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3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장면 1.

“내가 네 월급을 어떻게 주는지 알어? 내가 은행 대출 받아서 너한테 월급을 주는 거야. 그런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떤 업체에서 사장과 직원 사이에 회사의 사업과 관련하여 다툼이 있었나보다. 토론이 격해지다 못해 감정 싸움으로 번지자 사장은 직원에게 이런 말을 쏟아냈다. 사업 방향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다 이야기가 서로를 비난하고 잘못을 추궁하는 쪽으로 빠지다 보니 사장은 울컥하는 심정으로 직원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꺼낸 모양이다. 그 직원은 며칠 후에 퇴사했다.



장면 2.

“그런 거 사줄 바에야 차라리 돈으로 주지. 사장님은 돈이 남아도나 봐.”


작은 개인회사의 대표는 몇 안 되는 직원을 근사하고 맛있는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직원들이 맛본 적이 없을 듯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즐겼다. 직원들은 신기해 하면서 그런 이벤트를 즐기는 듯 했지만, 식사가 끝나고 나면 대표를 집으로 보내고 자기네끼리 모여서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을 먹었지만 자기네들 입맛에는 삼겹살이 최고라고 말하며, 고급 음식을 사 준 대표를 고마워 하기보다 자기네들 취향을 모르고 헛돈 쓰는 사람으로 평했다. 그런 돈 쓸 바에 삼겹살 사먹으라고 돈으로 주지 그게 뭐냐며 자기네끼리 대표를 비난하는 뒷담화는 밤늦도록 계속됐다.




장면 3.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고 걸어 주십시오.”


역시나 작은 회사의 이야기이다. 업무에 열의를 보이는 ‘똘똘한’ 직원이 있었다. 사장은 그 직원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 직원을 잘 교육시키면 훌륭한 인재로 조직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은 회사나 여유자금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사장은 직원에게 돈이 꽤 드는 외부교육을 수강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교육이 끝나고 그 다음 날, 그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다.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 전화를 걸어도 ‘없는 번호’라는 안내멘트만 나왔다.



장면 4.

“그렇게 잘하시면 사장님이 직접 하시지 그래요?”


어떤 직원이 작업을 느리게 하고 늦게 가져온 결과물도 오류 투성이였다. 사장은 속으로 화가 났다. 아주 기초적인 사칙연산조차 틀린 채로 가져왔고 회사에서 기본적으로 통용되는 포맷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장은 포맷을 일러주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작성할 수 있다’를 직원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직원도 알아듣는 듯 했다. 하지만 그 후에 가져온 직원의 결과물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몇 차례 이렇게 ‘다시 해 와’란 공방이 오고가다보니 양측 모두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선 모양이다. 사장이 “왜 그렇게 내 말을 못 알아 들어?”라고 쏘아붙이자 직원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맞섰다고 한다. “그렇게 잘하시면 사장님이 직접 하시지 그래요?” 사장은 후에 나를 만나 하소연했다. “내가 직접 만들 거면 왜 걔를 직원으로 고용해야 하죠?”라고.



장면 5.

“이 회사는 시스템이 없어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거 같아요.”


오랫동안 같이 일한 직원이 퇴사를 하겠다면서 퇴사 사유를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직원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을 만들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사장의 경영방침이었는데, 이렇게 시스템이 없다, 주먹구구식이라는 말을 들으니 사장은 좀 어이가 없었다. 목표 설정도 없고 매출이 떨어져도 별로 채근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쪽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런 걸 보고 주먹구구라고 하다니... ‘작은 회사의 강점은 체계적인 규칙 없이도 그때그때 잘 대응하는 능력 아닌가? 시스템이란 게 과연 뭐지?’ 사장은 혼란스러움과 섭섭함으로 한동안 마음이 상했다.




내가 컨설팅을 하면서 그간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다섯 가지 장면은 여느 회사의 여느 사장의 입장에서 벌어질 법한 전형적인 상황이다. 소위 ‘사장은 잘해줬는데 직원은 딴 생각을 하는’ 상황.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똑같은 장면이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사장의 입장을 보고 듣노라면 ‘사장 노릇’이 어쩌면 직원들보다 더 힘들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특히 사장과 직원들이 항상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소기업의 경우가 더 그렇다. 소기업 사장은 경영의 압박과 함께 직원들의 이런 행태도 견뎌내야 하는 자리이다. 


사장이 직원에게 갖는 ‘인간적인 섭섭함’의 근원은 ‘기대감’과 ‘계정의 불일치’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해줬는데 네가 그럴 수 있니?’ 내가 이만큼 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주길 바란다, 라는 건 인지상정이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기록하는 ‘주고 받은 양과 질’의 계정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직원 입장에서는 사장이 잘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그 계정에 (+)로 잡히지 않는다. 복지가 엄청나게 좋다는 여러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을 먹이는 게 하찮은 걸로 여겨진다. 사장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잘해준 항목을 (-)로 기록하고 언젠가 직원이 그 (-)를 채울 만한 기여를 해주길 기대한다. 은행 대출로 직원 월급을 지급했으니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고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사장의 마음 속엔 이런 식의 대차대조표가 있다.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맞추려는 감정의 싸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부터 대차대조표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기대를 말라’는 것이다. 사장은 자신이 법정 요건과 사규를 넘어서서 직원에게 추가적으로 지출을 하거나 배려하는 행동을 할 경우에 자신의 마음 속에 저절로 만들어지는 대차대조표를 경계해야 한다. 그냥 해주고 그걸로 무엇을 얻겠다는 기대를 버려라. 좋은 음식을 직원들과 함께 먹으러 갈 경우에는 그런 배려로 무언가를 얻겠다고 여기지 말고 ‘내가 그걸 먹고 싶어서. 하지만 혼자 먹으면 재미없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게 서로 속 편하다. 은행 대출을 받아서 월급을 주는 건 특별한 배려는 아니다. 사장의 할일이고 의무라서 아예 대차대조표를 만들어서는 안 될이건만 그걸로 직원 잘못을 공격하는 건 신사적인 행동이 아니다. 


매몰비용이란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일컫는 말이다. 오해할까 분명히 말하는데, ‘법정요건과 사규를 넘어서서’ 복지 프로그램을 통해서나 사장이 개인적으로 직원들에게 지출하는 물적, 심적 비용은 회수할 수 없는 매몰비용으로 인식하는 게 좋다. 그 비용으로 ‘편익’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하는 뜻이다. 쉽게 말해, 직원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잘해주는 것으로 끝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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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6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외국계 컨설팅사를 다니다가 ‘독립 컨설턴트’로 일한 지 이제 만으로 16년, 햇수로 17년이 되었다. 지난 날을 반추해 보면 소위 다사다난했다는 말이 제대로 실감이 난다. 나와 컨설팅 혹은 워크숍으로 관계를 맺은 고객사들은 세월이 흐른 만큼 일일이 기억하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고객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첫 세금계산서를 끊던 순간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는 전자세금계산서가 아니라서 손으로 일일이 내용을 쓰고 도장을 찍어서 발급해야 했기에 그 ‘손맛’의 짜릿함을 아직 내 손은 기억하고 있다. 또한 (그리 자주는 아니었지만) 최종 보고회 때 박수를 받으며 컨설팅 결과를 치하 받았던, 그 감격 역시 가슴 저편에서 아직 울리고 있다. 한때는 하룻밤 만에 (파워포인트 기준으로) 100페이지 가까운 보고서를 단숨에 작성해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집중력과 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물론 좋았던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컨설팅 수수료를 제때 주지 않고 질질 끌며 강짜를 부리던 고객사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시간, 하루 종일 진행되는 교육에서 자기네끼리 동기회를 하는지 떠들어 대며 강의하는 나를 무시하기까지 했던 무례한 신입 2년차 직원들, 어쩌다가 누군가를 ‘쳐내기 위한’ 논리 만들기에 내가 동원되는 바람에 그 당사자로부터 대신 욕을 먹어야 했던 기억, 고객 담당자와 컨설팅 결과물을 놓고 거의 싸우다시피 하다가 감정적으로 틀어졌던 아픔 등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지난 일이라 그런지 그때의 신산함도 이제는 재미난 추억으로 남았다.




갑자기 회상 모드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조금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지난날을 회상한다는 것은 정리를 의미한다. 이제 나는 컨설턴트로서의 나의 경력을 어느 정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컨설팅 의뢰가 날이 갈수록 급감하기 때문이다. 또 가뭄에 콩나듯 들어오는 의뢰라 해도 책정된 컨설팅 수수료는 역시나 갈수록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17년 전에 동일한 컨설팅 서비스를 100에 했다면 지금은 30~40에 해달라는 식이다. 이 정도의 금액으로도 수주하겠다고 여러 업체들이 나선다. 최근에 어느 고객사는 일주일 동안 컨설팅을 해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헌데 그 작은 컨설팅도 3개 업체나 불러 비딩을 하겠다고 해서 나 혼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컨설팅과 컨설턴트의 가치가 이렇게 떨어진 것이다. 격세지감이다. 물론 컨설팅 의뢰 건의 감소와 수수료 급감이 나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잘나가는’ 컨설팅 회사가 그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그렇다면 축하와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컨설턴트로서의 경력을 마무리진다면 그 대안은 무엇일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이런 생각은 2007년에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란 당돌한 책을 낼 때부터 가져왔던 것이니 10년이나 된 오래된 질문이다. 고백하자면, 아직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컨설팅 매출 비중보다 강의나 워크숍 매출 비중이 높아지더니 이제는 80% 정도에 육박하고 있다. 20% 정도의 매출 역시 ‘의뢰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보고서를 제출하는’ 전통적 의미의 컨설팅은 아니다. 고객사 내부적으로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내가 ‘자문역’으로 투입되어 매월 소정의 수수료(투입시간을 정산하여)를 받는 식이니까. 그리고 경영상의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고객사에게 컨설팅이 아니라 이런 식의 ‘자문’을 해주겠노라고 내가 먼저 제안하니까. 이러니 내가 컨설턴트라고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강의 및 워크숍의 비중이 훨씬 높다고 해서 ‘강사’로 내 직업이 포지셔닝되는 것도 사실은 마땅치 않다. 내게 유명 강사에 버금가는 강의 실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내가 강사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8권 정도(번역서 제외) 책을 쓰면서 나는 남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심리학이나 과학 등의 시각으로 경영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줄곧 해왔다. 그 시작은 <경영유감>이었고 그 클라이막스는 <전략가의 시나리오>와 <착각하는 CEO>였다. 능력은 일천하지만 나름대로는 주류에 반하는 새로운 경영의 시각을 ‘제안’하고자 했다. 혹자는 나에게 강사나 컨설턴트가 아니라 ‘경영철학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낯간지러운 칭호이긴 하지만 그간 저돌적일 정도로 주류 경영방식에 도전해 온 내 노력을 한 마디로 치하하는 칭호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그렇다고 경영철학가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너무 면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강사라고 불리면 이런 나름의 노력들이 그저 묻힐까 염려되는 마음이 있다. 솔직히 그렇다. (교육시에 나를 '강사님'이라고 부를 때 그게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0.5초쯤 느리게 싱크된다.)


지금 당장은 내가 앞으로 어떤 포지션으로 어떻게 일할지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앞날의 불확실성 때문에 오늘도 ‘불안한 행복’에 지쳐간다. 답을 구하려 할수록 그 답은 점점 멀리 달아나버린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직업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사실이다. 내적인 요구로 아니면 외적인 상황 변화로 인해 지금의 직업은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의 기로에 설 것이다. 제2의 경력을 요구받게 될(또는 스스로 요구할) 때가 반드시 온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 ‘이때’를 지나는 중이다. 이때를 보내는 가장 현명한 태도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자신만의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목표를 잡는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 보면 목표를 잘 정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재빨리 변화하고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 역시 그렇다. 나는 컨설턴트가 될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어쩌다 처음 들어간 회사가 ‘망했고’ 그후에 그 망한 회사 출신의 선배가 컨설팅 회사에 입사하여 나를 끌어준 것이 컨설턴트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책을 쓴 것도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연히 어느 모임에서 출판사 대표를 만나 책을 내보라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삶은 정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되는 대로’ 된다.


제2의 경력을 요구받는 때에 ‘되는 대로 되려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기회를 무시하지 말고 적극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이것 때문에 안돼’, ‘이건 내가 할일이 아냐. 난 잘 알지 못하니까’라고 관심을 끊어서는 안 된다. 자기가 ‘그럴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기회들이 노크를 한 것이다. 노크 소리를 들으면 문을 열어 주듯이 그 기회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일단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된다. 해보고 재미있으면 계속 하면 된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면 제2의 경력으로 삼을 만한 직업이 서서히 명함 타이틀로 자리잡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런 마음으로 이 어두운 ‘제2의 경력 탐색’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빛 하나 없이 어둠 속을 걸어가려면 더듬는 수밖에 없듯이 무엇이든 ‘만져보고’ 판단해야 한다. 만질까 말까 망설이다가는 영원히 터널 안에 갇힌다.


연일 비가 내리고 8월의 날씨 치고는 꽤나 선선해져서 이미 가을이 온 듯하다. 그래서인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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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4일(금) 유정식의 경영일기


내가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사실 내 소유가 아니라 장기렌터카라서 캐피탈 회사의 소유다. 그래서 번호판에 ‘호’자가 붙어 있다. 3년 계약의 이 렌터카는 내년 1월이 만기이지만, 나는 조기반납 수수료를 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번 달에 조기반납하기로 결정했다. 전장(자동차 앞뒤 길이)이 4.6미터라서 차급으로 치면 ‘준중형’ 정도의 크기이지만 골목이 좁고 주차공간이 부족한 연희동에서 살면서 이 정도 크기도 상당히 부담스럽게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는 자동차에 설치했던 스피커를 탈거하러 일산 쪽에 있는 카오디오샵을 찾았다. 순정 스피커의 소리에 워낙에 좋지 않아서 거금을 들여 달았던 소리 좋은 스피커를 렌터카 회사에 그냥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샵 주인은 내게 물었다. 

“어떤 차로 하시게요?”

아마도 그는 내가 다른 렌터카를 계약하거나 자차를 구입할 생각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아직 생각 중인데요, OOO을 살까 말까 하고 있어요.”

“OOO이요?”

OOO은 현재의 자동차보다 브랜드 측면이나, 차급 측면이나, 무엇보다 차 크기 측면에서 떨어지는 차종이라 그랬는지 샵 주인은 상당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어떤 차종이 새로 출시되는데 그 차는 어떠냐고 그는 내게 물었다. 그가 제안한 차는 SUV였다. 연희동에서 SUV를? 골목이 좁은 연희동에서 내가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울 것 같아서  가장 배제하고 있던 카테고리를 그는 추천했던 것이다. 보아 하니, 샵 안에 오디오 시연용으로 가져다 둔 차종(주인의 것으로 추정)도 SUV였다. 정말 요즘 SUV가 전세계적으로 대세이긴 한가보다. 세단이나 해치백보다 상대적으로 덩치가 큰 SUV가 소형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인기몰이 중이고 지난 달에는 잇따라 2종의 소형 SUV가 출시됐으니 말이다.


세단 쪽도 ‘큰 자동차’가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오늘 아침 신문 기사를 보니 국민차로 여겨졌던 H사의 소나타가 같은 회사의 그랜저에게 바통을 넘겨줬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달에 그랜저는 무려 1만 2093대가 팔리면서 출시 후 8개월 연속 월 1만대 판매 기록을 수립한 반면, 소나타는 기껏해야 6,000~7,000대 정도가 팔린다고 한다. 중형차인 소나타 정도 몰면 제법 ‘사는 축’에 속했던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전장이 5미터에 육박하는(정확히는 4930밀리미터) 그랜저 정도는 ‘타 줘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랜저 구매 고객도 상당히 젊어졌다. 준대형차는 전통적으로 4~50대를 타겟으로 하는데, 30대 고객도 25퍼센트나 된다고 한다. 첫차를 그랜저급으로 선택하는 젊은층도 상당하다.


같은 차종을 놓고 봐도 예전 세대부터 현재 세대까지 나란히 세워두면 크기가 커지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랜저를 예로 들면 1986년의 1세대가 4865밀리미터였고, 2세대는 4875밀리미터, 3세대는 4895밀리미터였다. 어떻게든 조금씩 차를 키워 온 것이다. 소나타 1세대는 4578밀리미터였지만 현재는 4855밀리미터로 과거 1세대 그랜저와 거의 차이가 없다. 우리나라 자동차 회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BMW 3시리즈의 경우 2세대는 4325밀리미터였던 반면, 현세대는 4633밀리미터이다. 왜 이렇게 자동차는 커지는 걸까? 왜 큰 자동차를 선호하는 걸까? 왜 지금보다 작은 자동차로 바꿔 타겠다는 생각이 의아함을 불러 일으키는 걸까?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습성’ 때문일까? 아직 뾰족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이렇게 큰 자동차를 선호하는 현상에 내가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리라.


(이 때의 차는 참 컴팩트했는데...)



스피커 탈거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연희동 초입부터 차가 막혔다. 평소에 막히는 길이 아니라서 웬일이지 싶었다. ‘사고라도 났나?’ 알고보니 연희동의 여러 식당을 찾은 손님들이 가져온 자동차를 대느라 양쪽 갓길이고 인도고 모두 다 점령해 버려서 정작 통행해야 할 차들이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죄다 자동차를 끌고 온 모양이었다. 식당 앞 인도와 도로를 점령한 자동차들을 보면 준중형 이하의 차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는 2~3분 걸릴 거리를 15분이나 걸려서 겨우 주차 장소(거주자 우선주차 자리)에 차를 댔다. 나도 차를 몰면서도 그렇게 큰 차들이 도로를 막고 선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


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렌터카를 반납하고 몇 개월 동안은 차 없는 ‘뚜벅이’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돌이켜보니 대학 4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차없이 살아본 적은 없다. 최근까지 동시에 차를 두 대 굴린 적도 있었다. 차 없는 생활이 나에게 어떤 것인지 아직 상상은 되지 않지만 그리 불편할 것도 없을 듯 하다. 가까운 거리는 택시를 타면 되고 먼 길을 갈 때는 카셰어링(car-sharing)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자동차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주차장에 세워 두기보다는 필요할 때만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자동차로 넘쳐나는 도로의 비경제성을 미미하나마 줄일 수 있는 길이지 싶다. 그리고 자꾸만 커지는 자동차들로 인해 유발되는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지 싶다. 뚜벅이 생활이 불편해서 자동차를 구입한다면 OOO과 같은 작은 차를 살 것이다.


일본H사의 경차, N-One


개인적으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터라 꼭 구입할 목적이 아니더라도 구경을 위해 딜러샵을 찾곤 한다. 얼마 전엔 어느 일본 자동차 딜러샵(이 회사도 이니셜은 H이다)에 들러서 영업사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왜 경차는 수입을 안 하는 건가요?”

일본H사에도 꽤 괜찮고 예쁜 경차들이 있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정식으로 수입되면 정말 사고 싶어서 묻기도 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국내 자동차 회사(아마 H사를 가리키는 듯)가 못 들어오도록 정부에 엄청난 로비를 해서 그렇습니다. 일본 경차가 국내에 들어오면 내수 매출이 상당히 떨어질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이 영업사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의 개인적인 생각일 것 같다. 겨우 4개 차종(모닝, 스파크, 레이, 다마스) 밖에 없는 우리나라 경차의 마켓 셰어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수익성 측면에서 일본 경차의 한국 진출을 주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는 워낙에 큰 차를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에게 과연 일본의 다양한 경차가 ‘먹힐지’ 의심스럽기도 할 것 같다. 


하지만 모르는 일 아닌가? 트렌드는 역트렌드를 동반하는 법이다. 큰 차를 좋아하는 축과 작고 아기자기한 자동차를 선호하는 축으로 나뉘지 않을까? 자꾸만 커지는 자동차 때문에 스트레스가 차오르는 나는 정말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OOO을 타도 다운그레이드됐다는 생각은 결단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뚜벅이 생활이 약간 불편할 것도 같아서 동네 이동용으로 스쿠터를 알아보는 중이다. "오토바이는 정말 위험해요"라는 H군의 강력한 주장에 주저하고 있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떼어낸 스피커를 중고가격으로 팔까 생각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살짝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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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1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이 광고 봤어요?”

H군은 날 보자마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게 들이대며 이렇게 물었다.

“무슨 광고인데요?”

“일종의 공익광고인데요, 상담원들의 통화연결음을 가족들이 육성으로 만들었더니 고객들의 폭언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내용이에요.”

“음… 그렇다면, 좋은 광고 아닌가요? 아이디어도 좋은 것 같구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난 표정이에요?”

H군은 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더니

“일단 그 광고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말해 봐요.”

또 나를 시험하려는구나. 원하는 대답을 하지 못하면 어쩌지. 아무튼 2분 51초에 이르는 그 긴 광고를 보고 나서 말해야겠다 싶었다.


(광고를 보려면 여기를 클릭)



H군의 말마따나 상담원들이 평소 겪는 고객들의 폭언과 욕설을 줄이기 위한 ‘작은’ 방법으로 상담원들의 자식, 남편, 부모가 통화연결음, 아니 통화연결 멘트를 녹음하여 들려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담원의 아이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 드릴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멘트를 상담원과 연결되기 전에 들려주는 식이다. 상담원도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자 부모이자 ‘아내’라는 점을 고객에게 인지시켜서 상담원을 하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대상으로 상대하도록 유도하고자 한 아이디어였다. 


뭐가 문제지? 나는 한번 보고 H군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번 더 광고를 보면서 어떤 측면이 H군을 화나게 했는지 ‘분석’해 봤다. 일단 광고에 나오는 상담원은 모두 여성이었다. 현실적으로 콜센터에 근무하는 직원의 대부분이 여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남성 상담원이 없는 것은 아니니, 광고에 등장하는 여러 상담원들 중에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남성 상담원이 나왔어야 현실을 반영한 균형 있는 시각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했고 “나오는 상담원이 모두 여성이라서 그게 언짢은 건가요? ‘상담원 = 여성’이라는 공식과 비뚤어진 젠더 의식을 강요하는 것 같아서?”라고 H군에게 물었다.


“그것도 이 광고의 문제이긴 하지만, 더 심각한 게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미안하지만 등장하는 상담원들이 모두 여성인 것 빼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는데요. 상담원의 아이, 남편, 부모가 통화연결 멘트를 하게 해서 그만큼 고객의 폭언이 줄어들었다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참신하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곳에 꽃을 심어서 더 이상 무단투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처럼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이끌어낸 좋은 사례라고도 볼 수 있구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H군의 표정을 살폈다. H군은 한숨을 쉬더니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자기가 페이스북에 남긴 글을 보라고 손짓했다. 여기에 H군의 글을 옮겨 적어본다.


———

이 광고... 매우 거슬린다.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없다면 ... 저 통화연결 녹음은 누가 해줄까? 자기 아내가 ,부모가 , 자식이 맨날 전화로 욕이나 쳐먹고 있는데, 조직에선 아무 대책도 안 세우고 안내원들만 사지에 몰아넣고 그냥 몸빵만 치라고 일시키는데 그저 우리 딸, 우리 아내 , 우리부모 험한꼴 덜 당하라고 저런 통화음을 속좋게 녹음 할 수 있겠는가?


오래전 나 역시 고객센터에서 근무했었다. 회사는 전국 수십 개 매장을 갖고 있던 외국계 외식업체였지만 고객센터 컴플레인 전화와 메일 , 게시판관리는 딸랑 나 혼자였다. 온갖 진상 전화 받아가며 스트레스 받다가 결국 한쪽 귀에 이상이 생겨 지금까지도 고생이다. 욕은 일상이고 심지어 고객이 회사까지 쳐들어와 물건을 부수고 내게 폭력을 써도 어느 누구도 아니, 고객의 불만 원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회사는 어떤 사후조치도 개선안도 만들지 않았다.


심지어 같은 부서 여직원은 내게 '언니도 빨리 시집 가서 이런 일은 다시 하지 마’라는 현명한 조언도 들었다. 난 그 때 무능한 팀장과 무책임한 회사에 대해 분노했고 그들과 싸웠지만 결국 퇴사하고 말았다. 


이미 15여 년이 지났지만 이 분야는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 그저 감정노동자라는 해괴한 이름만 생겼다. 조직과 시스템이 직원을 보호해야 하는데 왜 가족이 나서서 쉴드쳐 줘야하는가? 고객은 그냥 진상부리는 개, 돼지, 레밍이냐?  문제 핵심은 교묘히 피해가고 미담만 만드는 이런 캠페인. 심히 탁하다 탁해.

———




“이제 진짜 문제가 뭔지 알겠어요?”

내가 글을 다 읽고 나자 H군은 이렇게 말하며 “무엇이 이 광고의 문제인지 한번 말해봐요.”라고 나에게 다시 시험문제를 냈다.

“H군 말한대로, 고객 불만의 책임은 회사측에 있는데, 상담원들의 가족이 동원돼서 해결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이군요. 상담원들이 욕받이가 돼서 고객의 폭언과 욕설을 막아냈는데 이제는 그런 의무를 가족에게까지 은연 중에 떠넘기는 것 같아요. 가족들이 저렇게 멘트를 남겨도 폭언하고 욕하는 고객이 반드시 있을 거에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그렇게 멘트를 녹음했는데도 그런 일이 생기는구나’라며 그때부터는 가족들도 책임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상처를 받지 않을까요?”


고객 불만의 책임이 회사측에 있다는 점을 아는 조직이라면, 그리고 직원들을 '진짜로' 아낀다면 직원들의 가족들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조직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 즉 CEO가 직접 멘트를 녹음해야 하지 않을까? 가족이 있는 상담원들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의 녹음을, 가족이 없는 상담원들은 CEO의 멘트를 내보냈으면(혹은 가족 유무와 상관없이 CEO의 멘트가 랜덤으로 나가도록 했으면) 훨씬 더 좋지 않을까? CEO는 뒷전에 앉아 이런 ‘미담’을 흐뭇한 미소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고객 폭언의 문제가 결국 자신의 책임임을 안다면 자신도 팔을 걷어 붙이고 통화연결 멘트를 녹음했어야 옳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회사의 사장 아무개입니다. 제가 아끼는 직원이 곧 상담드릴 예정입니다. 고객님의 요청을 잘 처리해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만약 지나친 폭언과 욕설을 하실 경우에는 저희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립니다.”라는 식의 경고 메시지도 포함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광고의 문제점은 '고객 폭언은 너희들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해봐' 라는 생각이 전제된 것 같기 때문이다.




H군에게 나의 아이디어를 말하니, 정말 그래야 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직원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직원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있다면 설령 고객이라 하더라도 엄중하게 상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상담원들을 욕받이로 내보내고 뒷전에서 미담만을 즐기는, 비겁한 ‘장수’가 되지 않는 길이다.


댓글이 많이 달린 걸 보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공익광고에 감동했고 아이디어의 ‘천재성(?)’에 탄복한 듯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하지만 이런 미담성 광고에는 우리가 지금껏 지니고 있는 선입견, 편견, 편향, 고루하고 잘못된 가치관(특히 빈약하고 비뚤어진 젠더 의식)이 투영되고 녹아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상담원은 모두 여성이라는 편견, 가족 없는 상담원이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지 못한 배려 없음, CEO는 뒷짐 지고 빠져 있어도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계급의식 등이 바로 그러하다. 


앞으로 이런 미담류 광고는 철저하게 뜯어볼 일이다. H군의 시험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H군이 상담원이라면 누가 멘트를 녹음해줄까? 고양이들이 해주려나? “야옹, 야옹, 야오옹~~~”하면서.



(*덧붙이는 글)

이 공익광고의 아이디어는 아마도 어느 까페에서 아르바이트생이 입는 옷 뒤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고 적힌 글귀에서 힌트를 얻은 듯 하다(추정이다). 아이디어 자체는 탁월하다. 하지만 CEO나 고위 임원을 멘트 녹음에 동참시켰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든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라는 점은 이해된다. 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음편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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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6일(수) 유정식의 경영일기


1955년 4월 18일에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사망한 후에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뇌를 특별히 궁금해 했다. 뉴턴의 절대론적 과학관을 무너뜨리는 상대성이론을 제시하고 양자물리학(아인슈타인 본인은 양자역학에 회의적이었지만)의 기초를 닦은 20세기의 위대한 지성이었기에 당연히 그의 뇌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던 모양이다. 들어본 적 있겠지만, 아인슈타인의 시신을 부검하던 병리학자 토머스 하비는 뇌만 빼내고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었다. 어찌어찌해서 하비는 가족을 설득해서 뇌를 연구할 수 있도록 승낙을 받아냈고, 아인슈타인의 뇌는 240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여러 신경학자들에게 보내졌다.



그의 뇌 구조를 조사한 신경과학자 샌드라 위틀슨은 ‘하두정소엽’이라는 부분이 일반인들에 비해 상당히 크고 형태도 특이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하두정소엽은 공간적 추리력과 수학적 직관을 관장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평균 이상으로 발달되었기에 일반상대성 이론과 같은 천재적 업적을 달성한 것이 아닐까 위틀슨은 추측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만 특별히 발달된 하두정소엽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수학자와 일반인의 뇌를 비교해 본 신경학자 쿠빌레이 에이디나가 수학자들의 하두정소엽이 일반인들보다 상대적으로 크다는 사실을 밝혔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아인슈타인의 뇌는 생각만큼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뇌의 특정 부위가 평균 이상으로 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알고보면 단순하다. 어느 하나의 능력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면 그 능력을 관장하는 뇌의 부위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마도 들어봤을 텐데, 바로 런던의 택시기사들의 이야기이다. ‘올 런던(All London)’이라고 불리는 런던의 택시 면허 시험은 세계에서 가장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모든 도로와 주택단지뿐만 아니라 공원, 관청, 호텔 등 손님이 목적지로 요청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장소를 알아야 하고 가장 이상적인 경로를 꿰뚫고 있어야 시험에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망생들 중 절반 이상이 도중에 탈락하거나 포기한다. 


엘리너 맥과이어라는 신경학자는 런던의 택시 운전사 16명의 뇌를 MRI로 관찰했는데, 공간 탐색과 위치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의 뒷부분이 택시 운전사가 아닌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컸다. 같은 대중교통 분야에서 일하는 버스 운전사들과 비교해도 역시나 그들보다 크기가 상당히 컸다. 알다시피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가지만, 택시는 손님이 원하는 위치로 가기 위해 매번 길 찾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가질지 모르겠다. 택시 운전을 오래 해서 해마가 커진 게 아니라 애초에 해마가 큰 사람들이 어렵기로 악명 높은 택시 면허 시험을 통과한 것은 아닐까? 시간적 선후관계가 반대일 가능성이 충분했는데, 맥과이어는 후속 연구를 통해 혹독한 교육을 거쳐 택시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시험 전에 비해 해마의 뒷부분이 커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택시 운전을 시작하면서 모든 장소와 이동경로를 학습하는 과정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해마가 발달한다는 뜻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뇌 조각을 들고 있는 토머스 하비



컴퓨터보다 뇌가 훨씬 오래 전에 생겨 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의 뇌를 CPU나 메모리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이런 비유는 비록 직관적이긴 하지만, 인간의 뇌가 CPU의 성능처럼 한계가 있다는 고정관념을 형성시키고, 학습 과정은 메모리에 소프트웨어를 띄우는 일과 같다는 인상을 갖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수학자와 런던 택시기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인간의 뇌는 훈련을 통해 언제든 커지고 더 발달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닌다. 집중적인 근육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는 것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이를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학습이란 뇌의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봐야 옳다.


이러한 뇌의 가소성은 크기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기관의 ‘역할 재배치’에서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시각장애인들의 시각피질은 그 기능이 정지해 버린 ‘암흑 지대’라고 간주하겠지만, 뇌는 손가락으로 점자를 읽는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미를 해석하도록 시각피질에 새로운 기능을 할당한다. 이래도 뇌가 컴퓨터의 CPU나 메모리와 비슷한가? 



고백하자면, 요즘 눈 앞의 글씨가 안 보여서 책이나 모니터를 볼 때마다 안경을 벗어 머리 위에 걸쳐놓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게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근시와 원시 사이, 소위 ‘노안’이 찾아온 것이다. 매번 안경을 벗는 게 귀찮고 안경이 쉽게 망가질 것 같아서 나는 안경 렌즈 부위만 위로 들어올리는 플립형 안경을 끼고 다닌다(사람들이 다 신기해 한다!). 안과의사는 어쩔 수 없는 과도기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나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연습을 통해 노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스라엘 신경학자 유리 폴라트의 연구를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의 연구에서 일주일에 세 번 30분씩 시력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체의 색과 배경의 색이 아주 비슷해서 어떤 물체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를 계속 맞혀야 했다. 3개월 후에 참가자들은 예전보다 60퍼센트 더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축 쳐진 수정체가 탄력을 회복해서가 아니었다. 뇌가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정보를 더 잘 해석해 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의 뇌는 물렁물렁하다. 아인슈타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런던에서 그 어렵다는 택시 운전쯤은 할 수 있고 불편한 노안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집중적인 훈련과 의지가 뒷받침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제 사람의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일은 그만하지 싶다. 아인슈타인의 뇌 이야기가 어떻게 경영과 연관이 있는지 궁금할지 모르겠다.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뇌는 컴퓨터나 소프트웨어가 아니다. 이런 기계론적 시각을 버려야 직원을 로봇처럼 여기는 기계론적 경영방식을 없앨 수 있을 테고, 넓게는 인간성을 회복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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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5일(화) 유정식의 경영일기 


“신입사원을 채용해서 한달 만에 현업에 투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달 만에요?”

“교육을 하든 어떻게 하든 빠르게 업무능력을 높여서 현장에 투입해야 한다는 게 CEO의 지시사항입니다. ”


몇 년 전에 모 고객사로부터 이런 의뢰를 받았다. 난감했다. 1999년부터 그때까지 컨설팅 일을 하면서 그런 의뢰는 처음 받아 봤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온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떤 이유로 신입사원을 그렇게 빨리 투입하려고 하십니까?”

“단독으로 스스로 알아서 업무를 수행하기까지 적어도 시간이 2~3년 걸리는데, 그게 회사로서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채용하자마자 한두 달 교육을 시켜서 바로 그 인력을 활용해야(정확히는 “써먹어야”라고 표현함) 비용도 확 줄이고 다른 회사보다 경쟁력 있는 인력을 운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획기적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이시니까 다른 회사의 사례를 알고 계실 테고, 뭔가 방법을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난감해졌다. 전문가라고 해서 답을 다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회사의 사례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의 원칙이다. 못하면 못한다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좋다. 컨설팅 수수료를 받으려고 무조건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 결국 끝이 좋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회사 사례도 저는 아는 바가 없고요. 신입사원을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바로 활용하신다니, 너무 급하신 거 아닌가요? 업무에 필요한 지식(이를 ‘형식지’라고 함)은 어떻게든 한 달 안에 학습이 가능하겠지만, 노하우라든지 상황대처능력이라든지 그런 ‘암묵지’는 업무를 통해서 서서히 체득되기 마련입니다. 지금처럼 선임 직원과 파트너가 되어서 적어도 2~3년은 현업에서 ‘굴러 봐야’ 스스로 업무를 맡아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겠죠. 2~3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만…”

상대방은 내 말을 이해했지만 “CEO가 계속 채근하셔서…”라며 난감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짐작컨대 CEO는 어디에서 ‘즉전력(卽戰力)’이라는 말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바로 전장에 투입시켜도 될 만한 능력을 말하는 일본식 단어이다. 일본 구인 사이트를 보면 즉전력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리가 제법 자주 등장하고,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도 자신이 즉전력을 갖췄다는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곤 한다. 이 단어는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가 2007년에 펴낸 <즉전력>이란 책의 제목이 될 정도니 일본에선 어지간히 흔하게 쓰이는 말인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례가 있는지 한번 찾아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대충 대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뢰를 받아들일 마음은 하나도 없었지만, 대체 즉전력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위해 <즉전력>이란 책을 살펴봤다. 그가  책에서 소개한 즉전력의 구성요소는 어학력, 재무력, 문제해결력, 공부법, 회의술(토론력)이었다. ‘별거 아니네?’란 느낌이 바로 들었다. 이 5가지는 분명 중요한 것이지만, 새로울 것은 없었다. 여느 자기계발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 아닌가? 5가지를 조합해서 즉전력이란 단어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걸 고객사 담당자가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두 달 훈련시켜서 ‘단독으로’ 일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 회사 CEO는 오마에 겐이치의 책을 읽어보지 않은 채 ‘바로 현장에 투입할 만한 능력’이라는 즉전력의 사전적 정의만 어디에선가 듣고서 ‘멋진 말이다. 우리 회사도 그렇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다)?


신문 기사에 간혹 나오는 CEO들의 인터뷰를 보면 자기네 회사는 인재가 우선이고 인재 양성을 중요시한다는 말이 십중팔구 등장한다. 나는 약간 시선이 삐딱한지 그런 말을 접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직원, 열심히 일하는 직원, 높은 성과를 올리는 직원을 ‘원하기만’ 할 뿐, 그런 직원들을 어떻게 채용하고 어떻게 육성시킬 것인지는 뒷전에 밀려 있지 않나 의심해 본다. 


거의 10년 전으로 기억된다. 모 대학교에서 ‘공학 교육의 방향’이란 주제로 열린 주제 발표에 연사로 참여한 적이 있다. 아마도 <경영, 과학에게 길을 묻다>란 책을 썼다는 이유로 나를 초청을 한 듯 했다. 여러 연사들 중 한 사람의 발언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모 기업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신입사원들이 회계를 몰라서 자기네들이 회계 교육을 시키느라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고 시간이 많이 드는지 아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에서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다며 대학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게 요지였다. 학생들을 회사에 취업시키고 싶다면 전공과 상관없이 회사 생활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대학에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 학생들을 취업시키고 싶은 거냐, 라는 그의 주장이 나는 상당히 불편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왜 대학에게 떠넘기면서 비용과 시간 문제를 운운하는가? 취업문이 좁아지니까 기업이 대학에게 ‘갑질’을 하는 듯 보였다. 대학은 취업 준비를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기초 지식을 함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 아닌가? 회계 지식이 그렇게 필요하면 자기네 회사에서 가르치면 될 일 아닌가? 그렇게 인재를 중요시하는 회사가 단지 비용과 시간이 든다고 호통을 쳐야 하는가?




즉전력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짜증이 솟구친다. 지긋지긋한 빨리빨리 문화라는 악습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인력을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여기고, 대학을 로봇을 제조하는 공장처럼 여기며, 그 로봇에 한 두 달 정도 지식과 정보를 ‘다운로드’하면 단독으로 업무 수행이 가능한 실전 로봇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계론적 경영방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 하에서 직원들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질 것이다(이미 그런 직원들이 제법 있다).


몇 년 전에 나에게 전화해서 즉전력을 한 두 달 안에 갖추는 방법을 의뢰했던 사람은 그 후로 한 두 번 더 연락을 해오다가 끊겼다. 다른 컨설팅사가 의뢰를 받아 들였는지, 아니면 그런 주제가 흐지부지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소문이 없는 걸 보니 그 회사가 즉전력 있는 직원들을 키워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성공했다면 유수의 경영 잡지에 소개됐을 테니까. 만약 성공했더라도 한 두 달 만에 즉전력 있는 직원을 양성했다는 건 그만큼 자신들의 업무가치가 저급하다는 증거일테니.


“즈쩡녕이 뭐에요?"

어려운 단어를 말할 때 H군의 발음은 이렇게 꼬이곤 한다. 꼬이는 건 H군만은 아니다. 빨리빨리 ‘인력 로봇’을 찍어내려는 기업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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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7일(월) 유정식의 경영일기

 

날씨가 점점 더워져서 방에 작은 벽걸이형 에어컨을 설치해야겠다는 생각에 연희동 모 전자제품 대리점의 점장으로 있는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름 끝이 ‘왕’으로 끝나기에 우리(나, H군, 정왕씨)끼리 편의상 왕 아저씨로 통하는 그 분은 우리가 사무실을 오픈할 때 냉난방기 설치를 부탁할 때부터 알게 된, 연희동의 사실상 토박이(연희동에서 태어났는지는 몰라서)였다. 그때 동네 아저씨처럼 이것저것 우리에게 유리하게 냉난방기 구입을 ‘컨설팅’해 주었던 게 참 인상적이었다. 연희동에서는 왕 아저씨처럼 오랫동안 터를 잡고 영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한 마디만 하면 ‘어, 알았어.’라고 말하며 ‘알아서 해주곤’ 한다. 


사실 왕 아저씨에게 연락을 하기 전에 전화를 받을까 살짝 염려가 됐다. 왜냐하면 H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1년 전인가, H군은 TV 하나를 살까 해서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TV의 광팬인 H군에게는 당연히 TV가 있었지만 오래 되고 화질도 변변찮고 ‘두꺼웠기’ 때문인지 기존 TV를 얄쌍하게 잘 빠진 최신 기종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헌데 왕 아저씨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 H군은 놀랐다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요?”라고 내가 물으니,

“왕 아저씨가 아프시다네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데요.”라고 H군이 대답했다.

“많이 아프시데요?”

“병명은 잘 모르겠는데, 꽤 오래 입원해야 한데요.”




H군은 한번 단골 관계를 맺으면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지 않으려는 ‘고객 충성도’가 높다(왜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새 TV를 사고 싶은 욕구가 싹 가라앉았는지 그렇게 노래 부르던 ‘TV를 사야겠다’는 소리를 그 후로는 들을 수 없었다. 물어보니 아직 옛날 TV를 그대로 쓴단다. 왕 아저씨가 아니면 TV를 살 수 없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제는 다 완쾌되셨기를 빌며 왕 아저씨에게 전화를 거니 이제는 퇴원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에어컨 하나를 설치하고 싶다고 하니 왕 아저씨는 “언제 한번 들를게요”라고 바로 대답하곤 일이 바쁜지 전화를 급히 끊었다. 나는 ‘동네 영업자’의 ‘내가 알아서 해줄게’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헌데 그 후로 2주일 가까이를 기다렸지만 왕 아저씨의 ‘언제 한번’은 소식이 없었다. 나도 에어컨이 그리 급할 것 없었다. 벌써 7월 중순이니 이번 여름은 그냥 참고 넘어갈 참이었다. 그렇지만 요 며칠 한껏 높아진 습도 때문에 끈적거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왕 아저씨에게 SOS를 쳤다.


이러저러 해서 왕 아저씨가 결국 집을 방문해서 에어컨 설치 위치를 살펴 보게 됐다. “이렇게 설치하면 되겠네”라고 말하며 일이 바쁜지 급히 자리를 뜨려는 아저씨에게 시원한 매실차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프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떠세요?”

“지금은 괜찮아요. 하지만 일이 너무 바빠 무리가 될까 걱정이에요.”

“오랫동안 아프셨으니 무리하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왕 아저씨는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쉬엄쉬엄 할 수 있게 해주지 않네요. 월급쟁이가 그렇죠. 실적 압박도 있어서 뭐…”

왕 아저씨는 매실차를 한번에 들이킨 다음에 말을 이었다.

“병원에 있을 때도 어찌나 전화가 많이 오는지 병실 침대에 누워서 전화를 참 많이 받았어요.”

H군의 전화도 한몫했었겠군,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물었다.

“고객들이 전화를 많이 했나봐요? 워낙 영업을 잘하시니까요.”

“글쎄요, 고객들 전화도 많았지만, 직원들이 ‘이건 어떻게 하냐, 저건 어떻게 하냐’ 하는 전화를 많이 하더라구요.”

왕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한 마디 말을 덧붙였다.

“자기들이 안 아프니까 아픈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이 말은 아파도 제대로 아플 수 없는 한국 직장인들의 서글픈 단면과 ‘잔인성’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병원에 있다면 요양을 한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남들은 바쁘게 일하는 데 팔자 좋게 혼자 휴양한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주 간혹이지만 주변에 있다. 고용주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말이다. 누군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야겠다면 ‘빨리 건강해져라’는 측은지심과 ‘이렇게 바빠 죽겠는데 왜 지금?’이라는 감정이 야릇하게 혼합된 표정이 느껴진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아픈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너의 일을 내가 떠맡아야 하는구나’하며 한숨을 쉰다. 잘 모르는 게 있다는 이유로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지만, 이것저것 묻는 말의 행간에는 ‘너 때문에 내가 아주 힘들다’라는 푸념이 들어 있고, 그 부정적인 감정은 고스란히 병자에게 제대로 아프지 못하게 만드는 부담으로 전달된다. 추측컨대, 왕 아저씨의 경우에도 그랬을리라.


얼마 전, 갑작스러운 허리 디스크 수술로 일주일 동안 입원했던 지인도 그랬다. 마치 허리 디스크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동료들과 부하 직원들이 병실로 전화해서 ‘팀장님이 빨리 오셔야 해요. 일이 진행이 안 돼요.”라는 죽는 소리를 여러 번 하더란다. 퇴원 후에 집에서 며칠 간 요양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조언했지만 그런 직원들의 등쌀(?)에 못이겨 바로 회사로 출근할 수밖에 없었단다. 주말에도 말이다. ‘빨리 오셔야 해요’란 말은 ‘빨리 나으세요.’라는 위로의 뜻이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런 변명은 자신의 말이 아픈 자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무감하다는 증거다. 생각해 보라. 아픈 자가 어떻게 빨리 나을 수 있겠는가? 그건 의사가 할 일이다. 아픈 자는 오롯이 병에 집중하고 충분히 아플 ‘여유’를 가져야 한다. 낫는 것에도 그 지긋지긋한 ‘빨리빨리’를 외치며 스트레스를 주는가?


아픈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잔인’해졌는가? 경쟁과 성과 창출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는 버려진 연탄 재처럼 이리저리 채인다. 마음 놓고 아플 수 없는 직장이 직장인가? 급히 떠나면서 던지는 왕 아저씨의 말이 아프게 박힌다.


“아프면 자기만 손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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