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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암묵지(tacit knowledge)와 형식지(explicit knowledge)로 나뉘죠. 암묵지는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의 머리 속에 내재되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형태의 지식을 말하고, 형식지는 문서, 영상, 말의 형태로 외부로 드러난 지식을 말하죠. 지식경영의 대가인 노나카 이쿠지로와 같은 사람들이 지식이 이렇게 두 가지로 분류하죠.
노나카는 다음과 같은 4단계의 변환을 거치면서 지식이 창조되고 공유된다고 주장했습니다.
(1) 암묵지가 다른 암묵지로 변환
(2) 암묵지가 형식지로 변환
(3) 형식지가 다른 형식지로 변환
(4) 형식지가 암묵지로 변환
4단계 과정이 지속적으로 순환하면서 지식의 상승효과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나선형 프로세스'라고 불립니다. 언뜻 보면, 정말 그렇겠구나, 란 생각이 드는 명료한 개념입니다.
이 4단계 과정 중에 무엇이 가장 크리티컬할까요? 바로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사람들(특히 숙련된 전문가들)의 머리 속에만 자리잡고 있는 지식을 겉으로 끄집어내야 그것을 다른 사람들(암묵지가 부족한 사람들)이 빠르게 공유하고 활용해서 새로운 암묵지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암묵지를 형식지로 옮기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과정입니다. 암묵지는 말 그대로 그것을 보유한 사람조차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는 지식이고 무의식적으로 쓰이는 지식이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핵심의 대부분은 휘발되고 맙니다. 더군다나 무엇이 날아가 버렸는지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언어란 그릇은 암묵지를 담기엔 적당하지 않은 그릇이죠.
여러분이 안 보고도 능숙하게 수행하는 일을 하나만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옮려고 하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단순작업이라면 어렵진 않겠지만, 복잡한 일을 할 때 적용하는 자신만의 암묵지를 기술하라고 하면 '적을 게 없네' 혹은 '(적어 놓은 것을 보고) 아,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래서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는 과정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기울여야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지식의 창조는 물건너간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컨설턴트의 경력을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으로 시작했습니다(초기에 잠깐 ERP를 하기도 했지만).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창 지식경영이 붐을 이뤘던 때였죠. 하지만 요즘엔 지식경영을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지식경영에 대해 컨설팅을 해달라는 기업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ERP나 CRM 등은 한창 때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데, 정부가 나서서 대대적으로 지원했던 KM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왜 지식경영은 실패한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패착은 노나카가 제시한 나선형 프로세스 중 두 번째 단계(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를 안이한 방식으로 대응하려 한 데에 있습니다. 바로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는 과정을 시스템과 제도에게 전가해버린 '시스템 만능주의' 사고방식 때문이었죠.
지식경영을 구현하는 과정은 대개 이런 식이었습니다. 회사가 필요로 하는 지식들을 분류하여 지식 맵(Knowledge Map)으로 설계한 후에 각 카테고리별로 DB를 하나씩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여기에 올릴 공간을 만들었으니 '당신이 가진 암묵지를 등록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지식 등록을 유도하려고 '지식 마일리지'를 쌓게 하여 일정 수준이 되면 현금이나 상품으로 보상하는 방법도 씁니다. 그리고 각 지식이 얼마나 활용가치가 있는지 '별 다섯 개' 방식으로 평가해서 해당 카테고리에서 누가 '지식전문가'인지 선발하기도 하죠.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유치하기 그지 없습니다. 시스템만 덜렁 만들어 두고 사람들이 알아서 암묵지를 밖으로 꺼내어 놓기를 기다리는 '천수답' 방식이었으니 말입니다. 누구 하나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지 않았죠. 시스템을 만들어 두면 직원들이 알아서 하리라는 편의적인 사고가 지식경영의 본래 목적을 호도했습니다. 시스템은 지식경영의 도구일 뿐인데 시스템의 기능을 고도화하는 쪽으로 지식경영의 목적이 경도되어 버렸습니다. '고객 담당자 입장에서 뭔가 눈에 보이는 멋진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돈을 쓴 면목이 섰겠죠. 그 당시에도 '이건 아닌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암묵지를 형식지로 변환하기가 녹록치 않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는 점은 이해가 됩니다. 게다가 예산 문제로 3~4개월 만에 몇 명의 인력만을 가지고 완료해야 하니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들을 확보하기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겁니다. 한 가지의 암묵지를 형식지화하려면 전문가(또는 숙련자)가 일을 할 때 옆에 붙어서 그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일일이 캐묻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3~4개월의 시간은 너무 짧겠죠. 그렇게 하는 게 정석이지만 멋드러진 시스템이 남는 게 아니라서 또한 꺼려지기도 했을 겁니다.
혹시 여러분의 회사에 지식경영시스템(KMS)이 있습니까? 그 시스템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습니까? 실무에 많은 도움을 줍니까? 물론 구축에 들인 비용 이상으로 잘 활용하는 기업이 몇몇 있겠죠. 하지만 제가 목격한 바에 따르면 대다수 KMS는 여기저기에서 Copy & Paste로 끌어다 놓은 '쓰레기 지식'들로 가득하거나 몇 년째 아무런 지식이 등록되지 않는 휴면시스템입니다. 진짜 가치 있는 지식은 KMS에서 유통되지 않고 여전히 직원들의 머리 속에서 잠잘 뿐입니다.
지식경영은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지식경영의 철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식경영이 실패한 이유는 지식경영 철학 자체가 아니라 지식경영을 구현하는 데 적용한 지극히 안이한 방법 때문입니다. 시스템과 몇 가지 절차만 만들어 놓으면 다 이루어지리라 기대했을 때 지식경영의 실패는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지식경영해봤는데 지금은 깡통뿐이야"라고 지식경영을 백안시하는 풍조는 시스템 만능주의가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무덤입니다.
암묵지가 지식경영의 핵심이듯이, 진정한 혁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기본을 다지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도 해봤다"란 기록을 남기기 위한 혁신은 장식장에 추가될 또 하나의 트로피에 불과합니다. 시장에서 유행하는 '혁신의 상품'을 고르기 전에 과연 그 상품의 철학을 우리 회사에 구현할 수 있는지, 무엇이 그 혁신의 진짜 지향점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스템 만능주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식경영과 같은 좋은 경영철학을 내재화하는 경영의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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