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sm 1] Room Mate   

2008. 1. 15.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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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모집공고를 낸지 정확히 29분이 지난 무렵, 누군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룸메이트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제가 해드리겠어요."

난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내 앞에 서있었다.

"당신, 놀랐군요? 그럴 만 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이 낸 공고 어디에도 룸메이트가 알몸이어서는 안 된다라는 언급은 없었어요."

"물론 그래. 당신의 몸은 정말 훌륭해. 하지만 일반론적인 룸메이트의 세계에서 당신을 이해하기란 무리야."

"호호, 그렇군요. 나는 당신의 그런 점이 맘에 들어요. 이봐요. 우선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다른 사람이 보면.... 암튼 나에게도 수치심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녀는 침대에 털썩 앉더니 어디에선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알몸인 그녀의 어느곳에 담배 따위를 휴대할 수 있는지 난 잠시 궁금했다.

"어젯밤의 전화를 기억하시죠? 당신에게 10분만 나와 통화하자는 제의를 했었죠. 그 사람이 바로 나랍니다."

그래, 나는 어젯밤 펄벅의 '대지'를 읽으며 칭따오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같이 지내던 룸메이트가 사명감 어린 눈빛을 남기고 남극으로 떠나버린 후의 적적함을 달래고 있을 때 날카롭게 울린 전화. 그 시간에 날 찾는 전화는 내가 이 방에 산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 룸메이트의 여자들이 룸메이트를 간절히 찾는 그런 류의 전화 밖에는 없었다. 처음엔 룸메이트의 여자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이렇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저와 10분간만 이야기하시겠어요?"

"룸메이트를 찾아? 그는 이미 떠났어. 사명감에 젖은 눈빛을 하고 말이야."

"알아요. 전 당신의 룸메이트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과 10분간 이야기 하는 것일 뿐이죠."

"그런데 왜 꼭 10분 간이지? 거기엔 무슨 메타포라도 있나?"

"이봐요. 난 시간이 없어요.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기엔 10분은 너무 짧아요. 나와 이야기하시겠어요?"

"좋아. 그럼 어서 말해보라구."

"난 지금 막 당신꿈을 꿨어요. 무슨 꿈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

그녀는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난 술에 취해 건성으로 들었다. 누구누구와 어디를 갔는데 거기가 녹색인간의 무리들을 만나서 그 부족의 추장과 결혼했는데, 그가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의 피부가 온통 녹색이었다는, 싸구려 SF 소설같은 이야기 였다. 10분간 혼자서 지껄이던 그녀는 정확히 10분이 되자, 아무 말없이 딸깍 전화를 끊어 버렸었다.

"당신이 뭐라든 난 여기에 살겠어요."

마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듯 그녀의 표정은 비장함, 그 자체였다. 그 눈빛은 나를 압도해버렸다. 그녀를 나의 룸메이트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책임감 같은 것이 뼈속을 파고 들어왔다. 그래서 난 허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녀의 훌륭한 몸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그래서, 지금 나는 새로운 룸메이트와 함께 산다. 그녀는 매일밤 어디론가로 전화를 한다.

"저와 10분간만 이야기해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는 전화는 녹색 피부의 아기로 끝을 맺는다. 전화를 끝내고 알몸인 상태로 어디론가 외출한다. 그리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푹 꺼진 눈을 하고 들어와 내 곁에 눕는다.

"안아줘요, 꼭"

내품을 파고드는 그녀의 흰 살갗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나는 모른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녀에게도 사생활이란 게 있는 것이다. 그녀가 외출을 하고 나면 난 침대에 누워 그녀를 생각한다. 어느 지하도시의 한구석에 거주하고 있는 녹색인간을 상상하기도 한다. 아마 그녀는 그들을 만나고 있으리라고, 나는 귀찮아서 그렇게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이상한 룸메이트를 가진,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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