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명의 강사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허리를 꼿꼿이 편 상태로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아무런 자료를 보지 않고 유창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그는 수강생들과 눈을 잘 마주치면서 적절하게 제스쳐도 취할 줄 아는 강사입니다. 다른 한 강사는 이와는 반대로 교탁 앞에 꾸부정한 자세를 취한 채 종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만 합니다. 사람들과 눈을 맞추기는커녕 읽다가 자주 더듬거리고 준비한 자료를 이리저리 뒤적거리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이 두 명의 강사로부터 아주 생소한 주제로 강의를 들었다고 해보죠. 여러분은 누구에게 높은 점수를 주겠습니까? 누가 더 지식이 풍부하고, 더 강의를 잘 준비했으며, 더 효과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일까요? 우문인가요? 당연히 여러분은 더듬거리는 강사보다는 유창하게 이야기하는 강사에게 높은 점수를 줄 겁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보죠. 둘 중 누구에게 강의를 들었을 때 여러분은 강의에서 들은 내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누구에게 강의를 들을 때 교육의 효과가 높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여러분들 중 거의 대부분이 '유창한 강사'라고 답했을 겁니다. '더듬거리는 강사'를 선택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겠죠.
그림 출처: http://everydaylife.globalpost.com/senior-lecturer-vs-professor-5048.html
하지만 이러한 판단이 옳지 않음(착각임)을 지적하는 연구가 있습니다. 아이오아 주립대학교의 샤나 카펜터(Shana K. Carpenter)와 동료 연구자들은 유창한 강사로부터 강의를 듣든, 더듬거리는 강사로부터 강의를 듣든 교육의 효과는 별 차이가 없음을 실험을 통해 주장합니다. 카펜터는 동일한 사람이 똑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하되, 앞서 언급했듯이 강사가 유창하게 말하는 동영상과 미숙하게 말하는 동영상을 준비하여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도록 했습니다.
카펜터는 참가자들에게 이 실험이 기억력 테스트라고 알렸고 가능한 한 집중하여 강의를 들어 달라고 요청했죠. 동영상을 보고 나서 참가자들은 강의에서 얻은 정보를 나중에 얼마나 잘 기억해낼지 예상해보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카펜터는 참가자들에게 10분 동안 다른 작업을 수행하도록 한 후, 참가들에게 강의에서 들은 내용을 5분 동안 가능한 한 자세하게 기록해 달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강의 내용을 얼마나 잘 기억하는지 측정함으로써 참가자들의 예상과 비교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유창한 강의를 들은 참가자들은 미숙한 강의를 들은 참가자들에 비해 자기들이 더 많은 내용을 기억해내리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써낸 답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유창한 강의를 듣든 미숙한 강의를 듣든 기억해낸 정보는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까요. 참 이상한 일이죠? 유창한 강의를 들으면 교육을 잘 받았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실제로는 내용을 더 잘 기억해내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강의의 유창함과 미숙함이 수강생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다시 말해, 유창한 강의를 듣고 나서 강의에서 들은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은 미숙한 강의를 듣고 난 후에 복습하는 시간보다 길까요, 짧을까요? 후속 실험에서 카펜터는 앞선 실험에서 사용했던 2개의 동영상을 참가자들에게 보여준 후, 강사가 말한 내용(스크립트)을 참가자들 각자가 보는 모니터에 띄웠습니다. 카펜터는 참가자들에게 시간을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스크립트를 학습해도 좋다고 일렀습니다.
컴퓨터를 통해 측정된 복습 시간을 분석해보니, 두 그룹 사이에 차이는 미미했습니다. 앞선 실험과 똑같은 방식으로 강의 내용을 기억해 보라고 하니, 역시 두 그룹 간의 차이는 없었습니다. 강의의 유창함 여부는 공부 시간에도 기억력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유창하게 강의하는 사람에게 훨씬 후한 점수를 줍니다. 그 사람에게 강의를 들으면 뭔가 더 많이 배우고 있다고, 나중에 더 많은 지식이 머리에 남을 거라고 기대하죠. 카펜터의 연구는 이런 판단이 착각일 수 있음을 경고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창한 강의를 들을 때 더 많이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요? 카펜터는 전문가적인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전문성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고된 과정을 거쳤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런 전문성을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강사가 유창하게 지식을 전달하면 그 지식을 얻기까지의 어려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은연 중에 그 지식을 '쉽게만' 본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강의를 들은 후에 교육의 효과를 스스로 측정하고자 한다면 '얼마나 강사의 말을 잘 이해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강사가 말한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고 카펜터는 말합니다.
이 연구가 실험실에서 이루어졌기에 현실의 교육 환경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란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유창한 강의를 들었다고 해서 스스로 많이 배웠다, 배운 것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부는 강의 수강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수강 후에 스스로 얼마나 학습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고논문)
Carpenter, S. K., Wilford, M. M., Kornell, N., & Mullaney, K. M. (2013). Appearances can be deceiving: instructor fluency increases perceptions of learning without increasing actual learning. Psychonomic bulletin & review,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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