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품을 창조하고 싶은 크리에이터들에게   

2019. 5. 3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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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마케팅은 다음 책을 쓰는 것이다”


이 문구는 나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2015년에 책을 낸 이후로 4년 동안 내 책을 쓰지 못한 채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나를 이처럼 아프게 비판하는 문구는 없다. 내가 책을 쓸 동기를 가지지 못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 책(<당신들은 늘 착각 속에 산다>)이 나의 기대와 달리 판매가 아주 부진했기 때문이다. 나름 홍보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책이 출간된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제목 탓이었을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책 제목을 매번 틀리게 말할 정도로 입에 착 달라붙지 않았으니까. 출판사의 마케팅이 소홀했기 때문일까? 전작만큼 출판사에서 밀어주지 않는 느낌이라 서운하기도 했으니까. 아니면, 독자들이 ‘착각’과 ‘경영 심리’라는 키워드에 식상해졌기 때문일까? 때마침 심리학 관련 책들이 붐을 이루며 서점 매대를 점령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 <창작의 블랙홀을 건너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가 뼈아프게 지적하듯이, 모든 건 나의 책임이다. 제목도, 출판사도, 독자들도 아닌, 바로 크리에이터인 나의 잘못이다. 솔직히 전작 <착각하는 CEO>가 경영서 치고 꽤 많이 팔리고 이를 통해 나의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고 해서 방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연속하여 책을 내면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판매가 될 줄 기대했다. 전작의 문체와 구성을 그대로 따르며 책을 쓰는 편안한 방법을 택했고, 블로그나 페이스북 정도로 홍보를 하면 전작을 읽었던 독자들이 다시 구매할 줄 알았다. 독자들에게 왜 다른 책을 읽을 시간에 이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 책이 무슨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지 등을 알리는 데 소홀했다. ‘그런 일은 출판사가 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동안 책을 쓰느라 힘을 소진했으니 그 정도는 출판사가 해줘야 하는 건 아닌가?’란 안일함에 빠져 있었다.

그때 나는 이랬어야 했다. 전작이 CEO 혹은 리더가 범하기 쉬운 착각과 그 위험에 대해 다뤘으니, 후작에서는 그 대안을 좀더 심도있게 제시함으로써 ‘착각한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구성으로 책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나에게는 핑계거리가 있었다. ‘대안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지, 내가 해결책까지 일일이 줄 수는 없잖아. 고작 1~2만원 짜리 책에서 답을 구하려는 건 너무 욕심이 큰 거 아니야? 착각한다는 것 자체를 아는 게 중요해. 대안은 좀 천천히 고민해 봐.’라고 말이다. 돌이켜 보니 아주 건방진 생각이었고, 나 또한 심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2년 내에 후작을 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비록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독자들이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책을 읽을 만한 ‘새로운 컨텐츠’를 창조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또한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틈틈이 독자들과 소통했어야 했고 책이 나온 다음에는 ‘목표 대상’을 분명하게 타케팅하여 그들에게 나의 책이 입에 오르내리도록 면밀하게 작업했어야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뉴스 재킹’ 방법, 이메일 목록 활용, 약간은 노이즈 마케팅적인 이벤트 등을 출판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고 실천을 했어야 했다. 물론 (저자가 강조하듯이) 이렇게 마케팅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철두철미하게 기획되지 않았고 그리 참신하지 않았던 책의 내용으로는 앞으로 10년, 20년 이상 계속해서 읽히는 영원불멸의 작품이 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경영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책이 뇌리에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내가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새 책을 출간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친절하지만 신랄하게 알려준다. 저자 본인이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고, 베스트셀러 작가를 배출한 편집자이기에 그의 문장 하나 하나는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작가만을 위한 가이드는 아니다. 화가, 음악가, 스타트업 기업가, 디자이너 등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창조하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으려는 모든 크리에이터들, 자신의 창조물이 그저 몇 개월 반짝하다 사라질 존재가 아니라, 적어도 10년 이상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는 일상적 작품이 되길 희망하는 야심찬 크리에이터들에게 소중한 조언을 전하고 있다. 

요즘 나는 ‘드디어’ 새 책을 쓰고 있다. 계획된 분량의 반 정도를 썼는데, 이 책이 출간되면 옆에 두고 늘 참고하며 글을 쓸 요량이다. 지금껏 8권의 책을 썼고 14권을 번역한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왜 모든 크리에이터들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않겠는가?
 

 

교보문고로 가서 책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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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링] 최고의 질문이란 무엇인가?   

2019. 3. 1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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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이 성남시 분당에서 월 21일(목) 저녁에 튜터링 세션을 엽니다.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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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차잔과 울면, 그리고 아저씨   

2019. 2. 1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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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손에 이끌려 어쩌다 다방에라도 가면 머리에 스카프를 동여맨 화장기 짙은 누나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내오던 엽차잔. 그 위에 포개진 빨간 손톱과 엽차의 김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풍기는 민트껌 냄새가 엽차잔과 늘 따라다니는 흐릿한 감각이다. 


어릴 적엔 중국집에 가도, 백반집을 가도, 어쩔 땐 빵집에 가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었던 엽차잔이 어느덧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근대사 박물관에 가서나 겨우 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 무겁고 깨지기 쉬운 단점 탓이었을까? 이제 찻집이나 음식점의 물잔은 죄다 스텐레스나 플라스틱이 점령해 버렸다. 엽차잔만 골라 몰살시키는 바이러스라도 있지 않는 한, 어디에 가서나 볼 수 있었던 사기컵이 어떻게 이리 단박에 사라질 수 있는 걸까? 마치 공룡처럼?




한번 멸종된 엽차잔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중고 사이트를 찾아봐도, 벼룩시장을 이잡듯 뒤져도 비슷한 물건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후쿠오카의 빈티지 상점을 일부러 찾아갔었는데, 주인이 내가 스마트폰으로 보여준 사진을 보더니 자기네 가게에 있다고 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헌데 그가 들고 나온 잔은 사진과 완전 딴판이었다. 모양도 색깔도 전혀 다른, 회색 질그릇을 같은 거라고 우기듯 말하다니! 난 웃었지만, 사실 그건 주인에게 던진 비웃음이었다. ‘사람 눈을 어떻게 보는 거야?’


수집하기로 마음 먹은 지 근 2년이 되어서야 나는 서울풍물시장의 어느 점포에서 마침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기대 없이 둘러보는데, 엽차잔 5개가 흰 노끈으로 묶인 채 먼지를 덮어쓰고 있지 않은가? 보아하니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소위 ‘데드 스톡(dead stock)’인 듯 했다. 한 개에 1만원. 옛날엔 1,000원도 안 될 가격이었겠지만, 비싸도 어쩔 수 없다. 언제 만날지 모르니까. 하나만 사는 행위는 콜렉터로서는 실격 사유일 터, 나는 5개를 모두 샀다. 쓰다가 깨질 수도 있으니까.


기억 속에 각인된 엽차잔의 모서리 수는 팔각이었는데, 이제와 세어보니 무려 열두각이나 된다. 새삼 신기한 발견이다. 안쪽 면은 원형으로 매끄러운 모양인데, 요새 쓰는 컵에 비해 물이 담기는 양이 별로 안 된다. 기껏해야 100ml 정도? 목이 마를 때는 세 컵 정도는 연신 마셔줘야 비로소 갈증이 풀린다. 그래서 이 컵에는 물컵이라는 말보다 엽차잔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나 보다. 엽차잔이란 이름에 걸맞게 본디 찬물보다는 뜨거운 차가 담아 마셔야 하는 컵이다.




어릴 적 기억은 페이지가 대부분 떨어져 나간 그림책처럼 단편적이다. 그래도 유난히 자세히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그 장면에 등장하는 여러 물건들 중 하나가 바로 엽차잔이다. 열 두 살 쯤 나는 동네 교회를 다닌 적이 있다. 친구가 크리스마스 때 가면 맛있는 걸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이제는 얼굴도 희미하게 떠오르는 여선생님의 피아노 소리에 반해 몇 달을 독실한 신도인 체 행세하고 다녔다. 

교회 활동을 하다가 남자 어른들과 안면을 트게 됐는데, 그 중 한 아저씨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내가 지금도 상세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은 친구와 함께 그 아저씨를 따라 교회 근처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었던 장면이다. 나는 그때 매번 먹던 짜장면이 아니라 어린 나에게 이름마저 생소한 울면을 주문했다. 실은 아저씨의 추천 때문이었다. “짜장면은 자주 먹잖아. 이 집 울면 맛있어. 먹어 봐” 


아저씨는 자기 몫으로 나온 짬뽕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엽차잔을 손에 쥔 채 그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삶이 어떠했고, 믿음과 소망이 무엇이고,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울면은 말그대로 울고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고, 아저씨 이야기는 목사님 설교보다 재미가 없었다. 점심 사주는 대가로 그보다 혹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위선자였다. 동네 친구들과 야구 놀이를 하다가 아웃이니 세이프니 하며 옥신각신한 적이 있다. 하필 그렇게 떠들며 놀던 놀이터 뒷집(아파트 1층)이 그 아저씨 집일 줄이야!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라 우리를 점잖게 타이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눈알을 부라리며 이 새끼들 저 새끼들 하며 욕을 해댔다. 몽둥이를 들고 나올 기세였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눈이 촉촉해질 정도로 예수님의 성스러운 삶을 이야기하던 모습과 우리에게 쌍욕을 날리는 모습은 도무지 하나의 인간으로 포개지지 않았다. 




내가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게 되고 지금껏 무교로 버티게 된 계기는 우습게도 그 아저씨 때문이었다. 도저히 교회에서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위선자란 단어를 그때는 몰랐지만, 사람좋은 얼굴을 하고 다닐 그의 모습이 어린 나에게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더욱이 피아노 소리가 청아했던 선생님은 개인 사정이라며 며칠 전부터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나이롱 신자’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엽차잔 덕에 이렇게 한 타래의 기억이 고스란히 딸려 나온다. 어찌보면 어릴 적 물건들은 하나하나가 USB 메모리처럼 훌륭한 저장장치가 아닐까? 물건 하나에 기억 한 줌씩. 이렇게 한 줌 한 줌이 모여 소년의 시간이 된다. 생각해 보니, 그 때 이후로 한 번도 울면을 먹지 않은 것 같다. 세상 맛 없는 음식 중 하나를 발견하게 해 준 아저씨 덕분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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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요청할 때는 이메일을 보내지 마라   

2019. 2. 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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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이메일이 의사소통의 도구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2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첫 입사하던 해에 직원들이 이메일 사용법을 몰라 해맸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도구로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1)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업무의 대부분을 수행하는 직원들도 상당히 많죠. 그래서인지 상대방을 찾아가서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 빠르게 처리될 것 같은데도 이메일로 업무를 요청하고 자료를 주고 받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대면으로 요청하거나 논의하면 금방 끝날 것 같은 일을 왜 이메일을 주고 받으면서 진행하느냐, 이메일을 보내고 답신을 받느라 시간을 지체시키는 건 아니냐라고 물으면, 여러 답변이 나오지만 대략 두 가지로 정리가 되더군요. 하나는 '이메일로 증거를 남겨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메일로 요청하는 게 얼굴 보며 부탁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서로 업무의 책임 소재를 다투는 경우라면 어느 정도 타당한 주장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두 번째 이유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메일이 마음도 편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효과도 대면 요청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메일로 기록이 남기 때문에 요청에 응할 가능성이 크다라는 추가적인 근거를 댑니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과연 신빙성이 있는 걸까요? 워털루 대학교의 M. 마디 로가니자드(M. Mahdi Roghanizad)와 코넬 대학교의 바네사 본스(Vanessa K. Bohns)는 이메일 요청이 대면 요청보다 상대방을 설득하는 효과, 즉 상대방으로부터 '예스(yes)'를 이끌어내는 효과가 높을지를 따져보기로 했습니다. 두 연구자들은 495명의 참가자들을 45명의 요청자(requester)와 450명의 대상자(target)으로 나누었고, 요청자들을 다시 '대면요청 그룹'과 '이메일 요청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10명의 낯선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지시했죠. 


로가니자드와 본스는 요청자들이 설문지 작성 요청을 하기 전에 대상자들이 얼마나 요청에 응할지 예상해보라고 함으로써 실제 결과와 비교해 보고자 했습니다. 실험 후에 분석해 보니 이메일 요청 그룹의 참가자들이 이메일의 설득 효과를 과신한다는 결과가 도출되었습니다. 아래의 그래프를 보면, 대면 요청은 예상보다 설득 효과가 좋은 반면, 이메일은 그 효과가 형편 없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근소하긴 하지만, 이메일 요청 그룹이 대면 요청 그룹보다 '예스'라는 답을 더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을 볼 수 있죠.


(출처(source); 아래에 명기한 논문)



480명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두 번째 실험에서는 실험조건을 약간 달리했습니다. 요청자들은 대상자들에게 설문지를 완성하면 1달러의 보상을 주겠다고 말한 다음 설문지를 완성하고 나서 1페이지 짜리 글의 문법이 맞는지를 '공짜로' 점검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추가적으로 부탁하는 '공짜' 작업을 덧붙임으로써 결과가 어떻게 바뀔지 보려 한 것이죠. 각각 대면 요청 조건과 이메일 요청 조건으로 실험한 진행한 결과, 첫 번째 실험과 마찬가지로 대면 요청 그룹은 대면 설득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이메일 요청 그룹은 이메일의 설득 효과를 과신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또한, 대상자들은 이메일 요청자들보다 대면 요청자들을 더 신뢰하고 더 '공감(empathy)'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간단한 실험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정보 전달 도구로서가 아니라 요청 혹은 설득의 도구로서 이메일은 그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메일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비대면 도구인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편리하고 심리적으로 안전감을 준다 해도 상대방이 요청에 응하리라는 기대까지 높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이메일 뿐만 아니라 메신저, 사내 SNS 등 컴퓨터 및 네트워크 기반의 의사소통 도구가 일상화되면서 비대면이 주는 안락함에 기대는 게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일이 되게 하고' 상대방에게 신뢰와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대면 소통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이메일은 정보 공유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이 실험이 주는 시사점입니다. 미래에는 대면 소통을 완전히 대체할 만한 도구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예상하건대 그런 도구는 궁극적으로 대면 소통 방식을 완전히 '모사'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 봅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다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영화 '킹스맨'의 홀로그램을 통한 원격화상 회의처럼 말입니다).


(출처: 영화 <킹스맨>)



오늘 누군가에게 크고 작은 일을 요청한다면 이메일보다는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길 바랍니다. 그게 어렵다면 전화가 차선책입니다. 이메일에 적힌 차가운 문장이 아니라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소통 방식이 우선입니다. 인간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주1) 이메일은 1978년에 시바 아야두라이(Shiva Ayyadurai)가 개발하고 저작권을 등록했다. 일상적으로 활발하게 쓰이기 시작한 건 그 후 20년 정도가 흐른 후였다. 


*참고논문

Roghanizad, M. M., & Bohns, V. K. (2017). Ask in person: You're less persuasive than you think over email. Journal of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69, 22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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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가 먼저냐, 성과가 먼저냐, 그것이 문제로다!   

2019. 1. 3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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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문화가 성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이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직문화가 좋아지려면 먼저 성과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몇몇 CEO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조직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회사의 성과가 좋아야 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분위기가 생기지 않겠나? 어느 정도 재무적인 성과가 축적되어야 조직문화에도 신경 쓸 여력이 있지 않겠나?" 이들은 조직문화가 성과에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지만, 성과 역시 조직문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는 조직문화가 성과에 끼치는 영향(culture to performance, C2P)보다 성과가 조직문화가 끼치는 효과(performance to culture, P2C)가 더 크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무엇이 우선순위가 더 큰 원인(causal priority)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과를 올리려면 먼저 조직문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구축해야 할까요, 조직문화를 바람직하게 형성하려면 먼저 성과를 끌어올려야 할까요? 다시 말해, 조직문화가 우선일까요, 반대로 성과가 먼저일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조직문화와 성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제3의 원인이 조직문화와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이처럼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이 경영 현장에서 지금도 한창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런 논쟁을 끝내도 될 만한 연구 결과가 이미 2015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에이온 휴잇(Aon Hewitt)이라는 컨설팅 회사를 다니는 앤서니 보이스(Anthony S. Boyce)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자 '조직 행동 저널(Journal of Organizational Behavior)'에 동료 학자들과 공동 발표한 논문을 통해 "조직문화가 먼저다"라는 결론을 제시했습니다. 보이스는 동일 자동차업체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판매하는 95개의 딜러샵으로부터 2000년부터 2005년까지(6년간)의 자료를 수집 분석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각 딜러샵이 진행한 조직문화 설문조사와 고객만족도 조사 결과를 수집하고 자동차 판매 데이터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판매부서(sales department)와 서비스 부서(service department)로 대상을 구분하고, 성과를 '고객만족도'와 '자동차 판매'로 구분함으로써 좀더 구체적인 분석을 시도했죠.


다소 복잡한 통계 분석을 통해 도출된 결론은 이러했습니다(분석 과정과 결과는 아래 명기한 논문을 참조).


(1) (판매부서와 서비스 부서 공히) 조직문화가 고객만족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고객만족도가 조직문화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2) 조직문화가 자동차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자동차 판매가 조직문화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3) 조직문화가 자동차 판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에 고객만족도가 매개요인으로 작용한다.




요약하면, 조직문화가 성과 창출에 미치는 영향은 존재하지만, 성과가 조직문화 개선에 끼치는 효과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즉, C2P는 존재하지만, P2C는 없다는 뜻입니다. "회사에 돈이 많으면(풍족하면) 조직문화는 저절로 나아진다"라는 주장이 근거 없음이 밝혀진 셈이죠. 또한 "돈을 먼저 좀 벌고 나서 조직문화에 신경 쓰겠다"라는 발상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조직문화와 성과 사이의 '상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조직문화가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한쪽 방향의 화살표'만 존재한다는 것이죠. 이는 "조직문화가 좋으면 성과가 좋아지고, 성과가 좋아지면 다시 조직문화가 좋아진다"고 말할 근거도 없다는 뜻이니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잡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래의 그림이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는 도표입니다.


(출처: 아래 명기한 논문)




이 도표를 보면 또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데, 바로 '시차(time lag)'입니다. 조직문화가 고객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려면 1~2년 가량의 시간이 걸리고, 이것이 다시 자동차판매에 좋은 영향으로 이어지는 데에 2년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문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구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손에 잡히는 성과로 (특히 돈으로) 나타나려면 최소 2~3년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이는 경영자와 관리자들이 주의해야 할 대목입니다. 1년 단위의 단기 경영 방식에 함몰되어 있다면, 조직문화 혁신 활동이 무용한 일이라고 너무나 성급히 판단한 나머지 "성과가 좋아야지, 조직문화가 중요한가"라면서 직원들에게 성과 창출을 강요하는 관행으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효과가 발생하려면 적어도 몇 년은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조직문화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성과가 뒤따릅니다. 성과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조직문화가 뒤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논쟁에 빠져 있는 조직이라면 이 결론을 지나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과를 높이려면 나빠질대로 나빠진 조직문화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먼저입니다. 차등보상을 앞세운 성과주의로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참고논문

Boyce, A. S., Nieminen, L. R., Gillespie, M. A., Ryan, A. M., & Denison, D. R. (2015). Which comes first, organizational culture or performance? A longitudinal study of causal priority with automobile dealerships. Journal of Organizational Behavior, 36(3), 339-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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