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제가 월간 샘터 2017년 5월호의 <과학에게 묻다>라는 칼럼에 소개한 글입니다.



2017년도 4개월이 흘렀다. 3분의 1이 지난 시점에서 올해 세웠던 계획을 다시 점검해야 할 시기다. 많은 이들이 여러 목표 중 하나로 살빼기를 설정했을 터인데 과연 그 목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아직 8개월이나 남았으니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는 말을 반복하며 여전히 치맥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내가 바로 허풍 떨듯 ‘기필코 다이어트!’를 밤마다 외치는 사람이니 말이다.


살이 찌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말을 하면 운동을 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운동은 오히려 입맛을 좋게 하여 뱃구레를 늘려 버린다. 그래서 운동을 중단하면 고스란히 살로 축적되어 다이어트고 뭐고 포기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섭취한 칼로리보다 운동으로 더 많은 칼로리를 태워야 살이 빠지기 때문에 운동은 습관이 들기 전까지 괴로움 그 자체다. 조각 케이크 하나에 해당되는 칼로리(500Kcal)를 모두 연소시키려면 10Km 정도 뛰어야 한다.




분자생물학적으로 살찌지 않으면서 미식을 즐기는 방법은 한번에 먹을 양을 조금씩 나누어 자주 먹는 것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떠올려 보면 이 방법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 보인다. 한번에 먹든 몇 번에 나눠 먹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양은 똑같으니까 축적되는 체지방도 같지 않을까? 1000Kcal를 섭취할 경우 100그램의 체지방이 쌓인다면, 100Kcal를 섭취할 때는 10그램의 체지방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니 1000Kcal를 10번에 나눠 먹어도 체지방이 모두 100그램 쌓일 것만 같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렇게 비례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들어간 양이 많아진다고 그에 따라 아웃풋이 ‘선형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디오의 볼륨 조절 다이얼을 돌려본 사람이라면 처음에는 소리가 조금씩 커지다가 나중에는 약간만 돌려도 볼륨이 갑자기 커지는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인간의 몸도 그렇게 ‘비선형’적이다. 1000Kcal을 한꺼번에 먹으면 100그램의 체지방이 생기더라도 100Kcal씩 나눠서 먹으면 10그램보다 훨씬 적은 체지방이 쌓인다. 




왜 그럴까? 섭취한 영양소는 몸 속으로 들어와 최종적으로 포도당으로 변하고 혈액에 스며들어서 모세혈관을 통해 각 세포에 공급된다. 그리고 지방세포는 포도당 수용체를 세포막에 배치시켜 혈액 속의 포도당을 안으로 흡수하고 지방의 형태로 저장한다.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 바로 췌장이다. 췌장은 인슐린이란 물질을 통해 지방세포로 하여금 포도당 수용체를 세포막에 배치하도록 한다. 혈중 포도당이 갑자기 증가할 경우 췌장은 다량의 인슐린을 각 세포에 뿌려대는데, 이런 신호를 받은 세포는 인슐린의 양만큼 포도당 수용체를 만들어내어 다량의 포도당을 지방으로 쌓아둔다. 포도당이 지방으로 축적되는 걸 최소화하려면 인슐인의 대량 방출을 막아야 하고, 그럴려면 조금씩 적게 먹음으로써 췌장에게 ‘나 많이 먹지 않았어’라고 속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하거나 공부할 때 먹을 것을 옆에 두고 오며가며 조금씩 먹는 것이 고통을 동반하지 않으면서도 살을 빼는 방법이다. 치즈 케이크라도 앉은 자리에서 한번에 먹지 않으면 다이어트 걱정은 덜해도 괜찮다. 하지만 사무실이나 학교에서 항상 음식을 꺼내 놓으며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된장찌개 백반을 옆에 두고 30분마다 두 세 숟갈씩 퍼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이어트의 관건은 섭취하는 칼로리의 총량이 아니라 칼로리의 흡수속도라는 점을 떠올리면 해결책이 생긴다. 음식을 한번에 먹되 가능한 한 칼로리의 흡수속도가 느린 음식을 먹음으로써 혈당의 갑작스런 증가, 인슐린의 과다 분비, 포도당 수용체의 과다 활성화를 막는 것이다. 흰 쌀밥의 흡수속도가 85인 반면 현미는 50이니 똑같은 양을 먹더라도 현미로 식단을 바꾸면 적어도 살이 찌는 것은 막을 수 있다. 


2017년이 7개월 정도 남았다. 나눠서 자주 먹고 칼로리 흡수속도를 조절한다면 한달에 1Kg씩 감량하여 연말이 되면 7~8kg을 뺄 수 있지 않을까?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으면서 말이다.



* 이 글은 월간 샘터 2017년 5월호의 <과학에게 묻다>라는 칼럼에 소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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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6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이런 교육 요청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올 초에 모 기업으로부터 어떤 교육을 의뢰 받은 후에 나는 H군에게 의견을 물었다.

“재미있는 주제인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이쪽 분야에 대해서 그리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거든요. 제가 강의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그 회사에서 적합하다고 생각하니까 대표님에게 강의를 의뢰한 것 아니겠어요? 어렵겠지만 시도해 보세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아서 할까 말까 무지하게 고민했던 강의 주제는 바로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의 몰입’이었다. 금년은 뭐든 시도해 보는 게 좋다며 싫어도 수락해야 한다는 H군의 반강제적(?) 조언에 따라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어떻게 말을 풀어가야 할지 몰라서 초반엔 엄청 애를 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련자료를 얻기가 쉽지 않았기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나 아마존을 뒤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운 것은 미국에서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연구 조사 자료가 매우 많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연구자가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은 이렇다라고 말하면 다른 연구자가 근거를 들어 논박할 정도로 논의가 활발한 영역이라는 점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갑론을박 논쟁이 벌어지는 분야라 어떤 주장이 옳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여러 연구자들이 밀레니얼 세대에 공통적으로 내놓는 의견을 바탕으로 내 경험을 섞어서 강의 내용의 얼개를 잡아나갈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니 한달 내내 자료 수집하고 강의자료 만들고 대략의 강의 대본을 만들던 올해는 시작부터 ‘이걸 해? 말아?’라는 번민의 시간이었다. 





어찌어찌하여 4시간 분량의 강의 내용을 완성하여 고객사 앞에서 시험 강의를 한 다음 수정을 거쳤고, 3월에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와 조직몰입’이란 타이틀로 강의를 진행했다. 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나 또한 그 강의에 몰입했고, 강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느꼈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강의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일단 끝냈다는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주제로 어떤 기업이 또 강의를 의뢰하겠나 싶은 생각도 들어서 그동안의 시간 투자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란 의심이 마음 한켠에 남아서 허탈함 또한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헌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몇몇 기업에서 내가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를 강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왔다. 조찬 강의를 해달라는 곳도 있었고 그때의 평이 좋아서 리더들의 집합교육 때 심화 교육을 진행해 달라는 곳도 있었다. 내가 운영하는 ‘중요한학교’에서 공개강의를 열기도 했다. 몇 번 강의를 수행하니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전문가로 나를 칭하는 분들도 있는데, 서두에 언급했듯이 이 쪽의 전문가라고 호칭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다. 그저 난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전달한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전문가라는 호칭은 붙이지 말아 주시길 부탁 드린다. 


어쨌든, 강의를 의뢰할 기업들이 많지 않을 거란 예상이 틀렸다고 생각 들 정도로 제법 의뢰가 들어오는 걸 보고 많은 조직들이, 흔히 말하길, ‘요즘 젊은 직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이 크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1980년부터 2000년 사이에 태어난(현재 17~37세) 밀레니얼 세대가 예의가 없고, 힘든 일을 싫어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충성심이 낮고, 보상에 관심이 많고, 의존적이라는 생각이 수강생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힘든 일을 싫어한다’는 것에는 베이비 붐 세대와 X세대에 해당되는 수강생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흥미롭다. 자신들이 초년병일 때는 윗사람이 시키면 아무런 불평없이 수행했는데, 요즘 젊은 직원들은 ‘그걸 왜 해야 하는데요?’라며 반발을 한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맥락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던 자신들에게는 이의를 제기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속된 말로 ‘싸가지 없다’고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예전에 상사의 지시에 무조건 순응했다는 건 진짜 사실일까? 본인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표정을 드러내거나 동료에게 상사 욕을 쏟아내진 않았을까? 어떤 세대이든 누구나 힘든 일은 싫어한다. 밀레니얼 세대라고 해서 힘든 일을 언제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의미없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에게 반복적으로 관행적인 일을 시키면서 그냥 예전부터 해왔으니까 ‘너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소통하지 않았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들에겐 ‘의미’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엄청난 경쟁을 몸으로 경험했고 어렵게 입사한 직원들이다. 경쟁을 해야 하는 이유가 다른 어떤 세대보다 뚜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에 자신이 떠안은 업무의 이유가 명확치 않으면 일할 동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출처: https://2020workforce.com/tag/millennials/



물론 보상에 민감해서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는 조직으로 언제든 옮기고 싶어한다는, 밀레니얼 세대에 대한 평가는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게 밀레니얼 세대만 그런가? 누구나 그렇다. 더 나은 기회가 손짓을 하는데 그에 응하고 싶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왜 밀레니얼 세대만 억울하게 그런 평을 받는 걸까? 몰입에도 여러 대상이 있는데, 크게 ‘조직몰입’과 ‘경력몰입’으로 나뉜다. 기성세대들은 조직과 자신 사이에 일체감을 느끼는 ‘조직몰입’이 출세 혹은 성공 방정식의 중요 변수라고 느끼지만(물론 요즘은 많이 옅어졌지만), 밀레니얼 세대는 자신의 경력에 훨씬 무게중심을 둔다. 경력개발 관점에서 조직을 바라보지, 조직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 좋은 상사를 둔 직원이라 해도 한 조직에 ‘충성’하며 오래 다니겠다는 생각보다는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의지가 커진다. 그 좋은 상사가 그런 기회를 감지하도록 이끌어줬기 때문이다. 


조직몰입보다는 경력몰입을 우선하기에 밀레니얼 세대 직원들의 조직충성도가 낮다는 평을 받지만, 이제 조직충성도라는 말의 정의를 바꿀 필요가 있다. 상사와 경영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지시를 내리더라도 묵묵히 따르는 게 조직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군대식 사고방식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의 경력에 몰입하는 건 뒤바꿔 놓기 불가능한 거대한 방향이니, 그 경력몰입의 흐름을 조직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 유도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경력몰입의 장을 조직이 열어주고 그 성과를 같이 공유함으로써 조직과 개인이 동반성장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들이 조직을 떠난다면 더 넓은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우리가 키워냈다’는 자부심을 오히려 느끼는 ‘쿨함’이 필요하다.


강의를 진행하면 ‘밀레니얼 세대의 특징을 보니까 우리랑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요.’라는 말이 꼭 나오곤 한다. 맞다. 그들은 그리 다르지 않다. 같은 인간이니 욕망이 다르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IT에 친숙하다는, 그 몇 가지 다른 점 때문에 우리가 그들이 특성이 확연히 다르고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건 아닐까? 이것이 내 강의의 가장 키포인트이다. 다른 측면을 바라보기 전에 동일하고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직장 내 세대간 갈등의 해결 포인트일 것이다.


“내가 연변 아줌마 때문에 상처 받은 적이 있어요.”

H군은 모 기업에 밀레니얼 세대의 이해를 주제로 강의를 하러 가는 나에게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아줌마가 힘들게 일하시길래 내가 이것 좀 드셔보세요, 라고 친절하게 말했는데 단칼에 ’일 없어요’라고 하더군요.”

“그 말은 ‘괜찮아요’란 뜻 아닌가요?”

“그렇지만 처음에 그 말을 들을 때 내 배려가 무시 당하는 것 같아서 진짜 상처 받았거든요.”


밀레니얼 세대들도 이와 같다. 그들의 어법와 사고 스타일, 취향이 조금 다른 것을 보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여기고 어쩔 때는 '상처까지 받는 것'은 아닐까?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동시에 아주 어려운 ‘입장 바꿔 생각하기’가 해법이다.

“어, 이 사례를 강의 때 인용하려고 하죠?” 

H군이 사무실을 떠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단박에 대답했다.

“일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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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4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최근에 나는 차를 바꿨다. 장기렌트 방식으로 자동차를 빌려 타고 있었는데, 연희동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그 차가 골목이 많은 동네 특성상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비록 크기는 준중형 자동차(아반테 정도) 정도였지만, 코너를 돌거나 요철 많은 골목길을 갈 때 적잖이 조심스러웠다. 다음에 차를 바꾸게 되면 필히 작은 차로 하겠다는 마음이 절실할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장기렌트카 반납 시점이 도래했고 때마침 모 자동차 동호회에서 괜찮아 보이는 중고차 매물이 나왔기에 곧바로 거래를 했다. 돌이켜보니 대학교 다닐 때 ‘프라이드’를 첫차로 구매한 이래로 첫 번째 중고차다.


나온 지 7년된 중고차(수입차이지만 연식이 오래돼 국산 소형차 가격보다 싸다)이고 크기도 내가 딱 원하던, 전장 4미터 미만의 작은 차다. 골목 모퉁이에서 속도를 많이 줄이지 않아도 스티어링 휠을 돌리기만 하면 쏙쏙 빠져나가고, 양쪽에 불법주차를 해 놓아서 좁아진 길도 여유있게 지나갈 만큼 작은 차다. 일렬주차를 해도 앞뒤가 넉넉하게 남아 그다지 애쓰지 않고 바로 주차를 할 수 있다. 그 동안 주차해 놓으면 전봇대 위에 앉은 새들의 ‘똥 세례’를 많이 받아서 새똥 닦아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이 차는 앞뒤가 짧은 덕에 새똥을 받아내는(?) 면적이 작아서 그런지 새똥이 피해가는 느낌이다(물론 몇번 맞기는 했다). 그러니 이 차야말로 연희동 환경에 딱 맞는 ‘좋은 차’가 아닌가? 




하지만 이 차는 누군가에겐 ‘안 좋은 차’이기도 하다. 동호회를 통해 차를 구매하기 전에 매물을 알아보러 중고차 전문 매장을 둘러보기도 했는데, 이 차와 같은 차종을 발견하고 딜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중이었다.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곁으로 오더니 자기들끼리 그 차에 대해 평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부인이 그 차의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자 남편이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당신이 차를 몰라서 그래. 승차감이 정말 나쁜 차야. 예쁜 것만 보고 샀다가 실망하지. ‘객관적’으로 정말 꽝이야.” 그는 차를 향해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려가며 싫은 표정을 지엇다. 부인에 비해 차를 잘 안다는, 약간의 거만함이 섞인 얼굴이었다. 이 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바로 나)이 옆에서 딜러와 이야기를 하고 있든 말든 상관없는 건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이보게, 친구. 자네가 차를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이 차 샀다가 후회할 거야.’라고 말이다. 나는 머쓱해지려다가 살짝 기분이 상했다.


궁동산에서 내려다 본 연희동



그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예전부터 그 차의 ‘악명 높은’ 승차감은 실제의 오너들로부터 들어왔기 때문이다. 서스펜션이 아주 ‘딱딱해서’ 길바닥의 크고 작은 요철에도 통통 튀고 휠베이스(축거,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와 윤거(좌우 바퀴 사이의 거리)가 짧은 탓에 바닥에서 오는 충격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차를 인수하고 며칠 타고 다녀보니 ‘엉덩이로 길바닥을 스캔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게 됐다. 게다가 서스펜션이 딱딱해서 타이어가 노면을 ‘타는’ 경우도 많다. 약간 굴곡이 있는 도로면을 지날 때 약간씩 차가 휘청거리는 느낌이 있고 어떨 때는 ‘토크 스티어(핸들이 약간 돌아가는 현상)’도 발생하기도 한다. 이 차의 동호회 회원들은 뭐라 말할지 모르지만(그것마저 이 차의 매력이라고 할 것 같다) 아저씨의 말처럼 승차감이 꽝인 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저씨의 악평에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승차감 저하는 차 자체의 특성도 한몫 하지만 우리나라 도로가 정말로 형편없다는 게 더 큰 이유이니까 말이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듯이 깨끗한 노면을 만나기가 드물다. 보수한 흔적(소위 ‘땜빵’)이 없는 구간이 없을 정도다. 특히 비가 많이 오고 나면 아스팔트가 떨어져 나가 길이 패이기도 해서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골목길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평탄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육안으로 봐도 ‘주름진’ 길도 있고, 조각보처럼 ‘땜빵’이 더 많은 곳도 있다. 이런 길을 가야 하니 승차감이 좋을 리가 있나? 


외국 이야기를 해서 좀 미안하지만, 매끈하게 깔린 독일과 일본의 도로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간선도로뿐만 아니라 이면도로, 골목길도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땜빵’ 하나 없이 깔려 있는 도로는 엉덩이에 별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 아우토반에서 속도 무제한으로 달릴 수 있는 이유는 노면이 그만큼 매끄럽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도로 포장이 우수한 독일과 일본에서는 이 차(내가 소유한 차)가 승차감이 나쁜 차로 그렇게 지탄을 받을 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토목기술이 세계적이라고 자화자찬하던데, 길 하나 매끈하게 깔지 못하는 ‘기본기 부족’에도 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런 도로 환경 때문에 국산차의 서스펜션은 상대적으로 물렁물렁할 수밖에 없고 그런 쿠션감을 ‘승차감 좋다’라고 느끼는 소비자들이 많다. 번외로 말하는 건데, 승차감은 상당히 광범위한 뜻을 담고 있는 말이라서 차가 푹신푹신하다, 서스펜션이 부드럽다 등으로만 정의 내릴 수 없다.


아우토반.



서론이 좀 길었는데 내가 하려는 말은 이렇다. 우리는 무언가를 평가할 때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오류에 빠진다. 그것 자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환경이 그것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 똑같은 차가 어느 환경에 있는가에 따라 ‘좋은 차’가 되고 ‘안 좋은 차’가 되듯이 말이다. 차 자체의 특성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나라 여느 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면 ‘안 좋은 차’로, 쭉쭉 뻗은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는 이와 골목길 운전과 주차 편의성을 우선으로 여기는 이에게는 ‘좋은 차’로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각자가 어느 환경과 어느 조건 하에 있는가에 따라 평가는 이처럼 극과 극으로 갈리기 때문에 ‘내 평가는 객관적이야’라고 장담하는 태도는 때로는 위험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떤 일을 맡고 있는지, 그를 둘러싼 상사와 동료들은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예산은 얼마나 주어지는지, 제품이나 서비스의 품질은 어떤지 등 수많은 환경 요소가 한 사람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그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으면 ‘일 잘하는 직원’이 될 수도 있지만 ‘일 못하는 직원’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다. 바로 그런 평가를 내리는 상사와 동료들 자체가 그 직원을 둘러싼 ‘환경’의 일부라는 걸, 자신들이 그 직원의 ‘일 못함’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무언가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그것을 둘러싼 환경 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추운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과 뜨거운 여름 한 낮에 같은 음료를 마시는 것을 생각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지 않는가? 이 말을 평가의 객관성을 높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환경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그것 자체의 특성과 장단을 평가하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하지만, 그럼에도 환경요소의 영향을 100% 없앨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평가해’라고 말할 때 그가 어떤 환경요소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이해하고 그의 평가를 존중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나는 객관적으로 평가해’라고 자신만만해하기보다 본인 주위의 환경이 평가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각자의 ‘입장(立場)’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른 평가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뜻이다. “이 차는 객관적으로 꽝이야”라고 대번에 평가 내리기 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읽고 내가 소유한 차를 ‘옹호’한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물론이다. 나는 ‘이 차를 소유한’ 환경 조건 하에 있으니까 팔이 안으로 굽을 수 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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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3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장면 1.

“내가 네 월급을 어떻게 주는지 알어? 내가 은행 대출 받아서 너한테 월급을 주는 거야. 그런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떤 업체에서 사장과 직원 사이에 회사의 사업과 관련하여 다툼이 있었나보다. 토론이 격해지다 못해 감정 싸움으로 번지자 사장은 직원에게 이런 말을 쏟아냈다. 사업 방향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다 이야기가 서로를 비난하고 잘못을 추궁하는 쪽으로 빠지다 보니 사장은 울컥하는 심정으로 직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꺼낸 모양이다. 그 직원은 며칠 후에 퇴사했다.



장면 2.

“그런 거 사줄 바에야 차라리 돈으로 주지. 사장님은 돈이 남아도나 봐.”


작은 개인회사의 대표는 몇 안 되는 직원을 근사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직원들이 맛본 적이 없을 듯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즐겼다. 직원들은 신기해 하면서 그런 이벤트를 즐기는 듯 했지만, 식사가 끝나고 나면 대표를 집으로 보내고 자기네끼리 모여서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을 먹었지만 자기네들 입맛에는 삼겹살이 최고라고 말하며, 고급 음식을 사 준 대표를 고마워 하기보다 자기네들 취향을 모르고 헛돈 쓰는 사람으로 평했다. 그런 돈 쓸 바에 삼겹살 사먹으라고 돈으로 주지 그게 뭐냐며 자기네끼리 대표를 비난하는 뒷담화는 밤늦도록 계속됐다.




장면 3.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 주십시오.”


역시나 작은 회사의 이야기이다. 업무에 열의를 보이는 ‘똘똘한’ 직원이 있었다. 사장은 그 직원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 직원을 잘 교육시키면 훌륭한 인재로 조직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회사나 여유자금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사장은 직원에게 돈이 꽤 드는 외부교육을 수강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교육이 끝나고 그 다음 날, 그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멘트만 나왔다.



장면 4.

“그렇게 잘하시면 사장님이 직접 하시지 그래요?”


어떤 직원이 작업을 느리게 하고 늦게 가져온 결과물도 오류 투성이였다. 사장은 속으로 화가 났다. 아주 기초적인 사칙연산조차 틀린 채로 가져왔고 회사에서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포맷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장은 포맷을 일러주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작성할 수 있다’를 직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직원도 알아듣는 듯 했다. 하지만 그 후에 가져온 직원의 결과물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몇 차례 이렇게 ‘다시 해 와’란 공방이 오고가다보니 양측 모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모양이다. 사장이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알아 들어?”라고 쏘아붙이자 직원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맞섰다고 한다. “그렇게 잘하시면 사장님이 직접 하시지 그래요?” 사장은 후에 나를 만나 하소연했다. “내가 직접 만들 거면 왜 걔를 직원으로 고용해야 하죠?”라고.



장면 5.

“이 회사는 시스템이 없어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거 같아요.”


오랫동안 같이 일한 직원이 퇴사를 하겠다면서 퇴사 사유를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을 만들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사장의 경영방침이었는데, 이렇게 시스템이 없다, 주먹구구식이라는 말을 들으니 사장은 좀 어이가 없었다. 목표 설정도 없고 매출이 떨어져도 별로 채근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걸 보고 주먹구구라고 하다니... ‘작은 회사의 강점은 체계적인 규칙 없이도 그때그때 잘 대응하는 능력 아닌가? 시스템이란 게 과연 뭐지?’ 사장은 혼란스러움과 섭섭함으로 한동안 마음이 상했다.




내가 컨설팅을 하면서 그간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다섯 가지 장면은 여느 회사의 여느 사장의 입장에서 벌어질 법한 전형적인 상황이다. 소위 ‘사장은 잘해줬는데 직원은 딴 생각을 하는’ 상황.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장면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사장의 입장을 보고 듣노라면 ‘사장 노릇’이 어쩌면 직원들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사장과 직원들이 항상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소기업의 경우가 더 그렇다. 소기업 사장은 경영의 압박과 함께 직원들의 이런 행태도 견뎌내야 하는 자리이다. 


사장이 직원에게 갖는 ‘인간적인 섭섭함’의 근원은 ‘기대감’과 ‘계정의 불일치’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네가 그럴 수 있니?’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주길 바란다, 라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기록하는 ‘주고 받은 양과 질’의 계정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직원 입장에서는 사장이 잘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 계정에 (+)로 잡히지 않는다. 복지가 엄청나게 좋다는 여러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게 하찮은 걸로 여겨진다. 사장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해준 항목을 (-)로 기록하고 언젠가 직원이 그 (-)를 채울 만한 기여를 해주길 기대한다. 은행 대출로 직원 월급을 지급했으니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고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사장의 마음 속엔 이런 식의 대차대조표가 있다.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맞추려는 감정의 싸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부터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기대를 말라’는 것이다. 사장은 자신이 법정 요건과 사규를 넘어서서 직원에게 추가적으로 지출을 하거나 배려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 자신의 마음 속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대차대조표를 경계해야 한다. 그냥 해주고 그걸로 무엇을 얻겠다는 기대를 버려라. 좋은 음식을 직원들과 함께 먹으러 갈 경우에는 그런 배려로 무언가를 얻겠다고 여기지 말고 ‘내가 그걸 먹고 싶어서. 하지만 혼자 먹으면 재미없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게 서로 속 편하다. 은행 대출을 받아서 월급을 주는 건 특별한 배려는 아니다. 사장의 할일이고 의무라서 아예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서는 안 될이건만 그걸로 직원 잘못을 공격하는 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니다. 


매몰비용이란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일컫는 말이다. 오해할까 분명히 말하는데, ‘법정요건과 사규를 넘어서서’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서나 사장이 개인적으로 직원들에게 지출하는 물적, 심적 비용은 회수할 수 없는 매몰비용으로 인식하는 게 좋다. 그 비용으로 ‘편익’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하는 뜻이다. 쉽게 말해, 직원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잘해주는 것으로 끝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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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6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외국계 컨설팅사를 다니다가 ‘독립 컨설턴트’로 일한 지 이제 만으로 16년, 햇수로 17년이 되었다. 지난 날을 반추해 보면 소위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제대로 실감이 난다. 나와 컨설팅 혹은 워크숍으로 관계를 맺은 고객사들은 세월이 흐른 만큼 일일이 기억하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고객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첫 세금계산서를 끊던 순간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는 전자세금계산서가 아니라서 손으로 일일이 내용을 쓰고 도장을 찍어서 발급해야 했기에 그 ‘손맛’의 짜릿함을 아직 내 손은 기억하고 있다. 또한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최종 보고회 때 박수를 받으며 컨설팅 결과를 치하 받았던, 그 감격 역시 가슴 저편에서 아직 울리고 있다. 한때는 하룻밤 만에 (파워포인트 기준으로) 100페이지 가까운 보고서를 단숨에 작성해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집중력과 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물론 좋았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컨설팅 수수료를 제때 주지 않고 질질 끌며 강짜를 부리던 고객사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시간, 하루 종일 진행되는 교육에서 자기네끼리 동기회를 하는지 떠들어 대며 강의하는 나를 무시하기까지 했던 무례한 신입 2년차 직원들, 어쩌다가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논리 만들기에 내가 동원되는 바람에 그 당사자로부터 대신 욕을 먹어야 했던 기억, 고객 담당자와 컨설팅 결과물을 놓고 거의 싸우다시피 하다가 감정적으로 틀어졌던 아픔 등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그때의 신산함도 이제는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다.




갑자기 회상 모드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이제 나는 컨설턴트로서의 나의 경력을 어느 정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컨설팅 의뢰가 날이 갈수록 급감하기 때문이다. 또 가뭄에 콩나듯 들어오는 의뢰라 해도 책정된 컨설팅 수수료는 역시나 갈수록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17년 전에 동일한 컨설팅 서비스를 100에 했다면 지금은 30~40에 해달라는 식이다. 이 정도의 금액으로도 수주하겠다고 여러 업체들이 나선다. 최근에 어느 고객사는 일주일 동안 컨설팅을 해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헌데 그 작은 컨설팅도 3개 업체나 불러 비딩을 하겠다고 해서 나 혼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컨설팅과 컨설턴트의 가치가 이렇게 떨어진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컨설팅 의뢰 건의 감소와 수수료 급감이 나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잘나가는’ 컨설팅 회사가 그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그렇다면 축하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컨설턴트로서의 경력을 마무리진다면 그 대안은 무엇일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2007년에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란 당돌한 책을 낼 때부터 가져왔던 것이니 10년이나 된 오래된 질문이다. 고백하자면, 아직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컨설팅 매출 비중보다 강의나 워크숍 매출 비중이 높아지더니 이제는 80% 정도에 육박하고 있다. 20% 정도의 매출 역시 ‘의뢰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전통적 의미의 컨설팅은 아니다. 고객사 내부적으로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내가 ‘자문역’으로 투입되어 매월 소정의 수수료(투입시간을 정산하여)를 받는 식이니까. 그리고 경영상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고객사에게 컨설팅이 아니라 이런 식의 ‘자문’을 해주겠노라고 내가 먼저 제안하니까. 이러니 내가 컨설턴트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강의 및 워크숍의 비중이 훨씬 높다고 해서 ‘강사’로 내 직업이 포지셔닝되는 것도 사실은 마땅치 않다. 내게 유명 강사에 버금가는 강의 실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내가 강사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8권 정도(번역서 제외) 책을 쓰면서 나는 남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리학이나 과학 등의 시각으로 경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줄곧 해왔다. 그 시작은 <경영유감>이었고 그 클라이막스는 <전략가의 시나리오>와 <착각하는 CEO>였다. 능력은 일천하지만 나름대로는 주류에 반하는 새로운 경영의 시각을 ‘제안’하고자 했다. 혹자는 나에게 강사나 컨설턴트가 아니라 ‘경영철학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낯간지러운 칭호이긴 하지만 그간 저돌적일 정도로 주류 경영방식에 도전해 온 내 노력을 한 마디로 치하하는 칭호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렇다고 경영철학가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너무 면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강사라고 불리면 이런 나름의 노력들이 그저 묻힐까 염려되는 마음이 있다. 솔직히 그렇다. (교육시에 나를 '강사님'이라고 부를 때 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0.5초쯤 느리게 싱크된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앞으로 어떤 포지션으로 어떻게 일할지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앞날의 불확실성 때문에 오늘도 ‘불안한 행복’에 지쳐간다. 답을 구하려 할수록 그 답은 점점 멀리 달아나버린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직업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사실이다. 내적인 요구로 아니면 외적인 상황 변화로 인해 지금의 직업은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의 기로에 설 것이다. 제2의 경력을 요구받게 될(또는 스스로 요구할) 때가 반드시 온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이때’를 지나는 중이다. 이때를 보내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자신만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목표를 잡는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보면 목표를 잘 정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재빨리 변화하고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컨설턴트가 될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어쩌다 처음 들어간 회사가 ‘망했고’ 그후에 그 망한 회사 출신의 선배가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여 나를 끌어준 것이 컨설턴트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책을 쓴 것도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어느 모임에서 출판사 대표를 만나 책을 내보라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삶은 정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되는 대로’ 된다.


제2의 경력을 요구받는 때에 ‘되는 대로 되려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기회를 무시하지 말고 적극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것 때문에 안돼’, ‘이건 내가 할일이 아냐. 난 잘 알지 못하니까’라고 관심을 끊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그럴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기회들이 노크를 한 것이다. 노크 소리를 들으면 문을 열어 주듯이 그 기회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된다. 해보고 재미있으면 계속 하면 된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제2의 경력으로 삼을 만한 직업이 서서히 명함 타이틀로 자리잡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마음으로 이 어두운 ‘제2의 경력 탐색’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빛 하나 없이 어둠 속을 걸어가려면 더듬는 수밖에 없듯이 무엇이든 ‘만져보고’ 판단해야 한다. 만질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영원히 터널 안에 갇힌다.


연일 비가 내리고 8월의 날씨 치고는 꽤나 선선해져서 이미 가을이 온 듯하다. 그래서인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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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금) 유정식의 경영일기


내가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사실 내 소유가 아니라 장기렌터카라서 캐피탈 회사의 소유다. 그래서 번호판에 ‘호’자가 붙어 있다. 3년 계약의 이 렌터카는 내년 1월이 만기이지만, 나는 조기반납 수수료를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달에 조기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전장(자동차 앞뒤 길이)이 4.6미터라서 차급으로 치면 ‘준중형’ 정도의 크기이지만 골목이 좁고 주차공간이 부족한 연희동에서 살면서 이 정도 크기도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는 자동차에 설치했던 스피커를 탈거하러 일산 쪽에 있는 카오디오샵을 찾았다. 순정 스피커의 소리에 워낙에 좋지 않아서 거금을 들여 달았던 소리 좋은 스피커를 렌터카 회사에 그냥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샵 주인은 내게 물었다. 

“어떤 차로 하시게요?”

아마도 그는 내가 다른 렌터카를 계약하거나 자차를 구입할 생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직 생각 중인데요, OOO을 살까 말까 하고 있어요.”

“OOO이요?”

OOO은 현재의 자동차보다 브랜드 측면이나, 차급 측면이나, 무엇보다 차 크기 측면에서 떨어지는 차종이라 그랬는지 샵 주인은 상당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어떤 차종이 새로 출시되는데 그 차는 어떠냐고 그는 내게 물었다. 그가 제안한 차는 SUV였다. 연희동에서 SUV를? 골목이 좁은 연희동에서 내가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울 것 같아서  가장 배제하고 있던 카테고리를 그는 추천했던 것이다. 보아 하니, 샵 안에 오디오 시연용으로 가져다 둔 차종(주인의 것으로 추정)도 SUV였다. 정말 요즘 SUV가 전세계적으로 대세이긴 한가보다. 세단이나 해치백보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SUV가 소형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인기몰이 중이고 지난 달에는 잇따라 2종의 소형 SUV가 출시됐으니 말이다.


세단 쪽도 ‘큰 자동차’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를 보니 국민차로 여겨졌던 H사의 소나타가 같은 회사의 그랜저에게 바통을 넘겨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달에 그랜저는 무려 1만 2093대가 팔리면서 출시 후 8개월 연속 월 1만대 판매 기록을 수립한 반면, 소나타는 기껏해야 6,000~7,000대 정도가 팔린다고 한다. 중형차인 소나타 정도 몰면 제법 ‘사는 축’에 속했던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전장이 5미터에 육박하는(정확히는 4930밀리미터) 그랜저 정도는 ‘타 줘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랜저 구매 고객도 상당히 젊어졌다. 준대형차는 전통적으로 4~50대를 타겟으로 하는데, 30대 고객도 25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첫차를 그랜저급으로 선택하는 젊은층도 상당하다.


같은 차종을 놓고 봐도 예전 세대부터 현재 세대까지 나란히 세워두면 크기가 커지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랜저를 예로 들면 1986년의 1세대가 4865밀리미터였고, 2세대는 4875밀리미터, 3세대는 4895밀리미터였다. 어떻게든 조금씩 차를 키워 온 것이다. 소나타 1세대는 4578밀리미터였지만 현재는 4855밀리미터로 과거 1세대 그랜저와 거의 차이가 없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BMW 3시리즈의 경우 2세대는 4325밀리미터였던 반면, 현세대는 4633밀리미터이다. 왜 이렇게 자동차는 커지는 걸까? 왜 큰 자동차를 선호하는 걸까? 왜 지금보다 작은 자동차로 바꿔 타겠다는 생각이 의아함을 불러 일으키는 걸까?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습성’ 때문일까? 아직 뾰족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큰 자동차를 선호하는 현상에 내가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리라.


(이 때의 차는 참 컴팩트했는데...)



스피커 탈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연희동 초입부터 차가 막혔다. 평소에 막히는 길이 아니라서 웬일이지 싶었다. ‘사고라도 났나?’ 알고보니 연희동의 여러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가져온 자동차를 대느라 양쪽 갓길이고 인도고 모두 다 점령해 버려서 정작 통행해야 할 차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죄다 자동차를 끌고 온 모양이었다. 식당 앞 인도와 도로를 점령한 자동차들을 보면 준중형 이하의 차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2~3분 걸릴 거리를 15분이나 걸려서 겨우 주차 장소(거주자 우선주차 자리)에 차를 댔다. 나도 차를 몰면서도 그렇게 큰 차들이 도로를 막고 선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몇 개월 동안은 차 없는 ‘뚜벅이’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니 대학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차없이 살아본 적은 없다. 최근까지 동시에 차를 두 대 굴린 적도 있었다. 차 없는 생활이 나에게 어떤 것인지 아직 상상은 되지 않지만 그리 불편할 것도 없을 듯 하다. 가까운 거리는 택시를 타면 되고 먼 길을 갈 때는 카셰어링(car-sharing)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자동차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주차장에 세워 두기보다는 필요할 때만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자동차로 넘쳐나는 도로의 비경제성을 미미하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이지 싶다. 그리고 자꾸만 커지는 자동차들로 인해 유발되는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지 싶다. 뚜벅이 생활이 불편해서 자동차를 구입한다면 OOO과 같은 작은 차를 살 것이다.


일본H사의 경차, N-One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터라 꼭 구입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구경을 위해 딜러샵을 찾곤 한다. 얼마 전엔 어느 일본 자동차 딜러샵(이 회사도 이니셜은 H이다)에 들러서 영업사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왜 경차는 수입을 안 하는 건가요?”

일본H사에도 꽤 괜찮고 예쁜 경차들이 있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정식으로 수입되면 정말 사고 싶어서 묻기도 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국내 자동차 회사(아마 H사를 가리키는 듯)가 못 들어오도록 정부에 엄청난 로비를 해서 그렇습니다. 일본 경차가 국내에 들어오면 내수 매출이 상당히 떨어질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이 영업사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의 개인적인 생각일 것 같다. 겨우 4개 차종(모닝, 스파크, 레이, 다마스) 밖에 없는 우리나라 경차의 마켓 셰어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수익성 측면에서 일본 경차의 한국 진출을 주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워낙에 큰 차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에게 과연 일본의 다양한 경차가 ‘먹힐지’ 의심스럽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모르는 일 아닌가? 트렌드는 역트렌드를 동반하는 법이다. 큰 차를 좋아하는 축과 작고 아기자기한 자동차를 선호하는 축으로 나뉘지 않을까? 자꾸만 커지는 자동차 때문에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나는 정말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OOO을 타도 다운그레이드됐다는 생각은 결단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뚜벅이 생활이 약간 불편할 것도 같아서 동네 이동용으로 스쿠터를 알아보는 중이다. "오토바이는 정말 위험해요"라는 H군의 강력한 주장에 주저하고 있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떼어낸 스피커를 중고가격으로 팔까 생각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살짝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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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5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신입사원을 채용해서 한달 만에 현업에 투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달 만에요?”

“교육을 하든 어떻게 하든 빠르게 업무능력을 높여서 현장에 투입해야 한다는 게 CEO의 지시사항입니다. ”


몇 년 전에 모 고객사로부터 이런 의뢰를 받았다. 난감했다. 1999년부터 그때까지 컨설팅 일을 하면서 그런 의뢰는 처음 받아 봤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이유로 신입사원을 그렇게 빨리 투입하려고 하십니까?”

“단독으로 스스로 알아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적어도 시간이 2~3년 걸리는데, 그게 회사로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채용하자마자 한두 달 교육을 시켜서 바로 그 인력을 활용해야(정확히는 “써먹어야”라고 표현함) 비용도 확 줄이고 다른 회사보다 경쟁력 있는 인력을 운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획기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이시니까 다른 회사의 사례를 알고 계실 테고, 뭔가 방법을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난감해졌다. 전문가라고 해서 답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사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의 원칙이다. 못하면 못한다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좋다. 컨설팅 수수료를 받으려고 무조건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 결국 끝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회사 사례도 저는 아는 바가 없고요. 신입사원을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바로 활용하신다니, 너무 급하신 거 아닌가요?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를 ‘형식지’라고 함)은 어떻게든 한 달 안에 학습이 가능하겠지만, 노하우라든지 상황대처능력이라든지 그런 ‘암묵지’는 업무를 통해서 서서히 체득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선임 직원과 파트너가 되어서 적어도 2~3년은 현업에서 ‘굴러 봐야’ 스스로 업무를 맡아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겠죠. 2~3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만…”

상대방은 내 말을 이해했지만 “CEO가 계속 채근하셔서…”라며 난감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짐작컨대 CEO는 어디에서 ‘즉전력(卽戰力)’이라는 말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바로 전장에 투입시켜도 될 만한 능력을 말하는 일본식 단어이다. 일본 구인 사이트를 보면 즉전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가 제법 자주 등장하고,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즉전력을 갖췄다는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곤 한다. 이 단어는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가 2007년에 펴낸 <즉전력>이란 책의 제목이 될 정도니 일본에선 어지간히 흔하게 쓰이는 말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례가 있는지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뢰를 받아들일 마음은 하나도 없었지만, 대체 즉전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즉전력>이란 책을 살펴봤다. 그가  책에서 소개한 즉전력의 구성요소는 어학력, 재무력, 문제해결력, 공부법, 회의술(토론력)이었다. ‘별거 아니네?’란 느낌이 바로 들었다. 이 5가지는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새로울 것은 없었다. 여느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 아닌가? 5가지를 조합해서 즉전력이란 단어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고객사 담당자가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단독으로’ 일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 회사 CEO는 오마에 겐이치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바로 현장에 투입할 만한 능력’이라는 즉전력의 사전적 정의만 어디에선가 듣고서 ‘멋진 말이다. 우리 회사도 그렇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신문 기사에 간혹 나오는 CEO들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네 회사는 인재가 우선이고 인재 양성을 중요시한다는 말이 십중팔구 등장한다. 나는 약간 시선이 삐딱한지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직원, 열심히 일하는 직원, 높은 성과를 올리는 직원을 ‘원하기만’ 할 뿐, 그런 직원들을 어떻게 채용하고 어떻게 육성시킬 것인지는 뒷전에 밀려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거의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모 대학교에서 ‘공학 교육의 방향’이란 주제로 열린 주제 발표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다. 아마도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란 책을 썼다는 이유로 나를 초청을 한 듯 했다. 여러 연사들 중 한 사람의 발언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모 기업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신입사원들이 회계를 몰라서 자기네들이 회계 교육을 시키느라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많이 드는지 아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에서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대학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게 요지였다. 학생들을 회사에 취업시키고 싶다면 전공과 상관없이 회사 생활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싶은 거냐, 라는 그의 주장이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왜 대학에게 떠넘기면서 비용과 시간 문제를 운운하는가? 취업문이 좁아지니까 기업이 대학에게 ‘갑질’을 하는 듯 보였다. 대학은 취업 준비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기초 지식을 함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 아닌가? 회계 지식이 그렇게 필요하면 자기네 회사에서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인재를 중요시하는 회사가 단지 비용과 시간이 든다고 호통을 쳐야 하는가?




즉전력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짜증이 솟구친다. 지긋지긋한 빨리빨리 문화라는 악습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인력을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여기고, 대학을 로봇을 제조하는 공장처럼 여기며, 그 로봇에 한 두 달 정도 지식과 정보를 ‘다운로드’하면 단독으로 업무 수행이 가능한 실전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계론적 경영방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 하에서 직원들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질 것이다(이미 그런 직원들이 제법 있다).


몇 년 전에 나에게 전화해서 즉전력을 한 두 달 안에 갖추는 방법을 의뢰했던 사람은 그 후로 한 두 번 더 연락을 해오다가 끊겼다. 다른 컨설팅사가 의뢰를 받아 들였는지, 아니면 그런 주제가 흐지부지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소문이 없는 걸 보니 그 회사가 즉전력 있는 직원들을 키워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성공했다면 유수의 경영 잡지에 소개됐을 테니까. 만약 성공했더라도 한 두 달 만에 즉전력 있는 직원을 양성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들의 업무가치가 저급하다는 증거일테니.


“즈쩡녕이 뭐에요?"

어려운 단어를 말할 때 H군의 발음은 이렇게 꼬이곤 한다. 꼬이는 건 H군만은 아니다. 빨리빨리 ‘인력 로봇’을 찍어내려는 기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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