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리더가 되기 어려운 이유?   

2024. 9.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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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여성이 대기업의 고위 임원직에 올랐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저는 좀 의아해집니다. “이게 왜 특별한 기삿거리지?” 그 일이 축하받을 일이 아니라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여성이‘유리 천장’을 깨고 고위직으로 승진한 일을 '예외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아직 존재한다는 게 이상해서 그렇습니다. 

거의 모든 임원진을 남성으로 채우는 조치에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어쩌다 여성이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을 두고 ‘유리 천장’ 운운하는 행태를 볼 때면 ‘일터에서 성평등’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여성 인력이 조직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지기는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린 게 사실이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로 이런 가설을 수립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리더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라고 말입니다. 이 가설은 크고 작은 조직을 이끌고 가는 리더십이 ‘남성적 특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기에 남성이 조직의 리더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로 이어집니다.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저 가설을 이야기할 뿐이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논리가 맞다고 봅니까? 여성이 기질적으로(혹은 본성적으로) 유약하고 섬세하며 수동적이고 관계지향적이라서 목표를 달성해 생존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조직의 생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합니까?

혹시나 동의한다면, 이렇게 바꿔 질문해 보죠.그동안 남성 위주로 조직이 굴러왔기에 여성은 리더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편견이 굳어진 게 아닐까요? 공격적이고 카리스마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과업 지향적인 남성들이 절대적으로 지배해 왔기에 ‘남성적 리더상’이 옳은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진 게 아닐까요? 리더십의 잣대가 남성 중심으로 만들어진 탓에 “여자는 리더가 되기엔 미흡해”라는 편향이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새겨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여성이 남성보다 리더로서 역량이 부족하다’는 가설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고 봅니다. ‘여성이 남성 중심의 조직에서 남성보다 리더로서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 받는다’라는 가설이라면 모를까. “여자가 팀장이나 임원이 되면 못 견디고 금방 떠나 버려.” 혹은 “여성 리더를 두는 것은 외부 홍보용이지.”라는 인식을 가진 조직이라면 자신들이 ‘마초 지향의 조직문화’에 찌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돌아볼 일이죠.

실제로 여성은 '리더로 육성되는 데 별로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상사가 직원에게 제공하는 피드백을 분석했는데요, 피드백을 받는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피드백의 특징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상사들은 남성 직원에게는 “사소한 것은 무시하고 장기적으로 바라보라”, “운영적 관점이 아니라 전략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식으로 피드백을 했는데요, 반면에 여성 직원에게는 “재무 관련 지식을 쌓아서 활용하라”, “복잡한 이슈 해결을 위해 좀더 분석 능력을 키우라”는 피드백을 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줄 아십니까? 네, 남성 직원에게는 ‘거시적 관점의 비전 설정’을 강조한 반면, 여성 직원에게는 ‘일상적인 업무 수행 능력’을 강조한 것이 커다란 차이입니다.

또한 상사들은 남성 직원에게 “힘을 가진 사람과 폭넓은 협력 관계를 구축하라”, “언어를 배우듯 정치력을 개발하라” 등 ‘사내 정치를 활용하라’는 식으로 피드백을 주었지만, 여성 직원에게는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불쾌하더라도 잘 견뎌라”라고 피드백 했습니다. 

여기서도 어떤 차이가 발견되나요? 남성 직원에게는 주도성과 야망을 강조한 반면, 여성 직원에게는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와 관용을 요구한다는 게 차이점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상사는 남성 직원에게 리더의 자질을 강조하고, 여성 직원에게는 직원의 자질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여성 직원들이 리더로 육성되는 데 있어서 별로 지원을 못받는 이유, 그래서 리더로 선발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이유입니다. 사소하고 미묘한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여성 직원은 '나는 이렇게 행동해야 해'라고 자신도 모르게 '설정'되고 말죠.

그렇다면 여성 직원들에게 어떻게 피드백해야 할까요? 직원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떠나서 ‘리더라면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동등하게 피드백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리더십을 표출하라는 조언과 동료들과 조화를 이루라는 조언을 남성 직원과 여성 직원 모두에게 동등하게 해야 합니다. 상사가 임의로 성별에 ‘어울릴 법한’ 조언을 편향적으로 해서는 곤란합니다.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선의의 피드백이 사실은 일종의 '가스 라이팅'일 수 있다는 걸 늘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이 성평등주의자임을 자부하는 리더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참고논문
Doldor, E., Wyatt, M., & Silvester, J. (2019). Statesmen or cheerleaders? Using topic modeling to examine gendered messages in narrative developmental feedback for leaders. The Leadership Quarterly, 30(5), 1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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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옳다'고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2024. 9.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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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방어하고 변호하며 타인에게 본인의 생각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욕구는 생존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서 뭐라 탓할 수 없고 탓해서도 안 되죠. 하지만 문제는 엄밀한 조건 하에 실시된 과학 연구 결과가 자신의 의견과 반할 때조차 자기 의견을 수정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 그 연구는 나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라고 반응하며 연구 결과를 무시하더고요.

저는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 매일 한 편씩의 논문을 읽고서 제 관점을 가미해 연구 결과를 블로그에 소개하는 것을 꽤 오랫동안 지속했었습니다(그 결과물이 <착각하는 CEO>란 책이다). ‘연봉을 많이 줘도 동기는 올라가지 않는다’, ‘일잘하는 사람을 아무 생각 없이 승진 시키지 마라’ 등 기존의 통념과 반대되는 연구나 누군가가 ‘기분 나쁠 만한’ 연구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난 안 그래. 그러니 너는 틀렸어’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곤 했습니다. 별다른 논리를 제시하지도 않고 ‘그냥 아닌 것 같다’라는, 뭐라 대꾸하기도 어려운 댓글도 달렸죠. 자신의 신념에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면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갖는 것이 인간의 습성처럼 보일 정도로 저는 그런 댓글을 자주 접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리나 개념에 반대되는 것이 출현하면 그것은 우리의 울타리 밖에 존재하는 이방인들의 관점이라고 보는 걸까요? 이방인들은 우리의 안락한 삶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존력을 보존하려면 이방인을 경계하고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DNA 어딘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건 아닐까요? 이방인들의 관점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이라 해도 일단 거부함으로써 방어할 시간적 여유를 갖고자 함은 아닐까요?

 



지금까지의 글을 읽고 이렇게 반응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나는 명백하게 옳다고 증명된 것이라면 바로 내 의견을 수정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야."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삼단논법이라는 개념을 다들 아시죠? 삼단논법의 전개가 논리적으로 옳은지는 '보통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삼단논법의 내용이 자기 신념과 다르다 해도 '논리적으로 옳은지'의 여부는 맞혀야 하죠.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연구가 있어요. 연구자는 낙태 찬성파와 낙태 반대파 사람들을 대상으로 각각 '낙태 반대'를 지지하는 문장과 '낙태 찬성'을 지지하는 문장을 각각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유효한 삼단논법인지를 맞혀 달라고 요청했죠. 

연구자가 "자기 신념은 잠시 내려놓고 삼단논법이 논리적이냐 아니냐만 따져 달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관한 자기 신념과 반대되는 내용을 가진 삼단논법에 대해서는 논리적 유효성을 잘 맞히지 못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자기 신념에 경도됐던 겁니다. 심지어 논리학을 배운 참가자들이 더 경도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참 어이없죠?

이러한 경향을 ‘우리편 편향(My-side bias)’라고 부릅니다. 나의 신념은 무엇인가, 내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판단하려는 경향이 바로 ‘우리편 편향’입니다. 우리편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말하죠.양팀의 팬들이 격하게 응원하는 축구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반칙처럼 보이는 행동을 한다면, 그걸 당한 팀에서는 “왜 저런 행위에 반칙 휘슬을 불지 않느냐!”며 심판을 욕하고, 상대팀에서는 “우리가 반칙을 한 게 아니라 쟤네가 헐리우드 액션을 하는 것이다. 심판은 뭐하냐! 시뮬레이션 파울을 선언해야 할 거 아냐!”라고 하는 게 우리편 편향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보려고 하지 않죠. 첨예한 주제를 놓고 찬성측과 반대측이 벌이는 논쟁은 의견 차이를 좁히고 공통분모를 찾아 새로운 해결책을 마련하자는 결론으로 절대 마무리되지 않기 때문이죠. 토론은 각자가 가진 신념을 더욱 강화할 뿐이고 양측은 토론 전보다 더욱 적대적인 눈빛을 교환하며 등을 돌리니까요.

누구에게나 마음 속에 '적'이 있습니다. 그를 떠올리면서 '내가 혹시 우리편 편향에 빠져 있지 않는지', '그 사람의 논리 중에 옳은 것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요? '내 논리가 맞아!'라고 고집은 좀 그만 부리자고요. 우리편 편항을 줄이려는 노력이 첨예한 양측의 대립을 풀고 화해하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참고논문
Čavojová, V., Šrol, J., & Adamus, M. (2018). My point is valid, yours is not: myside bias in reasoning about abortion. Journal of Cognitive Psychology, 30(7), 65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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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걸' 잘했기에 지워지지 않는 사람   

2024. 8. 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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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레트로 카페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타자기는 20세기만해도 펜을 대신해 규격화된 글을 쓸 수 있는 세기의 발명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20세기초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가능하게 했던 ‘타이피스트’라는 직업을 탄생하게 했죠.

베티 네스미스 그레이엄(Bette Nesmith Graham)은 평범한 주부였지만 2차대전 이후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과 이혼하게 된 후 홀로 아이를 양육해야 했습니다. 생계 유지를 위해 타이피스트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녀는 뛰어난 타이피스트는 아니었지만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하던 전통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이 아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덕분에 조직에서 책임자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승진을 해도 직장여성에게 주어진 일은 '남자'를 보조하는 업무,  그저 타이핑뿐이었습니다.

당시 IBM이 출시한 새로운 모델은 기존의 타자기보다 빨랐고 먹물이 아닌 탄소 필름 리본을 사용하는 새로운 전자 타자기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새 타자기에 익숙해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민감하고 빨라진 키패드 때문에 타이핑에 그다지 재주가 없었던 그녀는 더 많은 오타를 만들어냈죠. 오타가 많다보니 상사(남성)로부터 질책을 자주 받았겠죠?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는 처지이기에 보통의 타이피스트라면  밤새 타이핑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었겠지만 그녀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자리가 불안정하다 보니 부업으로 은행 창문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때 그레이엄에 머리 속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쩍거렸습니다. 타이핑 오타를 감쪽같이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죠. 그녀는 매니큐어병에 수성 페인트를 담아 오타가 생길 때 마다 위에 덧칠을 했고 이런 방법 덕에 그녀는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수정 페인트를 사용하던 그녀는 다른 비서들에게도 자신이 제조한 수정액을 ‘미스테이크 아웃- mistake Out’이란 이름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이 수정액은 비서들 사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세주 같은 제품이었지만 수정액을 사용하고 공급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직장 상사는 그녀를 해고해 버렸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베티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수정액 탓에 직장을 잃고 말았죠.

다행히 그녀는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믹서기 한 대만을 가지고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비서들 사이에 필수품이 된 수정액을 제조, 공급하는 ‘리퀴드 페이퍼(Liquid Paper)’란 이름의 회사를 창업했던 거죠. 그리고 1979년에 회사를 질레트에 매각하기 전까지 연간 2,500만병의 수정액을 판매하는, 5천만 달러 가치의 회사로 성장시켰습니다. (아쉽게도 1년 후인 1980년 5월에 그녀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가 그저 자수성가한 기업가이기에 유명한 것은 아닙니다. 알다시피 1960년대에는 그 어떤 대기업들도 직원의 복지에는 관심이 전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싱글맘으로 살아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진보적인 업무환경을 조성했습니다. 

회사에 보육원(어린이집)을 설치했고 직원 소유의 신용조합을 신설했으며 휠체어 이용이 가능한 작업 현장을 디자인했습니다.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문화도 철폐했죠. 예술 분야의 여성을 지원하고 불우한 여성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했고요.

지금은 우리가 흔히 '화이트'라고 불렀던 수정액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 자리를 수정 테이프로 대체했으니까요 하지만 '지우는 걸' 누구보다 잘했던 베티 그레이엄이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자였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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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 좀 하세요   

2024. 8.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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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잘 하려면 암기하지 말고 공부한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습과 관련한 책에서도 암기보다는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하지만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것을 외우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암기는 기본기와 기초를 다지는 필수 요소임을 그들은 알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를 말하기 전에 유명 예술가들을 떠올려 보세요.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직 20세가 되지 않은 어린 제자들을 가르칠 때 절대로 붓과 물감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고 해요. 오직 거친 철필만을 써서 유명한 작품을 똑같이 따라서 그리게 했습니다. 몸으로 기술을 '암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이런 건 나도 그리겠다’라는 느낌이 들 텐데요, 하지만 피카소가 명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힘든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입체파 화풍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훨씬 전인 7살 때 그린 데생을 보면(아래 사진) 그가 얼마나 기본기가 탄탄한 화가였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손 끝으로 미술의 기법을 암기했습니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장영주. 사람들은 그녀에게 천재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매일매일 연습한다. 성공의 비밀은 끊임없는 연습이다”라고 말이죠.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나도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해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몸으로 기본기를 연마하는 스포츠 선수나 예술가들의 노력은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뭐 하러 힘들게 외워? 인터넷이나 책 찾아보면 다 나오는데. 요즘엔 챗GPT도 있으니까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머리로 기초를 다지는 암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고의 폭을 좁히고 창의력을 저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암기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것 참 이상하지 않나요? 모순 아닌가요?

암기해 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항상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눈 앞에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 때 기본 지식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발화(發火)시킬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노벨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물리학자, 사람들은 그가 천재인 줄 압니다. 하지만 그의 IQ 점수는 고작 125였어요. 천재의 아이큐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죠. 그럼에도 그는 중요한 논문이나 수학적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할 때까지 한 자 한 자 끝까지 파헤치고 암기했기에 나중에 양자 운동을 독창적으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선천적인 지능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세운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종종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저는 기본을 지키는 것이 초심이라고 봅니다. 기본이 기교로 변질됨을 막는 것은 부단한 연습과 암기 이외에는 없어요.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제자리에서 맴돈다는 느낌이 든다면 기본을 멀리하고 기교 높이기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기교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본기가 되는 지식을 하나만이라도 암기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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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만 좋아하는 어른이십니까?   

2024. 8.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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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떽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도무지 묻지 않는다. 그 분들은 "그 친구의 목소리가 어떠냐?" "무슨 장난을 제일 좋아하느냐?" "나비 같은 걸 채집하느냐?" 이렇게 묻는 일은 절대로 없다.
"나이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느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느냐?" 

이것이 그 분들의 묻는 말이다. 그제야 그 친구를 아는 줄로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 고 말하면, 그 분들은 이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 내질 못한다.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거 참 굉장하구나!"하고 감탄한다.

어느 날 모 회사의 신입사원 교육현장에 청중으로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임원과의 간담회 시간에 직장인으로서 어떤 점을 주의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는데요, 임원은 말끝마다 “숫자로 이야기하지 않는 직원들의 보고는 받지 않는다. 신입사원 여러분은 항상 숫자로 이야기하라.” 라고 1시간 내내 강조하더군요. 도대체 숫자가 뭐기에?

 



물론 의사결정을 할 때 숫자가 주는 힘은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사안이 중요할수록 숫자는 위력을 발휘하죠. 그리고 숫자는 의사소통을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수용성을 높이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숫자는 상대방에게 ‘생각의 고통’을 주지 않죠. 숫자로 얘기하면 다른 것을 따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가 맞는지 틀리는지만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서 보고서 작성기법을 주제로 한 각종 책이나 강좌에서는 최대한 숫자화할 것을 제 1 규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숫자가 의사결정의 정확성과 간편성을 높인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숫자에 대한 맹신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숫자는 지나치게 상황을 단순화합니다. 인력 채용에서 '우수인재 확보율'을 관리하는 회사가 늘고 있는데, 그 기준이 기껏해야 출신학교나 학점수준 등에 불과합니다. 명문대 출신을 몇 명 뽑았다는 그래프를 보고 인사담당자는 뿌듯해 하죠. 그러나 좋은 학교, 높은 학점이 직장 내에서의 우수한 성과를 보장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둘째, 숫자는 조작이 쉽습니다. 모 회사 공장은 납기단축을 목적으로 성과지표(KPI)로 ‘입고 후 출고시간’을 관리하더군요. 그 지표는 항상 목표를 초과달성하고 있었기에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납품은 여전히 늑장이었어요. 알고 보니, ‘입고 후 출고시간’을 임시창고에 완성품을 갖다놓는 시점까지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납기의 문제는 물류에 있었으나 공장 측은 문제를 숨겨보려 출고 시점을 조작했던 겁니다.

셋째, 숫자는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로 막습니다. 갓 생각해 낸 새로운 아이디어는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만큼 숫자로 덜 무장되어 있다는 뜻이죠. 그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데 인력과 비용이 얼마나 소요되는지, 아이디어의 결과로 나오는 산출물이 회사의 수익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 숫자로 정확히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숫자에 집착하는 이들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크겠죠. 상사가 ‘숫자 킬러’라면 부하직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숫자의 기세에 눌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합니다.

숫자는 강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취약하기도 합니다. 숫자를 잘 관리하라는 말은 ‘뭐든지 숫자로 측정하고 표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량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숫자로 잘 표현하고, 정성적 측면이 더 큰 의미가 있다면 숫자화시켜 의미를 상실케 하지 말고 그대로 수용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국 정나라 때 한 남자가 신발가게에 와서 자기 발 치수를 적은 종이쪽지를 집에 두고 온 사실을 알았다. 당황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가 쪽지를 가져왔지만, 신발가게는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친구가 물었다. “아니, 발이 있는데 종이쪽지가 왜 필요한가?” 그러자 남자가 당연 하다는 듯 대답했다. “발보다야 숫자가 더 정확하지!”

숫자 좋아하다가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오류에 빠진다는 걸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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