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에서 발견한 권위주의의 포악성   

2024. 4.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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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넷플릭스에서 <삼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난제로 일컬어지는 '3 Body Problem'을 소재로 한 SF인데요,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삼체 문제'가 무엇인지 간략하게만 설명하겠습니다.

삼체 문제란 질량을 가진 세 물체의 인력에 따라 각 물체의 운동 주기와 거리가 어떻게 될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태양계에는 오직 한 개의 별(태양)이 있고 그 별 주위로 8개의 행성이 공전을 합니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차지하는 질량이 매우 크기에(99.86%) 태양과 각 행성과의 관계는 '이체 문제'라고 불리고 천재 수학자이자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정리한 깔끔한 수학식으로 풀 수 있죠.

하지만 만약에 태양계 내에 태양과 같은 별이 하나 더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 지구의 공전 주기를 계산하기 어려운 상태로 빠집니다. 태양 1과 태양 2에 사이에 놓인 지구의 공전 주기가 어느 때는 1년보다 짧았다가 또 어느 때는 더 길어질 수 있죠. 또한 지구가 태양을 타원으로 돌던 궤도 또한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각 태양과 아주 가까워져서 지구 상의 모든 게 불탈 수도 있고, 또 너무 멀어져서 빙하기보다 심각한 상태가 될 수도 있죠. 문제는 언제 어느 정도로 궤도가 변할지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뉴턴은 이런 골치아픈 삼체 문제를 풀려고 평생 애를 썼지만 끝내 실패했습니다. 결국 수학자 푸앵카레에 의해서 삼체 문제의 '해(solution)'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중에 증명됐죠(푸앵카레는 삼체 문제를 이체 문제로 단순화시켜서 '특수해'를 구하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삼체 문제는 '풀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삼체> 드라마에서 외계에 전파를 발사하여 외계 문명을 찾으려는 프로젝트가 나오는데요, 전파를 증폭시키는 데 기술적 한계가 있기에 어딘가에 있을 외계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태양을 거대한 전파 반사판으로 사용하면 엄청난 크기로 전파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전파를 태양으로 직접 쏘면 그걸 태양이 반사하여 훨씬 강하게 먼 곳까지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거죠(이제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독재자 마오쩌뚱이 지배하던 중국의 여성 엔지니어였습니다. 칭화대에서 물리학을 배우다가 문화혁명의 피바람으로 어찌어찌해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또 어찌어찌해서 전파 천문대에서 일하게 되었죠(자세한 스토리는 스포일러일 테니 생략합니다).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1960~70년대의 중국임 배경임을 이야기한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마오쩌뚱은 인민의 태양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만큼 신격화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문대장은 주인공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합니다. 태양에 정면으로 전파를 쏜다는 것은 마오쩌뚱의 존엄을 위협하는 불경한 짓이라는 게 거부의 이유였습니다. 태양을 거대한 증폭기로 사용한다는 매우 참신하고 놀라우며 '손쉬운' 아이디어가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거부 당한다는 게 어이가 없더군요. 

'고작 인민의 태양이라는 은유적 표현이 실제의 태양을 무시해 버릴 만큼 강력한 것인가?'  

이 장면을 보면서 권위주의가 시대의 발전과 혁신을 막고 오히려 후퇴시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새삼스레 느껴지더군요. 비록 픽션이라지만 중국 작가의 작품이기에 당시 마오쩌뚱 치하의 '권위주의 포악성'을 이 장면으로 잘 캐치했을 겁니다.  무자비한 희대의 비극과 폭력을 문화혁명이라는 당의정으로 포장할 만큼 마오쩌뚱을 위시한 위정자들은 무지하고 무도했고, 그놈의 문화혁명으로 중국은 몇십 년 뒤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조직이 가야할 올바른 길보다 윗사람 심기를 살피는 것이 최우선인 조직에서 희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은 몰래 외계에 메시지를 보내 지구를 침공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세상은 희망이 없다는 말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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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을 보며 든 몇 가지 생각   

2024. 4.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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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시작된 '총선' 정국이 종료됐습니다. 여느 유권자처럼 저 역시 선거철이 되면 '정치 고관여' 상태로 전이되어 안 보던 정치 토론 프로나 각종 유튜브 채널을 일부러 챙겨보곤 하는데요, 투표도 하고 결과도 봤으니 이제는 일상에 보다 집중해야겠습니다.

이번 총선 과정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몇 가지 생각을 '짧게' 정리해 보렵니다. 자세히 서술하면 자칫 정치 성향을 드러낼 수 있기에 일부러 중립적인 어조로 짧게 서술한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가설일 뿐이라는 점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는 몇 가지 더 있는데, 중립적인 생각만을 공유합니다)


1. 손짓과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말로 속마음을 감추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감춰진 속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손짓이나 표정 등 바디랭귀지로 튀어나오려는 속성이 있나 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속마음부터 진정성이 있어야 그런 이상한 손짓이나 표정, 말투가 나오지 않습니다.

2. 승리하려면 '중도층'을 투표장에 나오게 해야 한다
중도층에는 보수적 중도와 진보적 중도가 섞여 있는데, 보통은 투표 의지가 적습니다. 정치 저관여층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들을 투표장에 나오게 할수록 승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들을 투표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 정당의 일.

3. '밴드웨건' 전략보다 '언더독' 전략이 효과적이다
밴드웨건은 '우리가 대세다'를 알림으로써 지지자들의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고, 언더독은 '우리가 질 것 같다'라고 지지자들에게 읍소하는 것입니다. 둘다 선거 전략으로 자주 쓰이지만 각 전략에는 부작용이 존재합니다. 밴드웨건 전략을 쓰면 '내가 투표 안 해도 이기겠지'란 생각에 투표할 동인이 적어지고, 언더독 전략을 쓰면 '내가 투표해봤자 안 될 텐데'란 생각에 역시나 투표하기가 싫어지죠.

그런데 이번 총선을 보니(지난 여러 번의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인 듯), 밴드웨건 전략을 쓰면 부작용이 커지는 반면에 언더독 전략을 쓰면 지지층이 결집해 투표장에 나가는 현상이 엿보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극난 극복의 후손이라 그런 걸까요? 중도층을 투표장에 이끄는 데에도 언더독 전략이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4. 여론조사를 믿기 어렵다
여론조사가 여론을 조작하고 호도하는 모습이 평범한 시민인 저에게도 보일 정도입니다. 여론조사가 있는 그대로의 표심을 반영해야 하는데, 밴드웨건 전략이나 언더독 전략의 전술로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5. 전문가의 예측 역시 믿기 어렵다
4번과 같은 이유로 그렇습니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예측을 내놓은 정치평론가들은 왜 계속 방송 매체에 출연하는 걸까요?

6. 출구조사 때 거짓으로 답하는 사람이 꽤 많다
출구조사 결과가 개표 결과가 완전히 딴판으로 나온 경우가 꽤나 많았습니다. 통계 오류는 아닙니다. 거짓으로 응답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게 제 가설입니다.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그저 장난으로? 보수 유권자와 진보 유권자 중 누가 더 거짓말을 많이 하는 걸까요?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7. 이기고 있다가 지는 게 더 고통스럽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지는 것'보다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지는 것'이 더 고통스럽고 납득하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있다가 없는 것'이 더 아쉽듯이.

당선자들께는 축하를(그리고 준엄한 책임감을),
낙선자들께는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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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한 경영, 심플한 리더십   

2024. 4.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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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제가 번역한 책 '무기가 되는 알고리즘'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목에 '알고리즘'이라는 단어가 포함돼 있어서 IT 관련 책이 아닌가 오해할 것 같은데, 사실은 리더가 하루에 하나씩 실천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리더십 책에 가깝습니다. 

당초 '옮긴이의 글'을 책에 싣기로 했으나 출판사측이 편집 단계에서 게재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요, 그래도 이 책을 선택하는 데 참조하십사 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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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전에 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를 다니다가 ‘1인 컨설팅 사’로 독립했다. 그때 나는 여러 기업이 겪고 있는 ‘시스템 과부하’ 증상을 해소하는 것을 나의 미션으로 삼았다. ‘Not Plus, But Minus. 직역하면 ‘더하지 말고 빼자.’ 문제를 해결하고 효율을 높인다는 취지로 도입된 각종 시스템과 제도가 생산성과 성과를 향상시키기는커녕 직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도록 족쇄가 된다든지, 그 복잡성 때문에 눈앞의 단기 성과에 매몰되게 만든다든지, 단순하게 접근해도 되는 문제에 복잡한 분석을 들이대는 바람에 오히려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한다든지 등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Not Plus, But Minus’는 경영 시스템이 복잡해지는 것을 경영의 고도화 혹은 과학화라고 오해하는 분위기를 깨야겠다는 나의 신조가 담긴 문구였다.

“평가제도를 없애라.” 나는 CEO나 인사담당자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주저없이 던졌다. 직원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평가를 해야 연봉을 결정할 수 있는데, 평가를 없애라니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었을까? 상대는 늘 놀란 눈을 하며 이유를 물었다.

평가를 없애라는 내 ‘공격적 제안’에 워낙 반발이 심했기에, 그리고 예상 질문이 거의 비슷했기에 반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나는 평가를 없애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연구 논문으로 검증된 결과들을 제시하며 평가제도가 일으키는 다양하고 심각한 문제를 지적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듣던 상대는 내 설명이 다 끝나면 십중팔구 이렇게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평가를 없애면 그 대신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의 기저에는 ‘평가를 없애면 직원들이 일을 안 할 것이다.’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무언가 강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으니까. 대안을 달라는 뜻인데, 나는 짐짓 모른 척 하면서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평가를 없애면 됐지, 또 뭘 하려고 하세요?”라고. 그러면 상대는 아까보다 더 깊이 미간을 찡그렸다. 속으로 ‘이 사람이 장난하나?’ 싶었을 것이다. 나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다가 상대에게 평가를 없앴을 때의 대안을 차근차근 제시했다. 물론 먼저 평가를 없앤 타사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하지만 나는 자괴감을 자주 경험했다. 그렇게 자세히 설명하고 타사 사례를 들어가며 이해를 시켜도 이미 화석처럼 박힌 제도를 없애려고 시도한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평가의 대안을 제시해도 평가만큼의 강제성과 압박이 없다는 이유로 ‘까이기’ 일쑤였다. 상시 피드백을 통해 직원의 성과 창출 과정을 꾸준히 모니터링하고 지원해야 하는 것이 점수 매기듯이 1년에 한두 번 평가하는 제도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나의 주장은 효율과 일괄 조치를 좋아하는 경영자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다. 경영의 복잡성을 해제하고 ‘심플’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담론에 다들 동의하면서도 정작 실행은 주저하고 ‘그래야 하는 이유’를 너무나 따져 묻는 경영자들이 꽤나 많다는 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책을 번역하면서 종종 드는 생각이 있는데 바로 ‘그때 이 책을 알았더라면….’라는 아쉬움이다. 이 책 ‘비즈니스 메이드 심플’이 그때 나왔더라면 ‘더하지 말고 빼라’는 나의 ‘고독한’ 외침을 든든히 지지해 주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 책이 나온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업계를 돌아보면 많은 기업들이 복잡한 시스템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깨닫고 경영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점차 주류가 되고 있다. 내가 욕을 먹어가며 줄기차게 외친 ‘평가를 없애라’는 주장이 이제 인사관리의 메인 테마 중 하나가 됐다는 게 단적인 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이 책은 리더들을 ‘심플’한 경영의 기본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가이드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것이다.

이 책은 리더 본인의 마인드 전환과 정립뿐만 아니라 마케팅, 연구, 영업, 협상 등 경영 전반의 기본을 망라한다. 하루에 한 꼭지씩 60일간 읽으며 실천해가는 구성이 참신하고 ‘심플’하다. 저자는 이 책을 몇 번이고 꼼꼼히 읽는다면 경영대학원에 지불해야 할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아낄 수 있다고 장담한다. 과장이 살짝 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만큼 ‘심플’한 경영의 기본을 잘 다지고 반복 실천하는 것이 경영대학원에서 복잡한 경영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유용하고 값지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지면을 빌어 저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미션 수립 프레임워크로 모 회사에 미션 재정립 제안서를 제출해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었다. ‘히어로’의 여정으로 미션 수립 과정을 설명한 것이 클라이언트 측에 참신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 책이 매우 실용적이란 말에 이보다 강력한 증거가 있을까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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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한 리더'가 훌륭한 리더입니다미리보기   

2024. 4.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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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영어 원문을 번역할 때마다 “도대체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되지?”라는 단어가 종종 튀어나오는데, ‘vulnerability’도 그 중 하나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취약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언뜻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리더에게 필요한 여러 요소 중 취약성이 꽤 중요하다는 말이 리더십 관련 글에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게 취약성이라고? 왜지?' 리더라면 취약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고, 취약한 사람은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상식 아닌가 해서 처음엔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vulnerability은 ‘약점 투성이’ 혹은 ‘실수나 실패’, ‘위험’이라는 뜻이 아니더군요. vulnerability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의 취약함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자기객관화를 잘 할 줄 알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며, 약자에게 겸허한 자세로 임한다는 뜻이죠.

 



소위 “나 때(‘라떼’)는 말이야"를 접두어로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을 종종 접하곤 하는데, 안 해 본 것이 없고 못 해 본 것이 없는 그들에게는 상대방이 '늘'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왜 이리 못난 애들만 자기 주위에 있는지 분통을 터뜨리죠.

하지만 이렇게 ‘절대 취약할 리 없는 완벽한’ 리더를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런 리더가 다른 조직으로 옮길 때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직원이 과연 있을까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리더는 그저 두려울 뿐, 절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제가 리더들에게 “닮고 싶은 리더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항상 나오는 대답이 ‘이순신 장군’이더군요. “왜 이순신 장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략 “모든 것이 완벽한 리더”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틀린 점 2가지를 지적하고 싶네요. 첫째, 사실 이순신은 완벽한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처럼 ‘취약한’ 리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는 자신의 고충을 부하 장수들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했던 리더였거든요. 결코 모든 전략과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고 부하들에게 일사불란하게 수행할 것을 ‘하달하는’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완벽한 리더를 지향하다가는 고립된 리더가 될 뿐입니다. 무엇이든 틀릴 수 없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며,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감정을 숨기려다가 갑자기 폭발하며, 직원들의 비이성적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직원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겠죠.

취약한 리더는 겸손한 리더이고, 경청하는 리더이며, 포용하는 리더이고, 협업하는 리더이며, 성공을 함께 나누는 리더입니다. 완벽한 리더가 되려는 노력은 부질없고 모두에게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나 이번 총선에 뽑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후보들 중 가장 '취약한 리더'에게 표를 주는 게 어떨까요? 자신은 완벽하다고 외치는 리더 말고요. (이 글은 총선 전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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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치인은 다음부터 안 봤으면 좋겠습니다   

2024. 4.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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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선거철입니다. 그래서인지 제 유튜브 첫 화면에 선거 관련된 영상이 하나둘 뜨더군요. 평소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던 정치 컨텐츠를 선거철이 되어 하나둘 보기 시작하니 어느새 제 타임라인은 관련 컨텐츠로 도배되다시피 했습니다.

정치 평론가들에게는 지금이 대목일까요? 저마다 선거 전망을 내놓고 정당별 의석수 예측을 하느라 약간은 신이 난 모습이더군요. 또한 한물간 정치인들, 아니 이제는 뒷방으로 물러났다 해도 될 만한 인물들도 이런 저런 프로그램에 초대되어 나름의 지론을 펼칩니다. 

또한 ‘왜 이 사람은 또 나타났나?’ 싶은 인사들을 ‘정치 원로’라는 타이틀로 초대해 고견을 듣는 컨텐츠도 있던데요, 그 중 A라는 사람이 출연한 모 방송을 보면서 느낀 바를 간단히 말하고자 합니다. 민감한 이야기일 수 있으니 A의 실명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상황 설명도 하지 않겠다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방송은 패널들이 질문을 던지면 A가 답변을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포맷이었습니다. 제 흥미(?)를 끈 부분은 A가 답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현재의 정치 상황이나 선거 전망을 질문할 때마다 A는 그 질문을 끝까지 듣는 법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마무리할 법한 질문을 끝까지 마무리하도록 놔두지 않더군요. ‘네가 무슨 질문을 할지 난 알아.’라는 듯이 상대가 “~에 대해서...”라고 말하면 바로 말을 낚아채서 자기 할말을 바로 질러버리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질문이야 끊어버릴 수 있다 치죠. 제가 불편함을 느끼기까지 한 그의 말하는 태도는 이랬습니다. 그는 상대의 말을 낚아채 대답을 할 때마다 ‘다 아는 것을 왜 물어? 그 딴 걸 왜 물어봐?’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건 당연히 그렇지, 뭐. 꼭 해봐야 아나?”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그는 이런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원로’라고 추켜세워주니 기고가 만장해진 걸까요? 질문하는 패널들을 하수를 대하듯 한없이 look-down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속으로 ‘그리 잘났으면 왜 본인의 정치 경력은 그러셔?’라고 조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치 지형을 잘 알고 통달한 분이 그런 멍청한 결정을 하셨어?’ 헛웃음이 났습니다. 이런 자를 원로로 대접해 초대하다니, 제작진도 참 딱했습니다.

‘고견은 무슨 얼어죽을 고견!’ 저는 듣기가 상당히 거북해서 중간쯤에서 꺼버렸습니다.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자가 아직 정치판에서 원로라는 견장을 차고 앉아서 한없이 하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리고 대화랍시고 비슷한 스타일로 일관했던 과거의 누군가가 오버랩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겸손은 1도 없던 그 사람.

‘군림하는 대화’ 스타일을 일관하는 사람은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유권자들은 그런 자에게 정치 행위를 허락해서도 안 된다는 걸 일깨워 준 A. 그를 다음 선거 때는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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