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는 컴퓨터가 아니다   

2017. 7. 2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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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6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1955년 4월 18일에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후에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뇌를 특별히 궁금해 했다. 뉴턴의 절대론적 과학관을 무너뜨리는 상대성이론을 제시하고 양자물리학(아인슈타인 본인은 양자역학에 회의적이었지만)의 기초를 닦은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이었기에 당연히 그의 뇌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던 모양이다. 들어본 적 있겠지만, 아인슈타인의 시신을 부검하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뇌만 빼내고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어찌어찌해서 하비는 가족을 설득해서 뇌를 연구할 수 있도록 승낙을 받아냈고, 아인슈타인의 뇌는 240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여러 신경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의 뇌 구조를 조사한 신경과학자 샌드라 위틀슨은 ‘하두정소엽’이라는 부분이 일반인들에 비해 상당히 크고 형태도 특이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하두정소엽은 공간적 추리력과 수학적 직관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평균 이상으로 발달되었기에 일반상대성 이론과 같은 천재적 업적을 달성한 것이 아닐까 위틀슨은 추측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만 특별히 발달된 하두정소엽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수학자와 일반인의 뇌를 비교해 본 신경학자 쿠빌레이 에이디나가 수학자들의 하두정소엽이 일반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아인슈타인의 뇌는 생각만큼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뇌의 특정 부위가 평균 이상으로 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알고보면 단순하다. 어느 하나의 능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면 그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마도 들어봤을 텐데, 바로 런던의 택시기사들의 이야기이다. ‘올 런던(All London)’이라고 불리는 런던의 택시 면허 시험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모든 도로와 주택단지뿐만 아니라 공원, 관청, 호텔 등 손님이 목적지로 요청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장소를 알아야 하고 가장 이상적인 경로를 꿰뚫고 있어야 시험에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망생들 중 절반 이상이 도중에 탈락하거나 포기한다. 


엘리너 맥과이어라는 신경학자는 런던의 택시 운전사 16명의 뇌를 MRI로 관찰했는데, 공간 탐색과 위치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의 뒷부분이 택시 운전사가 아닌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컸다. 같은 대중교통 분야에서 일하는 버스 운전사들과 비교해도 역시나 그들보다 크기가 상당히 컸다. 알다시피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가지만, 택시는 손님이 원하는 위치로 가기 위해 매번 길 찾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다. 택시 운전을 오래 해서 해마가 커진 게 아니라 애초에 해마가 큰 사람들이 어렵기로 악명 높은 택시 면허 시험을 통과한 것은 아닐까? 시간적 선후관계가 반대일 가능성이 충분했는데, 맥과이어는 후속 연구를 통해 혹독한 교육을 거쳐 택시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시험 전에 비해 해마의 뒷부분이 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택시 운전을 시작하면서 모든 장소와 이동경로를 학습하는 과정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해마가 발달한다는 뜻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뇌 조각을 들고 있는 토머스 하비



컴퓨터보다 뇌가 훨씬 오래 전에 생겨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의 뇌를 CPU나 메모리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이런 비유는 비록 직관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뇌가 CPU의 성능처럼 한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형성시키고, 학습 과정은 메모리에 소프트웨어를 띄우는 일과 같다는 인상을 갖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수학자와 런던 택시기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인간의 뇌는 훈련을 통해 언제든 커지고 더 발달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닌다. 집중적인 근육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는 것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이를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학습이란 뇌의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옳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은 크기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기관의 ‘역할 재배치’에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시각장애인들의 시각피질은 그 기능이 정지해 버린 ‘암흑 지대’라고 간주하겠지만, 뇌는 손가락으로 점자를 읽는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미를 해석하도록 시각피질에 새로운 기능을 할당한다. 이래도 뇌가 컴퓨터의 CPU나 메모리와 비슷한가? 



고백하자면, 요즘 눈 앞의 글씨가 안 보여서 책이나 모니터를 볼 때마다 안경을 벗어 머리 위에 걸쳐놓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게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근시와 원시 사이, 소위 ‘노안’이 찾아온 것이다. 매번 안경을 벗는 게 귀찮고 안경이 쉽게 망가질 것 같아서 나는 안경 렌즈 부위만 위로 들어올리는 플립형 안경을 끼고 다닌다(사람들이 다 신기해 한다!). 안과의사는 어쩔 수 없는 과도기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연습을 통해 노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 신경학자 유리 폴라트의 연구를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의 연구에서 일주일에 세 번 30분씩 시력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체의 색과 배경의 색이 아주 비슷해서 어떤 물체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를 계속 맞혀야 했다. 3개월 후에 참가자들은 예전보다 60퍼센트 더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축 쳐진 수정체가 탄력을 회복해서가 아니었다. 뇌가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더 잘 해석해 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뇌는 물렁물렁하다. 아인슈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런던에서 그 어렵다는 택시 운전쯤은 할 수 있고 불편한 노안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집중적인 훈련과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사람의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일은 그만하지 싶다. 아인슈타인의 뇌 이야기가 어떻게 경영과 연관이 있는지 궁금할지 모르겠다.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뇌는 컴퓨터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이런 기계론적 시각을 버려야 직원을 로봇처럼 여기는 기계론적 경영방식을 없앨 수 있을 테고, 넓게는 인간성을 회복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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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로봇이 되기를 바라는 회사   

2017. 7. 2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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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5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신입사원을 채용해서 한달 만에 현업에 투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달 만에요?”

“교육을 하든 어떻게 하든 빠르게 업무능력을 높여서 현장에 투입해야 한다는 게 CEO의 지시사항입니다. ”


몇 년 전에 모 고객사로부터 이런 의뢰를 받았다. 난감했다. 1999년부터 그때까지 컨설팅 일을 하면서 그런 의뢰는 처음 받아 봤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이유로 신입사원을 그렇게 빨리 투입하려고 하십니까?”

“단독으로 스스로 알아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적어도 시간이 2~3년 걸리는데, 그게 회사로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채용하자마자 한두 달 교육을 시켜서 바로 그 인력을 활용해야(정확히는 “써먹어야”라고 표현함) 비용도 확 줄이고 다른 회사보다 경쟁력 있는 인력을 운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획기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이시니까 다른 회사의 사례를 알고 계실 테고, 뭔가 방법을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난감해졌다. 전문가라고 해서 답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사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의 원칙이다. 못하면 못한다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좋다. 컨설팅 수수료를 받으려고 무조건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 결국 끝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회사 사례도 저는 아는 바가 없고요. 신입사원을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바로 활용하신다니, 너무 급하신 거 아닌가요?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를 ‘형식지’라고 함)은 어떻게든 한 달 안에 학습이 가능하겠지만, 노하우라든지 상황대처능력이라든지 그런 ‘암묵지’는 업무를 통해서 서서히 체득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선임 직원과 파트너가 되어서 적어도 2~3년은 현업에서 ‘굴러 봐야’ 스스로 업무를 맡아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겠죠. 2~3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만…”

상대방은 내 말을 이해했지만 “CEO가 계속 채근하셔서…”라며 난감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짐작컨대 CEO는 어디에서 ‘즉전력(卽戰力)’이라는 말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바로 전장에 투입시켜도 될 만한 능력을 말하는 일본식 단어이다. 일본 구인 사이트를 보면 즉전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가 제법 자주 등장하고,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즉전력을 갖췄다는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곤 한다. 이 단어는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가 2007년에 펴낸 <즉전력>이란 책의 제목이 될 정도니 일본에선 어지간히 흔하게 쓰이는 말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례가 있는지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뢰를 받아들일 마음은 하나도 없었지만, 대체 즉전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즉전력>이란 책을 살펴봤다. 그가  책에서 소개한 즉전력의 구성요소는 어학력, 재무력, 문제해결력, 공부법, 회의술(토론력)이었다. ‘별거 아니네?’란 느낌이 바로 들었다. 이 5가지는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새로울 것은 없었다. 여느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 아닌가? 5가지를 조합해서 즉전력이란 단어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고객사 담당자가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단독으로’ 일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 회사 CEO는 오마에 겐이치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바로 현장에 투입할 만한 능력’이라는 즉전력의 사전적 정의만 어디에선가 듣고서 ‘멋진 말이다. 우리 회사도 그렇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신문 기사에 간혹 나오는 CEO들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네 회사는 인재가 우선이고 인재 양성을 중요시한다는 말이 십중팔구 등장한다. 나는 약간 시선이 삐딱한지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직원, 열심히 일하는 직원, 높은 성과를 올리는 직원을 ‘원하기만’ 할 뿐, 그런 직원들을 어떻게 채용하고 어떻게 육성시킬 것인지는 뒷전에 밀려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거의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모 대학교에서 ‘공학 교육의 방향’이란 주제로 열린 주제 발표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다. 아마도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란 책을 썼다는 이유로 나를 초청을 한 듯 했다. 여러 연사들 중 한 사람의 발언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모 기업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신입사원들이 회계를 몰라서 자기네들이 회계 교육을 시키느라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많이 드는지 아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에서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대학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게 요지였다. 학생들을 회사에 취업시키고 싶다면 전공과 상관없이 회사 생활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싶은 거냐, 라는 그의 주장이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왜 대학에게 떠넘기면서 비용과 시간 문제를 운운하는가? 취업문이 좁아지니까 기업이 대학에게 ‘갑질’을 하는 듯 보였다. 대학은 취업 준비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기초 지식을 함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 아닌가? 회계 지식이 그렇게 필요하면 자기네 회사에서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인재를 중요시하는 회사가 단지 비용과 시간이 든다고 호통을 쳐야 하는가?




즉전력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짜증이 솟구친다. 지긋지긋한 빨리빨리 문화라는 악습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인력을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여기고, 대학을 로봇을 제조하는 공장처럼 여기며, 그 로봇에 한 두 달 정도 지식과 정보를 ‘다운로드’하면 단독으로 업무 수행이 가능한 실전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계론적 경영방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 하에서 직원들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질 것이다(이미 그런 직원들이 제법 있다).


몇 년 전에 나에게 전화해서 즉전력을 한 두 달 안에 갖추는 방법을 의뢰했던 사람은 그 후로 한 두 번 더 연락을 해오다가 끊겼다. 다른 컨설팅사가 의뢰를 받아 들였는지, 아니면 그런 주제가 흐지부지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소문이 없는 걸 보니 그 회사가 즉전력 있는 직원들을 키워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성공했다면 유수의 경영 잡지에 소개됐을 테니까. 만약 성공했더라도 한 두 달 만에 즉전력 있는 직원을 양성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들의 업무가치가 저급하다는 증거일테니.


“즈쩡녕이 뭐에요?"

어려운 단어를 말할 때 H군의 발음은 이렇게 꼬이곤 한다. 꼬이는 건 H군만은 아니다. 빨리빨리 ‘인력 로봇’을 찍어내려는 기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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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나으세요'라는 말의 잔인성   

2017. 7. 1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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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7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날씨가 점점 더워져서 방에 작은 벽걸이형 에어컨을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에 연희동 모 전자제품 대리점의 점장으로 있는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 끝이 ‘왕’으로 끝나기에 우리(나, H군, 정왕씨)끼리 편의상 왕 아저씨로 통하는 그 분은 우리가 사무실을 오픈할 때 냉난방기 설치를 부탁할 때부터 알게 된, 연희동의 사실상 토박이(연희동에서 태어났는지는 몰라서)였다. 그때 동네 아저씨처럼 이것저것 우리에게 유리하게 냉난방기 구입을 ‘컨설팅’해 주었던 게 참 인상적이었다. 연희동에서는 왕 아저씨처럼 오랫동안 터를 잡고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한 마디만 하면 ‘어, 알았어.’라고 말하며 ‘알아서 해주곤’ 한다. 


사실 왕 아저씨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전화를 받을까 살짝 염려가 됐다. 왜냐하면 H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1년 전인가, H군은 TV 하나를 살까 해서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TV의 광팬인 H군에게는 당연히 TV가 있었지만 오래 되고 화질도 변변찮고 ‘두꺼웠기’ 때문인지 기존 TV를 얄쌍하게 잘 빠진 최신 기종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헌데 왕 아저씨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H군은 놀랐다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요?”라고 내가 물으니,

“왕 아저씨가 아프시다네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데요.”라고 H군이 대답했다.

“많이 아프시데요?”

“병명은 잘 모르겠는데, 꽤 오래 입원해야 한데요.”




H군은 한번 단골 관계를 맺으면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지 않으려는 ‘고객 충성도’가 높다(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새 TV를 사고 싶은 욕구가 싹 가라앉았는지 그렇게 노래 부르던 ‘TV를 사야겠다’는 소리를 그 후로는 들을 수 없었다. 물어보니 아직 옛날 TV를 그대로 쓴단다. 왕 아저씨가 아니면 TV를 살 수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는 다 완쾌되셨기를 빌며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거니 이제는 퇴원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에어컨 하나를 설치하고 싶다고 하니 왕 아저씨는 “언제 한번 들를게요”라고 바로 대답하곤 일이 바쁜지 전화를 급히 끊었다. 나는 ‘동네 영업자’의 ‘내가 알아서 해줄게’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헌데 그 후로 2주일 가까이를 기다렸지만 왕 아저씨의 ‘언제 한번’은 소식이 없었다. 나도 에어컨이 그리 급할 것 없었다. 벌써 7월 중순이니 이번 여름은 그냥 참고 넘어갈 참이었다. 그렇지만 요 며칠 한껏 높아진 습도 때문에 끈적거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왕 아저씨에게 SOS를 쳤다.


이러저러 해서 왕 아저씨가 결국 집을 방문해서 에어컨 설치 위치를 살펴 보게 됐다. “이렇게 설치하면 되겠네”라고 말하며 일이 바쁜지 급히 자리를 뜨려는 아저씨에게 시원한 매실차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프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일이 너무 바빠 무리가 될까 걱정이에요.”

“오랫동안 아프셨으니 무리하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왕 아저씨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쉬엄쉬엄 할 수 있게 해주지 않네요. 월급쟁이가 그렇죠. 실적 압박도 있어서 뭐…”

왕 아저씨는 매실차를 한번에 들이킨 다음에 말을 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도 어찌나 전화가 많이 오는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참 많이 받았어요.”

H군의 전화도 한몫했었겠군,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고객들이 전화를 많이 했나봐요? 워낙 영업을 잘하시니까요.”

“글쎄요, 고객들 전화도 많았지만, 직원들이 ‘이건 어떻게 하냐, 저건 어떻게 하냐’ 하는 전화를 많이 하더라구요.”

왕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자기들이 안 아프니까 아픈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이 말은 아파도 제대로 아플 수 없는 한국 직장인들의 서글픈 단면과 ‘잔인성’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병원에 있다면 요양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남들은 바쁘게 일하는 데 팔자 좋게 혼자 휴양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주 간혹이지만 주변에 있다. 고용주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말이다. 누군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겠다면 ‘빨리 건강해져라’는 측은지심과 ‘이렇게 바빠 죽겠는데 왜 지금?’이라는 감정이 야릇하게 혼합된 표정이 느껴진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픈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너의 일을 내가 떠맡아야 하는구나’하며 한숨을 쉰다. 잘 모르는 게 있다는 이유로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지만, 이것저것 묻는 말의 행간에는 ‘너 때문에 내가 아주 힘들다’라는 푸념이 들어 있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고스란히 병자에게 제대로 아프지 못하게 만드는 부담으로 전달된다. 추측컨대, 왕 아저씨의 경우에도 그랬을리라.


얼마 전, 갑작스러운 허리 디스크 수술로 일주일 동안 입원했던 지인도 그랬다. 마치 허리 디스크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동료들과 부하 직원들이 병실로 전화해서 ‘팀장님이 빨리 오셔야 해요. 일이 진행이 안 돼요.”라는 죽는 소리를 여러 번 하더란다. 퇴원 후에 집에서 며칠 간 요양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조언했지만 그런 직원들의 등쌀(?)에 못이겨 바로 회사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단다. 주말에도 말이다. ‘빨리 오셔야 해요’란 말은 ‘빨리 나으세요.’라는 위로의 뜻이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런 변명은 자신의 말이 아픈 자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무감하다는 증거다. 생각해 보라. 아픈 자가 어떻게 빨리 나을 수 있겠는가? 그건 의사가 할 일이다. 아픈 자는 오롯이 병에 집중하고 충분히 아플 ‘여유’를 가져야 한다. 낫는 것에도 그 지긋지긋한 ‘빨리빨리’를 외치며 스트레스를 주는가?


아픈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잔인’해졌는가? 경쟁과 성과 창출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버려진 연탄 재처럼 이리저리 채인다. 마음 놓고 아플 수 없는 직장이 직장인가? 급히 떠나면서 던지는 왕 아저씨의 말이 아프게 박힌다.


“아프면 자기만 손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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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해 보이려면 야근하지 마라   

2017. 7. 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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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4일(금) 유정식의 경영일기 


“오늘따라 왜 그렇게 늙어 보여요?”

날 보자마자 H군이 이렇게 말했다. ‘늙어 보인다고?’ 솔직한 건지 거리낌이 없는 건지, 아무튼 H군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나는 “어제 잠을 잘 못자서 그래요.”라고 얼버무렸다.

H군은 책상에 앉으려는 내 등을 향해

“잠을 잘 자야 일도 잘 하죠.”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조언을 했다.

에잇, 이 사람이!

“알아요. 요즘 번역이 밀려서 그거 하느라 어제 늦게 …… 어라?”

H군은 어느새 사무실 밖으로 나가더니 유리창 밖에서 입모양으로

“고양이 밥 좀 주고 올게요.”라고 하더니 계단을 총총거리며 내려가 버렸다.

뭐야, 도대체.

그러려니 하고 내 책상에 앉아 거울을 보니 정말 오늘따라 더 늙어보이긴 했다. 얼굴 피부가 푸석푸석하고 눈은 좀 부어서 작은 눈이 더 작아져 버렸고, 미간에 있는 주름이 더 깊게 패어 보였다. 게다가, 늦게 잤더니 늦게 일어나게 됐고 사무실에 늦게 나와 일하게 됐다. 결국 일에 투여하는 시간은 많아지지 않았고 피곤함만 가중돼 버렸다. 늙어 보인다는 소리까지 듣고 말이다. ‘야근’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PC를 켠 다음 습관처럼 논문 사이트에 접속했다. 매일 1편 이상은 논문을 읽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실천한 지 이제 10년이 다 돼 간다. 우울해진 기분을 전환시켜 줄 논문은 어디 없나? 하루에 살펴야 할 논문이 대략 50편에서 많게는(밀렸을 때) 100편 이상이 되는데, 그걸 다 읽을 재간은 없다. 일단 제목만 보고 흥미가 당기거나 일과 관련이 있겠다 싶은 논문 몇 개를 클릭하여 상세한 내용을 살펴보고, 지금 읽을 것과 나중에 읽을 것을 구분해서 메모장에 적어 둔다. 나중에 칼럼을 써야 할 때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 있고, 블로그 글에 쓸 소재를 ‘쟁여 둘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다. 


‘똑똑하게 보이려면 얼굴 표정 두 가지를 조정하면 된다고?’

H군에게 얼굴 표정을 지적 받은 터였기에 클릭해서 몇 줄 읽어보니 ‘잠 부족’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필요할 때 딱 맞는 논문이 나타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오늘도 그랬다. 논문을 쓴 션 탈라마스Sean Talamas 박사는 휴식을 충분히 취한 사람은 눈을 크게 뜰 수 있고 얼굴에 잔주름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타인을 평가할 때 눈이 게슴츠레하고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으면 피곤하고 기분이 저하된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고 인지능력 또한 떨어졌으리라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 표정이 그런 사람이 똑똑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탈라마스는 말한다.


그는 18세부터 33세에 이르는 성인 100명, 5세부터 17세까지의 학생 90명의 사진을 참가자들에게 보여주고 얼굴에서 느껴지는 똑똑함의 정도와 매력도의 정도를 평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실험을 통해 이런 결과를 얻었다. 또한 얼굴 이미지를 가지고 눈꺼풀이 내려온 정도와 입 주변의 주름살을 조작해서 참가자들에게 평가하도록 한 실험에서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


누가 더 똑똑해 보이나요? 출처: 아래의 명기한 논문 (Talamas et al., 2016)



그가 제안하는 ‘똑똑하게 보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눈꺼풀이 얼마나 밑으로 내려와 있느냐와 미세한 주름살이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이냐의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결국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해법이라고 탈라마스는 결론 내린다. 얼굴의 매력과 똑똑해 보이는 것과 ‘정(+)의 상관관계’가 있긴 하지만, 평소에 얼굴의 매력도가 떨어지는 사람도 수면을 충분히 취함으로써 눈을 환하게 뜨고 주름살 적은 ‘팽팽한’ 표정을 보이면 똑똑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다음날 중요한 면접이 있거나 회의가 있다면,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잠을 뒤척이겠지만, 그래도 충분히 자는 것이 상대방에게 똑똑하게 보이는 것이 전술상 좋은 해법이겠다 싶다.


‘야근이 문제로구나.’

이제 밤에 일하는 습관은 버려야겠다. 일하는 시간은 결국 똑같고, H군에게 늙어 보인다는 소리까지 들으니까 말이다. 논문을 다 읽은 나는 마음이 더 울적해져서 책상을 박차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아이스 플랫 화이트 한 잔을 쭉 들이키면 피곤하고 똑똑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 좀 나아지겠지?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 나는 ‘커피숍에 한번 갔다 오면 1시간이 그냥 흐를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왜 어젯밤에 1시간을 더 일했는지 후회가 밀려 들었다. 이래저래 일할 시간은 야근 때문에 오히려 줄어들지 않았는가? 야근은 정말 백해무익이다.


“어디 가요? 같이 가요.”

어느새 고양이 밥을 다 주고 온 H군이 따라 붙었다. 혼자 호젓하게 즐기려던 계획이 무너져 버렸다.



(*참고논문)

Talamas, S. N., Mavor, K. I., Axelsson, J., Sundelin, T., & Perrett, D. I. (2016). Eyelid-openness and mouth curvature influence perceived intelligence beyond attractiveness.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General145(5), 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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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소금이 들어 있을까?   

2017. 7. 1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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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2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둘 중에 어디에 소금이 들어 있을까요?”

나는 여러 주제로 강의를 할 때마다 아래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렇게 묻기를 즐긴다. 왼쪽 병은 구멍이 세 개 뚫려 있고 오른쪽 병은 구멍이 다섯 개 뚫려 있는 것 말고 두 병은 색깔이나 모양이 똑같다. 레스토랑에 가면 어디에 소금과 후추가 들어 있는지 헛갈리는 두 개의 병이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을 자주 봤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물으면 통계적으로 따져 본 건 아니지만 대략 “구멍 세 개 짜리가 소금이다”, “아니다. 구멍 다섯 개 짜리가 소금이다.”라고 의견의 거의 반반으로 나뉘는 경향을 보인다. 흥미롭게도 나이가 좀 있는 직원들은 다섯 개 짜리를, 젊은 직원은 세 개 짜리를 소금으로 지목하곤 한다. 어느 것이 소금이다, 라고 말할 때 각자가 드는 근거도 흥미롭다. 소금 결정의 크기가 후추보다는 크기 때문에(왜?) 구멍 다섯 개 짜리가 소금병이라고 말하고, 똑같은 이유로 구멍 세 개 짜리가 소금병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후추가 눅눅하게 굳는 경향이 있으니까(왜?) 잘 나오게 하려면 구멍 다섯 개 짜리가 후추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교육 참가자들이 여러 가지 근거를 들며 이렇게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잠시 ‘즐기다’가 “어느 것이 소금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걸 우리끼리 따지게 만든 제조업체가 잘못이다.”라고 운을 뗀다. 고객의 헛갈림을 매번 유도하고 고객이 확인 과정을 거쳐야만 소금이나 후추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디자인은 ‘고객 경험’을 무시한 ‘나쁜 디자인’이라고 말을 잇는다. 아주 단순한 제품이지만 ‘우리의 제품을 사용할 때 고객이 겪는 고충(반대로 즐거움)은 무엇일까?’라는 기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은 채, 이 디자인이 미적으로 아름다우니까(얼마나 미니멀한가!), 혹은 이렇게 만드는 게 돈이 덜 드니까, 이렇게 만들어서 생기는 헛갈림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간주하며(혹은 아무 생각 없이) 출시했을 게 분명하다고 말이다.


‘고객 경험’이라는 게 말은 쉬워도 그걸 제품이나 서비스 디자인에 녹아 들도록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점을 내가 던지는 그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디자인해야 고객들이 소금과 후추를 헛갈리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가장 빈번한 대답이 “어떤 게 소금인지 후추인지 써서 붙이면 되지 않느냐”란 것이다.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누가 써서 붙이나요?”

“식당 주인이 붙이면 되죠.”

걸려 들었다! 나는 일격을 가하듯 묻는다.

“식당 주인은 고객이 아닌가요?”

이렇게 물으면 ‘아차!’하는 표정이 그 사람의 얼굴에서 읽힌다. 소금이나 후추라는 표시할 책임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것만큼 최악의 제품 출시는 없으니까 말이다. 자동차 내부의 여러 버튼에 글씨나 아이콘을 써 넣지 않고 판매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사람은 그냥 냄새를 맡거나 구멍에 뭐가 묻었는지 보면 알 수 있는데 굳이 이런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고객 경험 따위는 무슨 상관이냐는 아집이 그에게서 느껴진다.


이 밖에, 색깔을 달리한다(소금병은 하얗게, 후추병은 검게), 투명한 유리로 만든다, 구멍을 뚫지 말고 아예 윗부분을 그냥 노출시켜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이게 만든다, 소금과 후추라는 글씨를 제조할 때 음각한다 등등 여러 대답이 나오는데, 나는 제조단가의 상승과 기술 부족(예: 유리로 만들 수 없는 기술적 한계)의 문제를 고려한다면 그리 좋은 해결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면서 교육 참가자들을 더 미궁으로 빠지게 만든다. “고객 경험도 중요하고, 내부 역량과 비용 효율성도 중요하다. 어떻게 만들면 될까?”


참가자들이 말을 잃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걸 잠시 ‘즐기고(나는 참 못됐다)’나서 나는 2년 전(2015년)에 독일의 소도시 ‘오스나부뤼크’의 어느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때 직접 찍어 놓은 사진을 ‘짠!’하듯 보여준다. 이때 작은 탄성이 흘러 나온다. 물론 이 사진의 병은 윗부분이 금속으로 돼 있고, 몸체는 유리로 만들어져 있지만, ‘메타포’ 차원에서 이해하면 된다.

“소금이 들어있는 병에는 소금(salt)을 뜻하는 S자 모양으로, 후추병에는 P자 모양(pepper)으로 구멍 뚫어 놓음으로써 손님이 헛갈리지 않고 바로 소금이나 후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디자인이야말로 고객 경험을 충분히 고려한 디자인이다. 그리고 현재의 기술이나 설비를 최대한 그대로 적용하고 제조단가의 상승을 최소한으로 억제했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디자인이다.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라서 알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디자인을 생각해 내기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나의 이런 말에 동의를 하는 표정인데, 꼭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S자를 salt가 아니라 sugar(설탕)으로 생각하면 어쩌죠?” 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모르는데 S자가 뭔 뜻인지 알까요?” 뭔가 딴지를 거는 듯하지만 나는 “좋은 질문이다. 그런 고객 불편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할지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게 훌륭한 디자인의 시작이다.”라고 마무리한다. 더 진행하면 다른 주제로 넘어가지 못하니까.


제품과 서비스 디자인에서 고객 경험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것’과 그걸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다. 며칠 전 지인이 후진하다가 뒷 차의 헤드라이트와 본네트를 살짝 박은 일이 있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고가 발생했던 장소인 모 마트의 무감각 때문이었다. 쇼핑을 하러 마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지인은 주차장이 철문으로 막혀있음을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마침 마트가 일괄적으로 쉬는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이유를 알고 차를 돌리려는데 중간에 하행 차로와 상행 차로를 구분하는 연석이 높아서 후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인처럼 마트가 휴무인지 모르고 들어온 차가 바로 뒤에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살짝 부딪혀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지하주차장으로 진입하기 전에 바리케이트나 ‘꼬깔’ 표시로 확실하게 휴무임을 알렸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다. 마트 측은 휴무라고 주차장 진입로 전에 알렸다고 주장하지만, 고객이 그걸 미처 못 보고 ‘아,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든지, 아니면 ‘이렇게 표시해 두면 알겠지’라고 넘어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번 대선에서 모 후보의 선거 공보물이 화제에 올랐었다. ‘제19대 대통령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라는 문구가 후보자 이름보다 크게 실렸고, 안쪽의 글씨들이 흰 바탕에 연두색(녹색이라기보다)으로 쓰여 있어 가독성이 크게 떨어졌었다. 선거 결과를 떠나서, 과연 그들이 공보물을 받아보는 유권자의 입장에서 점검해 봤는지, ‘유권자 경험’을 공보물 디자인의 제 1요소로 삼았는지 상당히 의심하게 만드는 ‘졸작’이었다. 물론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 나 역시 과연 고객 경험을 충분히 고려하는지 반성해 본다. 고객 경험을 무시하는 점을 하루에 하나씩 발견해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H군이 지인에게 물었다.

"한 100여만원 정도 물게 됐어요. 뭐 그 정도면 된 거죠."

"아니에요. 그 마트에게도 책임이 커요. 마트 사람들의 책임을 고객에게 전가한 거죠. 반드시 따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자꾸만 자기네들이 표시해 두었다, 라는 말만 반복하더라구요."

고객 경험을 무시하고 그 책임을 은근히 고객에게 떠넘기는 기업.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그 마트에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의문이다.



( 소금병 후추병 사례는 도널드 노먼의 책 '심플은 정답이 아니다'에서 찾은 것임. 'S'자 'P'자 모양 소금/후추병은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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