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 "선생님의 청록색 머리핀"   

2012. 5. 1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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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5월 15일 '스승의 날'입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스승의 날이면 제 마음 속에 한 분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부끄럽지만 까까머리 중학교 때 만난 그분과의 추억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오월이다. 저녁 무렵, 노란 유채꽃밭을 지나 언덕을 오른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서풍이 가슴 위로 쌓이다 흩어진다. 도시를 굽어보는 언덕 위, 나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선다. 이미 지평선을 넘어간 해가 진홍빛 숨을 힘겨이 토해 올릴 때 반대편 동녁 하늘로 손톱 같은 상현달이 떠오른다. 오늘도 저 달은 별 하나를 귀고리처럼 달았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흘러 나온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이병기의 시다. 외우는 데 젬병인 내가 이 시를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는 까닭은 이 시에 가락을 입힌 '별'이란 노래 때문이다. 말로만 두발 자율화 시대, 머리를 박박 깎은 중학교 2학년생의 나는 학교의 합창단원이었다. 특별히 노래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한 학년이 세 반 밖에 안 되는 시골 중학교에서 음치만 아니라면 누구나 30명 짜리 합창단에 낄 수 있었으니까. 도내 합창단 대회에 나가기 위해 방과후에 음악실에 남아 지겹도록 부른 노래 중 하나가 이 노래, '별'이었다.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진 탓에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다 시골 외갓집에 겨우 의탁하게 된 나는 세상의 끝에 버림 받은 느낌이었다. 그랬다. 사춘기 소년의 눈에는 똑바로 보이는 물체가 없는 법. 지위의 추락이랄까? 한때 시골 아이들에게 방학이면 외갓집에 놀러오는 세련되고 깔끔한 서울 아이이던 나는 이제 맡겨진 아이,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외갓집은 그저 잠자는 곳일 뿐. 나는 가능한 한 학교에 오래 남아있기를 좋아했다. 저녁 때까지 계속되던 합창 연습은 내겐 훌륭한 핑계거리였다. 합창단원을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고백하건대 그것 말고도 합창단원이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80년대 초, 어두운 흑백 이미지로 깔리는 시골 중학교의 배경 위로 파스텔톤의 청록색 머리핀이 떠오른다. 음악선생님의 까만 머리칼 위에 언제나 얹어져 있던 청록색 머리핀. 운동회 때 입는 트레이닝복조차 청록색일 정도로 선생님은 그 색깔을 좋아했다. 30년이 흐른 지금도 청록색 티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그 시절의 선생님 나이 정도의 숙녀를 발견하면 어느새 나는 선생님을 바라보던 키 작은 아이가 된다. 부끄럽지만, 내게 청록색은 풋사랑의 흔적으로 서툴게 각인되어 있다.

마음 둘 곳 없던 내게 선생님은 엄마이자 친구였고 마음대로 혼자만의 연인이었다. 잘하지 못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나를 선생님은 귀여워 했다. 학교 비품인 악기 몇 가지를 본인의 재량으로 무기한 대여해주기도 했다. 나는 능력도 없으면서 선생님을 기쁘게 할 생각으로 16마디 짜리 노래를 작곡하느라 몇날 몇일을 멜로디언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한번은 황순원의 '소나기'를 살짝 표절하여 선생님과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원고지 50매 짜리 짧은 소설을 써본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유치했다. 소설 속에서 나는 조난 당한 선생님을 구하고 대신 바위에서 떨어져 죽는다. 비현실적인 에코가 들어간 목소리로 '선생님'을 서너 번 외치면서. 선생님은 내 연정을 끝내 몰랐으리라. 악보와 원고지는 진작에 불쏘시개 신세가 되었으니까.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만 싶었을지도 모른다.

두 달여의 연습 후, 드디어 합창대회 날이 되었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죄다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으로만 구성된 합창단은 우리가 유일했다. 여학생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깔보는 눈치였다. 우리 팀 덕에 꼴찌를 면하게 됐다는 안도의 눈빛이 그녀들에게서 느껴졌다. 남자들은 노래도 못하고 음악도 못한다는 게 당시 중학생들의 인식 수준이었으니까.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남학생들의 무게감 있는 음이 대회장 구석구석에 퍼질 때, 함께 준비한 야심곡 '꽃 사세요'가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 그리고 우리 팀이 결국 1등으로 호명될 때 그녀들의 얼굴에서 떠오르던 야릇한 표정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기뻤지만 여러모로 슬픈 날이기도 했다. 대회를 끝으로 합창단은 해체가 예고되어 있었다. 집에 늦게 들어갈 핑계도, 선생님을 자주 만날 기회도 사라질 운명이었다. 더욱이 그날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그후도 오랫동안 생인손처럼 남을 터였다. 선생님은 합창단원들에게 흰 티셔츠에 청바지로 복장을 통일하라고 말씀하셨다. 고민이었다. 외갓집 사정상 청바지를 사줄 여유가 없었고 그런 부탁을 입 밖으로 꺼낼 나도 아니었다. 결국 청바지와 가장 색깔이 비슷한 짙은 회색 면바지를 입을 수밖에. 게다가 그 바지는 외삼촌 것이라 몇번이고 밑단을 접어야 했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내 바지를 가리키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중학생이 스무살 청년의 옷을 빌려 입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선생님의 눈에서 날카로운 책망이 느껴졌다. 대개 궁핍한 시골 아이들인지라 선생님이 나에게만 복장 문제를 지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송곳처럼 내 마음을 오래 후볐다. 세상의 끝에서 손 잡아주던 선생님이 먼저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미웠다. 그리고 서러웠다. 온통 청록생이던 세상은 남루한 빛의 너절한 환상으로 남았다. 연정은 끝내 연민이 되었다.

합창대회 후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성질이 무섭기로 소문난 체육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린 눈에도 그 둘은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어쩐지 둘이 다정하다고 아이들이 서로 끼득거리던 터였고 음악실에서 둘이 풍금을 연주하던 광경을 나도 목격했더랬다. 같은 학교에 부부가 함께 근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선생님은 얼마 후 도시의 중학교로 전근 갔다. 4개월 뒤 나도 시골을 떠나 도시로 전학하면서 인연의 끈은 끊어졌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툭! 그리고 꽤 오랫동안 시골 시절을 잊으려 애썼다.

10년 후, 일병 계급장을 달고 첫 휴가를 나온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절 그 중학교를 찾았을까? 검은색 이승복 어린이 동상과 책읽는 여자아이의 하얀 동상은 예전 그대로였다. 기억에 비해 학교의 축척이 조금 작아졌을 뿐이었다. 1층에서 올려다 뵈는 2층의 음악실에서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란 노랫가락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청록색 머리핀을 꽂은 선생님이 고개를 까딱이며 박자를 세고 있을까? 연신 팔을 흔들며 테너의 음을 침범하는 어중간한 바리톤 파트를 채근하고 있을까? 건반 위에 올려진 기다란 손가락은 오늘도 ‘소녀의 기도’를 연주하고 있을까? 아마 나는 병영생활의 고단함을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빛나던 추억으로 위안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빛바랜 추억을 뒤집어 보며 누구에게도 배려 받지 못했던 내 사춘기와 화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은 어울리지 않은 바지를 가리키던 선생님에게 뒤늦게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때늦은 방문은 툭 끊어진 끈을 이어줄 리 없었다. 기억의 스크린에서 가물대는 선생님은 아무말 없었고, 겨울방학을 맞아 인적 없는 학교는 추위가 더욱 사무쳤다. 흥미를 잃은 나는 터무니없게도 30분도 안 되어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20년이 다시 흘렀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해마다 5월 15일이면 스승으로서의 스승이 아니라, 엄마이자 친구이며 혼자만의 연인이기도 했던 음악선생님을 떠올린다. 불경일까? 세상으로부터 방기된 사춘기 소년에게 더 이상 끄트머리로 밀려나지 않도록 괴임목이 되어 준 선생님. 나에겐 그 이상의 스승은 없다. 감사한다는 판에 박힌 답례로는 부족하다. 후회된다.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해 드리지 못한 것과  전근 가는 선생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용서를 구한다. 30년이 지나도록 툭 끊긴 끈을 방치한 채 찾아뵙지 않는 죄를.

이 시간의 하늘빛이 좋다. 암청색 하늘이 검붉은 노을과 만나는 경계선에서 여러 색깔의 빛들이 뛰논다. 서늘한 바람결에 아주 잠깐 청록빛이 비쳤다 사라진다. 소년의 마음에 잠시 얹어졌다 사라진 청록색 머리핀처럼. 시간은 흘러 추억으로 멍울진다. 멍울진 추억은 또 어디로 쌓일까? 지금, 1밀리씩 어둠이 내린다. 별이 더욱 빛난다.


(* 이 글은 한국후지제록스의 기업 블로그인  '색콤달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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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미래보다 장미빛 미래에 끌리는 이유   

2012. 5. 1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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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어떻게 행동할지 머리 속에서 미리 시뮬레이션해 두면 그냥 앉아서 미래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대체적으로 실수할 위험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원하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익히 아는 바입니다. 기업에서 매번 수립하는 여러 종류의 전략이나 실행계획들은 바로 이런 목적으로 존재하죠. 

그런데 미래에 벌어질 일이나 취할 행동들 중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또 어떤 것들은 부정적인 느낌을 전달합니다. 고객의 구매 패턴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서거나 우리의 전략이 경쟁사의 마케팅 효과를 상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예상되는 경우, 미래를 상상하고 그에 따라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의 머리 속은 온통 장미빛 미래로 가득하겠죠.

반면 애써 연구하여 출시한 제품이 성장 궤도를 타기는커녕 소비자의 관심조차 얻지 못하거나 내부적인 역량의 한계로 인해 전략 실행이 더딜 가능성이 존재하리라 본다면, 당연히 전략가의 마음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겁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가라면 미래의 여러 가지 시나리오들이 장미빛인지 회색빛인지에 감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각각을 동일한 비중으로 면밀하게 살핀 후에 역시 동일한 노력을 기울여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고 다시 떠올릴 때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에 더 끌리는 편향이 존재한다는 칼 쉬푸나르(Karl K. Szpunar)와 동료들의 연구 결과는 미래를 바라보는 전략가들이 당혹스럽게 만들기 충분합니다. 쉬푸나르는 보스턴 대학교 학생들 48명에게 과거 10년 간의 기억 속에서 110개의 특별한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인물(자신 이외의), 장소, 특정 물건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각 장면을 간단하게 기술하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 달에 스티브와 함께 베스트 바이란 상점에서 새 아이팟을 샀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그럴 만했다." 라고 써야 했죠. 쉬푸나르는 학생들이 제시한 110개의 정보를 기초로 인물, 장소, 물건을 무작위로 섞어 90개의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 월마트 - 담배"라는 식이었죠.

일주일 후 쉬푸나르는 학생들을 실험실로 다시 불러 미리 무작위로 만들어 놓은 90개의 조합을 차례로 제시했습니다.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중립적으로'라는 꼬리표가 하나씩 달려 있는 조합을 본 후에 꼬리표의 내용대로 향후 5년 내에 일어날 일을 상상해야 했습니다. "데이비드 - 월마트 - 담배"란 조합에 '부정적으로'란 꼬리표가 붙었다면 "데이비드와 함께 금연 장소인 월마트 매장 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매장 관리 직원에 의해 쫓겨날 것이다"란 식으로 미래를 부정적으로 상상하도록 한 것입니다.

90개의 조합에 대하여 이렇게 미래를 상상한 직후(10분 후)에 학생들 중 일부는 쉬푸나르로부터 갑자기 '기억력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1일 후에 기억력 테스트를 하겠다는 말을 역시 갑자기 들었죠. 쉬푸나르는 앞서 제시한 각 조합에서 한 가지 요소를 지운 다음(예를 들어 "데이비드 - _____ - 담배") 지워진 내용이 무엇인지 맞혀보라고 학생들에게 요청했습니다. 

학생들은 90개의 조합 속에서 지워진 내용이 무엇인지 잘 맞혔을까요? 10분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과 1일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 중 누가 더 기억을 잘 해냈을까요? 당연히 10분 후에 바로 테스트 받은 학생들이 빈칸의 내용을 맞혔습니다. 하지만 쉬푸나르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긍정적으로 미래를 상상할 때와 부정적으로 미래를 그릴 때의 기억력 차이가 있는지를 보고자 했습니다.

10분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들은 조합에 달려있던 꼬리표의 내용에 따른 기억력의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1일 후에 테스트 받은 학생들은 긍정적으로 미래를 그리라고 요구 받았던 조합의 내용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35% 정도)이 발견됐습니다. 학생들은 부정적으로 미래를 상상해야 했던 조합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기억을 못했습니다(25% 정도만 기억). 중립적인 미래를 그리라고 한 조합에 대해서 학생들은 중간 정도의 기억률을 보였죠.

왜 부정적인 미래의 디테일을 더 빨리 망각하는 걸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 실험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기억과 관련된 우리 뇌의 생리적 한계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우리가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할 때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며 부정적인 기억을 덜 떠올리는 이유와 동일한 메커니즘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어찌됐든, 부정적인 시나리오보다 긍정적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더 잘 기억해낸다는 쉬푸나르의 실험은 전략가가 미래의 여러 상황을 머리 속에 그리고 대응전략을 수립할 때 긍정적인 시나리오에 끌릴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우울한 회색빛 시나리오보다는 장미빛으로 반짝거리는 시나리오를 기대하고 그것에 대비하는 데에 힘을 더 쏟을 거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정적인 시나리오의 내용을 더 빨리 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야기할 리스크를 시의적절하게 최소화시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제 경험상, 시나리오 플래닝의 결과물로 여러 개의 시나리오를 의사결정자들에게 제시하면 그들은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장미빛 시나리오)가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처음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관심의 영역에서 멀어집니다. 심지어 의사결정자들은 어떻게 하면 장미빛 시나리오가 일어나도록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보입니다. 시나리오는 컨트롤이 불가능한 외부환경의 거대한 흐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의 조치를 통해 원하는 시나리오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편향에 빠지지 않은 채 중심을 잘 잡을 줄 아는 전략가는 미래가 긍정적으로 보이든 부정적으로 느껴지든 간에 항상 동일한 비중으로 세부내용을 검토하려고 대비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이든 미래의 시나리오든 부정적인 것을 더 빨리 망각한다는 인간의 심리를 염두에 둔다면 회색빛 미래를 애써 무시하며 장미빛 미래에 헛된 기대를 거는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나치면 안 되겠지만 일부러 회색빛 시나리오를 잊지 않으려고 되새기는 것도 필요하겠죠. 긍정적인 미래만 보려는, 부정적인 미래는 쉽게 망각하는 편향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장미빛 미래가 품고 있는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참고논문)
Memory for Emotional Simulations:Remembering a Rosy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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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하게 피드백하면 성과가 떨어진다   

2012. 5. 11.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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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달성하고 역량을 계발하는 데에 상사의 피드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또한 피드백은 공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현장에서 상사와 직원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고가는 일상적인 일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우리는 압니다. 1년 내내 가만히 있다가 평가 시즌이 되어서야 피드백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죠. 상사나 직원이나 각자 업무가 바빠 피드백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자식이 어떻게 행동하는 1년 내내 가만히 있다가 12월에 가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피드백해야 하는 상황이나 이유를 잊어버리고 각자가 서로 다르게(보통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피드백은 즉각적이고 일상적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전달하는 피드백은 아주 자세해야 좋을까요? 아마 여러분은 모호한 정보보다 정확하고 자세한 피드백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 동안 피드백을 거의 하지 않는 상사를 모시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할 겁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자세한 피드백이 모호한 피드백보다 성과 달성에 긍정적일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유타 대학의 히만슈 미쉬라(Himanshu Mishra)와 동료들은 모호한 정보나 피드백이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직관에 반하는 실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먼저 미쉬라는 사전 테스트를 위해 38명의 참가자들에게 플라바놀(flavanol)이 함유돼 있어 정신적 활동을 활발하게 해 준다는 초콜릿을 먹도록 했습니다. 참가자 중 절반에게는 플라바놀이 정확히 1그램이 들어있다고 말한 반면, 나머지 절반의 참가자에게는 플라바놀이 0.5~1.5그램 들어있다고 알려줬습니다. 초콜릿을 먹은 후에 참가자들은 초콜릿이 자신들의 정신적 활동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지를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정확한 함유량을 들은 참가자들보다 모호한 함유량을 들은 참가자들이 초콜릿이 두뇌 활동에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답했습니다. 

미쉬라는 이 사전 테스트 후에 106명의 참가자를 모집하여 '브레인 에이지(Brain Age)'라 불리는 닌텐도 DS 게임을 하도록 하여 각자의 기준점수를 확보했습니다. 그런 다음, 사전 테스트와 같은 조건을 설정하여 참가자들에게 초콜릿을 먹이고 다시 브레인 에이지 게임을 하도록 했죠. 그랬더니 대체적으로 점수가 향상됐지만 플리바놀 함유량에 대해 모호한 정보를 들은 참가자들이 정확한 정보를 들은 참가자들보다 게임 점수가 더 나아지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참 특이한 일이었죠. 모호한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플라바놀의 최대값인 1.5그램을 더 의미 있는 수치로 받아들인 까닭일까요? 어쨌든 모호한 정보가 정확한 정보보다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하거나 모호한 정보의 차이가 게임과 같은 두뇌 활동보다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미쉬라는 캠페롤(Kaempferol)이 함유되어 있어 근육의 힘을 키워준다는 과일 쥬스 한 잔을 참가자들에게 주고 손의 악력을 측정하는 후속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137명의 참가자 중 절반은 캠페롤이 1그램이 정확히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고, 다른 그룹은 0.5~1.5그램 들어있다는 정보를 전달 받았죠. 미쉬라는 한 가지 실험 조건을 추가했는데, 참가자 중 절반에게 조심스럽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일을 상기시킴으로써 정확성을 강조하는 조건에 프라이밍(priming)되도록 만들었죠. 나머지 절반에게는 최근에 일어난 일을 묘사해 보라고만 했습니다.

악력을 측정한 결과,  정확성에 프라이밍되지 않은 참가자 중 모호한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정확하 정보를 들은 자들보다 더 높은 악력 수치를 나타냈습니다(217.22 대 168.30). 반면, 정확성에 프라이밍된 참가자들은 캠페롤 함유량을 정확하게 알든 모호하게 알든 악력 측정치 사이에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전에 미쉬라는 정확성을 강조하는 환경에 놓이면 정확한 정보(피드백)를 들을 때 성과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모호하게 제시된 정보는 참가자로 하여금 자기 식대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함으로써 두뇌 활동과 신체 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두뇌 활동이나 신체 능력이 아니라 '목표 달성'에 피드백의 정확성 여부가 어떻게 작용할지를 살피기 위해 또다른 실험이 3주 동안 실시됐습니다. 미쉬라는 39명의 학생들을 일주일에 한번 실험실에 찾아와 HHI라고 불리는 가상의 건강지수와 체중 등을 측정 받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학생들 중 절반에게는 정확한 HHI 지수를 제시한 반면,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 3퍼센트의 구간으로 HHI 값을 알려줬습니다. 3주 동안의 체중 변화를 살펴본 결과, 정확한 HHI 지수를 피드백 받은 학생들은 몸무게가 변하지 않거나 약간 늘었지만, 모호한 HHI 지수를 피드백 받은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체중이 더 많이 감소했습니다. 예를 들어 최초에 HHI값이 85였던 참가자 중 정확한 HHI값을 피드백 받은 사람은 체중이 1파운드 늘었지만, 모호하게 HHI값을 피드백 받은 사람은 4파운드 가까이 몸무게가 줄었죠. 정확한 피드백보다 약간은 모호한 피드백이 체중 감량이라는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된다는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미쉬라의 실험들이 조직 내 현장에서 벌어지는 피드백 상황을 정확하게 재현하지는 못하고 피드백의 내용과 방식도 같지 않기에 '모호한 피드백이 정확한 피드백보다 좋다'는 실험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 실험의 의미는 상사가 부하에게 지나치게 상세하게 피드백할 경우 부하직원들의 자율성을 떨어뜨리고 그에 따라 목표를 이루려는 동기도 저하될지 모른다는 데에 있습니다. 시시콜콜한 피드백은 부하직원에게 잔소리로 느껴질 위험이 있다는 뜻이죠. 부하직원이 상사의 피드백을 듣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여백'을 주어야 성과 달성의 동기가 유지되거나 높아지는 법입니다. 

또한 상사들도 부하직원에게 자세하게 피드백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이 실험은 일러줍니다. 오히려 상세한 피드백으로 대변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여러 모로 부정적인 분위기를 초래할지 모릅니다. 상사가 부족한 면을 상세하게 피드백한다면 부하직원의 마음 속에는 '내 사정도 잘 모르면서...', '날 얼마나 감시하고 있길래...'라는 불만이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성과를 달성하고자 하는 내적동기가 상사의 피드백에 의해 훼손될지 모르죠. 어느 정도는 모른 척하면서 상사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모호하게 제시하는 것이 부하직원의 자율성과 동기를 제고합니다. 물론 정확하고 상세한 피드백(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갈 때, 의사결정을 바로 내려야 할 때, 정보를 모호하게 제시하거나 뭉뚱그려 피드백한다면 곤란하겠죠.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상사는 소위 '대리급 팀장'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피드백도 중용이 필요합니다. 모호한 피드백과 상세한 피드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직원들의 내적동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피드백의 효과를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겠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극단은 쉽지만 중용은 어려운 법이니까요.


(*참고논문)
In Praise of Vagueness: Malleability of VagueInformation as a Performance 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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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팀장님은 날 그리 고마워하지 않을까?   

2012. 5. 1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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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어려운 일을 수행할 때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준다면 당연히 그에게 고마움을 느낄 겁니다. 특히 도와주는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에게서 느끼는 고마움의 감정은 더 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느끼는 고마움의 정도를 일을 수행하는 도중에 느끼던 고마움의 정도와 비교한다면 무엇이 더 클까요? 아마 여러분은 그 사람의 도움으로 일을 잘 마쳤기에 일이 완료된 이후에 느끼는 감사의 정도가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버지니아 대학의 벤자민 콘버스(Benjamin A. Converse)와 시카고 대학의 에일렛 피시바흐(Ayelet Fishbach)의 실험은 그 반대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즉 도움을 받는 도중에 느끼는 고마움의 정도가 일을 마치고 난 후에 느끼는 고마움의 정도보다 더 크다는 것이죠. 콘버스와 피시바흐는 시카고 시민 42명을 모집하여 수고료로 2달러를 지급한 후에 4개의 객관식 퀴즈를 모두 맞히면 12달러를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처음 두 문제는 쉬웠지만 나머지 문제는 어렵게 출제하여 세 번째 퀴즈는 '지우개 찬스'를 쓰도록 하고 네 번째 문제는 '친구에게 전화 찬스'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친구가 문제를 듣고 고민하는 동안, 그리고 게임이 종료된 이후에(하지만 결과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 각각 얼마나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지 평가했습니다. 결과를 보니, 참가자들은 문제를 푸는 동안 친구에게 고마움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5.72점 대 4.84점). 친구에게서 도움을 얼마나 받았느냐와 상관없이 참가자들은 게임이 끝난 후에는 친구에게 고마움을 덜 느꼈던 겁니다.

그렇다면 도움을 주는 사람에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그는 도움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고마움의 정도가 일이 완료된 이후에 줄어들 거라는 점을 알고 있을까요? 도움을 주는 사람은 일이 진행되는 도중보다 일이 완료된 이후에 더 많은 감사를 기대한다는 점이 후속실험을 통해 규명됐습니다. 콘버스와 피시바흐는 40명의 시카고 시민을 실험에 참가시켜서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제를 부여했습니다. '입력자'들은 '도우미'가 큰 소리로 값을 불러주면 그걸 입력해야 했죠. 입력자들은 과제를 수행하는 도중과 과제를 완료한 이후에 도우미의 도움에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지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우미들도 입력자들이 자신들의 도움에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 같은지를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죠. 

입력자들이 느끼는 '부채감'과 도우미들이 입력자들에게서 기대하는 감사의 정도를 분석하니,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입력자들은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72.0점의 감사를 느꼈지만 과제가 끝난 후에는 65.4점로 떨어졌습니다. 반면 도우미들은 과제가 진행 중일 때는 40.8점의 감사를 기대했고 과제가 완료된 후에는 48.1점으로 높아졌습니다. 과제가 끝나면 도움 받는 사람은 도움에 대한 부채감이 경감되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콘버스와 피시바흐가 실시한 세 번째 실험에서도 이러한 기대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튜터가 학생의 시험 준비를 도와줄 때 학생은 튜터에게 4.40점(7점 만점)의 고마움을 느끼지만 시험이 끝나고 난 후에는 3.17점으로 떨어졌습니다. 튜터는 시험 준비 기간 동안 학생이 자신에게 3.17점의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그 정도가 3.39점으로 높아졌습니다. 학생들이 시험 결과에 만족하느냐의 여부는 튜터에게 느끼는 고마움의 정도와 관계가 없었습니다. 튜터가 주는 도움의 유용성(instrumentality)을 평가하라고 하자 학생들은 시험 준비 기간 동안의 값이 시험 종료 후의 값보다 컸습니다. 학생들이 튜터에게 느끼는 유용성의 정도와 튜터에게 가지는 고마움의 정도가 상관성을 갖는다는 의미였죠.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느끼고 기대하는 고마움의 정도가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조직으로 투영시키면 어떤 시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팀의 성과 달성에 도움을 주는 사람을 부하직원으로, 부하직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람을 상사라고 가정하면, 부하직원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 있을 때보다 그것을 완료한 후에 상사로부터 더 많은 인정과 칭찬을 기대한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사의 입장에서는 부하직원이 목표를 완수한 후에는 그 전보다 부하직원의 공로를 덜 인정하고 당연시할지도 모름을 위의 실험이 일러줍니다. 어려운 목표라 해도 일단 달성한 후에는 그 목표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상호 간의 인식 차이는 평가 불만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부하직원은 자신의 목표 달성 결과에 100 정도의 인정 혹은 평가를 기대하는데 상사는 그것을 80 정도로 절하하여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콘버스와 피시바흐의 실험은 평가 시즌에만 부하직원들의 목표 달성 결과를 평가할 경우 상호 간의 갈등이 야기될 가능성뿐만 아니라 평가 측정의 왜곡도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상사는 연말에 가서 한번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부하직원이 목표 달성 과정에 있을 때 중간중간 보여주는 노력의 결과나 중간산출물을 바로바로 평가하고 축적해 둬야 한다는 시사점도 이 연구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부하직원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피드백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또한 부하직원들도 자신의 목표 달성 과정을 상사에게 지속적으로 알리고 어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어려운 목표를 잘 완수했더니 상사가 당연시하거나 평가절하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생각보다 덜 인정해 주던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인간 심리가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지 상사가 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고논문)
Instrumentality Boosts Appreciation: Helpers Are More Appreciated While They Are Use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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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받기 전, 상사에게 뜨거운 커피를 권하라   

2012. 5. 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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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찬 것이 닿은 후와 뜨거운 것이 닿은 후에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손에 느껴진 온도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을 동일하게 평가할까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까짓 촉감이 무슨 영향을 미치겠냐며 무시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는 많습니다. 로렌스 윌리엄스(Lawrence E. Williams)와 존 바그(John A. Bargh)는 솔로몬 애쉬(Solomon Asch)가 수행했던 실험을 확장하여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솔로문 애쉬는 동조 실험으로도 유명한 심리학자죠). 당초 애쉬는 사전에 느낀 차갑거나 따뜻한 촉감이 처음 본 누군가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실험으로 밝혔는데, 윌리엄스와 바그는 그러한 촉감이 미치는 영향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자 했죠.

윌리엄스와 바그는 41명의 학부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겐 손에 차가운 느낌이 전달되도록 하고 다른 그룹에게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실험장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한 후 실험의 목적을 모르는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단 둘이 엘레베이터에 타야 했죠. 도우미는 양손에 아이스 커피(혹은 뜨거운 커피), 교과서, 클립보드를 들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하는 시늉을 하며 학생에게 커피를 잠깐 들어 달라고 학생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학생의 손에 차갑거나 따뜻한 촉감이 느껴지도록 했죠.




실험장소에 앉은 학생들은 'Person A'라고 불리는 가상의 사람에 대한 자료를 읽고서 그 사람이 얼마나 지적이고 단호하며 조심스러운지 등과 같은 10가지 성격 특성을 평가하도록 요청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손에 따뜻한 커피를 잡았던 학생들이 차가운 커피를 쥐었던 학생들보다 Person A를 더 따뜻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했죠. 이로써 손에 느껴지는 온기처럼 무시하기 쉬운 것조차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의미 있는 차이를 유발한다는 점이 증명됐습니다.

윌리엄스와 바그는 손에 느껴지는 촉감이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후속실험으로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실험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우미로 참가한 사람이 비록 실험의 목적을 알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도 차갑거나 뜨거운 커피를 들고 있었기에 알게 모르게 실험참가자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찬 커피를 든 도우미는 학생들을 쌀쌀맞게 대하거나 뜨거운 커피를 쥔 도우미는 학생들을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그 감정이 학생들에게 전달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죠. 그래서 후속 실험에서는 오직 실험참가자인 학생들만 차갑거나 뜨거운 물체를 잡도록 했습니다.

실험장소에 도착한 53명의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냉찜질팩과 온찜질팩을 손에 잡아보고 제품을 평가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제품 평가는 사실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학생들의 손에 차갑거나 뜨거운 느낌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실험진행자는 학생들에게 실험 참가에 대한 보상으로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중 절반은 자신이 마시기 위해 스내플(Snapple)이란 음료를 선택할지, 친구를 위해서 1달러 짜리 아이스크림 무료 쿠폰을 선택할지 결정해야 했죠. 반면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은 친구에게 주기 위해 스내플 음료를 선택할지, 자신이 먹기 위해 1달러 짜리 쿠폰을 선택할지 역시 결정해야 했습니다.

손에 냉찜질팩을 잡았던 학생들 중 친구를 위한 상품을 선택한 사람은 25%에 불과했고 자신을 위한 보상을 선택한 사람은 75%나 됐습니다. 반대로, 손에 온찜질팩을 쥐었던 학생들 중 54%가 친구를 위한 상품을 택했고 46%는 자신에게 보상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손에 느껴진 온기가 어떠냐가 이타심과 이기심에 영향을 미쳤다는 결과였습니다.

비록 간단하지만 윌리엄스와 바그의 두 실험은 인간의 판단과 행동이 별것 아닌 듯 보이는 미묘한 것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는 평가자의 감정 뿐만 아니라 평가자가 평가 전에 어떤 촉감에 '프라이밍(priming)'되느냐도 중요한 차이를 야기한다는 결과입니다. 동절기 때 동일한 모양의 두 사무실의 온도를 다르게 하면, 동일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큰 차이를 보일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동영상은 EBS에서 방영된 바 있는 '인간의 두 얼굴'이란 프로그램에서 발췌한 것인데, 위 실험과 비슷한 실험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객관적 평가 능력은 미신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혹시 지금 상사에게 평가 받거나 결재를 받아야 한다면, 혹은 누군가와 중요한 협상을 하기 전이라면 그에게 아이스 커피보다는 뜨거운 커피를 권하세요. 시원한 게 좋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유리할지 모르니까요.


(*참고논문)
Experiencing Physical Warmth Promotes Interpersonal Warm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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