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 무임승차자는 몇 명이나 될까?   

2018. 1. 30. 08:25
반응형



조직이 커질수록 무임승차자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어제의 글에 이어, 오늘은 조직의 규모가 충분히 클 경우 무임승차자의 대략적인 비율이 어느 정도일지에 관한 논문을 살펴보자.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심리학자 로버트 쿠르즈반(Robert Kurzban)과 다니엘 하우저(Daniel Houser)는 84명의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공공재 게임'이라 불리는 실험을 수행한 바 있다. 그들은 학생들을 4명씩 그룹을 이루게 한 후 각자에게 50개씩 토큰을 나눠 줬다. 학생들은 받은 토큰을 자신의 개인 계좌에 둘 수도 있고 그 중 일부를 떼어 그룹의 공동 계좌에 기부할 수 있었다. 실험자는 공동 계좌에 기부된 돈을 2배로 증액해 주었다. 공동 계좌에 적립된 돈은 나중에 4명이 똑같이 분배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학생들이 기부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는데(회수는 4번에서 34번까지 무작위로 실시), 매번 기부를 결정하기 전에 공동 계좌에 얼마나 적립됐는지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정보를 들으면 그룹 내 학생들이 이기적으로 결정을 내렸는지 아니면 그룹을 위해 협력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학생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자신은 기부를 한푼도 하지 않고(즉 50개의 토큰을 자기 주머니 속에 확보해 두고) 나머지 3명이 공동 계좌에 기부한 돈을 나눠 가지면 될 것이다. 하지만 4명이 학생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면 공동 계좌에 한푼도 적립되지 않을 테고 공동 계좌에 적립된 돈을 2배로 불려준다는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공동의 이득을 위해 협조적으로 행동하는 학생이라면 공동 계좌에 기부하는 것이 자신이 받아갈 절대금액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어떤 학생은 매번 기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공동 계좌에 얼마나 기부됐는지의 정보를 듣고서 기부 여부를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을 것이다. 만일 다른 학생들이 직전에 기부를 별로 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기부하지 않겠다', 반대로 공동 계좌에 쌓인 금액이 이전보다 많아졌다면(직전에 기부가 많이 이뤄졌다면) '이번에는 기부해야겠군'이라는 전략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그룹 내에는 남들이 협조적으로 행동할 때(매번 기부를 하거나, 상호호혜의 원칙에 따라 기부를 결정하거나) 자신은 이기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에 '무임승차'하려는 학생도 분명 생기기 마련이다.


쿠르즈반과 하우저가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반복한 결과, 예상한대로 학생들의 성향이 협력자(cooperator), 보답자(reciprocator), 무임승차자(free rider)로 뚜렷하게 나뉘었다. 협력자는 매번 기부하려는 사람인 반면, 보답자는 조건에 따라 협조 여부를 결정하는 자로서 남들이 많이 기부할 때만 자신도 기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임승차자는 자신이 가진 50개의 토큰을 내어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기부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이다. 중간값(median)을 따져보니 무임승차자는 1개, 보답자는 25개, 협력자는 50개의 토큰을 기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성향의 분포였다. 협력자는 13%, 보답자는 63%, 무임승차자는 20%로 나타났다. 합쳐서 100%가 안 되는 이유는 유형을 정하기가 애매한 3명의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아마 3명의 학생들은 전략 없이 무작위로 행동한 탓일지도 모름). 이러한 분포로 인해 공공재 게임을 충분히 반복해 보면 세 유형의 사람들이 비슷한 이익을 얻는 상태로 수렴되는 결과를 보였다. 무임승차한다고 해서 특별히 많은 금액을 독차지하는 것도 아니었고, 매번 기부를 행하는 협력자라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다. 이론적으로 보면 25에서 125의 범위로 가져가는 이익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었지만 학생들은 대략 70에서 77.5 정도의 이익을 나눠 가졌다.




쿠르즈반과 하우저는 이 실험을 통해 협력자, 보답자, 무임승차자로 이루어진 인구 분포가 안정적인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시사점을 얻었다. 그룹의 크기가 충분히 크다면, 대략 13 : 63 : 20의 분포로 협력자, 보답자, 무임승차자가 존재하리란 점도 알려준다. 물론 이 실험으로는 개인이 어떤 종류의 게임(혹은 의사결정)이든 항상 자신의 협력 유형을 고수하는지, 아니면 종류가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협력자-보답자-무임승차자 전략을 넘나드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직을 둘러보면, 새로운 제도나 전략에 앞장서서 참여하려는 사람, 다른 직원들의 태도를 보고 결정하려는 사람, 뒷짐 지고 있다가 다른 직원들이 이뤄낸 성과에 얹혀 가려는 사람이 눈에 띌 것이다. 쿠르즈반과 하우저의 실험을 일반화해 본다면, 충분히 큰 조직에서 10명 중 8명 정도는 협조적이고 나머지 2명은 상황에 묻어가려는 무임승차자가 존재하리라 추측된다.


조직의 공동 이익을 위해 무임승차자를 최소화하는 조치가 필요할 터인데, 쿠르즈반과 하우저의 분석에 따르면 3명의 보답자가 1명의 협력자와 그룹을 이룰 때와 1명의 무임승차자와 그룹을 이룰 때, 전자가 후자보다 약 40% 많은 이익을 달성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무임승차자를 줄이는 것이 성과 향상의 한 가지 방법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과연 무임승차자를 없앨 수 있을까? 무임승차자의 존재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며 그들을 모두 발본색원하겠다는 조치는 힘만 많이 들 뿐 별로 효과가 없다. 무임승차자 제거 때문에 '부칙'을 잔뜩 달릴수록 제도가 누더기가 되고 제도의 본래 목적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참고논문)

Kurzban, R., & Houser, D. (2005). Experiments investigating cooperative types in humans: A complement to evolutionary theory and simulations.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02(5), 1803-1807.




반응형

  
,

조직이 커지면 무임승차자는 자연스레 나타난다   

2018. 1. 29. 12:00
반응형



연말에 개인평가와 조직평가를 하다 보면 나오는 말 중에 하나가 '무임승차'라는 단어이다. 알다시피 이 말은 남들이 이루어 놓은 성과를 아무런 노력 없이 가져간다는 뜻이다. 조직에는 이렇게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눈에 띈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했는데 단지 우리 팀이라는 이유로 성과급을 받아가다니, 참 불합리하군"이라고 생각한 적이 아마 여러분에게 한 두 번쯤은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무임승차는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까, 아니면 조직관리(혹은 성과관리)를 잘못할 때 발생하는 경영의 실패일까?




사회학자인 로버트 엑스텔은 이러한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해서 시뮬레이션 실험을 수행했다. 그는 먼저 가상의 사람들을 시뮬레이션 모델 속에 '살게' 했다. 그리고 그 가상의 사람들이 이익의 크기에 따라 독립적으로 일하기도 하고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는 로직을 집어 넣었다. 혼자 일하냐, 모여서 일하냐의 문제는 개인에게 돌아갈 이익의 크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엑스텔은 모델을 현실과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개성의 차이를 부여했다. 그것은 열심히 일해서 높은 소득을 원하느냐(소득 중시자), 아니면 높은 소득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을 더 많이 원하느냐(개인생활 중시자)의 차이였다. 쉽게 말해 일과 생활(Work and Life) 중 어디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느냐의 차이를 개인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2개의 로직을 시뮬레이션 모델에 집어넣은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엑스텔은 살펴봤다. 예상대로 일을 열심히 하는 야심가(소득 중시자)들은 독립적으로 일할 때보다 같이 일할 때 더 많은 소득이 생긴다는 것을 알고 기업을 만들기 시작했다. 모델의 로직상 그들은 높은 소득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자들 사이에선 기업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야심가들이 만들어낸 기업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점점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용된 사람 중에는 소득 중시자와 개인생활 중시자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기업이 작을 때는 한 사람이 조직에 기여하는 성과의 비율이 크기 때문에 개인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가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럴 때는 무임승차를 하지 못한다. 자신이 놀면 조직성과가 급락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몫도 눈에 띄게 줄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이 커질수록(즉 인력이 많아지면) 1명의 직원이 기여하는 비율이 작아진다. 절대액은 같아도 상대적인 기여분(分)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바로 이때 야심 없는 자(개인생활 중시자)들은 상대적인 기여가 작기 때문에 자기가 일을 하는 척만 해도 조직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임수를 써도 받아가는 연봉은 열심히 일할 때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렇게 되니 무임승차가 유리한 전략이 되고 열심히 일하던 야심가들도 무임승차 전략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열심히 일할 때보다 자신에게 높은 순이익(소득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뺀 값)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엑스텔은 모델에 하나의 로직을 더 첨가했다. 사람들이 더 높은 소득을 벌 기회가 있다면, 독립적으로 일하거나 다른 기업으로 이직하도록 한 것이다. 그랬더니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즉 무임승차 전략을 채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기업을 이탈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기업에는 무임승차자들이 우글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엑스텔의 모델은 비록 단순한 몇 가지 로직에 의존한 시뮬레이션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매우 비슷하게 나타낸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기업이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는 소수에서 시작하다가, 규모가 커지면 무임승차자들이 점점 증가하고, 급기야 일 잘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떠나 새로운 회사를 만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기업의 사이클을 모사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무임승차는 모든 조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까, 아니면 조직관리를 잘못할 때 발생하는 경영의 실패일까? 대답은 '둘 다'이다.


엑스텔의 실험은 무임승차자의 발생이 조직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어쩔 수 없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무임승차는 기업에 고용되는 직원들의 개성(태도)이나 역량 차이에서 비롯되는 필연이다. 하지만 필연이라고 해서 조직관리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무임승차자의 증가를 차단하지 못하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고 조직에는 무능한 사람들만이 남는다는, 소위 '파킨슨의 법칙'이 현실로 나타나니 말이다.


그러므로 무임승차가 이득을 최대화하는 좋은 전략이라는 인식이 퍼지지 않도록 적절하게 규제하거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이득이 돌아가도록 하거나,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이 무임승차보다 좋은 전략임을 '넛지(nudge)'하는 조직관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개인성과와 조직성과 중에 무엇이 먼저인가, 하는 중요한 질문이 떠오르는데, 이 질문은 관리자들에게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무임승차자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개인의 성과를 강조하다 보면 자신의 성과지표에 집착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만연하여 협력이 미약해진다. 그렇다고 협력을 권장하기 위해 팀이나 사업부 단위의 조직성과를 강조하다 보면 무임승차자를 용인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트레이드 오프인 셈이다.


조직의 규모가 크면 소수의 무임승차자는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한다. 엑스텔의 실험에서 봤듯이 그들의 발생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자들은 개인성과를 우선함으로써 무임승차자를 뿌리 뽑겠다는 접근보다는, 협력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단위조직(팀이나 사업부)의 성과를 높게 인정하고 동시에 협력의 요소를 개인의 성과지표에 담음으로써 무임승차가 결코 유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현명한 전략이다.


요컨대 성과관리는 개인보다는 조직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성공한 기업들이 보이는 경쟁력의 뿌리는 개인들의 협력과 자발적인 기여로부터 나온다. 그 협력을 훼손하거나 무임승차자들이 조직을 오염시키게 놔두는 기업은 협력으로 똘똘 뭉친 경쟁자의 공격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수의 무임승차자를 그대로 두면서 협력을 권장하는 조직관리가 필요하다. 무임승차자를 '발라내겠다'는 극단과, 무임승차자를 '방치하는' 극단 사이에서 적절하게 무게중심을 잡아야 한다.



(*참고도서)

<사회적 원자>, 마크 뷰캐넌, 사이언스북스, 2010년 8월)


(*참고논문)

Axtell, R. (1999). The emergence of firms in a population of agents: local increasing returns, unstable Nash equilibria, and power law size distributions. Brookings Institution Discussion paper: Center on Social and Economic Dynamics.






반응형

  
,

상사가 나에 대해 잘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   

2018. 1. 24. 12:00
반응형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항상 관찰하고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를 지적하면 그 내용이 맞건 틀리건 간에 일단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라는 감정이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에 또한 놀라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명확하게 분간이 되질 않는다.




사이민 바지르(Simine Vazire)는 나 자신의 여러 가지 특성 중에 내가 잘 아는 부분이 따로 있고 다른 사람이 잘 아는 부분이 따로 있을 거라는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165명의 학생들을 모은 다음 서로 잘 아는 친구끼리 5명씩 그룹을 이루도록 했다. 그런 다음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멤버들의 성격 특성들을 평가하게 했다. 이 과정이 끝나고 바지르는 이번에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그룹을 이루도록 한 다음에 역시 다른 멤버의 성격 특성을 평가하도록 요청했다. 평가 전에 10분 동안 각자 대화할 시간을 줌으로써 성격 특성을 파악하도록 했다. 


이렇게 자기 자신, 친구, 모르는 사람이 각각 평가한 결과의 정확도를 계산해 보니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먼저 신경증적 성질(neurotism)과 같이 알아차리기 어렵고 측정하기도 어려운 특성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하게 평가했다. 반면, 알아차리기는 어렵더라도 측정하기 쉬운 특성(예 : 지적능력(intellect))들은 친구가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외향성(Extraversion)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서 알아차리기는 쉽지만 측정하기는 어려운 특성들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모두 비슷했다. 이것으로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잘 아는 부분과 친한 사람이 잘 아는 부분이 같지 않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알아차리기 어렵고 측정하기 어려운 특성 --> 본인이 더 잘 안다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측정하기 쉬운 특성 --> 타인이 더 잘 안다

알아차리기 쉽지만 측정하기 어려운 특성 --> 본인이 타인이 비슷하게 안다




이 실험 결과는 평가 결과에 대해 평가자와 피평가자 간에 시각 차이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피평가자가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특성에 대해 평가자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 평가자의 입장에서는 피평가자의 실제 특성을 정확히 평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 실험이 보여준다. 요약하면, 창의력과 지능 등의 지적능력은 평가자가, 자존감과 불안감 같은 신경증적 성질은 피평가자 자신이 잘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달변, 지배력, 리더십과 같은 외향성은 피평가와 평가자가 공히 잘 평가하는 특성이다. 


이런 차이를 숙지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알기 어려운 특성을 내가 잘 안다고 믿거나, 상대방이 나보다 더 잘 아는 나의 특성을 지적할 때 거부감이 드는 경우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나에 대해 상대방이 잘 아는 특성이 따로 있고 내가 잘 아는 특성이 따로 있음을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유념해야만 엉뚱한 피드백이 오고 가는 일이 적어지고 평가에 대한 불만도 줄어들지 않을까? 상사가 나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잘 아는 부분도 있고 더 모르는 부분이 있다.'이다. 



(*참고논문)

Vazire, S. (2010). Who knows what about a person? The self–other knowledge asymmetry (SOKA) mode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8(2), 281.



반응형

  
,

나쁜 상사 밑에서 일하면 건강하지 못하다?   

2018. 1. 23. 12:00
반응형



직장 생활을 할 때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은 무엇일까? 과중하고 까다로운 업무일까, 아니면 하는 일의 수준과 양에 비해 턱없이 낮은 보상일까?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람 관계'가 직장 생활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이고 그 중에서도 '상사와의 관계'를 지목하리라 짐작된다. 적어도 '상사와의 관계'가 직원의 근무만족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라는 점에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30년간 10만 명을 대상으로 한 갤럽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직원들이 자신의 회사를 '좋은 기업'이라고 평가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직속 상사'였다고 한다. 상사가 직원의 만족도와 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하지만 직속 상사의 리더십이 훌륭하냐 그렇지 못하냐가 직원의 건강(그리고 수명)과 관련되어 있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스톡홀름 대학의 안나 뉘베리(Anna Nyberg)와 동료들은 3,122명의 스웨덴 남성들을 대상으로 상사의 리더십이 '심장 발작'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그들은 조사 대상자들에게 상사의 리더십을 평가하도록 했다. 리더십 평가 항목은 직원에 대한 배려심, 목표와 역할에 대한 명확한 지시, 정보와 피드백 제공, 변화를 주도하는 능력, 직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능력 등이었다. 그런 다음, 병원 기록을 토대로 직원들의 심장 발작 여부, 그로 인한 사망 여부 등을 조사했다. 


뉘베리는 상사의 리더십 점수가 부하직원들의 심장 발작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상사의 리더십 점수가 높을수록 직원들의 심장 발작 확률이 20% 낮았던 것이다. 그리고 좋은 상사(리더십 점수가 높은 상사)와 오랫동안 같이 일할수록(4년 정도) 심장 발작 확률은 39%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리더십이 부족하거나 '나쁜' 상사와 일하는 직원일수록 심장 발작 확률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상사와 같이 일할 경우, 심장 발작 위험도의 변화 


1년 같이 근무하면  : 1.0 --> 0.76

2년 같이 근무하면  : 1.0 --> 0.77

3년 같이 근무하면  : 1.0 --> 0.69

4년 같이 근무하면  : 1.0 --> 0.61


물론 뉘베리의 연구가 '상사가 훌륭한 리더십을 가질수록 부하직원들이 더 건강하다'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상사의 리더십과 직원들의 건강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을 밝혀냈을 뿐이라서 나쁜 상사가 나의 건강을 해친다, 라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이 연구 결과는 상사가 직원의 건강, 더 나아가 직원들의 웰빙과 수명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변수 중에 적어도 하나라는 점을 추론케 한다. 심장 발작과 같은 질병이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이고, 스트레스의 주된 원천이 상사라고 많은 직원들이 호소하는 점을 인정한다면, 상사의 리더십과 직원의 건강 사이에 '어느 정도'는 인과관계가 존재하리라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이 인과관계가 밝혀진다면, 직원들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서 상사의 리더십을 강화하거나, 강화할 수 없다면 다른 이로 교체하는 등의 조치가 효과적일 것이다. 직원의 생산성은 정신과 신체의 건강함에서 기반하니까 말이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2017년에 남녀 직장인 635명을 대상으로 직장인들이 겪는 우울증에 관하여 설문조사한 결과는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다. 남성 직원의 76.3%, 여성 직원의 88.2%, 즉 직장인 10명 중 8명이 '직장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 원인의 대부분은 직장 내 인간관계에 있으며, 인간관계 문제의 대부분은 상사와 직원 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이제부터라도 세심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참고논문)

Nyberg, A., Alfredsson, L., Theorell, T., Westerlund, H., Vahtera, J., & Kivimäki, M. (2009). Managerial leadership and ischaemic heart disease among employees: the Swedish WOLF study.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 66(1), 51-55.


(*참고기사)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104_0000194382&cID=10201&pID=10200



반응형

  
,

평창 동계올림픽 경제효과 65조원은 과연 옳은가?   

2018. 1. 22. 08:12
반응형



정치인이나 지방 행정가들은 크고 작은 국제 스포츠 행사를 유치하는 일을 좋아한다. 임기 중에 국제 행사를 유치하면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기에 좋고 그 덕에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들은 국제 스포츠 행사가 가져올 경제적, 사회적 효과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면서 유권자들의 동의와 성원을 기대한다.


정치인들이 내세우는 경제적 효과 중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이 바로 고용 효과이다. 경기장을 건설할 때는 물론이고 이벤트가 끝나고 경기장을 운영하려면 사람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인 듯 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들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이 말은 거짓이다. 범위를 좁혀서 보면 스포츠 행사 관련된 일자리는 늘어나긴 한다. 하지만 범위를 넓혀서 보면 그렇지 않다. 경기장을 짓고 운영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은 다른 곳에 쓰인다면 고용을 더 늘릴 수도 있는 돈이기 때문이다. 즉, 스포츠 행사를 치르기 위한 비용 조달로 인해 다른 곳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장기적으로 탄탄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기반이 약해져서 오히려 실업을 촉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스포츠 행사로 발생하는 일자리의 질도 그리 좋지 못하다. 경기장 건설 인력은 건설 기간이 끝나면 일자리를 보장 받기 어려울뿐더러 이벤트 이후의 경기장 운영 인력은 저임금의 비정규직과 시간제 근로자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크롬튼(Crompton), 바데(Baade), 홀(Hall)을 위시한 여러 경제학자들이 이같은 불편한 진실을 이미 여러 논문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국제 스포츠 행사가 일자리를 늘린다는 정치인들의 수사를 글자 그대로 믿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다.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를 추진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효과를 산정할 때 이벤트가 끝나고 남는 시설들의 유지비용은 고려하지 않는다. 멋있게 건설한 경기장들은 적절한 활용 방법이 없으면 어느새 돈 먹는 하마가 되고 만다. 텔로글로우(Telloglou)에 따르면, 시드니에 지어진 슈퍼돔의 1년 운영비용을 감당하려면 1주일에 한번씩 거대 행사를 유치해야 한다고 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메인 스타디움으로 쓰였던 잠실 주경기장 부근을 지날 때마다 1년에 며칠이나 사용한다고 저 큰 경기장 유지에 돈을 쏟아 부을까, 란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뜨끔한 말이지만, 2002년 월드컵에 관해 연구한 만젠라이터(Manzenreiter)와 호르네(Horne)는 거대한 스포츠 행사를 치르려고 지은 경기장들이 경제를 활성화시킬 거라는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곳은 일본의 경기장들이었지만,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관광객이 늘어난다는 말도 실은 거짓이다. 물론 스포츠 행사가 치러질 때와 치러지는 장소에 사람들이 몰려 들기는 한다. 하지만 이는 착시에 불과하다. 이벤트를 치르는 도시 이외의 지역을 방문할 수도 있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관광객의 순증가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차피 방문할 관광객들이 이벤트를 치르는 기간을 택해서 왔다가 갈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이벤트 때문에 혼잡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다른  국가나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국제 스포츠 행사의 관광객 증가효과는 신뢰할 만하지 않다.


국제 스포츠 행사의 경기부양 효과도 의심의 대상이다.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증세 조치는 가계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와 지역의 성장동력 창출에 기본인 교육, 의료, 복지 등에 투자돼야 할 공적자금이 길어봤자 한 달 정도인 스포츠 행사에 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국제 스포츠 행사의 경제적 효과가 크다는 말은 틀렸다. 




그래도 거대 행사를 유치하면 국민들의 행복이 증진되지 않겠느냐며 이에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혹은 우리 도시)가 국제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게 됐다는 자부심이 클 테니 말이다. 그러나 조르지오스 카벳소스(Georgios Kavetsos)와 스테판 스지만스키(Stefan Szymanski)는 이와 같은 생각도 착각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1976년부터 2000년까지 올림픽, 월드컵 축구, 유로컵 축구 경기를 치른 국가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그 국민들의 행복도가 특별히 높지 않다는 점을 밝혔다. 물론 행사를 치르는 해의 행복도는 높았지만, 그 효과는 급격히 사라졌다. 스포츠 행사를 치른다는 자부심과 행복감은 결혼에 비견할 만큼 크지만 그 효과는 금세 꺼지고 만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지방 행정가들이 국제 행사 유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항상 제시하는 경제적 효과와 '행복 증진 효과'는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오히려 거대 행사를 치르는 바람에 경제가 나빠진다는 사실을 많은 연구들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제 스포츠 행사 유치가 거시적 경제 효과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한 도구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요즘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일이 몇 주 앞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북한과의 단일팀 구성 및 동시 입장으로 연일 뉴스의 톱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혹여 올림픽 개최를 통해 경제적 효과를 잔뜩 기대한다면 이는 허황된 기대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림픽 개최로 64조 9천억원(약 65조원)의 경제적 효과가 예상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고논문)

Georgios Kavetsos, Stefan Szymanski(2010), National well-being and international sports events, Journal of Economic Psychology, Vol. 31(2)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