가리키는 지표라고 그다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파트너 그룹은 변호사 그룹보다 야근과 충성심의 관계가 낮다고 봤습니다. 

이런 설문 결과는 해석하기가 약간 모호합니다. 하지만, 두 그룹 모두 '필요할 때 기꺼이 야근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요소를 승진에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볼 때, 어소시에이트가 보이는 업무의 질을 올바로 측정하기 어렵다면(업무의 질적 요소는 항상 평가하기 어렵기 마련이죠) 야근이야말로 승진에 결정적인 요소로 떠오른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랜더스는 가상의 인물에 대한 글을 파트너들에게 보여주고 그 사람의 승진에 얼마나 지지할지를 평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야기 속 인물은 야근은 물론이고 필요하면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와 열심히 일하는 변호사로 그려져 있었죠. 하지만 새로운 의뢰인을 끌고 오는 능력은 약했습니다. 파트너 중 33퍼센트가 이 인물의 승진을 강하게 지지한다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인물이 육아로 인해 정시 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덧붙인 다음에 물어보니 강하게 지지한다는 의견은 17.5퍼센트로 줄어들었습니다. 이번엔 의뢰인을 끌고 오는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이야기를 바꾼 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인물이 야근을 많이 하는 인물로 그려질 때 파트너들은 59퍼센트의 강한 지지를 보였지만, 칼퇴근하는 사람으로 소개될 때는 그 지지율이 37퍼센트로 뚝 떨어졌습니다. 이는 동일한 조건이라면 어소시에이트의 야근의 여부나 정도가 파트너 승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입니다.

비록 로펌을 대상으로 한 연구지만, 랜더스의 연구는 일반기업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 연구는 다른 업무 조건이 동일할 경우, 그리고 평가를 신뢰할 수 없다든지 업무가 복잡하여 질적 요소를 올바로 측정하기가 어려운 경우, 회사에 남아 오래 일하는 직원이 그렇지 않은 직원보다 승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윗사람에게 자신의 승진을 어필하기 위한 도구로 업무의 질보다는 업무의 양, 즉 야근을 선택하려는 동기가 매우 크다는 점을 또한 시사합니다. 저녁 6시가 넘어도 퇴근하지 않는 까닭은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야근이 평가와 승진에 유리하다는 점을 은연 중에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랜더스는 이러한 심리가 극심한 생존경쟁(Rat Race)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지적합니다. '쥐들의 경주'는 로펌과 같은 전문가 집단 뿐만 아니라, 일반기업 내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도 역시 나타납니다. 경쟁이 극심할수록 작은 차이가 큰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때 야근은 다른 사람에게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가 됩니다. 야근은 직원 개인의 건강 측면과 조직의 생산성 측면에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지만, 승진할 자리가 부족하고 차등 보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애석하게도 이러한 역선택(Adverse Selection)은 더욱 강화됩니다.

여러분의 조직에서는 야근의 회수와 시간이 승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칩니까? 만일 그 영향이 크다면, 여러분은 '쥐들의 달리기'에 이미 참가 중이고 그 때문에 차차 burn-out될지 모릅니다.


(*참고논문)
Rat race redux- Adverse selection in the determination of work hours in law fir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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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주면 자원봉사를 더 많이 할까?   

2012. 5. 1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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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는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해서 노동력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자원봉사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미국에는 총 고용인구 중 6.8%(1990년 기준)가 자원봉사자일 정도입니다. 2011년에 기획재정부에서 발간한 '국가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원봉사자 비율은 OECD 28개국 가운데 16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한다면 좀더 많은 시간을 봉사하지 않을까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원봉사자가 되려면 자원봉사로 인한 기회비용을 감내해야 합니다. 자원봉사 시간 동안 돈을 못 버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죠. 자원봉사자들에게 기회비용의 일부를 보전해 준다면 자원봉사자들로부터 좀더 많은 봉사 시간을 끌어낼 수 있고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 논리적인 추론입니다. 하지만 진짜 그럴까요?



취리히 대학의 브루노 프레이(Bruno S. Frey)와 로렌쯔 괴테(Lorenz Goette)는 1997년에 실시된 '스위스 노동력 조사' 데이터를 확보하여 금전적 보상과 자원봉사 간의 관계를 분석했습니다. 정치기관, 공공기관, 지방자치기관 등에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데이터를 추출해 보니 약 20퍼센트의 자원봉사자들이 금전적 보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보상을 받지 않는 그룹은 한 달에 14시간을 자원봉사에 투여했지만, 한 달에 50스위스프랑 이하를 받는 그룹의 자원봉사 시간은 월 평균 12시간도 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지급했음에도 오히려 자원봉사 시간이 줄어든 것입니다. 프레이와 괴테는 추가 분석을 통해 14시간의 자원봉사 시간(돈을 안 주고도 확보할 수 있었던 시간)을 보상으로 확보하려면 적어도 75프랑 이상의 돈이 주어져야 한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반면 월 50스위스프랑 이상을 받는 그룹은 21시간을 자원봉사에 쏟았습니다. 이는 보상을 더욱 높이면 자원봉사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상 없이도 14시간의 자원봉사를 확보할 수 있는데 50프랑 이상의 보상이 과연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프레이와 괴테는 덧붙입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중간값 수준에서 볼 때 보상이 자원봉사 시간을 줄인다는 점은 분명했죠. 프레이와 괴테는 보상으로 인해 4시간 가량 자원봉사 시간이 줄어든다고 최종적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보상이 내적동기를 갉아 먹는다는, 소위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는 자원봉사자들에게서도 여실히 나타난다는 점을 이 연구 결과가 보여줍니다. 열심히 일하려는 욕구는 돈이 아니라 충만한 내적동기(intrinsic motivation)에서 나온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무언가를 장려하기 위해 돈이라는 손쉬운 도구를 사용하려는 안일함을 버릴 수 있을 겁니다.


(*참고논문)
Does Pay Motivate Volunt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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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 "선생님의 청록색 머리핀"   

2012. 5. 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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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5월 15일 '스승의 날'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면 제 마음 속에 한 분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부끄럽지만 까까머리 중학교 때 만난 그분과의 추억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오월이다. 저녁 무렵, 노란 유채꽃밭을 지나 언덕을 오른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서풍이 가슴 위로 쌓이다 흩어진다.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 위, 나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선다. 이미 지평선을 넘어간 해가 진홍빛 숨을 힘겨이 토해 올릴 때 반대편 동녁 하늘로 손톱 같은 상현달이 떠오른다. 오늘도 저 달은 별 하나를 귀고리처럼 달았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온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의 시다. 외우는 데 젬병인 내가 이 시를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는 까닭은 이 시에 가락을 입힌 '별'이란 노래 때문이다. 말로만 두발 자율화 시대, 머리를 박박 깎은 중학교 2학년생의 나는 학교의 합창단원이었다. 특별히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한 학년이 세 반 밖에 안 되는 시골 중학교에서 음치만 아니라면 누구나 30명 짜리 합창단에 낄 수 있었으니까. 도내 합창단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후에 음악실에 남아 지겹도록 부른 노래 중 하나가 이 노래, '별'이었다.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진 탓에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시골 외갓집에 겨우 의탁하게 된 나는 세상의 끝에 버림 받은 느낌이었다. 그랬다. 사춘기 소년의 눈에는 똑바로 보이는 물체가 없는 법. 지위의 추락이랄까? 한때 시골 아이들에게 방학이면 외갓집에 놀러오는 세련되고 깔끔한 서울 아이이던 나는 이제 맡겨진 아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외갓집은 그저 잠자는 곳일 뿐. 나는 가능한 한 학교에 오래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저녁 때까지 계속되던 합창 연습은 내겐 훌륭한 핑계거리였다. 합창단원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것 말고도 합창단원이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80년대 초, 어두운 흑백 이미지로 깔리는 시골 중학교의 배경 위로 파스텔톤의 청록색 머리핀이 떠오른다. 음악선생님의 까만 머리칼 위에 언제나 얹어져 있던 청록색 머리핀. 운동회 때 입는 트레이닝복조차 청록색일 정도로 선생님은 그 색깔을 좋아했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청록색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그 시절의 선생님 나이 정도의 숙녀를 발견하면 어느새 나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키 작은 아이가 된다. 부끄럽지만, 내게 청록색은 풋사랑의 흔적으로 서툴게 각인되어 있다.

마음 둘 곳 없던 내게 선생님은 엄마이자 친구였고 마음대로 혼자만의 연인이었다. 잘하지 못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선생님은 귀여워 했다. 학교 비품인 악기 몇 가지를 본인의 재량으로 무기한 대여해주기도 했다.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선생님을 기쁘게 할 생각으로 16마디 짜리 노래를 작곡하느라 몇날 몇일을 멜로디언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한번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살짝 표절하여 선생님과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원고지 50매 짜리 짧은 소설을 써본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유치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조난 당한 선생님을 구하고 대신 바위에서 떨어져 죽는다. 비현실적인 에코가 들어간 목소리로 '선생님'을 서너 번 외치면서. 선생님은 내 연정을 끝내 몰랐으리라. 악보와 원고지는 진작에 불쏘시개 신세가 되었으니까.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만 싶었을지도 모른다.

두 달여의 연습 후, 드디어 합창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죄다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으로만 구성된 합창단은 우리가 유일했다. 여학생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깔보는 눈치였다. 우리 팀 덕에 꼴찌를 면하게 됐다는 안도의 눈빛이 그녀들에게서 느껴졌다. 남자들은 노래도 못하고 음악도 못한다는 게 당시 중학생들의 인식 수준이었으니까.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남학생들의 무게감 있는 음이 대회장 구석구석에 퍼질 때, 함께 준비한 야심곡 '꽃 사세요'가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 그리고 우리 팀이 결국 1등으로 호명될 때 그녀들의 얼굴에서 떠오르던 야릇한 표정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기뻤지만 여러모로 슬픈 날이기도 했다. 대회를 끝으로 합창단은 해체가 예고되어 있었다. 집에 늦게 들어갈 핑계도, 선생님을 자주 만날 기회도 사라질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후도 오랫동안 생인손처럼 남을 터였다. 선생님은 합창단원들에게 흰 티셔츠에 청바지로 복장을 통일하라고 말씀하셨다. 고민이었다. 외갓집 사정상 청바지를 사줄 여유가 없었고 그런 부탁을 입 밖으로 꺼낼 나도 아니었다. 결국 청바지와 가장 색깔이 비슷한 짙은 회색 면바지를 입을 수밖에. 게다가 그 바지는 외삼촌 것이라 몇번이고 밑단을 접어야 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내 바지를 가리키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생이 스무살 청년의 옷을 빌려 입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선생님의 눈에서 날카로운 책망이 느껴졌다. 대개 궁핍한 시골 아이들인지라 선생님이 나에게만 복장 문제를 지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송곳처럼 내 마음을 오래 후볐다. 세상의 끝에서 손 잡아주던 선생님이 먼저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미웠다. 그리고 서러웠다. 온통 청록생이던 세상은 남루한 빛의 너절한 환상으로 남았다. 연정은 끝내 연민이 되었다.

합창대회 후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성질이 무섭기로 소문난 체육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 눈에도 그 둘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어쩐지 둘이 다정하다고 아이들이 서로 끼득거리던 터였고 음악실에서 둘이 풍금을 연주하던 광경을 나도 목격했더랬다. 같은 학교에 부부가 함께 근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마 후 도시의 중학교로 전근 갔다. 4개월 뒤 나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전학하면서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툭! 그리고 꽤 오랫동안 시골 시절을 잊으려 애썼다.

10년 후, 일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온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절 그 중학교를 찾았을까? 검은색 이승복 어린이 동상과 책읽는 여자아이의 하얀 동상은 예전 그대로였다. 기억에 비해 학교의 축척이 조금 작아졌을 뿐이었다. 1층에서 올려다 뵈는 2층의 음악실에서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란 노랫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청록색 머리핀을 꽂은 선생님이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세고 있을까? 연신 팔을 흔들며 테너의 음을 침범하는 어중간한 바리톤 파트를 채근하고 있을까? 건반 위에 올려진 기다란 손가락은 오늘도 ‘소녀의 기도’를 연주하고 있을까? 아마 나는 병영생활의 고단함을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던 추억으로 위안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빛바랜 추억을 뒤집어 보며 누구에게도 배려 받지 못했던 내 사춘기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울리지 않은 바지를 가리키던 선생님에게 뒤늦게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때늦은 방문은 툭 끊어진 끈을 이어줄 리 없었다. 기억의 스크린에서 가물대는 선생님은 아무말 없었고, 겨울방학을 맞아 인적 없는 학교는 추위가 더욱 사무쳤다. 흥미를 잃은 나는 터무니없게도 30분도 안 되어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20년이 다시 흘렀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해마다 5월 15일이면 스승으로서의 스승이 아니라, 엄마이자 친구이며 혼자만의 연인이기도 했던 음악선생님을 떠올린다. 불경일까? 세상으로부터 방기된 사춘기 소년에게 더 이상 끄트머리로 밀려나지 않도록 괴임목이 되어 준 선생님. 나에겐 그 이상의 스승은 없다. 감사한다는 판에 박힌 답례로는 부족하다. 후회된다.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해 드리지 못한 것과  전근 가는 선생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용서를 구한다. 30년이 지나도록 툭 끊긴 끈을 방치한 채 찾아뵙지 않는 죄를.

이 시간의 하늘빛이 좋다. 암청색 하늘이 검붉은 노을과 만나는 경계선에서 여러 색깔의 빛들이 뛰논다. 서늘한 바람결에 아주 잠깐 청록빛이 비쳤다 사라진다. 소년의 마음에 잠시 얹어졌다 사라진 청록색 머리핀처럼. 시간은 흘러 추억으로 멍울진다. 멍울진 추억은 또 어디로 쌓일까? 지금, 1밀리씩 어둠이 내린다. 별이 더욱 빛난다.


(* 이 글은 한국후지제록스의 기업 블로그인  '색콤달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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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미래보다 장미빛 미래에 끌리는 이유   

2012. 5. 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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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어떻게 행동할지 머리 속에서 미리 시뮬레이션해 두면 그냥 앉아서 미래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대체적으로 실수할 위험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원하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익히 아는 바입니다. 기업에서 매번 수립하는 여러 종류의 전략이나 실행계획들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존재하죠. 

그런데 미래에 벌어질 일이나 취할 행동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것들은 부정적인 느낌을 전달합니다. 고객의 구매 패턴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거나 우리의 전략이 경쟁사의 마케팅 효과를 상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예상되는 경우, 미래를 상상하고 그에 따라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의 머리 속은 온통 장미빛 미래로 가득하겠죠.

반면 애써 연구하여 출시한 제품이 성장 궤도를 타기는커녕 소비자의 관심조차 얻지 못하거나 내부적인 역량의 한계로 인해 전략 실행이 더딜 가능성이 존재하리라 본다면, 당연히 전략가의 마음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겁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가라면 미래의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장미빛인지 회색빛인지에 감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각각을 동일한 비중으로 면밀하게 살핀 후에 역시 동일한 노력을 기울여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고 다시 떠올릴 때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에 더 끌리는 편향이 존재한다는 칼 쉬푸나르(Karl K. Szpunar)와 동료들의 연구 결과는 미래를 바라보는 전략가들이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쉬푸나르는 보스턴 대학교 학생들 48명에게 과거 10년 간의 기억 속에서 110개의 특별한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인물(자신 이외의), 장소, 특정 물건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각 장면을 간단하게 기술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달에 스티브와 함께 베스트 바이란 상점에서 새 아이팟을 샀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럴 만했다." 라고 써야 했죠. 쉬푸나르는 학생들이 제시한 110개의 정보를 기초로 인물, 장소, 물건을 무작위로 섞어 90개의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 월마트 - 담배"라는 식이었죠.

일주일 후 쉬푸나르는 학생들을 실험실로 다시 불러 미리 무작위로 만들어 놓은 90개의 조합을 차례로 제시했습니다.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중립적으로'라는 꼬리표가 하나씩 달려 있는 조합을 본 후에 꼬리표의 내용대로 향후 5년 내에 일어날 일을 상상해야 했습니다. "데이비드 - 월마트 - 담배"란 조합에 '부정적으로'란 꼬리표가 붙었다면 "데이비드와 함께 금연 장소인 월마트 매장 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매장 관리 직원에 의해 쫓겨날 것이다"란 식으로 미래를 부정적으로 상상하도록 한 것입니다.

90개의 조합에 대하여 이렇게 미래를 상상한 직후(10분 후)에 학생들 중 일부는 쉬푸나르로부터 갑자기 '기억력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1일 후에 기억력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을 역시 갑자기 들었죠. 쉬푸나르는 앞서 제시한 각 조합에서 한 가지 요소를 지운 다음(예를 들어 "데이비드 - _____ - 담배") 지워진 내용이 무엇인지 맞혀보라고 학생들에게 요청했습니다. 

학생들은 90개의 조합 속에서 지워진 내용이 무엇인지 잘 맞혔을까요? 10분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과 1일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 중 누가 더 기억을 잘 해냈을까요? 당연히 10분 후에 바로 테스트 받은 학생들이 빈칸의 내용을 맞혔습니다. 하지만 쉬푸나르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미래를 상상할 때와 부정적으로 미래를 그릴 때의 기억력 차이가 있는지를 보고자 했습니다.

10분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들은 조합에 달려있던 꼬리표의 내용에 따른 기억력의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1일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미래를 그리라고 요구 받았던 조합의 내용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35% 정도)이 발견됐습니다. 학생들은 부정적으로 미래를 상상해야 했던 조합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기억을 못했습니다(25% 정도만 기억). 중립적인 미래를 그리라고 한 조합에 대해서 학생들은 중간 정도의 기억률을 보였죠.

왜 부정적인 미래의 디테일을 더 빨리 망각하는 걸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 실험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기억과 관련된 우리 뇌의 생리적 한계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우리가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할 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며 부정적인 기억을 덜 떠올리는 이유와 동일한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어찌됐든, 부정적인 시나리오보다 긍정적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더 잘 기억해낸다는 쉬푸나르의 실험은 전략가가 미래의 여러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고 대응전략을 수립할 때 긍정적인 시나리오에 끌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회색빛 시나리오보다는 장미빛으로 반짝거리는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데에 힘을 더 쏟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더 빨리 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야기할 리스크를 시의적절하게 최소화시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제 경험상, 시나리오 플래닝의 결과물로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의사결정자들에게 제시하면 그들은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장미빛 시나리오)가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처음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의 영역에서 멀어집니다. 심지어 의사결정자들은 어떻게 하면 장미빛 시나리오가 일어나도록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보입니다. 시나리오는 컨트롤이 불가능한 외부환경의 거대한 흐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의 조치를 통해 원하는 시나리오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편향에 빠지지 않은 채 중심을 잘 잡을 줄 아는 전략가는 미래가 긍정적으로 보이든 부정적으로 느껴지든 간에 항상 동일한 비중으로 세부내용을 검토하려고 대비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이든 미래의 시나리오든 부정적인 것을 더 빨리 망각한다는 인간의 심리를 염두에 둔다면 회색빛 미래를 애써 무시하며 장미빛 미래에 헛된 기대를 거는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일부러 회색빛 시나리오를 잊지 않으려고 되새기는 것도 필요하겠죠. 긍정적인 미래만 보려는, 부정적인 미래는 쉽게 망각하는 편향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장미빛 미래가 품고 있는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참고논문)
Memory for Emotional Simulations:Remembering a Rosy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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