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중국 한(漢)나라가 기울자 여기 저기서 영웅호걸들이 활거하는 형국이 됐습니다. 삼국지(三國志)는 바로 이때의 이야기를 다루는 오래된 고전이죠. 거기에 원소(袁紹)라는 걸출한 영웅도 등장합니다. 그는 4대에 걸쳐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른 명문가의 자손이었죠.
여러 호걸들은 제휴와 반목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합니다. 혼자서 천하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가 험난한 혼돈의 시기였으니까요. 원소도 처음엔 조조(曹操)와 제휴하다가 나중에 서로 세력을 다투는 적으로 돌아섰습니다. 원소 입장에서는 나날이 세력이 커가는 조조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제압해야 천하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죠.
당시에 유비(劉備)는 원소가 거들떠 볼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유비는 이사람 저사람에게 의탁하는,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판단력이 비상한 조조는 유비가 잠재적으로 가장 큰 대항마가 되리라고 오래 전부터 간파했습니다.
별볼일 없던 유비가 한때는 조조에게 의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삼국지에 의하면, 조조는 유비에게서 풍기는 영웅의 기품을 일찍이 깨닫고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둘 뿐이오.”
이 말은 유비의 숨겨진 의도를 떠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조의 말을 들은 유비는 깜짝 놀라서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유비는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창피했던지 천둥 소리에 놀라서 젓가락을 떨어뜨렸다고 짐짓 태연한 척했습니다. 그리고 조조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마음 먹습니다. 조조가 언제 자신을 제거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죠.
원소 |
유비 |
조조 |
때를 기다리던 유비는 조조에게 원술을 공격하는 전투에 자원을 합니다. 전장으로 나가는 척하면서 조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나름의 술책이었습니다. 의심이 많은 조조는 결국 유비의 청을 윤허합니다. 유비는 계획했던 대로 전장으로 떠나는 도중에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후 유비는 조조와 반목하며 삼국의 형세를 이루죠.
여기에서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런 분분함이 삼국지를 읽는 맛이지만 사실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면도 있습니다. ‘조조가 전쟁 치르는 데 바빠서 실수로 유비를 놓아줬다’, 또는 ‘아니다. 조조처럼 영악한 사람이 유비가 달아날 줄 뻔히 알면서 출병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 ‘조조가 유비를 죽이지 못한 것은 아직 세력이 미약한 그를 죽일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아니다. 조조는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범한 자라서 영웅의 면모를 보이는 유비가 자신과 어깨를 견줄 만한 세력을 키울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등이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좀 옆으로 샜는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유비가 아니라 원소입니다. 조조가 서주란 곳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공격하러 총출동하자 허도라는 지역이 텅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원소의 참모인 전풍(田豊)이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입니다. 조조가 유비를 잡기 위해 동쪽으로 대군을 이끌고 갔으니 허도를 공격하면 황제(당시 한나라 황제였던 현제)를 지키고 민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전풍의 간언을 듣고 원소는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내 막내아들이 옴을 앓고 있어서 마음이 어지러운데, 허도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있겠나?”
이렇게 말하며 결정을 어물쩍거렸습니다. 허도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할 절호의 기회를 집안 사정을 핑계로 날려버렸던 겁니다. 전풍은 “대업은 이제 틀렸다!” 라며 크게 한탄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일이 조조의 세력을 막강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원소는 2년 후에 조조와 전투('관도대전'이라 함)를 벌이는 와중에 병으로 죽고 맙니다.
원소가 진정한 영웅이었다면 집안 일은 잠시 잊고 허도를 공격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재빨리 판단하는 결단력을 보였을 겁니다. 만일 그랬다면 조조 대신 원소가 천하를 제패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결단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누구나 납득할 논리적이고 실제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사물과 현상의 참/거짓 여부나 행동의 'Go/No Go' 여부를 가려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불확실한 상황에 처할수록 의사결정을 내리기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옳을 수도,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어정쩡한 태도는 결단력과 거리가 멉니다. 문제를 전혀 해결할 의도가 없다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문제가 '가만히 멈춰 있으리라' 기대하는 의사결정자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는 것도 의사결정이라 믿는 모양이지만, 원소의 경우처럼 대부분 '실기(失機, 기회를 놓침)'하고 맙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문제는 수학 문제처럼 문제지 위에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혹시 결단력을 가능한 한 빨리 의사결정을 내리라는 의미로 오해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단력은 어정쩡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충분한 고민해서 참/거짓(혹은 Go/No Go)을 반드시 가리라는 말이지, 직관이나 불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무조건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원소의 결단력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가 허도 공격을 신속하게 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집안 사정을 핑계로 의사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흐지부지 했기 때문입니다. 간웅(奸雄)이라 폄하되는 조조는 결단력에 있어서는 원소보다 훨씬 출중한 사람이었죠(물론 그도 유비를 놓아 준 실책을 범했지만요).
결단력이 없으면 하늘이 내린 기회(진짜 로또!)를 날려 버릴지도 모릅니다. 결단력 있는 하루 되세요.
(*사례 출처 : '삼국지 강의', 김영사)
반응형
'[연재] 시리즈 > 의사결정의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대 100 퀴즈에서 이기려면? (1) | 2010.11.29 |
---|---|
여론조사를 조작하는 몇가지 방법 (10) | 2010.10.25 |
내 머리 속의 거짓말쟁이 (14) | 2010.10.05 |
사소한 차이는 전혀 사소하지 않다 (10) | 2010.09.17 |
빠른 의사결정이 때론 독(毒)이다 (7) | 2010.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