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영어 원문을 번역할 때마다 “도대체 한국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되지?”라는 단어가 종종 튀어나오는데, ‘vulnerability’도 그 중 하나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취약성'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언뜻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리더에게 필요한 여러 요소 중 취약성이 꽤 중요하다는 말이 리더십 관련 글에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리더에게 필요한 게 취약성이라고? 왜지?' 리더라면 취약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고, 취약한 사람은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게 상식 아닌가 해서 처음엔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vulnerability은 ‘약점 투성이’ 혹은 ‘실수나 실패’, ‘위험’이라는 뜻이 아니더군요. vulnerability은 ‘내가 완벽하지 않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의 취약함을 상대방에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자기객관화를 잘 할 줄 알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며, 약자에게 겸허한 자세로 임한다는 뜻이죠.
소위 “나 때(‘라떼’)는 말이야"를 접두어로 붙이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사람을 종종 접하곤 하는데, 안 해 본 것이 없고 못 해 본 것이 없는 그들에게는 상대방이 '늘'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왜 이리 못난 애들만 자기 주위에 있는지 분통을 터뜨리죠.
하지만 이렇게 ‘절대 취약할 리 없는 완벽한’ 리더를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그런 리더가 다른 조직으로 옮길 때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직원이 과연 있을까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리더는 그저 두려울 뿐, 절대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은 법입니다.
제가 리더들에게 “닮고 싶은 리더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면 항상 나오는 대답이 ‘이순신 장군’이더군요. “왜 이순신 장군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략 “모든 것이 완벽한 리더”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틀린 점 2가지를 지적하고 싶네요. 첫째, 사실 이순신은 완벽한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처럼 ‘취약한’ 리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겁니다. 그는 자신의 고충을 부하 장수들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했던 리더였거든요. 결코 모든 전략과 계획을 완벽하게 세우고 부하들에게 일사불란하게 수행할 것을 ‘하달하는’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둘째, 완벽한 리더를 지향하다가는 고립된 리더가 될 뿐입니다. 무엇이든 틀릴 수 없고,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며, 늘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자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감정을 숨기려다가 갑자기 폭발하며, 직원들의 비이성적 행동을 결코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직원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겠죠.
취약한 리더는 겸손한 리더이고, 경청하는 리더이며, 포용하는 리더이고, 협업하는 리더이며, 성공을 함께 나누는 리더입니다. 완벽한 리더가 되려는 노력은 부질없고 모두에게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나 이번 총선에 뽑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후보들 중 가장 '취약한 리더'에게 표를 주는 게 어떨까요? 자신은 완벽하다고 외치는 리더 말고요. (이 글은 총선 전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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