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스물 한 권의 책을 번역하고 보니   

2024. 4.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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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지금까지 제 이름이 달린 책을 몇 권이나 냈는지 세어 봤습니다. 31권이나 되더군요.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고 말할 수 있는 수죠. 그 중 저서는 11권이고 나머지는 모두 번역서입니다. 이걸 보면 경영 작가가 아니라 경영서 번역가라는 직함이 저에게 더 적합해 보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번역서를 꾸준히 출간하는 저를 보며 혹자는 “영어를 얼마나 잘 하시길래 그렇게 번역을 많이 하세요?”라고 묻곤 합니다. 고백하자면, 제 영어 실력은 보잘것없습니다. 유창한 수준은커녕 일반인들처럼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죠. 즉독즉해 수준은커녕 문장이 좀 길어지면 앞뒤를 오고가며 주어, 목적어, 서술어를 알아내느라 시간을 잡아먹습니다. 적절한 단어와 우리말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서 머리칼을 쥐어뜯을 때도 있죠.

그래도 제가 번역을 잘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조금은’ 자부하는 이유는 영어보다는 ‘국어 작문’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전에 컨설팅을 병행하느라 바빠서 미국에서 유학하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자에게 번역 초고를 맡겨 본 적이 있는데, 대체 어떤 단어를 그렇게 번역했는지 몰라서 매번 원문과 대조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배경지식이 없어서인지 전문용어인데도 일상어로 번역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죠(예를 들어 성과(performance)를 ‘연기’라고 번역했죠). 결국 안되겠다 싶어서 제가 처음부터 다시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때 저는 번역을 잘하려면 국어를 잘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 글에서 번역 스킬을 일일이 언급할 수는 없지만(이미 많은 책들이 나와 있죠) 번역을 잘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만 조언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번역을 3단계로 나눠 진행합니다. 1단계에서 저는 영어 문장을 가능한 한 직역 수준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말이라기엔 조금 어색하더라도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일단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 초고를 완료하는 데 힘을 집중하죠. 1단계가 끝나면 약 3~7일 정도 번역 작업을 잊어 버리고 휴식을 취합니다.

2단계부터는 어색한 영어식 표현을 자연스러운 우리말처럼 바꾸기 시작합니다. 흔히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단계가 창작에 가까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저자의 문장을 완전히 해체한 다음 ‘나라면 이 의미를 어떤 문장으로 쓸까?’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문장을 써내려 가죠. 물론 원래의 의미를 온전히 보전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이렇게 해야 독자들이 우리나라 저자가 쓴 책처럼 원활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의 성패는 번역가의 ‘국어 실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단계는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처음부터 읽어 가면서 ‘아, 이 부분은 독자가 좀 헷갈려 하겠는데?’ 혹은 ‘이 부분을 좀더 보강해 설명해야 좋을 것 같은데?’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수정하는 과정입니다. 흔히 ‘옮긴이 주’라고 표기하는 부분들이 이 단계에서 추가되곤 합니다. 저에겐 익숙한 용어라 해도 독자들은 해당 용어를 모를 수도 있고, 미국의 상황이라 미국인들은 추가 설명 없이도 이해하겠지만 국내 독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인기를 끈 드라마가 사례나 일화로 소개되면, 그게 어떤 드라마인지 짧게 설명을 넣어서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이렇게 추가 정보를 삽입하고 전체적인 ‘퇴고’ 과정을 거침으로써 번역의 최종 원고가 완성됩니다.

가장 만족도가 높은 직업 중 하나가 사진작가인 반면, 가장 만족도가 낮은 직업은 모델이라고 합니다. 사진작가는 모델을 피사체로 대상화하고 모델은 사진작가의 주도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 자기 의지를 발현하기는커녕 차단 당하기 때문이죠. 비유하자면, 번역가는 모델과 비슷합니다. 번역의 미덕은 저자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자의 주제, 문장, 논리 구조, 사례와 본인의 생각이 달라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상당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가 그냥 쓰고 말지, 다시는 번역 안 할래!”라고 혼자서 소리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만큼 번역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한 페이지라도 번역해 본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 같네요. 그러니 영어 좀 한다 해서 번역을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되죠. 번역서가 저서보다 세 배나 되는 저의 출간물 리스트를 보다가 번역 이야기 좀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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