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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없는 사무실'이란 말이 쓰이지만 여전히 많은 종이와 복사기가 사무실에서 사용 중입니다. 아마 사무실에 복사기와 A4용지를 없애버리면 업무가 꽤 오랫동안 마비되거나 혼란스럽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그만큼 복사기는 PC 다음으로 업무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물건이 됐습니다.
현대식 복사기의 효시는 체스터 칼슨이라는 사람이 개발한 '제로 그래픽 기술'입니다. 혼자서 이 기술을 상용화할 수 없었던 그는 등사기 회사인 'A.B. 딕'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철필로 파란 등사지에 가정통신문 같은 내용을 쓰면 그것을 등사실의 아저씨들이 판화 찍듯이 검은 잉크를 묻혀 한장 한장 찍어내던 기억이 있습니다. A.B. 딕은 바로 그런 등사기를 만들던 회사였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의 경영진은 제로 그래픽 기술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복사기에 비해 등사기가 훨씬 경제적이었고 등사기만으로도 충분한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은 10분 안에 20부를 복사하라는 지시를 쉽사리 내리지만 그때는 그럴 필요성을 별로 못 느꼈지요. 설령 똑같은 문서가 여러 장 필요해도 타이핑 속도가 뛰어난 비서들에게 시키면 그만이었습니다. 돈을 비싸게 들여 복사기를 개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A.B. 딕 뿐만 아니었습니다. 무려 20개가 넘는 회사가 칼슨의 기술에 퇴짜를 놓았으니까요. 이렇게 여러 회사의 문전에서 박대를 받았던 칼슨의 복사기 기술은 1947년에 '할로이드(나중에 제록스가 됨)'라는 회사가 수용했고 그로부터 11년 후에 최초의 사무용 복사기가 탄생했습니다.
문서를 원래 모양대로 찍어내는 복사기는 당시에 굉장히 흥미롭고 신기한 기술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왜 처음에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 걸까요? 바로 '패러다임' 때문이었습니다. 복사기 기술은 '효율'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하지만 '낮은 비용'이란 개념과는 반대되는 물건이었죠. 요즘에야 효율이 중요한 경영의 가치로 인식되지만 당시에는 효율은 저비용이란 가치보다 훨씬 후순위였습니다. 싼 임금으로 고용할 수 있는 타이피스트들과 복사기보다 훨씬 싼 등사기가 저비용이란 가치에 부합되었죠. 여러분은 복사기의 미래 가치를 보지 못한 A.B. 딕의 경영진이 멍청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비용 패러다임' 하에서 그들의 선택은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 중 하나는 패러다임이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고 의사결정과 미래에 대한 시각을 규정하는 틀로 작용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패러다임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에 나쁘게만 봐서는 안 됩니다. 패러다임 없이는 분석적인 추론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리기가 어렵거나 아예 불가능해지죠. 따라서 A.B. 딕 경영자의 선택은 당시에 패러다임 하에서 행한 '옳은' 결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시사점은 현재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그것의 울타리를 벗어난 새로운 패러다임과 미래의 일들을 웬만해선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불확실성 때문에 미래를 예견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패러다임이 사고의 틀을 제한하기 때문에 '복사기가 거의 모든 사무실의 필수 사무기기가 될 것이다'란 전망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죠. 그래서 게리 해멀은 "기업은 미래를 창조하는 데 실패한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시각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매우 근본적인 물음이고 그렇기 때문에 답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이렇게 하면 미래 예측력이 높아진다"고 선전하는 책들이 넘쳐나지만 딱히 해답이 손에 잡히지 않는 고차원적인 선언만 난무합니다. 저에게도 딱부러지게 "이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대답이 없습니다.
최선의 대답은 "가능성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워크맨으로 휴대용 오디오 기기의 선두주자였던 소니가 MP3의 기회를 외면한 것, 즉석카메라 기술로 유명했던 폴라로이드가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견했음에도 그 기회를 애써 무시한 것, 알타비스타와 야후가 구글의 검색기술을 100만 달러라는 싼 가격에 사라는 제안을 거부한 것 등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한 단적인 사례들입니다.
변화의 조짐을 감지하고 그것의 기회와 위협의 시나리오를 한편의 드라마처럼 시각화함으로써 창조적인 도약을 방해하는 현재의 패러다임에 의도적으로 저항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상상력과 통찰력과 직관을 총동원하여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시도가 지속되어야 합니다. 이런 시도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거대한 성공과 거대한 실패를 가르는 변곡점이 된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랍니다.
(*참고도서 : '스마트 월드', 리처드 오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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