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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무실을 오고 갈 때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자주 이용하게 됩니다. 예전엔 버스 번호와 노선이 익숙하지 않아서, 교통 정체에 갇히면 아무리 버스 전용차선이 있다 해도 지하철보다 느려서 버스를 거의 타지 않았습니다. 1년에 한번 탈까 말까 였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사무실까지 바로 가는 버스 노선을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한 두 번 타보니까 지하철이 주지 못하는 버스만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어두컴컴한 선로를 달리는 지하철은 나를 가둬두고 어딘가로 끌고 간다는 느낌이 들지만,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버스는 마치 짧은 여행을 가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특히 조금 열어둔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면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배우 한석규가 한껏 머리칼을 날린 채 어디론가 버스를 타고 가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한석규가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생각이 나겠지요'란 음악을 배경으로 나직하게 나레이션하는 그 장면 말입니다.
느긋하게 브런치를...
이렇게 버스를 예전보다 자주 이용하게 되니 아이폰에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어플이 유용하더군요. 버스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앞으로 몇 분 안에 이 정류장에 도착할지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트위터를 보면 가끔 버스 어플 덕에 막차를 놓치지 않고 탔다는 트윗이 올라오는 것만 봐도 상당히 유용한 어플임에 틀림 없습니다. 자주 사용하기에 아이폰 맨 첫 페이지에 이 어플을 올려 두었지요.
하지만 좋은 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법일까요? 정확히 말하면 버스 어플 자체의 단점은 아닙니다. 어플은 아주 훌륭합니다. 어플에서 알려주는 버스 도착 시간에 쫓기며 허둥지둥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는 제 모습을 종종 발견하면서 한편으로는 불편한 느낌이 가끔 들곤 합니다. 어플이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알지 못하는 궁금증을 해소해 주긴 했지만 그만큼 느긋하게 준비하고 느리게 걷을 수 있는 자유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막 떠나 버릴 때, 다음에 올 버스를 앞으로 10분이나 넘게 기다려야만 할 때, 어플 탓이 아닌데도 괜히 화가 나더군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버스 기사분을 원망하기도 하죠. 따지고 보면 그렇게 바쁘게 서두를 상황도 아닌데 말입니다.
불확실성은 어떤 일이 언제 터질지, 어떤 양상으로 터질지, 그 파급효과는 어떤 크기일지 사전에 가늠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이 크면 우리는 불안해지고 불편해집니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조금이라도 확실하게 눈에 보인다면 마음이 편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동전을 던져서 앞면과 뒷면이 나올 확률이 각각 50%인 상황(그래서 어떤 면이 나올지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황)보다는, 동전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탓에 앞면이 나올 확률이 70%가 넘는 상황(그래서 앞면이 나오는 경우가 뒷면이 나오는 경우보다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버스 어플이 우리에게 현재 서있는 정류장에서 몇번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를 실시간으로 확실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는 편리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버스 어플이 불확실성 자체를 없애거나 줄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버스 어플을 우리가 사용한다고 해서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 버스 사이의 간격 등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변동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아니죠. 버스 어플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창'에 불과합니다. 버스 어플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은 '버스 도착 시간의 불확실성'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에서 찾아야 합니다. 버스 어플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보를 알지 못한다는 갑갑함을 해소시키는 도구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버스 어플이 존재하지 않고 버스도 무작위하게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느긋하게 준비하고 느긋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서둘러 정류장으로 뛸 이유가 없죠. 따라서 불확실성을 확실하게 눈에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조급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하철이나 전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도봉구에 산 적이 있었는데,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국철을 탔어야 했습니다. 국철은 일반 지하철과는 달리 배차 시간 간격이 넓어서 한번 놓치면 15분 이상을 기다려야 합니다(지금은 좀 달라졌을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5호선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종종 국철 플랫폼으로 질주하곤 했죠.
그렇게 미친듯이 뛴 까닭은 따지고보면 국철의 도착시간을 사전에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불확실성을 눈에 드러내어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버스 어플도 우리에게 의도하지 않는 불편을 주지만, 거의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출발하는 국철처럼 불확실성이 별로 없는(그래서 확실성이 큰) 상황도 우리로 하여금 느긋할 자유를 빼앗아 갑니다. 지하철이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언제 도착할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점 때문일지 모릅니다. 불확실성이 더해지면 오히려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습니다.
오늘도 버스 어플을 보며 서둘러 옷을 챙기는 제 자신을 보면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없애는 것,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우리의 삶에 불확실성을 가미함으로써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느낍니다. 불확실성은 무조건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수용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도 명확해집니다.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적인 상황이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도 하니까요. 부자가 되어도 시간의 노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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