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평가를 믿지 않는 이유   

2011. 7. 1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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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장치인 라우터 생산으로 시작한 기업, 시스코(Cisco)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1987년 즈음 설립된 이 회사는 한때 마이크로소프트를 능가하는 시장 가치를 자랑하던 인터넷 시대의 총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98년에 시장가치가 1,000억 달러를 넘어섰는데, 이는 마이크로소프트가 20년이 걸려서 도달한 일을 10년 만에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존 챔버스(John Chambers)가 CEO로 영입된 1995년 이후에는 5년 동안 주주가치가 4,500억 달러나 증가됐는데 이것은 매일 2억 5천만 달러(약 2,500억 원)에 해당하는, 실로 폭발적인 성장이었습니다. 

미디어는 당연히 이런 시스코를 칭송하기 시작했죠. 1997년에 <포춘>은 시스코를 컴퓨터 업계의 새로운 강자라고 말하면서 '번개 치듯 발 빠른 기업 인수를 통해 네트워킹 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라고 시스코를 추켜 세웠습니다. 1998년에도 시스코가 '인터넷의 진정한 왕'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죠. 존 챔버스가 수십 개의 기업을 인수합병하고 통신기기 시장으로 진출할 때 핵심사업을 벗어나는 마구잡이식 성장이라는 비판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매체들은 그런 경영 방식을 다른 기업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례로 연일 소개하며 칭찬했죠. <포춘>은 시스코의 탁월한 인수합병 능력이 핵심성공요소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러 경영대학원에서도 시스코의 사례를 통해 인수합병의 성공전략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죠. 제프리 페퍼를 비롯한 경영학자들도 시스코 성공 비결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많은 책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존 챔버스의 리더십과 경영철학에 집중하며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시스코는 없다'는 식으로 시스코의 성공을 미화했죠.

이렇게 시스코를 칭찬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들이 시스코가 쇠락하자 태도를 180도 바꿨습니다. 시스코는 2000년 3월에 총 시장가치가 5,550억 달러에 도달하고 주가가 80 달러에 이르는 정점을 찍었지만, 2000년 말이 되자 주가는 38달러까지 폭락했고 2001년 4월에는 14달러로 주저 앉았습니다. 1년 만에 4,000억 달러의 시장가치가 증발해 버린 겁니다.

그러자 <포춘>은 "시스코의 성공요소라고 알려진 모든 것이 허위로 판명되었다" 며 비난 대열에 나섰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시스코를 칭송했다는 기억은 없다는 듯이 "시스코가 자만감에 취했고 통신시장을 기웃거리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며 열렬히 비판했습니다. 존 챔버스의 경영 방식도 상찬의 무대에서 끌어내려져 도마 위에 올려졌죠. <포춘>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위크>, <월드베스트CEO> 등도 가세했죠.

언론 매체의 가혹한 평가를 받던 시스코는 2003년이 되자 실적이 호전됐고 2007년에는 주가가 33달러까지 회복되었습니다. 금융 위기 때인 2009년엔 14달러로 떨어졌지만 2010년에는 24달러로 올랐죠. 앞으로 시스코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2000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할지, 아니면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처지에 놓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죠.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언론의 평가입니다. 어떤 기업이 잘 나갈 때는 한없는 찬사를 보내고 최고경영자를 경영의 귀재라고 추켜세우면서 성공의 비결을 찾는 데에 호들갑을 떱니다. 하지만 그 기업이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최고경영자를 잘 나가던 기업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취급하죠. 그 기업을 성공하게 만든 비결이 사실은 '잘못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결함투성이'라고 말을 바꿉니다. 동일한 경영자, 동일한 요소에 대해 이렇게 평가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기업이 두각을 나타내느냐 추락하느냐의 차이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언론(주로 경영관련 잡지)의 평가, 경영학자들의 case study, 소위 성공기업을 주제로 한 책을 접할 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동일한 경영자와 경영방식이 성공할 때는 성공요소로, 실패할 때는 실패요소로 얼굴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사실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 모 커피 체인점이 급부상하면서 그 기업의 성공 이야기가 책으로도 나오고 여러 잡지에도 소개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성공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포장되어' 나오는 성공 스토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안 될 말이긴 하지만, 언젠가 그 기업의 성장이 정체되거나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면, 동일한 경영자와 동일한 경영 방식에 대해 찬사의 나팔을 거두고 비난의 꼬챙이를 들고 달려들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하지만, 기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언론이나 매체가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예측 가능합니다. 수많은 사례가 이미 귀납적으로 이를 증명해 왔고 앞으로도 꽤 오랫 동안 그러할 테니까요.

(*참고도서 : '헤일로 이펙트', '상식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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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직원을 인신공격하지 말자   

2011. 7. 1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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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직원들의 인격을 존중해야 하고 그들을 인신공격하거나 망신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든 관리자들은 인식하고 있을 겁니다. 부하직원들이 잘못을 하면 그 행위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성격, 학력, 배경 등과 같은 개인의 속성을 조롱하거나 상처를 주면 되돌이킬 수 없는 앙금과 분열이 관리자와 부하직원들 사이에 생겨난다는 것쯤은 이미 아는 바이겠죠.

문제는 안다고 해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특히 실적이 떨어지고, 프로젝트 종료일자는 다가오고, 경영자들이 성과에 대해 압박을 가해오고, '갑'인 고객들은 과중한 요구를 연일 쏟아내기 시작하면 부하직원을 인격적으로 다루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누군가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업무 성과가 좋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도 벌어집니다. 관리자 스스로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더라도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는 구실로 합리화시키기도 하죠.



'디지털'사의 마케팅 담당 고위책임자였던 에드워드 E. 루센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부하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줄 목적으로 댈러스까지 기차 여행을 하던 중에 직원들에게  "문제가 있거나 건의할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 고 했습니다. 어떤 직원이 용기를 내어 회사의 판매 전략이 이상하고 불분명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루센트에게 요구했습니다.

루센트가 어떻게 했을까요? 평소 권위적인 경영 스타일로 악명이 높던 사람답게 그는 직원을 앞으로 나오라고 한 다음에 판매를 담당하는 자가 판매 전략을 모른다는 것은 멍청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라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었습니다. 사기 진작이라는 기차 여행의 본래 취지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직원들은 그런 루센트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결국 루센트는 디지털 사에서 쫓겨나고 말죠.

부하직원들의 자존심에 구멍을 내는 관리자들의 행동은 단기적인 위기를 빨리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부하직원들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모멸감과 상처를 안겨주어 장기적인 '단절'로 이어집니다. 부하직원들은 신뢰의 문을 닫아버리고 방어의 성벽을 높게 쌓아 올립니다.

부하직원들을 잘못 대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되돌아보고 '수정'하고자 하는 관리자라면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더글라스 맥아더의 '부하 사랑'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은 6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자신의 행동과 말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 부하들을 괴롭히지 않았는가?
- 부하들에게 화풀이하는 경우는 없는가?
- 나를 믿고 따르도록 부하들에게 모범이 되는가?
- 가족을 대하듯 부하 한 명 한 명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가?
- 다른 부하들 앞에서 어느 부하의 잘못을 질책하지는 않았는가?
- 상관에게는 굽실거리고 부하에게 야비하게 굴지 않았는가?


관리자의 리더십 성향은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퇴근할 때 맥아더의 6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자신의 행동과 말을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관리자와, '내 방식대로 할래' 라는 아집을 고수하는 관리자의 나중 모습을 서로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나겠죠.

오늘은 위의 6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며 퇴근하는 월요일이기를 바랍니다.

(*참고도서 : '최고의 햄버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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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가 유명해진 진짜 이유   

2011. 7. 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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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모나리자'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이유 중 가장 첫 번째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라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로 모나리자는 대단한 가치를 가진 그림입니다. 저도 파리에 갔을 때 루브르 박물관 구경을 하면서 소장된 작품이 너무나 많아 지칠 정도였지만, 모나리자 만큼은 꼭 보고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그 그림에 몰려든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까치발을 서던 기억이 납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No Photo'를 외치는 경비원들의 으름장 때문에 포기했죠. 아마 찍었다 해도 사람들 뒤통수 밖에 안 나왔을 겁니다.

모나리자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7억 달러라고 하는데, 이 가격은 역사적으로 판매된 모든 그림의 보험가격을 한참 초과하는 금액이라고 합니다. 사실 7억 달러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죠. 몽환적인 풍경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이 손을 포개고 앉아 신비로운 미소를 띠는 모습에 전 세계 사람들은 찬사를 보냅니다. 사람들은 때론 슬프게 느껴질 만큼 보면 볼수록 그 여인의 미소에 빠져 들면서 과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의 천재라고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박물관에서 만난 모나리자는 기대보다 못했습니다. 일단 크기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작습니다. 세로 77 cm, 가로 53 cm에 불과합니다. 만일 모나리자가 방탄 유리에 싸여 있지 않고 독립된 벽을 차지하고 있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정도입니다. 제 눈에는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다른 작품에 비해 별로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로 그동안 사진으로 봤던 것에 비하면 '그냥 그랬습니다'. 제가 명작을 볼 줄 모르는 문외한인 까닭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모나리자가 이렇게 유명해지기 전에는 미술 전문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다빈치는 1503~1506년 경에 모나리자를 완성하고 나서 프랑스의 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4천 에큐(1만 2천 프랑)를 받고 팔았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수백 년 동안 그저 그런 그림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 좋은 그림이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오늘날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죠. 다빈치는 과학, 토목, 건축, 미술 등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여준 사람이지만 화가로서 다빈치는 라파엘로나 티치아노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모나리자가 
거의 400년 동안 그저 그런 작품으로 파묻혀 있다가 유일무이한 세계적인 명작으로 떠오른 때는 1900년 대 초가 되어서였습니다. 그 계기는 엉뚱하게도 절도 사건이었습니다. 빈첸조 페루지아라는 이탈리아 사람은 루브르 박물관의 폐관 시간까지 청소도구함에 숨어있다가 모나리자를 옷 속에 숨겨 가지고 나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페루지아는 이탈리아 사람인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니 고국인 이탈리아로 그림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2년이나 모나리자를 자기집에 숨겨 놓고 있던 그는 피렌체의 미술상 골리를 통해 우피치 미술관에 그림을 팔려고 하다가 체포되고 말았죠.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모나리자에게 쏠렸습니다. '어떤 그림이기에 페루지아의 애국심(?)에 불을 당겼을까?'라고 궁금해 했죠. 모나리자를 보고는 과연 훔쳐올 만한 명작임이 분명하다고 입을 모으고 그 신비한 미소에 열광했습니다. 덤으로 페루자를 이탈리아가 낳은 그림을 구해내려 한 영웅으로 칭송하기까지 했죠.

모나리자는 그 뒤로 두 차례의 수난을 더 겪으면서(한번은 누군가가 산(酸)을 뿌렸고, 볼리비아 청년이 큰 돌을 던지기도 했음)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화가들이 모나리자를 패러디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원작에 대한 관심을 계속 불러 일으켰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수염 난 모나리자'와 같은 패러디 작품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팝아트의 개척자 앤디 워홀도 모나리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활용했죠.

모나리자가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림 자체의 예술성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지금까지 말한 일련의 스토리가 모나리자를 '평범하게 잘 그린 그림'에서 인류사에 남을 걸작으로 도약시킨 방아쇠 역할을 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허나 많은 미술평론가들은 이런 방아쇠를 애써 무시하고 모나리자가 위대한 작품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림 자체에서 찾곤 합니다. 모나리자를 유명해지게 만든 속성 중 많은 것들이 분명 그림 자체의 특이함에서 기인하지만, 절도 사건이라는 점프대가 없었으면 아직까지 다빈치의 여러 작품 중 하나로 남아 있었을 테죠. 만일 모나리자가 유명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모나리자를 포함한 다빈치의 작품들을 쭉 보여 준다면 그사람은 모나리자를 넘버원으로 꼽을까요?

우리는 무언가가 유명해지거나 특출한 성공을 거두면,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그것 자체'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나리자가 위대한 이유는 모나리자가 위대해질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순환논리에 갇히기도 하죠. 해리 포터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그 작품 안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구조, 소재, 캐릭터 때문이라고 말하고,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유는 미국이 흑인 대통령을 맞이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무언가가 유명해지거나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절도사건과 같은 엉뚱한 방아쇠의 덕이 더 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 유명해지고 성공을 거둔 그것의 특성을 그대로 따라한다고 해서 우리도 성공을 거두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유명세는 거품입니다. 그리고 거품이 오랫동안 발효되면 '신화(myth)'가 됩니다. 그 곰팡내 나는 신화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 전에 그 이면과 주변부를 따져보는 냉정한 시각을 항상 유지해야겠습니다.

(*참고도서 : '상식의 배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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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들은 왜 조기에 회사를 관둘까?   

2011. 7. 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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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KBS 제1 라디오 (FM 97.3 MHz) '성공예감, 김방희 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집단주의 문화와 창의적 인재'라는 주제로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2011년 7월 7일 08:40). 다음은 인터뷰의 주요 내용입니다.



사회자 멘트 : 해병대 총기 사고 진상이 다 밝혀져야 하겠지만, 집단주의적 문화와 신세대 장병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충돌한 결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기업에서도 총을 쏘지 않을 뿐이지 이런 일들이 허다하게 벌어지는데요. 
 
기업은 여전히 집단주의적인 반면 신입 사원들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니까요. 게다가 기업들은 최근의 경제, 경영 환경에서 창의 경영, 창조 경영을 요구받고 있는데요. 따라서 개인의 창의성을 집단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기업의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의 창의성간의 '문화 충돌'을 막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오늘은 집단주의 조직 문화에 어떻게 창의적 인재를 접목시킬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인퓨처컨설팅의 유정식 대표와 말씀 나누겠습니다.


1. 여러 조사들 보면 최근 신입사원의 조기이직률 높다고 하더군요. 3년내 10명중 3명 이상이 떠난다고 하는데. 그렇게 어렵게 구한 일자리를 쉽게 떠나는 걸 보면, 우리 기업 문화와 신세대 신입사원 간의 문화적 충돌이 큰 모양이죠?

제가 보기에는 성과를 강조하는 기업의 문화와, 신입사원들의 기대감이 서로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보다 스펙이 높은 신입사원들이 많고 또 경쟁이 치열해져서 기업들은 신입사원들에게 처음부터 많은 성과를 기대하는 경향이 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입사원들은 남들로부터 별로 도움 받지도 못하는데요, 기존 직원들도 성과에 대해 압박을 많이 받기 때문에 도와 줄 시간이 없습니다.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도 별로 없고요.

신입사원들은 회사가 뭔가 캐어해 주기를 바라지만, 회사는 그렇게 못 해주니까 충돌이 발생하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를 나가버리는 거죠. 이것이 문제의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2. 우리 기업이 다른 선진국 기업들에 비해 더 집단주의적인가요? 그렇다면 우리 기업이 가진 집단주의적 문화로 대표적인 것들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우리나라가 집단주의의 가치를 좀 더 중시하는 건 사실입니다. 집단주의라고 해서 항상 나쁜 것은 아닌데요, 하지만 집단주의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급주의적인 문화입니다. 많은 기업들이 과장, 부장 하는 호칭을 없앴다가 다시 복원시키는 데요, 집단 내에서 누가 서열이 높으냐 낮으냐가 개인의 능력과 권한을 규정한다는, 그런 증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능력이 좋아도 직급이라는 틀에 갇혀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죠. 신입사원들이 적응을 잘 못하는 이유가 서열과 나이에 복종해라, 이런 암묵적인 분위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3. 군대에서 원한다고 나가지도 못하고 하니까 총기나 탈영 사고가 빈번하고요, 우리 기업에서는 떠나면 그만이니까 많이들 이직하는 것 같은데 최근 입사하는 세대들의 특성은 어떤가요? 이전 세대의 특성과는 확연히 구분될 정도인가요?

많은 기업에서 신입사원들의 표면적인 스펙은 아주 좋아졌다고 인정하는데요, 제가 봐도 엄청난 스펙을 가진 신입사원들이 많습니다. 헌데 자기주도력은 전반적으로 예전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여러 학원에서 정해주는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고, 대학 때는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기보다는 취직 준비를 위해 이미 짜여진 대로 공부하는 버릇이 강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디다 갖다 놔도 스스로 알아서 개척해 나가기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잘 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회사에서 자신을 잘 케어해주지 못해서 그렇다,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는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회사에서도 족집게 선생처럼 자신들에게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4. 굳이 이런 기업 내에서의 문화 충돌이 아니더라도, 우리 기업들은 전에 비해 집단적 창의성을 요구받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처럼 일본 기업을 무조건 따라 하는 방식으로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커지고 있으니까요.

네, 그렇죠. 애플이나 구글, 페이스북이 성공하는 걸 보면서 창의력이 사업 성공에 필수적이라고 많은 기업들이 생각하는데요, 문제는 기업들이 창의력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시나 제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내면 창의적이지 않다고 야단치기도 하는데요, 창의력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죠.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많이 드니까 창의력도 단시간 내에 끝내려고 조급하게 다그칩니다. 기업들이 참 급한 것 같아요. 이런 건 절대 창의성을 육성하지 못합니다. 창의성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5. 문제는 우리 기업들의 집단주의적 문화는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는데, 창의 경영, 인재 중시 경영을 해야 하니까 이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대체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접근하고 있습니까?

기업들이 집단주의 문화를 깨려고 과장, 부장 하는 호칭도 없애보고요, 또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중책을 맡기는 직급 파괴도 해봤지만 크게 효과를 못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쉽게 실행할 수 있는 제도만으로 집단주의 문화를 깨려고 하기 때문이죠.

어떤 기업들은 팀워크를 다지고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겠다, 그런 목적으로 해병대 캠프 같은 교육을 정기적으로 하는데요, 집단에 복종해야 한다는 가치를 은연중에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집단주의를 강화시킵니다. 일시적인 제도만으로는 절대 집단주의 문화를 깰 수 없습니다.



6. 인사조직 전문 컨설턴트로, 우리 기업들의 접근법에 대해 조언할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먼저 지나치게 성과를 중시하는 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직원들 간의 협력이 약화되고요, 신입사원도 제대로 케어하지 못해서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죠.
 
또한 고객 만족이라는 가치 때문에 직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고객 만족보다 직원 만족이 먼저거든요. 직원들이 회사에 만족해야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요. 직원들을 중시하는 문화가 퍼지면 신입사원들도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거고, 집단주의 문화의 나쁜 점을 없앨 수 있을 겁니다.


7. 저희 프로그램 <직장인 성공학>이라는 코너를 통해서도 신입 사원들이 기업의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부적응이 직장인들의 큰 고민거리라는 걸 늘 확인하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이런 기업 문화에 부딪쳤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싫은 사람이 떠나면 그만이란 식으로 그만두는 게 과연 능사일까요?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바로 그만 두는 것은 나약하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생활 초기에는 아주 신중해야 하죠. 그리고 회사는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이기 때문에 집단의 안정을 위해서 규칙이 필요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도와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 말고, 주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겠다, 이렇게 입사 때부터 마음을 먹으면 잘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업들도 자기네 문화에 알맞은 인재를 뽑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펙이 좋아도, 능력이 좋아도 자기네 문화와 맞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뽑지 않겠다는, 그런 용기가 있어야 하죠. 이렇게 신입사원들과 기업들이 서로 노력해야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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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차이가 시위를 확산시킨다   

2011. 7. 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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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특정 장소에 모여 사는 100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정부의 어떤 시책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시위를 벌이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헌데 이 사람들은 시위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다른 사람은 얼마나 시위에 참여하는가'를 보고 결정합니다. 정부 시책에 대한 불만도 시위에 참가하게 만드는 동력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위 참여 여부가 그들에겐 또 하나의 변수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이 고작 서너 명 밖에 안 되면 경찰에게 표적이 되어 바로 연행될 위험이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시위에 가담하면 그만큼 체포되거나 물리적인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적어지니까 말입니다. 괜히 나섰다가 총대 메는 건 아닌지, 주저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성향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이들이 시위에 참여하든지 말든지 제일 먼저 앞장 서서 나갑니다. 그만큼 사회에 불만이 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성격이 원래 다혈질인 까닭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99명의 사람이 시위에 가담할 때야 비로소 시위에 참여하기로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위에 얼마나 참여하느냐'라는 '문턱값(Threshold)'가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의 문턱값은 대개 그 사이에 있죠.

마크 그라노베터(Mark Granovetter)란 사회학자는 이렇게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상황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100명의 사람들이 0부터 99까지의 문턱값을 각각 갖는다고 가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은 문턱값이 0, 그 다음 사람은 문턱값이 1, 세 번째 사람은 문턱값이 2라고 차례로 가정하고, 가장 보수적인 100번째 사람의 문턱값은 99라고 설정한 것이죠. 만약 문턱값이 0인 사람이 시위에 가담하면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문턱값이 0부터 99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한 명씩 시위에 가담하다가 결국에는 100명의 사람들이 모두 시위에 나서게 될 겁니다.

이번엔 상황을 조금만 변형해 볼까요? 예를 들어 문턱값이 3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 대신에 문턱값이 4인 사람이 두 명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나머지 사람들은 앞의 상황과 같은 문턱값 분포를 갖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턱값이 0, 1, 2 인 사람이 시위에 가담하지만 문턱값이 3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문턱값이 4인 사람들을 '자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00명 모두 시위에 가담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거나 쉽게 진압되고 말겠죠. 문턱값이 3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주 작은 차이 때문에 시위의 양상이 아주 달라지는 겁니다.

만일 동일한 이슈에 대해서 어떤 집단은 크게 반발하여 급기야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반면에 비슷한 다른 집단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반발을 보였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필시 전자의 집단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이 이슈에 대해 더 분노했거나 더 폭력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두 집단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여기겠죠. 그래서 전자의 집단을 소위 '문제 집단'이라고 규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라노베터의 '사고실험'에 의하면 두 집단 사이의 차이는 아주 미미합니다. 문턱값이 3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은 차이가 시위를 발전시키거나 흐지부지되게 만드는 요인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그라노베터가 설정한 상황은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실제 시위가 벌어지는 원인과 시위의 양상을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의 문턱값이 중복되지 않고 고루 퍼져 있다고 가정한 것도 현실과 다르죠. 그래서 그라노베터의 실험은 여러 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죠.

그러나 그의 사고실험은 개인의 성향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 조건 등에서 발생하는 아주 작은 차이가 사건의 양상을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진작에 나온 테블릿 PC가 이제야 확산되는 현상, 튀니지에서 촉발된 민주화 열풍이 이집트와 리비아 등으로 번진 재스민 혁명 등이 가장 단적인 예입니다.

또한 그라노베터의 사고실험은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뭔가 대단하고 심오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 의미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름을 시사합니다. 어떤 노래가 갑작스레 유행을 타서 음원판매 1위를 달성하면 그 노래가 1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음악평론가들이 갖다 붙이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평론가들이 제시하는 논리는 "그 노래가 1위를 차지한 이유는 1위를 차지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노래가 1위를 차지한 이유는 사람들이 그 노래를 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노래를 원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바로 그 노래가 1위가 됐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순환논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라노베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케팅이나 조직의 변화관리에 힘쓰는 기업들은 미미한 차이가 큰 격차로 확산된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사후 약방문' 격인 판단은 의미가 없거나 상황을 오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참고논문 : Threshold Models of Collective Behavi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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