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다   

2008. 7. 1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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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흔히 말한다. 또 '실패를 성공의 기회로 생각하라'고 여러 현자들은 이야기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을 각각 열 번씩 되뇌어 보라. 실패와 성공 중에 어떤 단어에 힘이 들어가는가? 아마 성공에 악센트를 두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은연 중에 풍기는 뉘앙스로 볼 때, 의도와는 달리 실패 자체보다는 성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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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 (출처 : 네이버)

이 격언들 때문에 저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성공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연상된다면 우리는 더 초라해지고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성공을 위한 실패'를 강조하는 이런 충고들은 '성공의 반대말이 실패'임을 더 각인시키고 성공과 실패 사이의 괴리를 더욱 크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것을 달성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실패했구나. 언제쯤 그걸 이룰 수 있을까?'란 생각 때문에 절망감만 더욱 키운다.

실패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실패를 '성공을 위한 실패'가 아니라 '더 나은 실패'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별개의 개념으로 떨어뜨려 놓는 것이다. '이번에도 실패했군. 그렇지만 저번 실패보다는 조금 나아졌으니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다음에는 지금의 실패보다 '더 나은 실패'를 위해 달려나가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희곡을 쓴 사무엘 베케트가 "또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더 세련되게 실패했다"라고 말했던가? 실패는 성공이 좌절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좀더 세련되게 만들어가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실패 = 인생을 좀더 세련되도록 만드는 과정


성공은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숭고한 가치는 결코 아니다. 어제의 실패가 어제보다 나은 방법으로 오늘을 대하도록 하고, 오늘의 실패가 오늘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내일을 만들어 가도록 이끌면, 그 과정에서 성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실패하는 과정 중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끼어들기 시작하면 실패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죄처럼 느껴지고 그토록 원하는 성공의 언저리에서 무너지고 만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해럴드 크로토(Harold Kroto)는 "열 번의 실험 중에 아홉 번을 실패했다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주 좋은 기록이다"라고 말하며 실패를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그의 말 속에는 실패를 죄악으로 간주해서 실패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완벽을 고집하면 성공에 거의 다다랐음에도 그 근처에서 스스로를 좌절케 만들 뿐이라는 숨겨진 의미가 담겨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하면서 성공 자체에 의미를 두기보다, 실패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보다 건설적인 사고 방식이다. 이탈리아의 리빙 용품 제조사인 알레시(ALESSI)의 CEO 알베르토 알레시(Alberto Alessi)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매년 출시하는 제품 중에 실패한 것이 1건도 없을까봐 걱정스럽다." 그는 모든 성공은 실패한 경험과 환경에서 나옴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실패는 초라하고 성공은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실패는 성공은 얼굴과 행동이 똑같은 쌍둥이다.

작가 매들린 랭글은 실패에 대해 말할 때 성공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간의 주름'이라는 대표작을 출판하기까지 2년 반 동안 수많은 출판사로부터 거절 통보를 받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것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에서 얻은 실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실패가 허락된 유일한 창조물이다. 만일 개미가 그랬다면 죽음 뿐이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우도록 허락됐다. 만일 마음 놓고 실패할 수 없다면 새로운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배우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힘이지, 성공하기 위해 쓰고 버리는 1회용 젓가락이 아니다.

당신이 만일 실패를 했다면 그것 때문에 낙담하고 괴로울지 모르겠다. '잘 할 수 있었는데 난 왜 이리 못낳을까?'라며 자신을 꾸짖는다. 이런 자책이 더욱 괴로운 이유는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이다. 실패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자신에게서 끝나면 좋으련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더 바보인 것처럼 느껴지고 패배감에 젖고 만다. 이 또한 실패와 성공을 한묶음으로 연상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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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매닐로


하지만 당신은 타인의 눈을 의식할 이유가 전혀 없다. 토머스 길로비치를 포함한 3명의 심리학자들은 코넬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진행했다. 어떤 학생에게 배리 매닐로가 그려져 있어 보기에 민망한 티셔츠를 입게 한 후에 다른 학생들이 모인 강의실에 들어가도록 했다. 길로비치 등은 적어도 50%의 학생들이 그 학생이 입은 티셔츠를 알아볼 거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겨우 23%의 학생들만이 그 티셔츠에 주목한 것이다. 여러 종류의 티셔츠(남루한 것, 촌스러운 것 등)를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비슷했다.
 
짐작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실패에는 별 관심이 없거나, 있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금방 잊어 버린다는 점을 실험 결과가 말해 준다. 실수로부터 뭔가를 배우기보다 남들의 시선 때문에 자기혐오의 철창 안에 갇히는 것은 매우 슬픈 비극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초연해진다면, 실패로 인한 고통과 패배감은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의 시선에 뻔뻔해지고, 실패를 과거의 일로 정리해야 한다. 그냥 잊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10년 전 일기를 들여다 보듯 그것을 관찰하고 분석하라는 의미다. 그러면 실패란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만드는 지표가 되고 자신이 좀더 세련되도록 일러주는 지침이 된다.

당신에게는 부실한 계획, 모자란 능력, 게으름과 낮은 집중력 등과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한계라고 인식하고 분석하는 순간 오히려 실패의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으며 힘을 축적할 수 있다. 그냥 주저앉아 실패의 고통에 매몰된다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아니라 성공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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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컷 공작이 더 아름다운 진짜 이유는?   

2008. 7. 9.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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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수컷이 아름다운 동물이다. 부챗꼴로 펴진 수컷 공작의 꼬리 깃털이 햇빛을 받으면 오색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 반면 암컷은 상대적으로 작고 수수한 깃털을 가졌을 뿐이다. 수컷의 깃털이 아름답고 화려할수록 더 많은 암컷을 차지하게 되어 그만큼 자신이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다(이런 현상을 '성(性)선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수컷의 꼬리 깃털은 '이기적인 유전자' 관점에서 유리한 전략인 듯하다.

그러나 치명적인 위험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다. 크고 화려한 꼬리 깃털은 암컷 공작 뿐만 아니라 여우와 같은 포식동물의 눈에 더 잘 띄게 만들기 때문이다. 암컷에게 잘 보이려고 한껏 치장하고 뽐내다가 천적에게 발각돼 잡아 먹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수컷 자신의 유전자는 물론, 자기를 선택해 준 암컷의 유전자도 후대에 잇기가 곤란해진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협하는 화려한 깃털은 '이기적인 유전자' 관점에서 불리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수컷 공작은 아름다운 꼬리 깃털을 고집하고 암컷 또한 그것에 매료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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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되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여러 학자들이 나름의 이론을 제시했으나 모두 불충분했다. 이스라엘의 조류학자인 아모츠 자하비(Amotz Zahabi)가 '핸디캡 원리'라는 이상한 제목의 이론을 제시하고 나서야 겨우 화려한 깃털 속에 숨겨진 전략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수컷 공작의 꼬리 깃털이 핸디캡이라고 지적했다. 핸디캡? 이 말은 약점이라는 의미 아닌가? 꼬리 깃털은 천적을 방어하는 데에는 약점이지만, 암컷을 유혹하는 데에는 장점이므로 꼬리 깃털을 핸디캡으로만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크고 화려한 꼬리를 가지고도 살아남은 수컷이라면 유전자가 아주 우수하다는 것을 암컷에게 광고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핸디캡을 가졌음에도 강하고 우수한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은 거라고 과시(showing-off)한다는 것이다. 정리하면, 화려한 꼬리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값비싼' 신호이고 이를 인지한 암컷들이 그런 수컷들을 선호한다.

핸디캡 원리가 1973년에 처음 발표됐을 때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많은 학자들은 그를 강하게 공격하며 인정하지 않았으나 1990년에 와서야 영향력 있는 가설로 인정을 받게 된다. 핸디캡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 생태계의 사례는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인간들의 행동에서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술을 많이 마시고도 끄떡 없다는 과시, 1950년대 미국 10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겁쟁이 게임(Chicken Game)' 등과 같은 행동도 '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는데도 문제 없어! 그러니까 난 우수한 사람이야!'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의 사례에서 봤을 때, 핸디캡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급소가 아니라 오히려 강점을 부각시키고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핸디캡을 가졌음에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면, 남들에게 자신의 능력이 더 잘 부각되고 인지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런 약점 때문에 그것을 할 수가 없어'라고 체념하는 대신에 '내가 이런 약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더 잘 할 수 있어'라고 발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핸디캡은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키는 도구다.

핸디캡 = 강점을 부각시키는 도구


핸디캡을 극복하고 오히려 그것으로 강점을 부각시킨 사례는 신체적인 장애라는 불행을 딛고 일어선 여러 위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청각, 시각, 언어 장애라는 3중고를 이겨낸 헬렌 켈러, 시력을 잃고도 아름다운 시를 써낸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귀가 들리지 않은 채로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 그들의 인생이 더 아름답고 그들의 업적이 더 빛나는 까닭은 그들이 핸디캡의 패배자가 아니라 승자였기 때문이다.

에디슨 역시 어렸을 때부터 청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가난한 생계에 보탬이 되려고 열 두살 무렵에 기차 안에서 신문이나 과자 따위를 팔러 다녔는데, 기차 안에 따로 실험 약품 등을 마련해 놓고 틈날 때마다 실험을 즐기곤 했다. 여느 날처럼 에디슨이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기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약품이 떨어져 불이 번졌다. 이를 발견한 차장이 그의 귀를 세게 잡아당겨 기차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고 그 일 때문에 그는 청력을 잃게 된다.

청력 장애 때문에 평생을 한탄하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핸디캡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소리와 관련된 축음기, 개량 전화기 등을 포함하여 1,093종의 발명품을 죽기 직전까지 쏟아냈다. 오히려 그는 청력 장애로부터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었다. 자기개발 전문가인 나폴레온 힐은 에디슨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힐이 "청력 장애가 핸디캡이 아닌지요?"라고 묻자 에디슨은 이렇게 대답한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이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걸요. 쓸데없는 수다를 듣지 않아도 돼서 집중이 잘 됩니다. 게다가 제 마음 속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됐지요."

아인슈타인이 그랬듯이, 당신의 핸디캡을 사랑하라. 그는 어렸을 때 지진아라고 불릴 만큼 언어 장애가 심했다. 간단한 단어를 발음하려 해도 사전에 몇번이나 연습한 뒤에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간과 시간'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자신의 핸디캡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절대 고민하지 않는다. 유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장이 너무 느렸던 나는 충분히 성장한 후에야 비로소 공간과 시간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보통 아이들보다 그 문제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당신의 핸디캡은 무엇인가? 누구나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의 강점을 부각시키는 데 활용하는 사람은 적다. 자신의 핸디캡에 실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그것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하라. 핸디캡에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으며 그래야 자신의 성공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라. 핸디캡은 하늘이 당신에게 성공하라고 내려 준 '값비싼 신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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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는 몰락을 알리는 슬픈 서곡이다   

2008. 7. 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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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찬란한 꽃을 피웠던 마야 문명이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은 스페인 정복자인 코르테스의 침략 때문이 아니다. 문명의 몰락은 이미 서기 800년 경에 시작되었다. 한때 적게는 300만, 많게는 14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인구로 북적거렸지만 코르테스가 1524년 즈음에 마야 문명의 중심지인 '페텐'에 도착했을 때 인구는 고작 3만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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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


마야 문명이 몰락한 원인은 바로 '풍요' 때문이었다. 풍요는 자연스럽게 인구의 증가를 낳았다. 인구가 증가하자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숲을 파괴해 농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고고학자 데이비드 웹스터의 말처럼 "지나치게 많은 농부가 지나치게 많은 땅에서 지나치게 많은 곡물을 재배했다."

풍요는 또한 사치를 낳았다. 마야에는 건물 벽에 석고를 바르는 풍습이 있었다. 마야의 왕들은 사원과 궁전을 치장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석고를 두껍게 바르기 시작했다. 석고를 만들려면 용광로에서 석회석을 녹여야 하는데, 이것때문에 막대한 양의 소나무가 땔감으로 쓰였다.

농지와 땔감 확보를 위해 삼림은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마야 문명을 파국으로 이끌었다. 숲이 사라지자 침식 작용이 심해져서 토양 속의 양분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고, 그 때문에 공들여 개간한 농지가 얼마 가지 않아 척박해지고 말았다. 또한 숲의 척박한 토양이 밑으로 흘러내려간 탓에 원래 비옥했던 골짜기와 평지의 토양까지 못쓰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삼림 파괴 때문에 강수량이 줄어들어 오랜 기간 가뭄에 시달렸다.

결국 곡식 수확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했고 식량을 쟁탈하기 위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식량의 급감을 부채질하고 말았고, 배고픔과 전쟁 때문에 수많은 주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것이 마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마야 뿐만이 아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세계 정복의 위업을 달성하자마자 시작되었고, 해가 지지 않을 거라 여겨진 영국은 빅토리아 전성기가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몰락했다. 풍요해질수록 변화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적어진다. 변화하지 않으면 외부적인 요인에 대처할 힘을 잃기 때문이다. 대처하지 못하면 풍요는 곧 스러지고 몰락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많은 역사가 증명하듯, 풍요는 곧 몰락의 시작이다.

풍요 = 몰락의 시작


역사상 가장 빨리  포브스의 500대 기업에 랭크된 회사는 애플 컴퓨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악하기 짝이 없으나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성능을 자랑하던 PC인 '애플 II'가 갑작스러운 성공의 견인차였다. 1976년에 9만 5천 달러에 불과했던 매출액은 1982년에 10억 달러를 초과했다. 고작 6년 만에 10,000 배가 넘는 성장을 한 애플 컴퓨터는 1983년에 포브스 500대 기업 41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고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젊은 갑부가 된다. 이때가 애플의 가장 풍요로웠던 전성기였다.

그러나 풍요는 몰락의 시작이라는 공식이 애플에게도 여지없이 들어 맞았다. 1982년에 '타임'지의 표지 인물로 오른 스티브 잡스는 3년 뒤에 자기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날 거라 예상했었을까? 1982년에 정점을 찍은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코끼리 IBM에 의해 서서히 잠식 당하고 그 뒤에 무수히 쏟아진 IBM호환 PC 때문에 애플은 도산 위기에까지 몰리고 만다.

10억 달러 이상의 적자로 허덕이던 애플이 1997년에 쫓아 낸 스티브 잡스를 다시 받아 들임으로써 그 해 1억 달러 흑자라는 반전에 성공하며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풍요가 몰락의 시작임을 회사의 역사가 증명하는 대표적인 회사임에는 틀림없다(지금 잘 나가고 있으니 뭐가 문제냐는 말은 하지 말자). 

"쇠퇴가 임박했음을 조기에 가장 잘 표시해 주는 것은 우량 경영에 대한 표창장들이다.한 기업이 랭킹 순위 1위에 오르면 이것은 문제가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의 수퍼스타는 내일 깊이 추락할 수 있는가장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고 헤르만 지몬은 경고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우습게 넘길 말이 아니다.


풍요는 마약과도 같아서 중독될수록 더 많은 '양'을 원한다. 국민들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다스릴지 고민하지 않고 석고를 얼마나 두껍게 바를 수 있는지와 같이 사소한 경쟁에 마야의 왕들이 집착했듯이 풍요는 마약처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작년(2007년)에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폭행 사건 역시 풍요가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아마 이와 비슷한 상상을 할지 모르겠다. "멋드러지게 꾸민 개인 전용 사무실에서 일한다면 아이디어가 더 많이 생기고 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텐데...장서가 가득한 나만의 서재가 있다면 까짓 멋진 작품 수십 편은 쓸 수 있을 텐데..." 나도 가끔 이런 공상에 젖곤 한다. 그러나 좋은 환경이라는 풍요는 좋은 아이디어와 높은 성과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에 끝도 없이 흘러가는 공상에 브레이크를 건다.

풍요할수록 변해야 할 이유를 상실하고, 상실된 목표의식은 자신을 게으름으로 몰고 간다. 게으름은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구나'라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데, 풍요로운 생활은 자신을 추스르도록 만들기보다는 술이나 오락처럼 방탕한 방식으로 죄책감을 해소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풍요로움에 대한 상상은 부질없는 '환상'이다. 풍요는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슬픈 서곡이다.

스스로 풍요롭다고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행운과 성공이 찾아 왔는가? 만일 당신이 행운아라면 축하의 악수를 건네기 전에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풍요를 경계하고 보다 건설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매진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인간은 더 많은 걸 항상 추구하는 동물이라 웬만해서 만족하는 법이 없고 또 행운아들은 매우 적은 법이기 때문이다.

풍요로움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가? 떵떵거리는 부자가 되고 싶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가? 이런 사람은 매우 많을 것이다. 만일 당신 그 중 한 사람이라면, '내가 풍요롭지 않아서 나는 잘 하기가 힘들어'란 패배감에 당신은 아마 젖어 있을지 모른다. 혹은 '풍요로워진다면 그때 잘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신의 처지와 무능의 이유를 애써 합리화하며 '노력을 유보'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공과 성공이 가져다 주는 풍요를 기대하지 말라.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당신은 매번 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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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라가 패리스 힐튼과 재계약한 이유는?   

2008. 7. 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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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에 미국 사교계의 패선 아이콘이자 트라블 메이커인 패리스 힐튼은 무면허인 상태에서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어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전 세계 언론들은 일제히 그녀의 수감과 감옥에서의 생활, 그리고 석방되기까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연일 보도하는 데 열을 올렸다. 힐튼에 대한 가십성 보도가 오죽 도가 지나쳤는지 TV 뉴스 생방송 도중 앵커우먼이 힐튼에 관한 뉴스는 더 이상 보도하지 않겠다면서 기사가 적힌 종이를 찢어 버리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힐튼이 침울한 표정으로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영되는 순간, 아마 한국의 어떤 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원망과 걱정이 반반씩 섞인 표정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바로 그 사건이 터지기 겨우 2달 전에 그녀와 광고 모델 계약을 맺은 휠라 코리아(FILA Korea) 말이다.

휠라 코리아는 노후된 브랜드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기 위해 한국에서는 가수인 동방신기, 김종국, 빅뱅 등 신세계 스타를 모델로 기용하고, 더욱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위해서 2007년 3월에는 패리스 힐튼과 1년 간의 광고 모델로 전격 계약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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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뜩이나 평소 행실이 좋지 않은 그녀가 이번엔 전세계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에 구속되다니! 마케팅 담당자가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구속이 확정적일 경우에는 다른 모델로 대체하는 등 대안을 마련하겠지만 구속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번 사건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곤혹스럽다" 라고 말했던 것으로 볼 때, 휠라 코리아로서는 상승을 기대했던 브랜드 이미지가 그녀의 구속으로 인해 오히려 추락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랬던 휠라 코리아가 2007년 11월에 패리스 힐튼과 1년 더 재계약을 단행했다. 대담하게도, 이번엔 그녀를 한국으로 초청해서 기자들을 모아 놓고 윤은수 회장과 재계약 협약식까지 가졌다. 그녀는 4박 5일 동안 체류하면서 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많은 화제를 뿌리고 떠났다.

조금 이상하다. 나는 과거에도 여러 번 경찰서를 드나든 전력이 있는 그녀가 CF에 나온 것을 보고 "이미지가 별로 안 좋은데 왜 모델로 쓴 거지?"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었다. 헌데, 전세계가 지켜보던 가운데 그녀의 비행이 '확실히' 드러난 이후에 계약 파기는커녕 오히려 계약을 연장하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휠라 코리아는 왜 그녀와 재계약을 한 것일까?

'주목은 또 다른 주목을 낳는다.' 이 말은 홍보의 첫번째 규칙이다. '아하!' 어느 날 우연히 이 문구를 발견했을 때 휠라가 그녀를 다시 선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이 첫번째 규칙을 아주 잘 만족하는 모델이었던 것이다. 언론들은 연일 그녀의 모든 언행을 파파라치처럼 주목하기 때문에 그녀에게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호재(?)가 터지면 전세계의 눈과 귀는 일제히 그녀에게 쏠린다. 그리고 그녀의 옷, 장신구, 헤어스타일 등도 덩달아 시선의 집중을 받게 되고 그 상품에 '꽂힌' 시청자들은 다음 날이면 매장으로 달려간다.

그녀는 '걸어다니는 광고판'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사고를 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주목하면서 그녀가 걸친 상품도 스포트 라이트를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광고 멘트를 날리는 센스를 지녔다. 그녀는 2006년에 구속될 때 '인앤아웃 버거(미국 햄버거 회사)를 먹고 싶어 빨리 달렸을 뿐이에요'라고 진술했고, 2007년 6월에 3주 간의 수감생활로부터 풀려나면서도 감옥 안에서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말했다. 아마 그 다음날, 인앤아웃 버거의 매장과 서점은 햄버거와 '시크릿'을 사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대지 않았을까? 광고주로서는 그녀처럼 '예쁜' 모델이 없는 셈이다.

계약한지 두 달만에 법정 구속된 그녀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실추될 것이 매우 염려된다는 마케팅 담당자의 말은 이제 생각해 보면 엄살, 아니 거짓말로 들린다. 아마 그는 기자를 만나고 돌아서면서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진 않았을까? 오히려 힐튼의 '악녀' 이미지는 휠라 제품과 잘 맞아 떨어진다.

패리스 힐튼과, 그녀를 모델로 계속 기용하기로 한 휠라 코리아를 보면서 '자기PR'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힐튼이 광고 모델로서 가진 미덕이 바로 전세계적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에 있듯이, 자기PR이란 뭐니뭐니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가 아닐까?


자기PR = 시선집중


주목은 또 다른 주목을 낳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을 시켜 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60초 동안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했다. 관찰 결과, 대부분의 행인은 그냥 지나치고 4% 정도만이 그 사람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러나 실험자(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지시 받은 사람)의 수를 늘릴수록 따라 하는 행인의 비율이 점점 커졌다. 15명의 사람에게 하늘을 올려다 보도록 하면 행인의 40%가 그들을 따라서 했다.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이 동조하는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키지 못한 자기PR은 추운 겨울 길거리에서 초라하게 공연을 하는 무명가수처럼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비로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생긴다. 한 두 사람이 모이면 세 사람이 모이고, 세 사람이 모이면 아홉 사람이 주목하게 되어야 자기PR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방문자수가 많고 추천자수가 많은 블로그의 글들을 보면, 제목의 힘 때문인 경우가 더러 있다.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제목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끌지 못하면 힘들게 쓴 글이 하루에도 수백만 건이 올라오는 인터넷 상에서 흔적없이 묻히고 만다. 간혹 내용은 부실하고 제목만 '섹시한' 글들이 있다. 분명 화 나는 일이다. 내가 쓴 글의 제목도 그렇다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하지만 그런 경우 때문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제목의 중요성이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

자기를 널리 알리는 행위, 즉 자기PR에 '한정 지어' 생각한다면, 자신의 내실을 기하는 것은 2차적인 것이다. PR이 성공하려면 포장을 잘해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 제1의 덕목이다. 아무리 좋은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리지 않으면 쓸쓸히 퇴장할 각오를 해야 한다. 서점에 가면 얼마나 많은 양서들이 시선을 모으지 못해 서가 뒤편으로 사라지는가?

혹시, 내실이 있어야 집중된 시선이 더 많은 시선을 끌어 들이기 때문에 내실이 우선이고 시선집중을 위한 포장은 나중의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일리가 있는 말이긴 하나, 세상은 참을성이 없다. 한가롭게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실이 먼저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하라.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를 PR하고 싶다는 생각은 나중에 하는 게 좋겠다. 내실과 포장, 이 모두를 잘하면 금상첨화지만, 적어도 자기PR을 하고 싶다면 포장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 글의 제목에는 '패리스 힐튼'이 들어가 있다. 공짜로 그녀를 모델로 고용한 셈이다. 만일 '자기PR은 시선집중에서 시작한다'라는 딱딱한 제목을 단다면 어떨까? 똑같은 내용에 제목만 달리 해서 실험을 해볼 수 없는 노릇이니.... 암튼, 그녀 덕분에 많은 방문자가 있길 기대해 본다. 아님 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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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실패는 오직 나만이 결정한다   

2008. 7. 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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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뮤지컬 영화에서 독보적인 두각을 나타냈던 전설적인 영화배우 프레드 아스테어(Fred Astaire)가 신인 시절 1928년에 한 영화사가 실시한 카메라 테스트에서 이런 평가를 받았다. "연기도 꽝, 노래도 꽝! 살짝 대머리!" 우리에게 마릴린 먼로로 알려져 있는 노르마 진 베이커는 1944년에 모델이 되기 위해 블루 북 모델 에이전시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비서 일을 찾아 보든지,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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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아스테어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이 멋진 아이디어를 보고서로 꾸며서 상사에게 보고를 하는데, 그가 보고서 앞부분에 있는 개요만 읽어보거나, 설명을 하는데 잘 듣지 않고 엉뚱한 페이지만 넘겨 보면서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진 적은 없었는가? 그가 "집어 쳐"라며 아이디어의 우수함을 칭찬하기보다는 그것이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며 문제점만 잔뜩 늘어 놓은 적은 없었는가?

만일 상사가 당신을 그렇게 대했다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절망하여 몇날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면서 참담한 기분일 것이다. '진짜 내가 능력이 없는 걸까? 내가 이 회사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라며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과 절망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면접관의 환상'을 모욕의 그 순간에 기억해 낸다면 말이다. 상사나 면접관의 위치에 서면 지원자(혹은 부하직원)들이 앞으로 일을 잘 할지 못 할지를 평가하는 능력에 지나친 자신감을 가진다. 여러 차례 실시된 심리 실험에 의하면, 면접관(혹은 상사)들은 '사람 보는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지원자가 면접하는 동안에 보인 행동과 말을 마치 그 사람이 나중에 보일 능력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식의 자신감을 보인다. 면접관 자신의 편견이나 컨디션에 따라 상대방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평가 내리기도 하고, 지원자의 말 실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들은 능력보다는 자신들의 편견에 따라 사람을 뽑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

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사람 보는 눈'을 자신하는 경영자들이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이 진짜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위치한 '높은 자리와 경력'이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좋게 평가해도, 그들의 '눈'은 다른 사람들의 평균보다 조금 나은 수준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 잘 본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충분히 실수를 저지른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당신은 실패자야' 혹은 '실패하고 말 거야'라는 말을 들을 때, 그사람의 지위나 전문성이 높을수록 그런 평가를 더 잘 받아들이는 실수를 또한 저지른다.

자신감이란,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낸 실패 메시지(진심 어린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의 성공과 실패는 내가 만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규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바로 자신감이다.

자신감 = 실패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

나에게 '실패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실패 메시지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의견은 틀릴 가능성이 높다. 내가 꿈을 위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노력한 과정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단편만을 보고 나의 전부를 판단한다. 불완전한 '사람 보는 능력'에 인생을 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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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프레드나 마릴린이 면접관들에게 들은 것은 "당신들은 실패자들이니, 여기 얼씬도 하지 마시요"라고 말하는 실패의 메세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꿈을 성취하여 영화사(史)의 아이콘으로 당당히 빛나고 있지 않은가?

작건 크건, 모든 실패 메시지는 수신해서는 안 된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다른 사람이 규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결코 실패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실패는 오직 나만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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