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 속의 거짓말쟁이   

2010. 10. 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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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래의 그래프를 보기 바랍니다. 이 그래프는 어떤 지역(예컨대 경기도나 전라도)를 나타내고 4개의 붉은 네모는 '송전탑'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파란 점들은 암환자가 발생한 위치를 나타냅니다. 파란 점 하나는 암환자 1명을 의미하죠.

암 발생 분포도


이 그래프를 보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마 여러분은 "송전탑이 설치된 지역일수록 암환자가 많이 발생한다"고 추측하게 됩니다. 그러다 생각이 발전하면 "송전탑이 암 발생을 야기한다"라는 결론에까지 이를지도 모릅니다. 송전탑에서 나오는 강한 전자파가 암 발생의 원인이라 단정짓게 되죠.

만일 여러분이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사회운동가이거나, 송전탑 주변에 사는 주민이라면, 그 결론이 상당히 신빙성 있다고 판단하여 송전탑을 세운 회사나 정부를 규탄할지도 모릅니다. "당장 송전탑을 이전하고 보상하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해야 마땅하겠죠?

그러나 이 그래프는 엑셀의 Randbetween 함수를 사용하여 임의로 만든 허구입니다. 송전탑과 암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무작위로 나온 그래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그래프를 만들었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그래프를 그리기 위해 다음을 가정했습니다.

가정 1 : 이 지역 전체 면적은 100 제곱미터다
가정 2 : 이 지역(이 그래프 전체)에 100명의 암환자가 발생한다
가정 3 : 30 제곱미터에 해당하는 인구밀집지역이 있다 

가정 4 : 인구밀집지역 내에 암환자의 50%(즉 50명)가 무작위로 분포한다
가정 5 : 나머지 50명의 암환자는 전 지역에 무작위로 분포한다
가정 6 : 총 4개의 송전탑은 임의로 설치된다

쉽게 말하면, 인구밀집지역엔 사람이 많이 거주하기 때문에 암 발병률이 동일해도 '시골'보다 암환자가 더 많을 수밖에 없겠죠. 그 점을 위의 6가지 가정으로 풀어 쓴 겁니다.

위의 6가지 가정을 가지고 여러 가지 패턴의 그래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위에서 보여준 그래프는 그 중 하나입니다. 무수히 많은 그래프를 얻을 수 있지만, 3개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죠. (크게 보려면 그래프를 클릭하세요.)

A

B

C

여기서 A를 보면, "송전탑에서 나오는 강력한 전자파가 암 발생의 원인"이라는 명제를 입증하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B를 보면 하나의 송전탑 주위(위에 위치한)에만 암환자가 많고 나머지 세 개의 송전탑 주위엔 암환자가 뜸하게 분포합니다. 게다가 C를 보면 송전탑 주위와 멀리 떨어진 곳에 암환자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송전탑이 곧 암 발생의 원인이다"란 명제와 관련성이 떨어집니다.

아래의 Excel 파일을 다운 받아서 여러분이 직접 여러 그래프를 얻어 보기 바랍니다. 송전탑과 암 발생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래프와, 그렇지 않은 그래프를 여러 개 얻을 겁니다. 아마도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그래프를 더 많이 보게 될 겁니다.


"송전탑은 암 발생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 건가?"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의도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분명히 언급하자면, 제가 말하고 싶은 바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도, 송전탑과 암 발생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오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송전탑과 암과의 관계는 그저 예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우연에 의한 것임에도 거기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잘못 믿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제법 큽니다. 여러분이 직접 여러 그래프를 추출해 보면 알겠지만, 그저 Excel의 Randbetween 함수를 써서 그린 것들임에도 송전탑의 위치와 암환자의 분포가 꽤 자주 겹쳐져(즉 연관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그래프를 보기 바랍니다. 빨간 동그라미 지역의 송전탑 주위엔 암환자가 별로 없다는 사실보다는, 아래에 위치한 파란 동그라미 지역의 송전탑 주위에 암환자가 대거 분포하는 모습만 눈에 더 잘 들어옵니다. 


만일 여러분이 파란 동그라미 지역에 거주한다면(혹은 송전탑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아, 동네 뒷산에 있는 송전탑 때문에 나는 필시 암에 걸리겠지"라며 분노하기 시작하면, 똑같은 송전탑인데도 암환자가 그리 많지 않은 빨간 동그라미 지역의 정보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맙니다.

인간은 사물을 관찰할 때 본능적으로 패턴을 인식하려고 합니다. 어떤 글자가 명조체로 쓰였건 고딕체로 쓰였건 간에 우리가 동일한 글자로 인식하는 이유는 여타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존력이 패턴 인식력에 기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이런 능력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마치 인과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여기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위에서 장황하게 서술한 까닭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저 특정 지역에 인구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암 발생 건수가 많은 것인데도 송전탑이란 혐오시설과 연결시키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상황을 오판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킬지 모릅니다. 애꿎은 송전탑 탓만 하다가 암 발생률을 낮추는 '진짜' 방법을 알아차리지 못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송전탑과 암 발생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고 단정 짓자는 게 아닙니다. 우연의 산물을 인과관계로 오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송전탑과 암'은 그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한 예시일 뿐이죠(둘 간에 인과관계가 있을 가능성을 저는 배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현상을 관찰할 때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한 회의론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철저한 정보를 기반으로 판단하는지, '송전탑'과 같은 혐오시설에 대한 '감정'에 자신의 판단이 휘둘리는지 매번 따져볼 일입니다. 판단의 오류는 데이터의 부족이나 시간의 촉박함 같은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패턴을 인식하려는 내부적인 본능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내 머리 속의 거짓말쟁이'에게 속지 마십시오.


(* 첨부한 Excel 파일은 최대한 단순하게 시뮬레이션했다는 점을 감안해 주기 바랍니다. 더 정교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겠지만 제 능력으론 미치지 못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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