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스프 만드는 법 5단계
1단계. 오늘 아침의 희망은 어제 아침의 희망보다 한 스푼만큼 줄어들고,
또한 그와 헤어진지 하루가 더 늘어나고,
시한부 삶 같이 입 안 가득 까끌까끌하게 떠도는
20대의 빌어먹을 아침이란 생각 2스푼을 1리터들이 냄비에 털어 넣는다.
2단계. 어젯밤 꿈 속에 스쳐간 누군가의 향기 1스푼과
새벽녘 내 창을 지나다가 그대로 고인,
푸르스름한 어둠 반 컵을 넣고,
베토벤 소나타 7번같은 리듬으로 푸른 불꽃을 켠다.
3단계. 서서히 뜨거워지면서 거품처럼 일어나는 그리움을
무감각한 알루미늄 주걱으로 무료하게 걷어내고,
혼잣말로, 이제 잊어버릴때도 됐잖아, 이제 그만 잊으라구, 되뇌이며
냄비 바닥에 눌어 붙을 고독을 또한 무료하게 저어낸다.
4단계. 불꽃을 쌀 한톨 크기만큼 줄인다.
우리 함께 했던 담담한 과거같이
스프 표면에서 이따금씩 톡톡 터지는 기포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그래도 희망이란 좋은 거야, 라고 또한 되새기며
어느새 창을 붉게 물들이는 햇살 3스푼과
올리브유 한 방울을 살짝 떨어뜨린다.
5단계. 하얀 식탁보를 깔고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접시에 스프를 붓는다.
속이 깊은 스푼을 그 옆에 놓은 후,
로스토로비치의 무반주 첼로곡을 낮게 틀고,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으로 서 있는 후추병을 만져 준다.
그 후추병이 체온에 의해 체온과 같은 온도로 따뜻해지면
오늘 아침의 크림스프는 조용하고 키작은 여자아이처럼
수줍은 김을 내며 내 앞에 손을 모으고 그렇게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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