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목적은 용서 받기가 아닙니다   

2024. 6.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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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을 일으킨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기자회견 자리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대중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어떤 정치인은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큰절을 하며 용서를 구하고 '도와달라' 읍소를 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행동과 의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데요, 그건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인 집단에서 자주 목격하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슴지 않고 눈물과 머리 조아리기를 연출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기만 행위가 어떨 때는 속이 훤히 들여다 보여서 오히려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꽤나 정교하게 연출되어 지지자들을 결속시키거나 비난의 수위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어느 정도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읍소형 머리 조아리식 사과'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용서를 '더 빨리', '더 쉽게' 받을 수 있는 행동은 아닙니다. 물론 "내가 여러분께 이 정도로 절박하게 사과한다"는 감정은 잘 전달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비읍소형 사과'보다 용서를 더 많이 유도해 내지는 못하죠. 연구 결과가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실험 참가자 절반에게 '읍소 버전'의 기사를 읽게 하고 나머지 절반에게는 '중립 버전'의 기사를 읽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사과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평가하도록 했는데요, 예상한 바와 같이 '읍소 버전'의 기사를 읽은 참가자들이 사과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더 높게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읍소 버전을 봤든 중립 버전을 읽었든 사과하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참가자 그룹 사이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눈물 흘리기와 무릎 꿇기를 연출한다고 해서 더 많은 용서를 얻지는 못했죠. 사과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은 극적 요소(무릎꿇기, 머리 조아리기 등)는 '내가 이 정도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라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잘 전달하는 효과가 분명 있지만, 그런 극적 요소를 연출한다고 해서 용서를 더 많이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용서는 사과의 정도, 사과의 극적 요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똑같은 잘못을 앞으로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실한 방법이 존재하고 그것이 실천될 때야 가능합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과의 양과 질이 아니라 '재발 방지'를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이니까요.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방법은 무릎 꿇기나 눈물 흘리기가 아니라, 재발을 방지하려는 구체적 계획을 실천해 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로부터 바로 용서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용서해 주길 기다릴 줄 모른다면 '내가 이렇게 사과하는데 왜 나를 용서하지 않지?'라고 의아해 하거나 '내 사과의 진정성을 몰라주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라며 되려 화를 내며 피해자를 공격하는 적반하장으로 이어지고 말 겁니다.

'허락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이 쉽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데요, 사고 싶은 물건을 구입하라는 배우자의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일단은 사놓고 나서 용서를 구하는 게 더 빠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이제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죠. '사과보다 용서를 받는 것이 백배 천배 어렵다’라고. 

사과의 목적은 용서가 아닙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을 실천할 때 비로소 용서 받을 겁니다.  (끝)


*참고논문
Hornsey, M. J., Wohl, M. J. A., Harris, E. A., Okimoto, T. G., Thai, M., & Wenzel, M. (2019). Embodied remorse: Physical displays of remorse increase positive responses to public apologies, but have negligible effects on forgivenes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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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에게 '깜짝 보너스'를 주면 어떨까요?   

2024. 6. 1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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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 상황이 악화되고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회시가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보너스는 말 그대로 ‘추가금’이기에 회사 성과가 나지 않은 상황에서(더욱이 성과가 떨어진 상황에서)는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보상이기 때문이죠. 회사의 재무건전성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보너스로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의 일할 동기가 저하된다는 게 문제일 겁니다. 이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투명하고 솔직한 소통’입니다. 회사의 재무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보너스가 지급되기 어려운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게 먼저죠. 고위 경영진이 직접 상황을 설명하고 허심탄회하게 토론에 임해야 합니다. 인사팀에게 맡기고 고위 경영진을 뒤로 빠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죠. 보너스 지급 불가를 최종 결정한 리더만이 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동시에 그런 불만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릴 수 있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 상황을 성실히 알리는 것에서 그치지는 말아야 합니다. 직원들의 입장에서 성과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회사 사정을 이해하기 전에 “회사의 이런이런 부분에서 과도하고 불필요하게 비용이 지출되고 있는데, 그런 건 감축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가?”란 강한 의문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회사가 방만하게 비용을 지출한 부분이 무엇인지 ‘먼저’ 밝히고 그것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도 ‘먼저’ 제시해야 합니다. 경영진이 ‘먼저’ 고통 분담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직원들이 동참할 테니까요.

 



비효율적인 비용 지출을 개선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발생하는 비용 감축분 혹은 이익 증가분이 있겠죠? 영리한 조직이라면 이를 직원들에게 ‘깜짝 보너스(spot bonus)’로 지급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구성원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절약하지 못했을 돈이고, 그 노력으로 앞으로 몇 년간은 계속 절약될 돈이기에 한번 정도는 전액 혹은 일부를 직원들에게 보상하는 데 사용하면 어떨까요? 그 액수가 많을 필요는 없어요. 함께 노력해서 마련한 재원을 공평하게 나눠 가질 수 있다면 10만원 수준이든, 100만원 수준이든 상관없습니다.

이런 깜짝 보너스를 잘만 활용하면, ‘바람직한 행동이나 조치 혹은 결과’를 직원들에게 독려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개인이나 팀이 어떤 개선조치를 취해서 이익 창출과 비용 감축에 기여했다면 기여분의 일부를 ‘즉각적’으로 해당 직원이나 팀에 지급한다든지, 고객의 클레임을 성공적으로 대처한 ‘우수사례’의 주인공에게 포상하듯 깜짝 보너스를 준다든지, 회사의 명예를 높이고 좋은 이미지를 널리 알린 자에게 역시나 보너스로 보상한다면 우리 조직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무엇을 가장 우선하는지를 구성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알릴 수 있습니다.

요즘 경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저도 작년에 비해 매출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으면 직원들의 몸과 마음이 알게모르게 피폐해질 수 있어요. 성과 압박이 클 테니까요. 직원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주기 위해서 깜짝 보너스라는 방법을 전략적으로 써볼 것을 권합니다. 

소액이라도 좋습니다. 직원 1명에게 지급한 몇 십만원의 깜짝 보너스가 향후에 적어도 몇 억원의 성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수익률이 높은 투자가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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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진을 원하지 않는 직원들   

2024. 6.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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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상당수의 직원들은 '가능하다면 리더가 되고 싶지 않다, 팀장으로 승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요즘의 실태입니다. 직원들을 인터뷰할 때 승진에 대한 욕구를 자연스레 감지하게 되는데, 과거 10년 전과 요즘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음을 실감하고 있죠. 

요즘 젊은 직원들은 승진을 하지 못하면 ‘루저’라는 딱지가 붙을까 두려울 뿐이지, 그리고 팀원으로 남아 있으면 비슷한 보상에 만족해야 하기에 문제일 뿐이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굳이 리더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속내를 그대로 내보입니다. 승진을 성공 척도라 보지 않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는 가볍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능력 있는 직원’ 그러니까 리더 역할을 잘 수행할 만한 직원일수록 리더 역할을 주저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연구 결과로 증명된 것인데요, 이 결과를 좀더 해석하면 리더 역할을 자청하는 직원들은 대체적으로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다는 것이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리더의 자리가 능력은 뛰어나지 않으나 ‘정치적 수완’이 좋은 이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클 테니 말이죠. 

그렇다면 왜 리더 자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연구자들은 3가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 3가지 리스크를 크게 느끼는 직원일수록 리더로 승진하려는 의지가 적다는 뜻이죠.



첫 번째는 ‘대인적(interpersonal) 리스크’로서, 리더가 행하는 조치들이 직원들과의 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팀원일 때는 같이 밥을 먹었는데 팀장 되니까 자기네들끼리 놀려고 한다”는 말은 대인적 리스크를 그만큼 크게 인지한다는 뜻이죠. 

두 번째는 ‘이미지(image) 리스크’인데, ‘명색이 리더라면 이래야지’하며 사람들이 가진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잘 몰라도 겉으로는 모든 것을 아는 척을 해야 직원들이 무시를 못한다”는 말은 이미지 리스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난 받을(being blamed) 리스크’였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슨 문제만 터지면 팀장에게 책임을 물으니 ‘아무리 리더가 그런 자리라지만 내가 맡을 이유는 없지.’라며 거부하고 싶은 이유를 말하죠.

능력있는 직원들이 승진을 꺼린다면 그들 각자가 이 3가지 리스크를 얼마나 느끼는지 살펴보고 그걸 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고 공개적인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죠. 그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작은 기회를 부여하고 그런 '안전한 환경'에서 그들이 리더십 근육을 키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팀장이었던 사람이 금년에 만날 때는 팀원 명함을 별 부끄럼 없이 내밀곤 합니다. 부끄럼은커녕 이제 팀장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감정이 표정에서 느껴집니다. 리더의 어깨에 짊어지우는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컸던지 연봉이 깎였어도 싱글벙글인 얼굴을 보면 조금은 짠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더군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승진을 원하십니까? 


*참고논문
Zhang, C., Nahrgang, J. D., Ashford, S. J., & DeRue, D. S. (2020). The Risky Side of Leadership: Conceptualizing Risk Perceptions in Informal Leadership and Investigating the Effects of Their Over-Time Changes in Teams. Organization 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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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다고 꼭 풀어야 할까요?   

2024. 6.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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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합니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 화는 풀어야 한다.”라고. 자신에게 화가 나든, 타인 때문에 화가 나든 간에 참지 말고 그때그때 풀어야 한다고 말이죠. 일리 있는 조언입니다. 화는 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푼다’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는 곤란하죠.

화를 남에게 전이시키거나 되갚는 것, 다시 말해서 나의 화를 외부로 ‘풀어 해치는’ 방법은 분노를 올바르게 푸는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화났으니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마!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가만히 안 둘 테야.” 혹은 “네가 날 화나게 만들었으니 나도 너를 화내게 만들어야겠어.”라며 분노를 상대방에게 그대로 앙갚음하는 방식은 화를 올바르게 푸는 방법이 아니죠.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 혹은 자기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술을 마시거나 상관없는 이들(보통 자신보다 약자인 자들)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고 해서 그 화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지 모르지만, 그런 행위는 화를 외려 증폭시킬 뿐이죠. 그리고 자기 자신을 모나고 비뚤어진 인간으로 변모시킵니다.

 



처음 한 두 번은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겠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차츰 익숙해지면서 일상이 됩니다. 반대로 상대방이 크게 반항하면 상대방 때문이 아닌 분노가 상대방 때문에 발생한 분노로 전이되고 말죠. 그리고 “너 잘 만났다!”라는 심정으로 그에게 있는 분노, 없는 분노를 다 쏟아 붓는 과정에서 화는 자기증식을 합니다. 어느덧 성격은 괴목처럼 비뚤어진 모습으로 굳어지겠죠. 

화는 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불 난 집에 불씨를 던져 넣는다고 불이 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죠. 불은 물로 끄는 게 상식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화는 ‘자각(自覺)’이라는 물로 꺼뜨려야 하죠. 이것이 진정으로 화를 참는 방법입니다. 가슴 속에 분노가 일렁이면 그것에 일차적으로 반응하려는 본능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화를 마치 내 것이 아닌 듯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 다음, 나를 화내게 한 사람으로부터, 혹은 화가 발생한 물리적 장소에서 잠시 벗어나 사색에 잠겨 보세요. 깊은 숨을 쉬며 마음을 가다듬어 보세요. 화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화나게 한 사람(자신 또는 타인)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의 화가 어떻게 변할지 등을 제3자가 되어 찬찬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세요. 이렇게 자각의 냉각기를 거치면 전보다 화가 엷어진 게 느껴지고 자기 자신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날 겁니다.

화를 밥먹듯 내면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노예가 되면 자신의 삶을 노예의 삶 이상으로 결코 만들 수 없겠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자신이 화를 다루는 주인임을 자각해 보면 어떨까요? 분노가 내 감정의 주인 행세를 하도록 열쇠를 내어주면 안 됩니다. 자각이 화를 올바르게 푸는 방법이고 나를 화내게 만든 사람(자신 또는 타인)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자각에 실패하는 때가 아주 많으니까요. 하지만 10번 분노를 폭발시킬 걸 서너 번으로 줄인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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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는 이유   

2024. 6. 1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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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자라는 직업을 ‘독자를 대신해 묻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진실을 파헤치는 것도 중요하고 발빠르게 새소식을 발굴하거나 전달하는 것 역시 의미있는 기자의 역할이고 또 그렇게 기자들이 주장하지만, 애초에 ‘묻는 행위’ 없이 과연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질문함으로써 정보를 얻고 진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질문하지 않거나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는 월급쟁이라는 직업에 충실할지는 몰라도 기자라는 정신을 온전히 추구하는 자라고 보기 어렵다, 라고 저는 단정합니다. 동의하시는지요?

이런 면에서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보아는 행태는 상당히 불만스럽습니다. 과연 기자가 맞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그들은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죠.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주최자가 달랑 몇 문장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뜨는데도 기자들은 그를 막아서기는커녕 손 한 번 들지 않았죠. 발표자의 퇴장을 막아서거나 번쩍 손을 들어 질문을 날리는 기자가 한두 명 있을 줄 기대했지만, 너무나도 말 잘듣는 기자들은 착한 학생마냥 고개를 숙이고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보이스 레코더가 있는데 굳이 뭘 받아쓰는 걸까요! 아니, 발표자가 손에 든 A4용지를 복사하면 될 텐데 말입니다. 받아 적을 시간에 질문을 던져야지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자회견’이라는 자리는 기자를 모아놓고 본인 할 말만 짧게 내뱉고 돌아서는 행사가 아닙니다. 주최자가 자기 생각을 밝힌 다음에 기자가 미진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나 더 파고들 필요가 있는 사항을 질문하여 주최자의 답변을 얻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존재해야 제대로 된 기자회견이라 말할 수 있죠.

 



주최자가 A4 용지에 적힌 글만 읽으려 나왔다면, 그리고 진행자가 “질문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고 해서 “네, 알겠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겠습니다.”라고 고분고분하게 행동한다면, 그건 ‘독자를 대신해 묻는 사람’이라는 직업의 본질을 잃은 겁니다. 

처음에 저는 기자들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이유가 그들이 너무나도 ‘shy(샤이)’하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혹은 질문을 어색해하고 학창시절에 질문 던지기에 충분히 훈련 받지 못한 한국인들의 특성 때문은 아닐까, 라고요. 뒤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팡팡 터지고 수십대의 비디오 카메라가 돌아가는 현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소에서 영상으로 지켜보는 수많은 시청자들. 그렇게 보는 눈이 많으니 가슴이 떨려서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겠거니, 라고 말입니다. 게다가 다른 언론사에서 나온 동료 기자들의 시선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니라는 의심이 들더군요. 의심 끝에 저는 기자들이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뭘 모르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샤이함은 바로 해당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거나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말이죠, 

발표자가 언급한 사안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거나 배경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발표자가 대충 얼버무리거나 고의로 누락한 정보가 무엇인지 혹은 속임수가 무엇인지 등을 간파할 수 있는 관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 앉아 있다면 뭘 질문해야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죠. 다른 기자들은 다들 아는데 나만 모르는 건 아닌가 싶어서 궁금한 게 있어도 선뜻 손이 올라가지 않습니다. 창피함을 당할까 봐서요.

머리에 든 게 많아야 질문도 잘하는 법입니다. 질문하려면 샤이함을 극복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으려면 아는 게 있어야 하며, 아는 게 있으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남들로부터 조롱 받지 않을 질문, 상황을 꿰뚫는 질문, 촌철살인 같은 질문을 던지려면 본인이 어떤 주제를 논하는 장소에 참석하는지 파악해야 하고 그 주제에 대한 관련 정보와 배경지식을 가능한 한 신속하고 심도 있게 학습을 해야 하죠. 그런 학습 없이 펜만 들고 기자회견에 들어가 스스로 '입틀막'하는 기자 생활을 반복할 거라면 ‘기레기’라는 조롱은 백번 천번 받아도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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